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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동학 천도의 세계

수도회 제10차 여행 (1편)

-1편-

( 2018. 5. 28 )


아슴한 흰구름이 뒤덮은 덕음산을 배경으로 가느다란 녹우(綠雨)가 내리는 고택 전경. 

오백여 년 전 어초은 윤효정으로부터 시작,  5대 윤선도(1587-1671), 8대 윤두서(1688-1715) 등

조선조 걸출한 인물들을 배출한 명문가로 지금도 종손이 거주하며 선대의 유업을 이어가고 있다..

 현존하는 호남의 주택 중 가장 큰 규모로 1968년 사적 제167호로 지정 고시되었다.






고택의 연륜을 상징하는 은행나무와 함께한 동학 천도 수도회 동덕 여러분.





정면으로 보이는 건물이 녹우당(綠雨堂)이다.

봉림대군(효종)과 안평대군의 사부였던 고산에게 효종이 수원에 지어준 집의 일부를 옮겨온 것으로

고택의 사랑채 역할을 하는 건물로 겹처마가 인상적인 건물이다.







안채 다실에 걸린 추사의 일로향실(一爐香室) 편액으로 많은 모각 작품이 전한다.

아래는 대흥사에 걸린 것으로 제주 유배 시, 막역한 지우 초의에게 써 보낸 것이다.











마악 출타를 마치고 돌아와 마루에 걸터 앉은 녹우당의 14대 종손 윤형식 선생님.

 집안에 전해 내려온 화첩 등을 보여 주시며 예의 그 우렁우렁한 음성으로 설명하시던 지난 70년 대의 모습이 대비되는데...






녹우당 안채 화대 앞에서의 정산님(左)과 백선기님.







사당 구역





은행, 비자, 소나무, 차나무 등을 이른바 녹우당 상징목이라 해도 좋으리라

 , , 松, 茶  중 하나인  사당 앞 노송 아래에서.




입향조의 묘역






녹우당 후원 「추원당」 가는 길, 

 코 끝에 퍼지는 진한 마삭줄 향기를 맡으며...






입향조인 어초은을 배향한 사당으로 기둥마다 시문 주련이 걸렸다.






추원당 역시 덧처마 형식으로 1935년에 지은 건물이라고.

( 보수중이어서 대문이 굳게 걸려있는지라 지난 해 5월 사진으로 대신)






추원당 앞에 싱그런 오월 차밭이 가득 펼쳐져 있다.  

 한 때 다산이 머물렀던 곳이라는데 그에 대한 자료는 아직 보지 못했다.

윤고산은 공재 윤두서의 증조부이자 다산 정약용의 5대 외조부.






숙소에서의 저녁 기도식과 주문 수련.

자임당, 정심당, 성수당, 정산, 백선기, 일포, 손원형, 수암, 화성당. 다천.





이하

(2018. 5. 29 )


달마산 미황사(達摩山美黃寺) 오름길





대웅보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서 보물 제947호로 지정되어 있다.

 1982년의 수리 때 묵서(墨書)가 발견되어 건물의 연혁을 알 수 있다.





육지 최남단의 절로 749년(경덕왕 8) 의조(義照)가 창건.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으로 소실,1598년 만선(晩善)이 중건.

당우로는 대웅보전·달마전(達磨殿)·응진당(應眞堂)·명부전(冥府殿)·세심당(洗心堂)·요사채 등이 있으며,

기타 석조(石槽)·당간지주(幢竿支柱)·부도군(浮屠群)·사적비(事蹟碑) 등의 문화재가 있다.





미황사 창건설화를 담고 있는 대웅전 주춧돌의 각종 문양이 흥미를 끈다.

 연꽃을 비롯한 게와 거북 등 각종 해산물의 잔치가 풍성하게 펼쳐져 있기에...






















세심당에 걸린 현판 미수(麋壽)는 장수를 상징하는 은유적 표현.

'老完漫筆노완만필'은 당연 김추사일 터이고...











큰 규모는 맞지만 '가장 큰 규모'라는 내용에는 수긍하기 어렵다.






이런 광경을 일러 떼부도라 한다던가?

박하당, 송암당, 영월당, 죽암당, 설봉당 등 승탑과 비들이 즐비한 모습이다.





묘향산에서 이곳 남녁으로 내려와 법맥을 잇고 간 서산대사의 후예들일 터이다.






