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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범 종단과 함께

티벳박물관 어린왕자 특별展

티벳박물관

어린왕자 특별展





























       
- 어린왕자 -


정식 판매 부수는 8천만 부가 넘고, 해적판까지 합하면 전 세계적으로 1억 부 이상 팔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 『어린 왕자(The Little Prince)』는 160여 개 언어로 번역되어 오늘날에도 널리 사랑받는 작품 중 하나다.

사실 『어린 왕자』는 책 읽는 어린아이들에게 통과의례와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도 전 세계의 어린이들로부터 꾸준히 읽히고 있는 『어린 왕자』는 본명이 앙투안 장밥티스트 마리 로제 드

생텍쥐페리(Antoine Jean-Baptiste Marie Roger de Saint-Exupéry)라는 긴 이름을 가진 작가가 쓴 작품이다.

그는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비행기 조종사로 아프리카 · 남대서양 · 남아메리카 항공로의 개척자이며,

 야간 비행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어린 왕자』의 시작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는 코끼리를 삼키고 있는 보아 구렁이를 그려서 어른들에게 보여주었다. 무섭지 않으냐고 하자 어른들은 모자가

뭐가 무서우냐고 하며 그런 그림을 그리고 있느니 지리나 역사에 관심을 두라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내 어릴 적

꿈인 화가라는 직업을 포기하고 비행기 조종하는 법을 배웠고 나는 세계 여기저기 안 가본 곳이 없다. 비행기를

타고 세계 일주를 하던 중 비행기가 갑작스럽게 고장이 나버렸다. 그래서 도착한 곳은 사하라 사막 한가운데였다.

 사막 한가운데에서 비행기를 고치고 있을 때 어린 왕자를 만났다. 


      

소설의 내용대로만 보면 화자(話者)는 매우 유복한 사람이다. 현대도 그렇지만 소설이 쓰인 1940년대에 자가용

비행기를 갖고 세계 일주를 한다는 것은 일반 사람들이라면 꿈도 꾸지 못할 일이기 때문이다. 생텍쥐페리가

프랑스 귀족 중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왕자』 곳곳에 남다른 순진함이 묻어나는 이유도

그의 성장 배경이 순수하고 특수하기 때문이다.

B-612라는 별에서 온 어린 왕자는 크고 작은 일곱 개 별을 방문한다. 그중 마지막 별, 즉 일곱 번째로 방문한

별이 지구다. 어린 왕자는 지구에서 지혜로운 여우 한 마리를 만나게 된다. 어린 왕자가 친구가 되자고 제의했으나

 여우는 길이 들지 않아서 친구가 될 수 없노라고 말한다. ‘길들인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고 묻자 여우는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라고 설명해준다.길들인다는 것에 대한 소중함을 깨닫게 된 어린 왕자는 정원에 핀 수많은 꽃이

 자기의 장미와는 조금도 닮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그 장미들이 자기에게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와 같은 설명은 『어린 왕자』가 다소 신비적이고 철학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린 왕자는 말 그대로 어린아이인데 얼마나 심오한 이야기를 하는지 보자.




추락한 지 여드레째 되는 날 물이 떨어졌다. 어린 왕자와 함께 샘물을 찾아 나섰다. 별들이 보였다. “별은 보이지 않는 꽃

때문에 아름다운 거야.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 우물이 숨어 있어서 그래.” 이 말을 듣고 나는 이 모래의 신비로운

 빛남을 이해하게 되었다. 왕자는 잠이 들었다. 잠든 왕자가 내 마음을 감동하게 하는 것은 이 애가 꽃 하나에 충실한 것

 때문이었으리라. 어린 왕자가 지구에 떨어진 지 일 년이 되던 날. 그는 우물가의 벽에 올라앉아 노란 뱀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는 돌아갈 것이라고 쓸쓸히 말했다. “내 별이 작아 보여줄 수는 없어. 모든 별을 봐. 그 중의 어느 하나에서

 내가 웃고 있겠지. 그러면 아저씨에게는 모든 별이 웃는 것 같이 보이겠지. 결국 아저씨는 웃을 줄 아는 별을 가진 거야.” 




