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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동학 천도의 세계

신과 종교의 생성과 소멸 2

 

 

 

Ⅱ 종교가 몰아낸 종교들

 

 

드루이드교

(아서 왕 전설의 뿌리, 켈트족 신들의 이야기)

"모든 갈리아인들은 영혼이 불멸한다고 믿는다."

-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에서

 

드루이드는 본래 고대 유럽을 지배했던 켈트족의 사제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비록 지금은 켈트족도 드루이드로 사라졌지만, 그들이 역사 속에 남긴 흔적은 현재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켈트족은 인도-유럽어족에 속한다. 이들은 지금의 우크라이나와 카스피해 동족의 대초원에서 서서히 유럽으로 진출했다. 그 세력이 절정에 달한 기원전 5세기에는 영국과 아릴랜드에서 프랑스와 벨기에, 스페인과 포르투칼, 스위스와  오스트리아, 아탈이아 북부, 루마니아와 헝가리, 체코, 독일 등 거의 모든 유럽에 걸쳐 분포했다. 캘트족은 기본적으로 농부였지만, 약탈과 정복을 즐기던 전사이기도 했다. 그들은 기원전 390년 로마를 공격해 7개월 동안 점령했으며, 마케도니아의 왕을 전사시키기도 했다. 소아시아 반도까지 쳐들어가 갈라티아라는 왕국을 세운는가 하면 이집트 왕을 위한 용병으로 수백 년 동안 복무하기도 했다. 하지만 켈트족은 심오한 자연의 진리를 찾는 철학자이기도 했다. 모든  켈트 부족들은 왕조차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아무리 권력이 큰 왕이라고 해도 드루이드들에게 의견을 물어 자문을  구한 다음 비로소 일을 진행했다. 켈트족은 두루이를 죽이면 저주를 받는다고 믿었기에 부족 간에 전쟁이 일어나도두루이드들은 결코 목숨을 위협받지 않았다.

 

 

 

드루이드는 단순한 성직자가 아니었다. 부족민들을 상대로 생활과 신앙에 관한 지식을 알려주고, 왕족과 귀족을 대상으로  부족이 나아가야 할 길을 가르쳐주는 지식인이자 의사, 학자였다. 드루이드는 왕족이나 귀족을 대신해 사실상 켈트 사회를  이끌어 갔다. 종교 드루이드교는 어떤 교리를 담고 있었을까? 유감스럽게도 이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은 찾기 어렵다. 드루이드는 글자로 지식을 남기지 않았고 외워서 전해주는 구전 방식에다 로마 제국과 오랜 전쟁으로 완전히 소멸된 터라, 자세히 전하지 않는다. 다만 갈리아족을 정벌한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쓴 《갈리아 전기》에 드루이드교의 가르침이 일부 남아 전해진다. 드루이드는 세계를 유지하는 힘이 '재생과 균형'이라고 믿었다. 드루이드는 사제 수업 20년을 온통 교리 암송에 매달렸다. 선배가 말해 주는 모든 지식을 다 외어야만 비로소 드루이드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여성 드루이드를 묘사한 그림,

알렉산드로 카바넬, 프랑스 화가

 

드루이드교가 소멸된 것은 바로 새로운 종교 기독교의 위세가 빠르게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는 기독교는 문자로 된 경전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7세기 이후, 기독교는 영국과 아일랜드에 퍼져 있던 드루이드교 신앙을 완전히 소멸시키고 켈트 사회를 지배하게 되었다.

 

 

 

 

 

 

 

 

 

 

 

 

 

 

 

 

 

앵글로 - 색슨족의 고대 신앙

 

다른 고대 사회에서처럼,  앵글로-색슨족의 왕들도 半神반신적 존재인 신들의 자손으로 여겨졌다. 대부분의 왕은 자신들이 워든이나 프레이(풍요의 신) 같은 게르만족 신들로부터 핏줄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했으며 훗날 8세기에 활동한 알프레드 대왕의 아내도 자신의 조상이 워든이라고 말할정도였다.

 

 

 

 

 

 

 

395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삼은 뒤, 게르만족들은 5세기에 이르러 로마 제국의 국경을 돌파하고 서유럽 각지에 정착하여 자연스레 기독교와 접촉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전통 신앙과 기독교의 갈등이 시작된다. 앵글로-색슨족이 전통 신앙을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첫째, 그들이 믿던 신들보다 기독교의 예수가 더 강력한 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둘째, 기독교의 사후세계에 대한 관념이 앵글로-색슨족의 전통 신앙보다 더 잘 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셋째, 국제무대에서 이익을 얻기 위함이었다. 당시 유럽 대륙의 프랑크 왕국이나 서고트 왕국 등 많은 나라들이 기독교로 개종한 지 오래였고, 그들 간의 세력 다툼 조정을 로마 교황청이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앵글로-색슨족은 영어와 잉글랜드라는 유산을 남겼으나, 자신들의 전통 신앙은 보존하지 못했다. 그들은 기독교 성직자들과 같이 자신들의 전통 종교를 변호해주는 조직이나, 기독교의 성경처럼 전통신앙을 잘 정리한 문헌을 만들지 못했다.  그러나 앵글로-색슨족의 전통 신앙은 아직도 우리 주변에 남아있다. 그들이 사랑했던 영웅 서사시 <베오울프>는 영문학 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교재이며  예수의 부활절을 뜻하는 영어 단어 '이스터Eastre는 앵글로-색슨족이 숭배한  봄의 여신 에오스트레Eostre를 섬기는 축제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고대 아랍의 신앙

 

 

전 세계 13억에 이르는 이슬람 신도 이른바 무슬림들이 믿는 종교, 그 이슬람교를 창시한 민족이 바로 아랍인이고 이들의 경전 쿠란이 아랍어로 적혀 있기에 무슬림이라면 어느 정도 아랍어를 할 줄 알아야 한다. 예언자 무함마드가 7세기 이슬람교를 창시하기 전까지 아랍인들은 다양한 신을 받드는 다신교였다. 자연적 경계가 없는 사막에 살다 보니 자연 외래문화에 개방적이었으며 신앙도 모두 받아들였다. 이슬람으로의 개종 전엔 물경 360여 신을 섬겼다고 한다.