약간 우측으로 고개를 튼 용과 귀부가 혼재(?)된 해학.






 초의선사의 그림 스승이었던 나암 시연선사의 비.










귀면






 설봉당 승탑에 새겨긴 여러 문양 모음. 

설봉은 서산대사의 4대 법손이다.



































옥개석을 잃어버린 승탑 한 기가 승탑군에서 비켜나 홀로 외로운 모습이다.






미황사 사적비


이 사적비가 땅 속에 들어앉게 된 내력인 즉, 

숙종 때 대제학을 지내고 후에 우의정까지 오른 인물 민암의 글을 새긴 이 비를 세우려던 차에,

 그만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고 말았다. 미황사로서는 중죄인인 민암의 이름이 노출되는 게 상당히 불편했을 터,

하는 수 없이 민암의 이름이 보이지 않도록 비를 반쯤 묻어 세웠고 훗 날 묻힌 부분을 찾다 보니 이런 모습이 된 것.

생각컨데 기단부 바윗돌은 아마도 거북 형태인 듯.




有明朝鮮國全羅道靈巖郡達摩山美黃寺事迹碑銘. 幷序.


崇政大夫行兵曹判書兼知 經筵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成均館事 世子左賓客閔黯長孺撰.


顯祿大夫朗善君兼五衛都摠管府都摠管俣書幷篆.

余讀西方書, 至華嚴經諸菩薩住處品, 未嘗不掩卷而嘆曰, 异哉! 我東方淨土之業, 盖亦有冥契者, 存曇無竭之據一萬二千般若之軀者如此, 月氏之印五十三鐵鐘之迹者又如此. 夫金剛之爲山也, 見在於莊嚴星宿之間, 與人鳥須彌, 同爲無上菩提之境, 則其表靈也, 宜其炳琅而光大也. 乃者, 湖南達摩山美黃寺之刱跡, 抑何奇之甚也. 有唐開元十三年乙丑新羅景德王八年八月十二日, 忽有一石舡, 來泊于山底獅子浦口, 天樂梵唄之聲, 迭發於船中, 漁人欲迫而察之, 則舡輒遠. 義照和尙聞之, 與張雲張善二沙彌, 曁村主于甘香徒一百人同往, 齋沐虔禱, 石船乃至岸, 鑄成金人一軀執櫓, 而立張以繡帆. 就而觀之, 其中有金函具鎖鑰, 盛以玉軸金字華嚴經八十縛, 法華經七縛, 毘盧遮那文殊普賢四十聖衆五十三善知識十六羅漢等畵幀, 又有金環黑石各一枚. 香徒等齎經河岸, 方議奉安之地, 黑石卽拆, 而生靑黑牸牛一頭, 倏忽長大, 是夕金人入和尙夢中曰, 我本于闐國王也. 遍歷諸國, 求安經像, 望見山頂, 有一萬佛現相, 茲故來此, 爾宜駄經以牛, 牛臥不起處, 卽安經之所也. 和尙乃以經載牛而行, 初臥一壤而復起, 至山峽而復臥大吼曰美, 因而斃焉. 初臥之壤, 刱一蘭若, 今通敎寺是也. 後臥之峽, 營一刹, 以安聖經及神幀, 顔之曰美黃. 美取牛之聲也, 黃取人之色也. 奇乎, 异哉. 世稱神山輒歸之三韓, 達摩以方丈之枝, 素饒眞境故, 有此聖迹靈踪之來, 應焉. 當時石牛金人事, 悅惚窅茫, 非世耳之所可剽者, 而年代考證不啻八字打開, 且貝葉金軀幀像等物故, 宛然也. 窃念諸佛出興, 皆爲一大事, 所謂一大事, 不外乎方便, 今茲塊然者豈自生公點頭中來, 而角者豈從雪山會上, 仍倣騰蘭駄來故事也耶. 金神之夢感者, 亦有阿難流通敎誨之遺意焉. 至於至元間, 南宋之達官君子, 望風馳想, 致令圖寫而去, 則亦足爲叢林吐氣, 此俱可以書諸貞珉, 標之永永者也. 余於張天覺之理, 白香山之筆, 皆蔑蔑如, 而重上人遠來之意, 因其所述, 而詮次之, 又有感於循物假物之義, 云爾銘曰, 石耶牛耶不可思, 金耶人耶不可知, 神無方而化無涯. 嘻噫. 崇禎紀元後六十五年壬申九月日, 立碑杜忍.