코끼리를 삼킨 보아 뱀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


 

               


『어린 왕자』가 지금도 많은 독자에게 사랑받는 이유는 어린 왕자라는 연약하고 순결한

 어린이의 눈을 통하여 잊히고 등한시되었던 진실들을 하나하나씩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속이 보이지 않는 보아 구렁이의 그림으로부터 시작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고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과 길들인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 이 작품의 전체에 흐르는 중심 사상이다.

이 작품에서 생텍쥐페리는 여우를 통해 마음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보는 진실성을 점차로 상실해가고 있는

오늘의 어른들, 즉 삭막한 물질문명에 찌든 사람들로 가득한 현실을 고발했다고 볼 수 있다.




























1971년 11월 법정 스님









어린왕자 특별전을 개최하며




인디언들은 말한다.

우리가 세상에 온 이유는 영적인 성숙을 이루기 위해서이다.

불가의 수행이란 영적인 진화를 이루어 가는 정교한 시스템이다.


영적 진화의 완성이 깨달음인 것이다.

보리심을 일으켜 번뇌의 마음을 정화하고 53명의 스승을 찾아 가르침을 듣고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는 과정을 문학적으로 서술한 경전이 화엄경의 『입법계품』이다.

그 주인공의 이름은 '선재동자'이다. 선재동자가 53선지식을 찾아 가듯

어린왕자는 여섯개의 별을 찾아 육도윤회의 세계로 만행을 떠난다.


여섯개의 별에는 명령만 내리는 왕, 자기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허풍쟁이,

자신의 부끄러움을 잊기 위해 술만 마시는 술꾼을 만난다.

하늘의 별이 자기 것이라며 돈 밖에 모르는 사업가, 자기 주체성을 잃고 습관적으로 살아가는 사람,

알고 있는 지식과 행실이 다른 위선적인 사람을 본다.


어린왕자는 여섯 개의 별에서 교만, 허영, 나태, 무지, 욕망, 위선을 보고

일곱번 째 별인 지구에 온다. 사막에서 여우스승을 만나 최고의 지혜를 얻은 후

육신을 벗고 고향 별로 돌아간다.


어린왕자 이야기는 화엄경 입법계품에 나오는

 선재동자가 53선지직을 찾아 떠나는 구도여행과 둘이 아니다.


금년은 생텍쥐페리 탄생 108주년이다.

2017년 어린왕자전을 통해서 고향으로 돌아온 어린왕자를 맞이하고

자기 안의 어린왕자를 만나기 바란다.



- 2017년 4월 8일 대원사 티벧박물관장 현장 손모음 -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Antoine(-Marie-Roger) de Saint-Exupéry


생 텍쥐페리(Antoine(-Marie-Roger) de Saint-Exupéry)


 

생텍쥐페리는 프랑스의 비행사이자 소설가로, 시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아름다움이 담긴 글과 인간과

세계에 대한 고양된 인식으로 '고독한 몽상가', '지상의 어린 왕자'로 불리며 전 세계적으로 널리 사랑받는 작가이다.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는 1900년 6월 29일 프랑스 리옹 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장 드 생텍쥐페리 백작이고, 어머니는

프로방스 지방 귀족인 마리 부아이에 드 퐁스콜롱브이다. 4세 때 아버지가 괴한의 습격으로 사망하자 어머니를 따라가

외가인 샤를 드 퐁스콜롱브의 라몰 성에서 자라났다. 음악가이자 화가였던 어머니 마리는 감수성이 예민하고 사색적인

소년이었던 앙투안의 문학적 성향을 북돋아 주었고, 앙투안은 어린 시절부터 평생 어머니와 깊은 유대를 맺고 살았다.