 

 

 

 

 

 

 

 

 

 

 

 

 




 

 

 






무함마드의 등장과 신들의 종말
오랫동안 이어진 아랍의 전통 신앙은 7세기로 접어들면서 종말을 맞았다. 쿠라이시 씨족 출신 무역상 무함마드가 오직 유일신 알라만을 받드는 새로운 종교 이슬람교를 들고 나온 것이다. 부유한 과부 하디자와 결혼한 무함마드.  기독교인이었던 하디자의 사촌 바라카가 가져온 기독교 경전을 놓고 자주 토론을 벌였다. 천지창조, 인류의 구원, 천국과 지옥 같은 방대하고 명확한 세계관을 갖는 기독교에 비해  아랍 신앙은 너무도 모호하고 초라한 것이었다. 동굴 명상을 통해 천사 지브릴(가브리엘)로 부터 계시를 받았다는 무함마드. 참된 신은 오직 알라 한 분뿐이고, 다른 신들은 우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그의 주장은  아랍 부족 장로들의 반발을 가져올 수 밖에 없었고,  냉대와 박해에 위협을 느낀 무함마드는  그의 추종자들과 함께 622년 메카를 떠나 메디나로 이주한다.  이슬람인들은 이때를 성스러운 탈출이라는 뜻의'헤지라' 라고 부르며 이슬람의 기원 원년으로 삼는다. 627년의 메디나 공방전에서의 대승리를 거두고  630년 마침내 메카로 입성한 무함마드는 카바 신전을 박살내고 유일신 알라만을 섬길 것을 선언한다. 동시에 수천 년 이어온 셈족-아랍 전통 신앙은 종말을 고하고 시간의 모래 속으로 잊혀져 갔다.



 

 

 

 

 

 

 

 






 

리투아니아의 전통 신앙

 

유럽 최후의 '이교도' 국가

 

동유럽은 그리스와 로마 등 남유럽, 켈트의 서유럽 및 게르만의 북유럽보다 더한 오지였기 때문에 문명의 발달이 발달이 느렸고 기독교 등 외래 종교가 늦게 들어와 전통 신앙이 더 오래 유지될 수 있었다. 로마 제국이 313년에 기독교를 받아들였던 것에 비해, 동유럽의 리투아니아는 무려1386년에야  기독교로 개종했다. 유럽에서 가장 뒤늦은 셈이다.

 

 

 

잊혀진 슬라브족의 신앙

 

리투아니아는 원래 슬라브족 전통 신앙을 믿어왔다.  슬라브족은 오늘날 러시아를 비롯하여 우크라이나, 베로루시,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폴란드,  체코, 슬로바키아,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마케도니아 등 동류럽 국가 대부분을 세운 민족이다. 동유럽은 동로마 제국(비잔티움 제국)이  페르시아 및 아랍과의 전쟁으로 쇠약해져 있던 터에 슬라브족이 남하하여 지금의 발칸반도와 그리스 이지역 대부분을 슬라브족이 차지하게 된다. 그렇게 남하해온 슬라브족은 동로마 제국과 싸우거나 협력하다 9~10세기 들어온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전통 신앙을 버리게 된다.  기독교 선교사 키릴루스와 케토디오스 형제는 문자가 없던 슬라브족에게 성경을 보다 쉽게 전파하기 위해 문자까지 만들어 주었다. 이것이 러시아 등 슬라브계 국가들이 사용하고 있는 키릴 문자인 것이다.

 

 

 

 

 





 

 

 





 

 

 





리투아니아의 개종

 

다른 슬라브족에 비해 리투아니아는 뒤늦은 13세기 중엽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전쟁에서 승리와 패배를 거듭하던 리투아니나는 1384년 지배자인 요가일라 공작이 폴란드 여왕 야비가드와 결혼하면서 한 나라로 통합된 것이다.     카톨릭 교도인 여왕과 결혼하기 위해 세례를 받고 정식으로 가톨릭 신자가 되자 모든 리투아니아인들이 그를 따라 전통 신앙을 버리고 가톨릭으로 개종한 것이다. 로마의 기독교 국교 승인 이후 무려

1000여 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리투아니아인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

 

 

 

 

 

 

 


20세기 초, 동유럽이 공산화되면서 슬라브 신앙은 기독교 개종 때보다 더 큰 타격을 받는다. 공산주의는 모든 종교와 미신을 부정, 전통 신앙이 역사의 발전을 막는다고 여겨 철저히 파괴된 것이다. 자취를 감춘 옛 신들이 또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그것은 아마 예술 작품 속에서나 가능할 것이다. 종교적 숭배를 잃어버린 신들이 살아남는 길은 그것뿐이다. 그리스 신화의 신들이 더 이상 신으로 숭배 받지는 못하지만 대중 예술 작품들 속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처럼 말이다.





아즈택의 전통 신앙
신의 재림을 기다리며
1116년 멕시코 북쪽의 사막에서 살고 있던 아즈텍인들은 남쪽으로 이주하여  원주민 톨텍족에게 봉사하는 용병으로 활동했다.1521년 스페인 군대에게 멸망하기 전까지 아즈텍인들이 세운 제국은 찬란한 번영을 누리며, 중앙아메리카 지역의 중심지 역할을 톡톡히 했다.아즈텍 신앙의 특이한 점은 이들이 세계의 종말론에 매우 집착했다는 사실이다. 아즈텍의 사제들은 지금 인류가 살고 있는 세계는 이미 네 번이나 멸망했다가 다시 재생되었으며, 다섯 번째 세상도 머지않아 멸망하고 여섯 번째 세상이 만들어 진다고 믿었다.  이런 믿음은 화산과 지진 같은 자연 재해가 많은 멕시코의 환경에 영향을 받아 생겨났을 것이다.또한 그들은 세계의 중심은 태양이며 태양이 계속해서 빛을 내면서 하늘에 떠올라야 세상이 돌아가고 만약 태양이 힘을 잃고 꺼지면 세상도 멸망한다고 생각했다.  리하여 그들은 세상의 멸망을 막고자신들이 창조한 생명체 중에서 가장 고귀한 인간의 생명력 원천인  심장을 바쳐야 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아즈텍인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주변 다른 부족을 습격하여포로를 신전으로 끌고 가 심장을 꺼내 태양신에게 바쳤다.  인신공양은 훗날 아즈텍을 멸망으로 몰고 가게 된다.