구멍 뚫린 옥개석의 운용문 조각이 화려하기 그지없다.





조선국 전라도 영암군 달마산 미황사 사적비명에 아울러 서 하노라.


숭정대부 행병조판서 겸 지경연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성균관 사세자좌빈객 민암 장유가 찬하고,

현록대부 낭선군 겸 오위도총관부 도총관 오가 쓰고 아울러 새긴다.



내가 서방의 글을 읽다가 화엄경 제보살주처품에 이르러서는

일찍이 책을 덮으며 탄식하며 말하였었다.


기이하도다!

우리 동방 정토의 업이 대개 또한 모르는 사이에 묵약이 있었나.

담무갈의 일만이천 반야의 몸이 이처럼 잘 보존되었고,

월씨국에서 오십삼 철종을 찍었던 자취도 또 이렇게 나타나는구나.


대저 금강산은 장엄한 세월 사이에 드러나서

인조수미로 더불어 함께 위없는 깨달음의 경지를 이루었으니,

그 드러난 영험이 마땅히 빛나는 옥처럼 밝고 큰 것이라.


예전 호남 달마산 미황사의 창건 자취도 또 어쩌면 이리도 기이한가.


당 개원13년 을축 신라 경덕왕 8년 8월12일에,

홀연 돌로 만든 배 한 척이 산 아래 사자포구에 와서 정박하였다.

하늘에서 들리는 음악인 듯 범패 소리가 배 안에서 계속 들려오기에

어부들이 가까이 가서 살펴보려고 하자 배는 문득 멀어져 버렸다.


의조화상께서 이 소문을 들으시고 장운과 장선 두 사미 및

촌주인 우감, 그리고 향도 백 사람을 데리고 그곳을 찾아 가셨다.

목욕재계하고 정성껏 기도를 하였더니 돌배가 해안으로 다가왔다.


금옷을 입은 사람 하나가 노를 잡고 일어나

수놓은 돛대를 펼치기에 다가가 살펴보니,

그 안의 자물쇠 달린 금함에는

옥축 두루마리에 금으로 쓴 화엄경 80박과 법화경 7박,

비로자나 문수 보현 40성중과 53선지식 및 16나한 등의 화상이 있었고,

또 금가락지와 검은 돌 각각 한 매씩이 들어 있었다.


향도 등 여러 사람이 경전을 가지고 해안으로 내려와서

바야흐로 봉안할 곳을 의논하고 있는데

검은 돌이 부숴지면서 청흑색의 암소 한 마리가 나오더니

갑자기 훌쩍 커졌다.


그날밤 금옷을 입은 사람이 화상의 꿈에 나타나 말하였다.


“나는 우전국의 왕인데

여러 나라를 두루 돌면서 경전과 화상 안치할 곳을 구하던 중

달마산 꼭대기에 일만 분의 부처님 상이 나타난 것을 보고 이곳을 찾아 왔노라.

그대가 경전을 소에 싣고 가다보면

소가 누워서 일어나지 않는 곳이 있을 터이니

그곳이 곧 경전을 안치할 만한 장소라.”


이에 화상께서 소에 경전을 싣고 가자니

소가 처음 한 곳 땅에서는 누웠다 일어나고,

산골짝에 이르러 다시 누워서는

“아름답구나” 큰소리로 부르짖고 숨을 거두었다.


처음 누웠던 땅에 절을 세웠으니 지금의 통교사이며

나중 누웠던 골짜기에도 또 하나의 사찰을 경영하여

경전과 화상을 안치하고 미황사라 현판을 걸었다.


미는 소의 울음소리에서 취한 글자요,

황은 사람의 색에서 취한 것이니 기이하고 이상한 일이라.


신선이 문득 삼한에 돌아와 달마산에 방장의 가지를 꽂은 것은

땅이 본디 기름지며 신선이 살 만한 깨끗한 땅이기 때문이라,

이렇게 성스럽고 신령스러운 자취가 나타난 것도

당연한 일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당시 돌에서 나온 소며 금옷 입은 사람 이야기 따위는

허황하고 망연하여서 세상의 귀로는 가히 믿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연대의 고증을 그저 추측이라고만 할 수 없는 것이

패엽경과 금구(金軀), 그리고 탱화 등이 있어서 완연하게 밝힐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하건대 여러 부처님들의 나심이 모두 일대의 사건이지만,

이른바 일대사라는 것은 방편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그런데 지금 어떻게 하여 멀뚱히 서 있던 돌덩이가

도생의 머리 끄덕임에 따라 살아나고,

뿔 달린 동물이 설산회상으로부터 나오면서

여전히 가섭마등, 축법란, 축법태께서 오셨던 옛 이야기를 재현하는가.