8세 때 리옹의 몽 생 바르테레미 학교에서 초등교육을 받았으며, 이듬해 친할아버지가 앙투안의 가족들을 불러들이면서

 망스로 이주해 예수회 소속인 생트 크루아 중등학교를 다녔다. 학창 시절에는 다소 엉뚱하고 주의가 산만한 학생이었으며,

 학교 수업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당시 그에게 가장 큰 즐거움은 가족들과 함께하는 바캉스였다고 하는데, 5남매 중

 셋째였던 앙투안은 누이들과 남동생들, 어머니와 어울려 화목한 가정생활을 누렸다. 때문에 15세 때 남동생 프랑수아가

죽자 그는 큰 상처를 입었다. 동생과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와 이때 죽음의 의미에 대해 고민한 상념들은

20여 년 후 회고록, 30여 년 후 《전투 조종사》를 통해 나타난다.


유년 시절 생텍쥐페리에게 가장 중요한 경험은 12세 때 집 근처에 있던 앙베리외 비행장을 들락거리면서

한 첫 비행이었다. 그는 이때의 경험을 평생 잊지 못하고 비행을 자신의 업으로 택하게 된다.

15세 때 스위스 프리부르에 위치한 마리아회 학교에 입학하여 고등교육을 받았으며, 17세 때 대학 입학자격고사에

합격하여 파리로 왔다. 그러나 해군사관학교에 들어가고 싶었던 앙투안은 두 차례 시험을 보았으나 실패하고,

20세 때 파리 예술대학에 입학하여 건축학을 공부했다. 이 때문에 학교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방랑하다 군에 입대했다.

스트라스부르의 제2전투기 연대에서 군 복무를 시작했으며, 비행기 조종사 자격증을 취득해 모로코 카사블랑카에

 비행사로 파견된다. 그는 후일 군대 생활은 지루했지만 카사블랑카에서 '시정 넘치는 삶'을 살았다고 말했다.


그곳에서 2년 만에 비행 사고를 당해 두개골 골절상을 입으면서 소위로 의가사제대를 했지만, 이후에도

계속 비행에 대한 열정을 놓지 못했다.제대 후 파리에서 생활하면서 앙투안은 군 입대 전에 만난 루이즈 드

빌모랭과 약혼했으며, 그녀와 결혼하고자 민간 조종사라는꿈을 포기하고 부아롱의 기와 공장에 들어가고,

소렐 자동차 회사의 판매 대리인으로 일하는 등 직업 생활을 전전했다.


생텍쥐페리는 그녀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의 길을 포기하고 방황을 거듭했으나, 사교계의 명사이자

여류 작가였던 빌모랭과 몽상적이고 까다로운 생텍쥐페리는 애초에 잘 맞지 않는 짝이었다.

두 사람은 2년 만에 파국을 맞는다.


의기소침한 상태에서 생텍쥐페리는 시와 산문 습작을 하면서 출판계 인사들과 접촉한다.

 그리고 1926년 〈은빛 배〉 지에 중편소설 〈비행사〉를 발표한다. 편집장 장 프레보는 생텍쥐페리의

 '섬세한 묘사력'에 찬탄을 보냈으나, 당시 생텍쥐페리는 글보다는 돈이 될 만한 일을 찾아다녔다.

그는 프랑스 항공에 입사하여 관광객들을 태우고 다니는 비행선을 조종하며 돈벌이를 잠시 하다가,

 에어프랑스의 전신인 라테코에르 항공사에서 기술자로 일을 시작했다. 그곳에서 그는 《야간 비행》

 속 모델들인 디디에 도라, 기요메 등과 친분을 나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생텍쥐페리는 우편 비행사로 일했고, 3년 후에는 아르헨티나 아에로포스탈 항공사에서

항로 개발 책임자로 임명되어 새로운 항로 개척에 나선다. 생텍쥐페리는 사고를 당한 비행사들을 구조하러

 가기도 하고, 비행기 고장 때문에 아프리카 다카르 사막에 체류하기도 했으며, 1930년에는 절친한 동료

기요메가 안데스 산맥 횡단 중에 실종되자 구조 작업에 나선다. 비행사로서의 경험들은 1929년 《남방 우편기》,

1931년 《야간 비행》, 1939년 《인간의 대지》에 생생하게 반영되어 있다.