 

 

 





 

 

 





 

 

 





 

 

 






 

 

외래 종교와 전통 신앙을 절충한 아즈텍인들

 

아즈텍을 멸망시키고 멕시코를 손에 넣은 스페인은 두 가지 작업을 열정적으로 벌였다. 하나는 아즈텍 전역에서 황금과 은, 보석 등을 닥치는대로 긁어모아 본국으로 보내는 일이었고, 다른 하나는 아즈텍인들에게 기독교를 강요하며 아즈텍 전통 신앙을 철저히 금지하는 선교 사업이었다.

아즈텍 성직자들과 스페인에서온 프란치스꼬 소속 수사 12명은 서로의 종교를 두고 신학적 토론을 벌였다. 아즈텍 성직자들에게 "당신들 아즈텍인들이 믿었던 신들은 모두 사악한 악마이고,  오직 하느님만이 진정한 신이다 락 말하자, 아즈텍 성직자들은 이렇게 반박했다.

 

당신들은 우리가 섬기는 신들이 사악한 마귀라고 하는데, 생전 처음 듣는 말입니다. 우리 선조들은 신을 믿으면서 인생의 진리를 깨달았고, 신이 주는 음식과 물을 먹으며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신을 섬기면서 하늘의 별들이 어떻게 움직이고, 시간과 날짜가 흘러가는지에 대해서 알았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에게 은혜를 배풀었던 고마운 신들을 버려야 한다는 말입니까? 당신네 스페인인들은 이미 우리나나를 멸망시켰고 땅을 빼앗았습니다.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더 이상 우리에게 당신들의 방식을 강요하지 마십시오.

 

 

 

 

 

 

 






 

 

 




스페인의 강력한 억압에 아즈텍인들은 목숨을 구하기 위해 일단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예전에 믿었던 신들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었다. 위 그림에 나오는 것처럼 아즈텍인들은 가톨릭 교리를 정확히 꿰뚫어보고 겉으로는 기독교의 외투를 쓰면서 사실은 자기들의 전통 신앙을 계속해서 간직했던 것이다. 오늘날 멕시코 국민의 96%가 가톨릭을 믿는다. 그리고 멕시코인들은 가톨릭의 성자들을 위해 해마다 축제를 성대하게 벌이곤 한다. 그 안에는 아즈텍의 옛 신들이 살아서 숨을 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네스토리우스 교단

 

몽골 초원의 기독교

 

칭기즈칸의 동양과 서양에 걸친 대제국 건설은 너무도 잘 알려져 있지만,  그의 후원자이자 의붓아버지 옹칸과 옹칸의 부족인 케레이트족이 예수를 믿는 기독교도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2세기 무렵의 기독교는 주로 유럽 지역에서 믿던 종교였고, 지금처럼 세계적인 종교로 성장하기 전이었다. 그런데 유럽에서 멀리 떨어진 몽골 초원에 어떻게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일까? 지금은 몽골 국민의 96%가 라마교를 믿지만, 한때 몽골 초원에도 기독교가 성행하던 시절이 있었다. 12세기와 13세기, 칭기즈칸이 활동했던 시기가 바로 그때였다. 칭기즈칸과 동맹을 맺거나 적대적이었던  케레이트와 나이만 부족들은 서방에서 전래된 기독교의 일파인 네스토리우스교를 믿었다. 나중에 케레이트와 나이만이 몽골에 흡수되자, 두  부족의 왕녀들은 칭기즈칸의 아내나 며느리가 되었다. 네스토리우스교는 오늘날 시리아의 안티오키아 지역에서 활동하던 네스토리우스 주교(386~450)의 가르침을  믿는 기독교 종파였다. 왜 엄연한 기독교 주교가 정통 교단에서 벗어나서 따로 종파를 만들었을까?

여기에서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

 

 기독교는 성경 중심의 종교다. 그런데 이 성경이 문제다.  본래 성경은 한 명의 저자가 한꺼번에 써낸 책이 아니라, 서로 다른 여러 명의 저자들이 제각기 쓴 책들을  하나로 엮은 것이다. 그러다 보니, 같은 성경 안에서도 앞뒤 내용이 모순되는 부분들이 수두룩하다. 예컨데 출애굽기(탈출기)와 레위기 등에서는 신을 믿지 않는 다른 민족들을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두 죽이라고 하다가,  요나서에서는 비록 신을 믿지 않는 이방인이라고 해도 그들의 생명은 귀한 것이니 죽여서는 안 된다고 한다. 이러한 성경의 상호 모순은 공부를 깊이 하려는 기독교 신도들이 가장 혼란스러워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래서 기독교는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수많은 다른 종파들로 분열될 수 있다.  로마 교황을 단인 지도자로 모시는 다톨릭이야 예외라고 해도, 단일 지도자가 없는 개신교는  장로교, 감리교 등 수 없이 많은 종파들로 나뉘어 있다.

 

초기 기독교 성직자들도 오랫동안 하나의 문제를 가지고 큰 논쟁을 벌였다. 그것은 삼위일체의 교리가 맞느냐 틀리느냐 하는 문제였다. 아리우스파는 예수는 하느님의 창조물일 뿐 결코 하느님과 같은 존재는 아니라고 주장하며 삼위 일체를 부정했다.  반면 아타나시우스파는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인 동시에 그와 같은 존재라고 주장하며 삼위일체설을 긍정했다. 갑론을박을 벌이다 결국 325년 니케아 공의회 결과, 삼위일체설을 외친 아타시우스파가 승리함으로써 기독교의 근본 교리는 성부(하느님)과 성자(예수)와 성령의 삼위일체설로 매듭지어졌다.