금신(金神)이 꿈에 나타나 감동시킨 것 또한

아난존자께서 유통하여 가르치신 뜻이로다.


지원 연간 남송의 달관군자들도 흠모하여서 그림으로 그려 갔으니

또한 족히 우리 총림의 자랑거리가 되었노라.

이 모두가 돌에 새겨 영원토록 표를 삼을만한 일이로다.


내 장천각의 이론과 백거이의 문장과는

비할 바 못되는 멸멸한 솜씨이지만,

어른께서 멀리서 오신 뜻을 어기기 어려워

인하여 술하신 바를 차례로 설명하였다.

그리고 또 그 감동을 명문으로 짓노라.


“돌이며 소는 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요,

금이며 사람도 가히 알 수 없는 일이로다.

신령함에 향방이 없고 조화가 끝이 없으니

아, 놀랍도다!”


숭정 기원후 65년 임신* 9월일(1692년)에 두인이 비를 세우다.







부도암에서 조망한 어란포 하경.




이순신, 정운, 황유적(黃惟績), 이정후(李廷厚) 등은

왜국의 해적을 쳐부수고 계속 승리하고 있었다.

빼앗겼던 여러 고을을 다시 탈환하였고,

그 승리의 기세로 고금도에서 마도까지 진격해 나갔다.

그리고 가진리(加鎭梨) 나루에서 배를 띄우고 대기하고 있었다.


광양 현감 어영담, 낙안 군수 신호, 순천 부사 권준, 전주부윤 권수 등이

그 뒤를 따라 어란진(於蘭鎭) 앞 바다에 이르렀을 때였다.

유진장 박세태(留鎭將 朴世泰)가 성 뒤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쳤다.


“왜선 수백 척이 오늘밤에 우수영 양도(羊島)로 향해 진격한다고 한다.

급히 쫓아가라!”


그리하여 이순신의 무리는 급히 배의 장비를 갖추고 바로 우수영을 향해 출발하였다.

도중에 어란 만호 최정란(崔廷鸞)이 싸움에 패해서 죽었다는 소식을,

조량 주부 김주희(調糧 主簿 金周希)의 말을 몰고 오던 병졸 편에 전해 들었다.

드디어 그 날 밤 삼경에 우수영에 이르니,

왜선 백 여 척이 진도(珍島) 부근에 늘어서 있었다.


그곳에서 군산 첨사 이봉래(群山僉使 李蓬萊)와 위도 첨사 변수(蝟島僉使 邊燧),

진도 군수 김영립(金永立), 영암 군수 이호전(靈岩郡守 李虎全),

무안 현감 정광연(務安縣監 鄭光廷), 고부 군수 윤명창(古阜郡守 尹命昌),

김제 군수 윤호순(金提郡守 尹虎珣) 등이 적과 맞서 싸우고 있었다.


왜국 군대의 중군은 일본 본묘사(本妙寺)의 중 일진(日眞)이었고,

선봉장은 청량사(淸凉寺)의 등○(登○)(원전에서 판독이 어려운 부분이다)이며,

승의병 대장 총섭(僧義兵 大將 總攝)은 재전(在田),

후군장은 부사산 생불사(富士山 生佛寺)의 중 조훈(祖訓)이 맡고 있었다.



왜국 병사들이 옥조진(玉鳥鎭)에 이르자,

멀리 달마산(達摩山)이 보였다.

왜국 장수가 유진장 이홍대(留鎭將 李弘大)를 붙들고

우리 나라의 사적에 대해 이것 저것 묻다가,

달마산을 가리키면서 물었다.


“저 산은 이름을 뭐라고 하는 산인가?

저 꼭대기에 서서 절을 하듯 예를 갖추고 있는[拜揖] 저것은 또 무엇인가?

대체 뭘을 하는 놈이기에 높은 산꼭대기에 앉아서

거만스럽게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가?”


이홍대가 여기에 맞서 궤변으로 대답하였다.