《남방 우편기》를 출간하면서 생텍쥐페리는 문학적 성취를 인정받았으며, 그해 시민 항공 부문

레종 도뇌로 훈장을 수여받았다. 또한 《야간 비행》으로는 페미나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이 작품은 미국에서 번역 출간되고 클라크 케이블 주연의 영화로도

 만들어져 큰 인기를 끈다.

생텍쥐페리가 직접 그린 《어린 왕자》 삽화


생텍쥐페리는 1931년 과테말라 출신 작가 엔리케 고메즈 카리요의 미망인이던 콘수엘로 순신과 결혼했다.

그는 그녀에게 헌신적인 애정을 바쳤으나 이전 약혼자 빌모랭보다 더 까다롭고 변덕스러운 콘수엘로와의 결혼 생활은

파란만장하기 그지없었다. 콘수엘로는 예쁜 외모에 유머 감각과 예술가적 기질이 풍부했으며, 주변 사람들을 자기 마음대로

 휘두르는 데 일가견이 있는 여성이었다고 한다. 앙리 장송은 "이 새는 제자리에 얌전히 있지 않는다. 생텍스라는 거대한 곰,

그 큰 곰 위에 제멋대로 올라타곤 했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어린 왕자》에서 장미꽃과 사막여우의 일화는

생텍쥐페리와 그녀와의 관계를 나타낸다고 한다.


이후 몇 년간 그는 작품을 집필하면서도 이따금 비행 일을 했으며, 사고도 여러 번 당했다.

1932년에는 시범 운행 중 추락 사고를 겪었으며, 1935년에는 에어프랑스 소속으로 사이공에 갔다가 리비아 사막에

추락하여 5일 만에 구조되었다. 1938년에는 푸에고 섬 항로의 시험 비행을 하고 돌아오던 중에 과테말라에 불시착해

중상을 입었다. 그런 한편 〈파리 수아르〉 지의 해외 특파원으로도 활동했는데, 1935년에는 모스크바, 1937년에는

스페인 내전을 취재하기도 했다.


1939년 2월, 《인간의 대지》가 출간되었다. 이 작품은 출간 직후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아카데미 프랑세즈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그해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생텍쥐페리는 9월에 입대하여 이듬해까지 정찰비행대 소속으로 활약했다.

이 전쟁으로 기요메를 포함한 동료들이 모두 사망하면서 생텍쥐페리는 전쟁의 비극을 온몸으로 체험한다.

그는 "기요메가 죽었다. 오늘 저녁 내겐 더 이상 친구가 없는 듯하다."라고 당시의 절망적인 심경을 표현했다.

이 시기에 그는 《성채》를 쓰는 데 집중했는데, 농담 삼아 '유작'이라고 말하던 이 작품은 실제로 미완성

 유작으로 남는다.


1941년에는 전쟁 복무 경험을 토대로 《전투 조종사》를 집필했으며, 이 작품은 이듬해 《아라스 비행》이라는

제명으로미국에서도 거의 동시 출간되었다. 이 책은 출간 즉시 매진될 정도로 베스트셀러에 올랐으나,

작품 속 유대인 비행사 이스라엘에 대한 긍정적인 묘사가 문제가 되어 프랑스에서는 판매 중단 조치를 받았다.