 

니케아 공의회에서 정론으로 승인한 삼위일체설을 따르면서 로마 교황을 모든 기독교 교회의 지도자로 승인하는 교파가 바로 오늘날의 가톨릭(천주교)이다. 그리고 삼위일체설을 따르지 않는 다른 기독교 종파들은 모두 정통에서 벗어난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아리우스파도 그렇게 이단이 되었고, 그에 따라 삼위일체설을 믿는 로마인들이 아닌 이방인 게르만족에게 퍼져나갔다. 삼위일체설 말고 또 하나의 논쟁은 예수를 낳았다는 성모 마리아를 어떤 존재로 볼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가톨릭 교단의 일반적 가르침에서는 마리아가 낳은 예수는 신과 같은 존재이니, 마리아는 곧 '신의 어머니'였다. 허나 네스토리우스는 성모 마리아는 한낱 인간일 뿐이며, 결코 신성한 존재가 될 수 없다고 반박한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결국 133년 네스트리우스는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가 내린 조치에 의거 기독교 정통 교단에서 파문되었고, 그를 따르는 자들도 모두 서방 교회에서 추방되기에 이르렀다. 450년 네스토리우스가  사망하자 그를 따르던 신도들은 기독교의 탄압을 피해 머나 먼 동방의 페르시아로 대거 달아난다.

 

 

 

 

 


페르시아에서의 네스토리우스 교도들은 조로아스터교와 페르시아 황실에게 고향 로마에서보다 훨씬 더 지독한 박해에 시달렸다. 사산 왕조는 적국인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지정하자 혹 네스트리우스가 로마와 내통하는 첩자로 활동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더 기독교를 핍박했던 것이다.
곤경에 처한  네스토리우스교도들의 선택은 두 가지로 갈렸다. 하나는 사산 왕조의 유력자들과 친분을 밎어 계속 페르시아에 남아 있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차라리 페르시아를 떠나 더 먼 동방으로 이주하는 것이었다. 전자를 택한 사람들은 497년 독자적으로 총대주교를 임명하여 네스토리우스 교회 창설을 선언했다. 페르시아 황제들도 조로아스터교의 지나친 전횡에 내심 불만을 가지고 있던 터라 네트토리우스 교단을 지원하여 견제하게 된다. 반면 후자를 택한 사람들은 중앙아시아와 중국으로 이주하여 현지 주민들을 상대로 선교활동을 벌였다. 이렇듯 중앙아시아로 이주한 네스토리우스교도들은 에프탈 등 현지 원주민들을 상대로 선교 사업을 벌였으며  이런 노력이 훗날 12세기 몽골 초원에서 많은 부족들이 네스토리우스 신앙을 받아들이는 밑바탕을 마련했다.


 

 

 





 

한편 중국으로 전래된 네스토리우스교는 한동안 파사교波斯敎라 불렸는데, 이는 페르시아의 한자표기인

파사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그러다가 당나라 현종 무렵에 景敎경교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대진국大秦國의 승려인 아라본이 정관 9년(635)에 장안을 방문했다.  황제는 아라본을 환영하고 궁전으로 초대했다. 아라본이 가져온 경전을 번역하고, 그 도를 물어보아서  그 뜻을 알게 되었다.(중략) 셋이 한 몸이며 근원과 진정한 주인이신 아라하께서 하늘과 땅과 사람을 만드셨다. 그러나 사탄이 사람의 마음 속에서 어둠과 무지르 불어넣었다. 그리하여 사람은 아라하의 참된 뜻을 모르고 아라하의 한 분이신 미시하께서 세상에 오셨다. 미시하는 처녀의 몸에서 나시고, 사람들에게 아라하의 참된 뜻을 널리 알리셨으며, 그런 후에는 하늘로 올라가셨다.

 

 

비문에 적힌 아라하는 기독교의 유일신인 '엘로힘'을 말한다. '셋이 한몸이며' 라는 부분은 네스토리우스교가 기독교의 삼위일체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뜻한다. 그리고 '미시하'는 '메시아',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킨다. 사탄은 말 그대로 인간을 죄짓게 하고 지옥으로 이끄는 악마인 사탄을 말한다. 나머지 내용들은 신약성경에 적힌 예수의 부활을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이다.

 





 

 

 







프레스터 요한의 전설은 몽골 초원에서 만들어졌다?

13세기 탐험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프레스터 요한('사제 요한'이란 뜻인데, 중세 유럽에서는먼 동쪽에  기독교를 믿는 강력한 나라를 '프레스터 요한'이라 불리는 사제이자 왕이 다스린다는 전설이 널리 퍼져 있었다.) 이라고 말했다. 그는 《동방견문록》에서 칭기즈칸이 프레스터 요한의 딸과 결혼하고 싶다고 연락하자, 프레스터 요한은 이에 분노하여 "그는 나의 노예에 불과한데, 어떻게 내 딸을 줄 수 있겠는가?  차라리 내 딸을불에 태워 죽이는 편이 낫다!"면서 거부하여, 분노한 칭기즈칸이 프레스터 요한과 전쟁을 벌여  결국 그를 멸망시키고 그의 딸과 여동생 등을 자신의 가족과 결혼시켰다고 주장했다.

 

 

 

 




 

앞서 마르코 폴로가 말한 프레스터 요한과 칭기즈칸과의 관계는 사실과 약간 다르다. 실제로 칭기즈칸은 옹칸의 딸과 자신의 장남인 주치를 결혼시키려 했으나 옹칸의 아들인 셍굼이  반대하여 실패한 뒤, 옹칸과 전쟁을 벌여 케레이트 부족을 정복하고 셍굼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옹칸의 동생인 자아 감보의 딸들은 칭기즈칸의 장남 주치와 막내아들 툴루이의 부인이 된다. 여기에서 톨루이와 결혼한 자아 감보의 딸이 소르칵타니다. 그녀는 네스토리우스교를 믿었고 그녀가 낳은 네 아들은 몽골 제국의 대칸이 되는 몽케와 쿠빌라이, 페르시아에 일한국을 세우는 홀라구, 쿠빌라이와 몽골제국의 제위를 놓고 싸웠던 아리크부카였다. 몽골 제국의 주요 군주들은 기독교를 믿는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것이다.

