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미륵사지(益山彌勒寺址)
사적 제150호.
미륵사지는 마한(馬韓)의 옛 도읍지로 추정되기도 하는
금마면 용화산(龍華山) 남쪽 기슭에 자리 잡은, 한국 최대의 사찰지이다.
601년(백제 무왕 2)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며, 무왕(武王)과 선화공주(善花公主)의 설화로 유명한 사찰이다.
국보 제11호인 동양 최대 석탑인 미륵사지 서석탑과 보물 제236호인 미륵사지 당간지주가 있으며,
1974년 8월원광대학교에서 실시한 발굴조사 때 동탑지(東塔址)도 발견되었다.
건물지(建物址)는 백제와 고구려의 유구(遺構)가 복합되어 있다.
미륵사는 백제 제30대 무왕 때 창건된 것으로 보이는 백제 최대의 사찰로, 언제 없어지게 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조선시대에 들어 17세기경에 폐사(廢寺)된 뒤 서탑(西塔) 및 당간지주(幢竿支柱) 등의 일부 석물만 남았으며,
사역(寺域)은 경작지와 민가로 변하여 오늘날까지 내려왔다.1910년대 일본 학자가 조사한 가람배치(伽藍配置)에 의하면,
미륵사지는 탑과 금당(金堂)이 마련된 일탑식(一塔式) 가람이 ‘品’자 모양으로 3개가 합쳐져 만들어진 사찰로 추정되어 왔다.
그 뒤 1974년과 1975년 두 차례에 걸쳐 원광대학교(圓光大學校)가 동탑지(東塔址)를 조사하기도 하였으나,
전체적인 성격을 파악하기에는 미흡하였다.
발굴조사를 통해 이전까지 알려졌던 ‘品’자모양의 가람배치설은 맞지 않는다는 것이 확인되는 것과 동시에
사지의 전체적인 규모도 밝혀지고 2만여 점의 유물도 수습되었다.
금제사리봉영기(金製舍利鳳迎記)
금제사리봉영기 앞면.
금제사리봉영기는 가로 15.3cm, 세로 10.3cm, 두께 0.13cm로 앞면에 99자, 뒷면에 94자,
전체 193자의 글자들이 송곳 같이 뿆고한 도구로 새겨져 있다.
9,900여 점이나 되는 많은 유물 중에서 가장 큰 충격을 준 금제사리봉영기. 작고 얇은 금판에 193자의 글씨가 새겨져 있었는데, 백제 왕후인 사택적덕의 딸이 기해년 639년에 가람을 창건하여 국왕과 왕실의 안녕을 기원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 사리봉영기에는 연호가 보이지 않는다. 백제의 금석문이나 목간에는 연도를 나타낼 때 따로 연호를 쓰지 않고 ‘정해년’처럼 간지만 사용했다. 567년에 만들어진 부여 능산리사지의 사리감이나 577년에 만들어진 왕흥사지 사리기의 명문도 동일하다. 백제에서 이처럼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백제의 자주성을 드러내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이 명문에서는 부처님께 귀의한다는 내용보다 백제왕의 장수를 기원하는 내용이 더 강조되고 있다. ‘대왕폐하의 수명은 산악과 같이 견고하고, 치세는 천지와 함께 영구하기를’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백제의 현실적인 바람이 반영된 것이다. 639년은 무왕이 즉위한 지 40년이 되는 해로 그는 이미 연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기원과 달리 무왕은 2년 뒤에 타계하고 만다. 또 하나 사리봉영기는 백제 왕비에 관한 귀중한 정보를 담고 있다. 백제 왕비에 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은데 무왕의 왕비로 ‘사택적덕의 딸’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때문에 『삼국유사』에 기록된 서동과 선화공주의 로맨스가 허구에 지나지 않고, ‘선화공주는 없었다’는 견해가 나오기도 했다. 7세기 전반은 백제와 신라의 군사적인 대립이 격화되는 시기로 그러한 대치 국면에서 다른 나라의 공주가 왕비가 된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고, 삼국유사 등 후대의 기록보다는 백제 사람들이 남긴 1차 사료를 더 신뢰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미륵사의 발원자가 사택왕후라고 해서 곧 선화공주는 없다는 논리가 성립될 수는 없다. 무왕과 왕비의 무덤으로 알려진 익산 쌍릉에 관한 최근의 연구에서는 신라계로 볼 수 있는 토기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밝혀졌고, 왕비의 무덤으로 알려진 ‘소왕묘’가 사택왕후의 무덤이 아닌 제3의 인물의 무덤일 가능성이 제기되는 등 구체적인 반론들이 나오고 있다. 현재까지의 자료만으로 선화공주의 실존 여부를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지금 우리들이 정설이라고 믿고 있는 것들이 새로운 자료의 발견으로 언제든 뒤집힐 수 있다는 열린 자세가 역사 해석을 더 풍요롭게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병호(국립미륵사지유물전시관장) |
- 사리봉영기 원문 -
가만히 생각하건데,
법왕께서 세상에 출현하시어 근기에 따라 부감하시고
중생에 응하여 몸을 드러내신 것은 마치 물 가운데 비치는 달과 같았다.