“저 산 이름은 달마산이요,

산 위에 서 있는 저것은 3천의 부처님이시다.”


그들은 또 물었다.


“그렇다면 무슨 일로 저렇게 배읍(拜揖)하고 있는가?”


이홍대는 대답하였다.


“임금의 은혜, 부모의 은혜, 부처님의 은혜, 시주의 은혜에 예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불경에서 말하는 네 가지 큰 은혜이기 때문이다.”


왜국 사람들은 원래 불교를 숭상하는 자들이라,

이 말을 듣고 기뻐하면서 말하였다.


“조선에 덕 높은 고승(高僧)과 살아있는 부처님[生佛]이

있다는 것을 소문으로만 들었더니,

이제 보니 조선은 예의와 문물이 마치

옛 중국의 삼대(三代) 시절에 비길 만큼이나 성한 나라로구나.”


그들은 이 사실을 대장 청정에게 보고하였다.


“조선이 비록 궁벽하고 작은 나라이긴 하지만,

빼어난 명산에 살아계신 부처님이 항상 서서 배읍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니 참으로 감복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제 우수영을 향해 전진하면서도

더 이상 무기를 쓰거나 백성들을 괴롭히지 못하였다.



*이 이야기는 임진왜란록(壬辰倭亂錄)에 실려있는 내용으로

서생포(西生浦)에 주둔해 있던 청정의 진영에서 흘러나온 말로 명나라 장수 고양겸(顧養謙)이 듣고 와서 우리 나라에 전해준 것이다.

 





달마산 부도암 수호견 호피.






참으로 예쁜 형태의 석조로 석공의 정 끝 감각을 오롯히 느낄 수 있다.






땅끝 전망






































완도 장보고 상










어느 날 장보고와 염장은 술을 마셨다.

 장보고가 아무 의심 없이 취해 있자, 염장(閻長)은 장보고가 찬 칼을 빼앗아 그를 내리쳤다.

장보고는 뜻하지 않는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장보고가 죽자, 귀족들은 철저하게 그의 세력을 꺾었다.

그리고 청해진도 폐쇄하고 해상활동도 중지시켰다.

 청해진에 있던 사람들은 벽골군(오늘날의 김제 일대)으로 옮겨 농사를 짓게 했다.

장보고의 죽음은 바로 중앙귀족과 해양 · 상인 세력과의 대결에서 후자의 패배를 의미한 것이다.

그가 비록 중앙권력에 맛을 들여 제 마음대로 권세를 휘둘렀지만 그 본질은 어디까지나

 평민세력의 중앙 진출을 의미한 것이다. 신라는 귀족사회였다.

이들 귀족은 경주를 중심으로 정치권력을 잡고 호사스런 생활을 하면서 평민세력 위에 군림했다.

 장보고의 딸이 왕비가 될 수 없다고 내건 명분도 섬사람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해상활동은 우리 역사에 찬란하게 빛난다.

알만한 이들은 그를 이순신에 앞선 해양활동의 선구자로 꼽는데 주저함이 없다.

 국제무역을 지배한 인물이자 우리 겨레가 낳은 세계사 속의 가장 위대한 인물이 장보고인 것이다.















민족사의 영웅 장보고 대사의 기상을 수도회 품 안에...






신지도 명사십리 해수욕장


양명학자 정재두를 사사하고 옥동 이서와 백하 윤순을 연구하여 이른 바 원교체를 창안했던 이광사.

원교가 바로 이곳 신지도에 귀양을 왔었다는 사실.

진서·초서·전서·예서에 두루 밝았고 소박한 문인 취향의 그림에도 일가를 이루었던 인물로

 호남 사찰 전각 어디에서나 원교의 서체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이곳 신지도에서 생을 마쳤다는 설에다 근차 신지도와 다리로 연결된 건너편의 고금도에서 생을 마쳤다는

설과 함께 근자에진도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설 등,  함경도에서 남쪽 바다 섬에 이르기까지

유배로 점철된 그의 이력이 남녘 섬 여기저기 구름처럼 떠돌고 있다.






















신지도와 고금도를 잇는 근자에 완공된 다리를 건너고 있는 중.

 해남 ~ 완도 ~ 신지도 ~ 고금도 ~ 약산도 ~ 강진 마량을 잇는 환상의 다도해 연결 프로젝트가

드디어 완성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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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e Tramonti - Ludovico Einau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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