 




몽골 제국이 발흥하던 13세기 몽골인들에게 큰 지원을 받고 번영을 누렸던 네스토리우스 교단은 14세기에 들어서 큰 타격을 받았다. 원나라의 몽골인들이 라마교로, 일한국과 중앙아시아의 몽골인들이  이슬람교로 개종하면서 더 이상 네스토리우스교를 믿건 지켜주지 않으니 자연히 교단의 세력이 위축될 수 밖에 없었다. 여기에 이슬람교로 개종한 중동의 몽골인들의 박해가 더해지면서 네스토리우스교는 더욱 궁지에 몰렸다. 쇠퇴해가던 네스토리우스교에 회복 불능의 치명타를 가한 사건이 14세기 말부터 벌어졌다. 그것은 중앙아시아에서 등장한 티무르Timur(1366~1405)가 일으킨 전쟁이었다. 교단의 재산이 탐났던 티무르는 무자비한 박해와 약탈을 일삼았다. 수많은 성직자와 신도들이 죽임을 당했고, 교단의 재산을 모조리 약탈했다. 15세기 말로 접어들자 중국과 몽골 등지의 네스토리우스 교단은 불교와 라마교에 밀려 완전히 소멸해 버렸다.



 

 

 

스코프츠이 교단

 

구원을 향한 거세

 

인간의 생로병사를 극복하기 위해 나온 개념이 바로 '종교'다.

그런데 간혹 어떤 사람들은 이 종교에 깊숙이 심취한 나머지 아예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한 기행을 벌이기도 한다.

인간의 기본 욕망을 끊으라는 것인데, 구원을 얻기 위해 아어ㅖ 거세를 하라는 기이한 종교도 있었다.

바로 러시아의 스코프츠이 교단이다.

 

 

 

원죄를 끊으려면 거세를 하라!

 

1771년 러시아 서부 오률의 농부 안드레이 이바노프는 성경에 담긴 교리를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스코프츠이라는 비밀 종파를 창시했다. 스코프츠이는 '거세하다'라는 뜻의 러시아어  '스코페츠skopts에서 유래했는데, 말 그대로 신도들에게 성기를 자르라고 권유하는 종교 단체였다. 최초의 인류인 아담과 하와(이브)에게 죄를 알게 해준 선악과가 둘로 갈라져 사람의 몸에 붙었는데,  그것은 남자의 고환과 여자의 젖가슴이라고 주장했다. 인류가 원죄를 짓기 전의  순수한 상태로 돌아 가려면 성기와 젖가슴을 몽땅 잘라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셀리바노프와 스코프츠이 교단은 1825년 알렉산드르 1세가 사망하고 후계자 니콜라스 1세가 즉위하자 수도원들이 강제로 폐쇄되는 등이 박해를 받기도 했지만 교세는 위축되지 않았고 신도는 늘어갔다. 공식적으로 1866년까지 거세파에 가입한 신도는 총 5444명이었는데 그중에 남자 신도 703명과  여자 신도 100명이 각각  고환과 젖가슴을 잘라내는 거세 의식을 치렀다고 한다.교단은 신도들에게  거세를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자진해서 거세 하는 신도들은 '성욕을 극복한 훌륭한 사람'으로 존경받았다. 예배는 언제나 밤중에 열렸고 모두 힌색 상의와 바지를 입고서 지하실로 내려가 다른 신도들과 함께 무아지경에 빠질 때까지 원을 그리며 춤을 추고 신을 찬양하는 찬송가를 불렀다. 이는 다분히 이슬람교의 신비 교단 수피파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제정 러시아가 무너지고 소련이 들어서자 교단은 큰 위기를 맞았다. 소련 정부가 스코프츠이 신도들을 체포해 집단농장이나 시베리아의 유형소로 보내 혹독하게 탄압했다. 그렇다면 스코프츠이 교단은 특이한 괴짜들이었을까? 그렇게만 보기 어렵다. 인간이 성욕의 갈등에서 벗어나면 더욱 훌륭한 존재로 발전한다는 믿음은 플라톤을 비롯한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철학자들도 가지고 있었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로마 장군 스키피오는 기회만 있으면 자신들이 성욕을 초월했음을 과시하곤 했다. 그런가 하면 로마의 적수였던 게르만족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여자와 성관계를 늦게 갖거나 아예 갖지 않을수록 더욱 강한 힘을 얻게 된다고 믿었으며 그래서 동정을 유지하고 있는 남자를 매우 높이 싱송했다고 한다.


 

 

 

 

 






 

 

 



이 밖에도 이미 거세되어 성욕을 발휘할 수 없게 된 환관의 경우도 있다. 동로마 제국의 환관이었던 나르세스는 뛰어난 장군으로 칭송되고 중국 송나라의 환관 동관도 서하와 오랫동안 싸워 전공을 세운 장군이었으며, 명나라의 환관 정화는 7차례에 걸쳐 남중국해와 인도양을  항해하는 대원정을 단행한 훌륭한 제독이었다. 거세가 되어 성욕을 더 이상 이어갈 수 없었기에 그만큼 자신들의 일에 전력을 다해 뛰어난 공헌을 데웠던 것으로 보인다.
아드레이 이바노프와 비슷한 발상을 한 사람이 20세기 한국에도 있었다. 1979년 신흥 종교 단군교를 창시했다가 1996년에 개신교로 개종한 목사 김해경 씨는 자서전에서《주여, 사탄의 왕관을 벗었나이다》에서 산속에서 자신과 함께 도를 닦던 사이비 교주 중 한 명이 성욕이 있으면 득도에 도달할 수 없다는 발상을 해서 스스로 거세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언제 어디서나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 법이다.


 

 

 

 








핀란드의 원시 신앙

 

시와 노래로 전해진 평화의 전통

 

핀란드 신화를 담은 《칼레발라》의 서사 구조와 내용은 이들 신화 못지않게 흥미로운 것들이 많다.