이 때문에 왕궁에 의탁해 태어나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드셨는데
8곡의 사리를 남겨 삼천대천세계를 이익되게 하셨다.
마침내 찬란히 빛나는 오색(사리)으로 일곱 번을 돌게 하였으니 그 신통변화는 불가사의 하였다.
우리 백제 왕후는 좌평 사택적덕의 딸로서 오랜 세월 동안 선인(善因)을 심으시어
금생에 뛰어난 과보를 받으셨다. (왕후께서는) 만민을 어루만져 기르시고 삼보의 동량이 되셨다.
때문에 삼가 깨끗한 제물을 희사하여 가람을 세우고, 기해년(639) 정월 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맞이하셨다.
원하옵건데, 세세토록 공양하여 영원토록 다함이 없어서
이 선근(善根)으로 우러러 대왕폐하의 수명은 산악과 나란히 견고하고 왕위는 천지와 함께 영구하여,
위로는 정법을 크게 하고 아래로는 창생을 교화하는데 도움이 되게 하소서.
다시 원하옵건데 나아가서는 마음은 수경같아서 법계를 항상 밝게 비추시고
몸은 금강과 같아서 허공과 같이 불멸하시어 칠세를 영원토록 다 함께 복리를 받고
모든 중생들이 불도를 이루게 하소서.
심주석 내 유리구슬
작은 금판
은제관꾸미개
진주구슬
청동합내 출토품
금동제사리외호 내 유리구슬류
사리호
목간과 벼루
시루
금동향로
청동 보살손
귀면와
이미테이션 동탑
3원 가람으로 구성된 미륵사는 중원에 목탑을 동·서원에 각각 석탑을 건립하였는데, 목탑과 동원의 석탑은
완전히 결실된 후 동원 석탑만 복원되었다. 서원의 석탑은 일부 결실부분이 많지만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석탑 가운데
최대 규모이며 가장 오래된 탑이다. 특히 탑 전체의 부재를 마치 목재처럼 다듬어 하나하나씩 결구했는데, 이를 통해
목탑의 구조를 완벽히 석탑으로 구현했다. 한편 미륵사지 발굴결과 동탑과 서탑의 남측에서 길이 820㎝, 동서 길이 603㎝의
‘H’자형 석렬구조가 발견되었다. 이 시설은 적심시설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석재를 올리기 위한 임시구조로
『화성성역의궤』에 나타난 녹로(轆轤)와 유사한 거중기 시설이었음이 밝혀져
탑 건립과정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잠시 후 맞은편에 보이는 미륵산 사자암에 오르게 된다.
미륵사지 당간
미륵사지 석탑
국보 제11호.
『삼국유사』에 따르면, 미륵사는 백제 무왕대에 미륵삼존을 모시기 위하여 창건된 사찰로, 규모로는
백제 최대 사찰에 속한다. 석탑 역시 이때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성덕왕조에 “미륵사에 벼락이 떨어졌다”는 기록이 있고, 『조선불교총보』에 실린 고려시대 초
혜거국사의 비문에 후백제 견훤대인 922년에 “견훤이 미륵사탑의 개탑(開塔)을 계기로 선운사 선불장에
참석하여 설법할 때 하늘에서 꽃이 내렸다”는 기록이 있어 백제 패망 이후에도 여러 차례 탑의 수리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도 문신 소세양(蘇世讓)의 『양곡집(陽谷集)』이나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기록이 나와 있다. 특히 조선후기 영조 때 강후진(康候晋)의 『와유록(臥遊錄)』에 탑의 붕괴에 대하여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조선시대에 이미 상당 부분의 훼손이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1913년 세키노 다다시[關野貞]와 다니이 세이치[谷井濟一]에 의해 탑의 촬영과 실측조사가 실시된 후
1915년 시멘트 모르타르로 보수되었다. 2000년부터 본격적인 해체수리가 이루어졌으며 2009년
초층 탑신 내부 심주에서 사리장엄구를 발견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탑은 동북쪽을 중심으로 절반가량이 남아 있고 나머지는 유실되었다.