1943년에는 《어느 인질에게 보내는 편지》와 《어린 왕자》가 출간되었다. 《어린 왕자》는 생텍쥐페리의

고뇌와 형이상학적 관념들이 집결된 작품으로, 그의 마음 깊은 곳에 품고 있던 어린 소년을 표현한 작품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어른을 위한 이 매혹적인 동화는 오늘날까지 160개국에서 번역 출간되었으며,

누적 판매부수가 1천억 부에 달하면서,

《성경》과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 다음으로 전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997년 프랑스에서 발행된 생텍쥐페리와 어린 왕자가 새겨진 지폐 

1997년 프랑스에서 발행된 생텍쥐페리와 어린 왕자가 새겨진 지폐





독일과 연합군의 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 생텍쥐페리는 3월에 연합군 진영에 합류하여 훈련을 받고 6월에 지휘관으로 임명되어

알제리로 갔다. 이듬해 5월 이탈리아 사르데냐 알게로에 주둔하던 233정찰대에 복귀하여 임무를 수행했고, 그해 7월 31일 마지막

정찰 비행을 떠나 실종되었다. 당시 시신도, 비행기의 잔해도 찾지 못했으며, 실종 자체에 대해서도 자살이거나 의도적 실종이라는

등 다양한 설이 대두되었다. 일각에서는 지상에 내려온 '어린 왕자'가 비행기를 타고 '자신의 별'로 돌아갔다고 말하기도 했다.

지난 2000년 프랑스 마르세유 근해에서 생텍쥐페리와 함께 실종되었던 P38 항공기의 잔해가 발견되었고, 2004년 추가로 수중에서

 잔해가 발견되면서 생텍쥐페리의 죽음은 공식적으로 확인되었다.



























































생택쥐페리와 형제들











































생텍주페리와 어머니







생텍쥐페리아 콘수엘로





































































































어린 왕자의 비행기를 발견하다



생텍쥐페리의 유품인 팔찌를 발견한 어부 장클로드 비앙코

생텍쥐페리의 유품인 팔찌를 발견한 어부 장클로드 비앙코


                                         



1998년 9월, 트롤 어선 로리종호의 선장 장클로드 비앙코는 프랑스 마르세유 근처 지중해에 그물을 내렸다. 얼마 후 선원들은

윈치로 그물을 감아올리면서 잡힌 물고기들을 분류하고 쓰레기들을 바닷속에 버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일등항해사 하비브

 베나머는 석회화된 검은색의 침전물 덩어리를 바다로 던지려다가 무언가가 은빛으로 빛나는 물체를 발견했다.

 그는 덩어리의 덮개를 해머로 두들겨 속에 있는 것을 꺼냈다.

그가 발견한 것은 팔찌였다. 그는 곧바로 선장에 보고했다. 팔찌를 받은 비앙코 선장은 긁히고 시커멓게 변해 있는 부분을

세제로 문질러 보았다. 팔찌에는 예상대로 글자가 나타났다. 대문자로 ‘ANTOINE DE SAINT-EXUPER Y(앙트완 드 생텍쥐페리)’

라고 적힌 글자와 함께 그 옆에는 ‘CONSUELO(콩수엘로)’라고 적혀 있었다. 콩수엘로는 생텍쥐페리의 아내 이름이다.

비앙코는 로리종호의 그물이 20세기 문학의 가장 큰 수수께끼 중 하나인 『어린 왕자』의 작가 생텍쥐페리가

 실종된 사건을 푸는 큰 열쇠를 건져 올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팔찌를 발견한 로리종호의 비앙코 선장은 다음날 마르세유에 있는 다이빙 회사 사장인 앙리 제르멩 드로즈에게

팔찌를 보여주었다. 해저에 가라앉은 파편을 주로 조사하는 드로즈는 생텍쥐페리가 탔던 비행기의 잔해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생텍쥐페리가 실종된 장소에서 건져 올린 항공기 잔해

생택쥐페리가 실종된 장소에서 건져 올린 항공기 잔해


               




그는 곧바로 탐사선 미니벡스호를 타고 로리종호가 그물을 내렸던 해역으로 가서 수중 음파탐지기, 케이블로 유도되는 로봇,

 2인용 미니 잠수함을 이용한 수색에 착수했다. 그러나 100제곱킬로미터의 해저를 뒤지는 중에도

비행기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가 생텍쥐페리의 비행기를 찾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언론에서는 보도에 열을 올렸다.