 

 

 

태초의 처녀와 알

 

핀란드 신화 《칼레발라》는 19세기에 이르러서야 편찬되었다. 그 전까지는 구송으로 전해지다가 핀란드의 애국시인 엘리아스 뢴로트가 일일이 시골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노인들을 상대로 수집한  신화를 책으로 엮으면서 비로소 세상에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칼레발라》에 따르면, 태초의 세상은 '일마타르'라는 이름을 가진 한 명의 순결한 처녀로 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녀는 임신한 상태로 거대한 원시 바다 위를 아주 긴 세월 떠다녔는데 그러던 중 어느 하얀 오리가 무릎 위로 내려와 황금색 알을 낳고는 떠났다. 그 알이 뜨거워지더니 갑자기 깨지면서 노른자와 흰자가 흘러나왔다. 부서진 알의 껍질은 하늘과 땅, 노른자는 해, 흰자는 달이 되었다. 그 후 그녀가 몸을 비틀자 물고기와 숲, 바위가 생겨났다. 그리고 그녀의 자궁 속에서 갑갑하게 살고 있던 아이는 스스로 어머니의 몸에서 나와 바다를 헤엄쳐 땅에 올랐다. 그가 바로 핀란드 신화의 가장 중요한 인물로 음유시인지자 마법사인 '베이네뫼이넨'이다.

 

 

 

 

 

 

 



핀란드 천지창조 신화 칼레발라의 이런 설정은 힌두교에 등장하는 '황금알'과 비슷하다.


 

 

 

 




《칼레발라》는 핀란드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기 이전에 숭배하던 전통 신앙을 노래와 시로 표현한다. 거기에는 핀란드 신화의 옛 신들이 등장한다. 아울러 핀란드 신화에서는 핀란드 신들을 총괄하여 주말라Jumaia라고 부르는 존칭이었다. 기독교가 전래된 이후에는 이 주말라가 한국의 '하느님'처럼기독교 유일신의 이름으로도 사용되었다. 700년 만에 바깥 세상으로 나온 베이네뫼이넨은 바닷가에서 나무 묘목과 보리  씨앗을 발견하고, 이를 황무지에 심어 나무와 보리가 잘 자라 수 있는 기원을 담은 노래를 부른다. 이런 점에서 베이네뫼이넨이 단순한 음유시인이 아니라, 일종의 무당이었다고 볼 수 있다. 고대에는 시와 노래가 따로 구분되지 않았다. 그리고 옛 사람들은 사람의 말에 힘이 담겨 있다는  이른바 言靈언령 신앙을 믿었다. '말이 씨가 된다'는 우리 속담도 그렇다. 또한 신비의 힘이 담긴 노래로 사물을 움직일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달리 표현하면 바로 무당이다.

 

 

 

 

《칼레발라》의 주인공 베이네뫼이넨. 핀란드 화가 악셀리 갈렌-탈레라

1893년 작품, 핀란드 국립박물관 소장.

 

 

 

 

 

 

삼포를 만드는 대장장이들

악셀리 갈렌-칼레라의 1901년 작품, 핀란드 국립박물관 소장.

 

 

 

 

 

 

《칼레발라》에 등장하는 영웅 쿨레르보가 모험을 떠나고 있다.

악셀리 갈렌-칼레라의 1899년 작품, 핀란드 국립박물과 소장.

 

 

핀란드 신화는 다른 신화들에 비하면 평화를 사랑하고 폭력을 멀리하는 경향이 강하다. 한 예로 핀란드와 바로 인접하 북유럽 지역이 신화와 비교해 보면 다른 점이 확연히 드러난다. 북유럽 신화에서는 신들이 사악한 거인 이미르를 죽이고 그의 시체로 세계를 만들었다고 얘기한다. 그저 임신한 처녀의 무릎에 떨어진 알이 저절로 깨어져 그 안에서 해와 달이 나왔다는 핀란드 신화와 비교하면 너무나 대조적이다. 요약하면 북유럽 신화는 그 근본부터 피와 폭력으로 가득 찬 데 반해,  핀란드 신화는 지극히 평화적이다.

 

 

 

 

 

 

 

잘못된 판결로 인해 떠나는 베이네뫼이넨.

그의 퇴장과 함께 장대한 서사시 칼레발라의 서사시도 끝난다.

악셀리 갈렌-칼레라의 1893, 핀란드 국립박물관.

 

 

 

스스로 떠나버린 베이네뫼이넨

 

《칼레발라》는 주인공 베이네뫼이넨이 따나면서 끝을 맺는다.

그런데 그 결과가 빚은 과정이 매우 흥미롭다. '마르야타'라는 처녀가 산딸기를 먹은 뒤 임신하고 남자 아이를 낳자 그녀의 부모와 주변 사람들은 전부 아이가 불길하다고 여겼다. 산딸기를 먹고 나서 아이를 낳었다는 말 자체가 거짓이고, 마르야티가 부모의 허락 없이 몰래 나쁜 남자와 놀아나서 아이를 낳고는 산딸기가 아이를 가지게 했다고 둘러댄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 문제로 초청된 현자 베이네뫼이넨은 아이를 살펴보고 이렇게 말한다.

 

이 아기는 버림을 받았고 산딸기가 그의 아버지이므로, 황무지 위에 눕고 골풀 사이에서 잠들게 해야하며

산 위에서 살게 내버려둬야 한다. 이 아기를 습지로 데려가 자작나무에 머리르 쳐박게 하라.

 

냉혹한 판결에 충격을 받은 마르야타는 스스로 물에 빠져 자살을 했고 어머니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아기는

놀랍게도 직접 말을 하며 베이네미이넨을 꾸짖는다.

 

당신은 너무 늙어서 어리석고 정의를 잊어버렸굱요. 당신은 북쪽 땅의 몰지각한 영웅입니다.

당신은 잘못된 판단을 내렸어요. 당신은 더 큰 어리석음과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이에 마르야타가 살고 있는 마을의 통치자인 비로칸나스는 아기가 신비한 능력을 가졋다고 여겨, 그에게 성수를 뿌리며 축복을 내려주는의식을 베풀었다. 그리고 장차 아기가 핀란드의 위대한 왕이 될 운명을 지녔다는 예언을 하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베이네뫼이넨은 서쪽 바다의 자줏빛 항구로 떠났다.

 

《칼레발라》는 다른 지역의 신화와 비교하면 매우 아기자기한 느낌을 준다. 그리스 신화처럼 화려하지도, 북유럽 신화처럼 비장하지도, 인도 신화처럼 방대하지도 않다. 작고 소박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1918년 마침내 독립을 이룬 핀란드가 오늘날까지 강대국 러시아에 흡수되지 않고 독립국으로 존재할 수  있는 배경에는《칼레발라》로 대표되는 핀란드의 정신 문화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전 세계를 열광케 한 <영화 반지의 제왕>은 바로

칼레발라》에 담긴 핀란드 전통 신앙을 새롭게 해석한 것이다.

 

 

 

 

 




마흐디 교단
세기말의 구세주
기독교에서 미래에 올 메시아를 믿는 것처럼 이슬람교에서도 '마흐디Mahdi라는 구세주를 믿는다.마흐디는 세상의 종말 무렵에 나타나 이슬람을 위협하는 악을 심판하고 세계를 정의로 채운다는 인물이다.아직도 많은 이슬람교도들은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는 기독교도들처럼 마흐디가 나타날 날을 고대하고 있다.

 

 

 











식민지 착취에 시달리다 봉기한 수단의 마흐디 교단
현대 수단의 국민 대다수는 이슬람교를 믿지만, 원래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수단은 본래 이잡트인들에게 '누비아'라고 불리던 땅으로, 처음에는 자연의 정령을 믿다가 시간이 흐르자 이집트에서 들어온 신들을 믿었다. 그로부터 300년이 지나고 나서 아라비아 반도에 이슬람교가 등장하자 기독교를 믿던 수단인들은 이슬람교를 앞세운 아랍인들의 침공에 맞서 거세게 저항했다. 결국 678년 아랍인들은 수단 정복을 포기하고 물러났다. 무력 확장에는 실패했으나 아랍과 수단 간의 평화가 오면서 수단의 각 지역을 다스리는 세력가 중에서도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급기야 1093년, 수단 북부 마쿠리아 왕국의 국왕은 기독교를 버리고 이슬람교로 개종했으며, 자신처럼 이슬람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세금을 면제해주겠다는 법령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슬람의 수단은 통일된 국가를 만들지 못했고 급기야 1820년 이집트 군의 침공으로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19세기 중엽 이집트 정부는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하는 수에즈 운하 건설 작업에 들어갔다. 건설 비용이 모자란 이집트 정부는 수단에 매기는 세금을 더욱 늘렸다. 여기다가 1877년 이집트가 영국 정부의 압력으로 영국인 장교를 수단의 총독으로 임명하자 수단인들은 이중으로 세금을 바쳐야 했다. 1881년 마침내 수단인들의 대대적인 저항이 일어난다. 아흐마드는 자신이 세기말에 나타난 구세주  마흐디라고 주장하며 영국인들을 몰아내고 순수한 이슬람 율법에 입각한 국가를 세워야 한다고 선언한다.









아흐마드를 추종하는 일명 '마흐디스트'들은 이집트 및 영국과 17년에 걸친 반제국주의 투쟁을 벌였다. 세계사에서는 이를 '마흐디스트 전쟁'이라고 부른다. 마흐디 교단도 종말론을 내세운다. 이슬람교에서 갈라져 나온 마흐디 교단은 이슬람교의 신 알라를 믿었다. 그러나 교주 아흐마드 본인이 자신을 가리켜 구세주라고 했던 만큼, 알라 못지않게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순수한 이슬람 원리주의와 반외세를 부르짖으며 일어난 마흐디 교단은 곧바로 주변의 거의 모든 세력의 적이된다.
이집트를 집어삼키고 더 나아가 수단마저 식민지로 삼으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영국은 마흐디 교단을 무력으로 멸망시키려 했으나 예상과 달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신앙의 의지는 최신 무기로 무장한 영국군을 번번이 막아내는 놀라움을 보여주었다. 영국군의 지휘자 힉스 대령은 마흐디군에 포위되어 본인은 물론, 거느린군대마저 전멸당하는 대패를 맛본다. 두 번째로 마흐디 교단과 맞붙어서도 역시 참패를 당한다. 당시 지휘관은 찰스 고든 장군이었는데 명장으로 추대받는 인물이었다.
 마흐디 교단의 종말은 1898년 9월 2일, 하르툼 인근의 두르만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찾아왔다.  영국군은 최신 무기인 맥심 기관총으로 총탄을 퍼부어 단 하루만에 3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낸 것이다.  1899년 11월 25일 영국군을 피해 도망 중이던 압달리와 그 신도들은 영국군에 의해 모두 사살당하고 만다.  이로써 마흐디 교단은 마침내 완전히 붕괴되었고 수단은 영국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만주족의 샤먼교

 

여자의 세상

 

대부분의 종교나 신화는 철저하게 남성 중심적이다. 최고 신은 주로 남성이며, 자신이 가진 권력을 이용해 수맣은 여자들과 난잡하고 방탕한 성생활을 즐긴다. 최고 신의 아내들은 남편의 음란함을 알면서도 울분을 삭여햐 한다. 만약 분노를 터뜨렸다간 나편의 힘에 의해 고통을 당할테니까. 하지만 세상에는 남성 중심적 신화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정반대로 여성 중심적인 신화도 있다. 바로 만주족의 신화다.

 

 

 

 

태초에 모든 신과 인간은 여자였다?

 

우리 역사에 말갈족으로 더 잘 알려진 만주족은  중국 한나라 시대부터는 말갈로, 송나라 시대에는 여진으로 불리다가 청나라 시대에야 비로소 만주족으로 불렸다. 12세기 이전까지 정치적 통일을 이루지 못해 주변 강대국 들에게 휘둘리는 상황이었다. 그러다 12세기에 금나라를, 17세기에 청나라를 세워 두 번이나 중국을 정복했다.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은 한족과의 결혼을 금지하고 한족과 분리된 별개의 공관에서 살아가도록 조치를 할 정도 로 자신들의 정체성 보존에 심혈을 기울였다. 허나 19세기 말로 접어들면 그런 청나라 황실에서 조차 만주족 정체성의 기본이랄 수 있는 만주어를 죄다 잊어버릴 정도로 한족 문화에 빠져들었다.