비행기 탐사가 답보하고 있을 때 마르세유의 전문 잠수부인 뤽 방렐이 등장한다. 그는 비앙코 선장이 팔찌를 발견했던 곳을

 잠수하면서 금속 잔해가 널려 있는 곳을 발견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는 자신이 금속을 발견했던 장소로 잠수하여

사진을 찍었고 미국의 전문가들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제367전투비행단의 P-38 조종사였던 잭 커티스는 그것이 P-38의 잔해임을 알려주었다. 커티스의 조언에 힘을 얻은

 방렐은 2년 동안 파편이 널려있는 곳으로 계속 잠수해서 잔해들의 사진을 찍었다. 항공기의 잔해는 충격으로

 폭발되었음을 증명하는 듯 넓은 지역에 파편이 흩어져 있었다.

작업은 매우 어렵고 오래 걸렸지만 그는 계속 자료를 모았고 2000년 5월 마르세유에 있는 수중유물관리국에

자신이 발견한 것을 신고했다. 그는 당시의 자료를 검토하여 당시에 P-38기 네 대가 추락했는데 그중 세 대는 이미

잔해가 확인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방렐이 발견한 파편들이야말로 생텍쥐페리의 항공기 파편일 가능성이 더 높아진 것이다.

그것을 증명하는 방법은 파편 중에서 아직 남아있을지 모르는 비행기의 일련번호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게 그렇게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프랑스에서는 아마추어 잠수부들이 바다에 수장된 고대 유물들을 건져서 판매하는 일이 많으므로

해저에서 인공물을 건져올리는 행위를 엄격히 규제했다. 더구나 관리들은 생텍쥐페리의 비행기에 대한 수색 작업을 반대했다.

한 기자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생텍쥐페리가 어린 왕자처럼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은 신성한 신화와 같은 것이다.

 많은 사람이 그런 신화를 굳이 깨뜨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생텍쥐페리의 비행기가 발견되었다는 사실이 워낙 큰 화제를 몰고 오자 수중유물관리국은 3년에 걸쳐 허락하지 않던

발굴 작업을 2003년에야 승인했다. 2003년 9월 드로즈는 방렐과 함께 미니벡스호를 몰고 리우 섬 근처에서 항공기의

 파편을 건져 올렸다. 항공기의 10퍼센트 가량을 건져낸 그들은 결국 그들은 생텍쥐페리가 몰았던 항공기의 고유번호

 2734가 뚜렷이 찍힌 숫자를 발견했다. 생텍쥐페리는 리우 섬에서 1킬로미터쯤 떨어진 지중해에 추락한 것이다.

비행기가 리우 섬 근처에 추락한 사실이 밝혀지자 왜 그곳에 추락했는가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었다. 많은 가설 중의

하나는 독일 전투기에 격추되었다는 것이었다. 이는 생텍쥐페리의 명예를 올리는 데 크게 이바지하므로 프랑스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답변이었다.

둘째는 엔진이 고장 나 베테랑 조종사인 생텍쥐페리도 어찌해볼 수 없이 추락했다는 것이고, 셋째는 당시 최신 비행기이므로

산소 공급 장치를 사용했는데 이것이 고장을 일으켜 기절했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이었다.

그러나 첫째 가설은 당시 독일 공군 기록에 1944년 7월 31일 P-38기를 격추했다는 문구가 발견되지 않았고, 발견된

파편에도 탄환 구멍이 나 있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인정받지 못했다. 둘째 가설도 부정되었다. P-38기는 엔진 하나만

온전해도 비행을 계속할 수 있는 첨단 비행기였다. 마지막으로 산소 공급 장치에 이상이 있었다 해도 베테랑 비행사인

생텍쥐페리가 낮은 고도로 내려왔다면 숨 쉴 공기가 충분히 있었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이후 잔해를 면밀히 검토한 학자들은 비행기가 엄청난 속도로 바다와 충돌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스테인리스 스틸은

구부러졌고 주름이 잡혀있었다. 이는 생텍쥐페리가 마지막 순간에도 엔진을 완전히 가동한 채 거의 수직 강하했음을 의미한다.

이들 증거를 종합해볼 때 유력한 가설은 생텍쥐페리가 항상 이야기했던 말, 즉 자살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프랑스인들이 씁쓸해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프랑스인의 사기를 한껏 올려주는 사건이 발생한다. 2008년 3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공군 메서슈미트

 전투기 조종사였던 호르스트 리페르트(당시 89세)가 프랑스의 한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이 생텍쥐페리가 타고 있던

 비행기를 격추했다고 고백했다. 1944년 7월 31일 당일 리페르트는 프랑스 남부 해상을 비행하고 있었는데,

 미국산 ‘P-38 라이트닝’을 발견하고 수차례 근접 공격하여 격추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안 찾아다녀도 된다. 내가 바로 생텍쥐페리의 비행기를 격추한 사람이다. 나중에야 바다에 떨어진 그 비행기에

생텍쥐페리가 타고 있었음을 알았다. 나는 제발 그가 아니길 바랐다. 우리 시대의 모든 젊은이가 그러했듯이

 나도 그의 책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리페르트의 주장에 신빙성이 없다는 말도 있지만 프랑스인으로서는 위안을 받기에 충분한 설명이었다.

 생텍쥐페리가 45세의 나이에도 비행기를 몰다가 전사했다는 사실은 그의 명예도 올리고

프랑스인들의 자존심도 높여주었기 때문이다.

이보다 앞서 생텍쥐페리의 명성을 높여준 일이 있었다. 타마라 미하일로프나 스미르노바가 1975년 11월 2일에

소행성대에서 발견한 소행성 ‘1975 VW3’을 ‘2578생텍쥐페리’로 명명한 것이다. 한편 『어린 왕자』에서

어린 왕자는 소행성 B-612에서 살고 있다. B-612는 실제로 존재하는 행성으로 ‘소행성 46610베시두즈’로 불린다.






생텍쥐페리 추모비 


생텍쥐페리 추모비



        








































































작품 속의 명문장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한 방향을 같이 바라보는 것이다.” - 『인간의 대지』


평생을 통해 수많은 시련을 경험한 생텍쥐페리는 공통된 목적으로 맺어진 인간 관계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역설한다.

그런 경우에는 그저 같이 호흡하고 있을 뿐인데도 ‘사랑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느낄 수 있다. 


  

“마음으로만 보이는 거야. 본질적인 것은 눈으로는 보이지 않게 마련이거든.” - 『어린 왕자』


『어린 왕자』에 등장하는 여우 한 마리가 어린 왕자에게 하는 말로, 작가가 가장 중심적인 사상으로 지니고 있던 ‘관계’의

의미를 시사하고 있다. 어린 왕자는 많은 장미꽃을 보았지만, 그것은 그가 자기 손으로 정성껏 키운 장미와는 다른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별에 있는 그의 장미만이 그가 물을 주고, 바람을 막아 주고, 벌레를 없애 준 것이기 때문이다.

‘본질적인 것’이란 바로 ‘관계’를 만드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물, 농부와 밭,

정원사와 정원, 친구, 조국, 문명 등 생텍쥐페리가 말하는 것의 중심에는 항상 ‘관계’의 그물이 있다.




















































































































































Kiss Of A Fairy - Banda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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