 

 

 

 

 

청나라의 최전성기를 연 강희제. 오늘날 중국의 광대한 영토는 그가 이룩한 업적에서 비롯되었다.

만주족임에도 불구하고 현제까지 중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황제로 남아 있다.

 

 

 

 

 

 

 



만주족의 신화는 《천궁대전》이라는 중국 책에 기록되어 있다.이 책은 1939년, 중국인 학자 부희륙과 오기현이 만주족 샤먼(무당) 백몽고를 찾아가서 들은 신화와 전설을 수록한 것이다. 참고로 무당을 가리키는 영어 단어인 '샤먼shaman' 자체;가 만주족을 포함한 시베리아와 극동의 부족들이 무당을 부르는 말인 '샤만'에서 비롯되었다. 만주족의 창세신화는 이렇다. 아득히 먼 태초에 세상은 온통 거대한 물로 뒤덮여 있었다.(이 부분은 슬라브 신화와 비슷하다.) 그러던 중 물 속에서 아포가혁혁 또는 아부카허허라는 최초의 신이 등장했다. 이 아부커허허는 여성적 인격을 지닌 신, 신이었다. 그가 먼저 공기와 빛과 안개를 만들었다. 그러자 그녀의 몸 아랫부분이 떨어져나가 '바나무허허' 라는 두 번째 여신이 탄생했다. 곧이어 빛은 하늘이, 안개는 땅이 되었다. 아부카허허의 몸 윗부분이 떨어져나가 와러두허허라는 세 번째 여신이 탄생했다. 이 세 여신은 서로 힘을 합쳐 세상을 창조해나갔다. 구약성경이나 그리스 신화 등과는 정반대로 만주족의 신화는 지극히 여성 중심적이다.

 

 

 

 

 




만주족 신화에 등장하는 여신은 모두 합치면 약 300여 명에 이른다. 아부카허허와 와러두허허 등의 여신을 섬기는 만주족 샤만교는 민족종교라는 특색을 지녔다.  따라서 만주족이 아닌 한족이나 위구르족 같은 다른 민족에게는 거의 알려지거나 전파되지 않았고 만주족만의 고유한 신앙으로 남았다. 한족에게 자신들의 문화인 변발을 강요하며, 이를 어기는 자들을 무참히 학살했던 만주족이 어째서 자신들의 신앙을 한족에게 강요하지 않았는지 이유는 알 수 없다.  1911년, 한족이 일으킨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하면서 샤먼교는 큰 타격을 받는다. 하지만 샤먼교를 쇠퇴하게 만든 진짜 이유는 중국 자체가 서구 열강의 침탈에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며 무너지자, 만주족을 포함한 중국인들은 서양의 최신 학문을 배워야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어 외세의 침략을 막아낼 수 있다고 믿게 된 것이다. 시골 정도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곳에서 샤먼교가 자취를 감추었고만주의 신들은 완전히 잊혀졌다.
만주족의 샤먼교나 한국의 무속 신앙 모두 그 신앙을 믿고 있던 구성원들에 의해 버림받은 것이다. 그나마 한국은 경제부흥에 성공한 뒤, 그동안 잊고 있었던 고유한 옛 문화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다소 사정이 나아졌다. 그런데 중국은 1660년대 들어 고유 문화를 시대에 뒤떨어진 미신이자 봉건적 요소로 규정한 이른바 문화대혁명의 광풍에 휩쓸렸다.



 

 

 

후금을 세운 청 태조 누르하치.

 

 

오늘날 중국에서 만주족의 후예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은 약 700만 명이나 된다. 그러나 그들 중에서 능숙하게 만주어와 만주 문자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10명도 채 되지 않는다고 한다. 언어와 문자를 잃은 사람들에게 고유 신앙에 대한 애착이나 열정이 있을 리 없다. 200년 넘게 세계 최강대국 청나라 황제들이 정성껏 섬겼던 평화와 풍요의 여신들은  이제 다 낡은 책 속에서나볼 수 있을 뿐이다. 신의 세계에도 흥망성쇠는 존재한다.

 

 

 

 

 

 

 

오나족의 전통 신앙

 

동서남북 하늘의 신들

 

 

오나Ona족은 지금의 아르헤티나와 칠레 최남단에 있는 티에라 델 푸에고 섬에서 살아가던 원주민 부족이었다.

이들은 약 1만 년 전부터 티에라 델 푸에고 섬을 고향으로 삼았으며 아마도 그보다 더 이전에 아시아에서 배링

해협을 건너 남미 대륙으로 이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털가죽 옷을 걸친 오나족 여인들.

 

 

 

 

 

오나족의 전통 신앙은 샤머니즘이었다.

여러 신을 믿고 무당이 그들을 불러내어 도움을 요청하는 우리의 삼국시대 초기를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평화를 누리며 살던 오나족에게 19세기 후반 끔찍한 재앙이 찾아왔다.  백인들이 총을 들고 티에라 델 푸에고 섬으로 쳐들어와 오나족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것이다. 이 잔인한 유혈극의 배경에는 섬으로 이주한 영국 목축업자들이 있었다. 1880년대 많은 영국인들이 이주 해왔는데 그들이 양 목장을 세우면서 갈등이 시작된 것이다.  백인 군인과 총잡이들은 오나족이 눈에 보이는즉시 무자비한 학살을 저지른 것이다.  인간 사냥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15년 동안이나 계속 되었다. 1 세기가 지난 지금, 오나족의 고유 언어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르헨티나에서 고작 4명에 불과하다. 그리고 살아남은 대부분의 오나족도  옛날 그들의 조상들이 믿었던 신들은 모두 잊어버렸고 가난한 수 민족으로 전락하여 역사의 기억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다.

 

 

 

 

 

 참고 도서 : 도현신 저, "지도에서 사라진 종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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