탑의 재질은 화강암으로 기단부와 탑신부가 남아 있으나 많은 부분이 훼손되어 탑신은 동북측으로 6층까지 남아 있다.
기단부는 이중기단으로 되어 있는데, 지대석과 면석, 갑석으로이루어진 가구식 기단이다.
탑신은 현재 6층까지만 남아 있는데 각 부분을 수매의 돌로 짜 맞추어 마치 목조건축의 결구를 연상시킨다.
초층 탑신은 초석을 놓고 민흘림(엔타시스)이 뚜렷한 기둥으로 각 면 3칸을 나누었는데, 목조건축과 같이 그 내부를 벽체처럼
구성하였다. 초석과 초석 사이에는 고막이석과 하인방을 놓았고 기둥과 기둥 상부에는 창방(昌防)과 평방(平枋)을 두었다.
초층 탑신 중앙에는 사방으로 내부로 들어갈 수 있는 출입구를 두었는데, 내부 중앙에는 거대한 사각기둥으로 심주를 두었다.
2층 이상의 탑신부도 구조에 있어 1층과 비슷한 구조를 보이고 있다. 옥개석은 여러 매의 판석으로 결구되었는데,
처마는 비교적 얇은 편이며 모서리에서 살짝 반전한다. 모서리에는 상하로 원공이 있어 풍경을 매달았던 것으로 보인다.
옥개석 아래로는 3단의 층급받침을 두었는데, 5층부터는 4단으로 늘어난다. 옥개석의 상단에는 1층과 2층은
1단, 3층부터는 2단의 받침을 두어 상층 탑신부를 받치고 있다.
이 석탑은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탑이며 동시에 가장 큰 규모의 탑이다.
양식상 목탑에서 석탑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충실히 보여주는 한국 석탑의 시원(始原)으로 평가 받는 기념비적인 석탑이다.
특히 석탑 내부 심초석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를 통해 백제시대의 사리봉안 방식이나 탑 건립에 따른 의식,
발원자와 발원 동기 등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와 의의는 매우 크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미륵산 사자암
백제의 고찰인 사자사는 미륵산 정상부 능선자락에서 탁 트인 앞을 내다보는 천혜의 절경에 자리잡고 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익산 미륵사지’로 유명한 미륵사가 이곳 미륵산 기슭에 창건되기 이전부터 사자사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고 한다. 사자사는 말법의 시대에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출현하는미륵처럼, 백제 쇠퇴기에
백제의 부흥을 꿈꾸던 무왕(武王)의 근거지로 서동요(薯童謠)의 주무대이기도 하다.
사자사 오름길 암벽에 새겨진 각자
사자암에서 조망한 익산시 일대.
사자사는 미륵사와 함께 백제시대에 창건된 이래 조선 초기까지 사세를 유지해왔음이
1993년에 발굴조사된 유물들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통일신라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출토유물에는
기와와 토기를 비롯하여 도자기, 불상 및 금속류, 목재 등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현재의 사자사는 발굴조사 이후 대웅전과 삼성각 등 2동의 건물을 새로 지은 뒤
계속해서 가람이 재정비되고 있는 상태로 보인다.
사자사를 찾아 심송(心誦)을 외는 '천도교 수도회' 사람들.
포덕 25년(1884년) 해월 최시형 신사께서
관의 지목(指目)이 심해지자 이 곳 익산군 미륵산 사자암(獅子庵)에 4개월간 은신해 있었다,
해월 최시형
평리원 재판장 조병직에 의해 '좌도난정'이라는 죄목으로 교수형 선고를 받고 일흔두 살의
파란만장 삶은 마감한 '사인여천'의 대부 최시형 선생.
해월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현장에 동학농민혁명의 단초를 제공한 조병갑이 있었다는 사실.
민비에게 뇌물을 주고 고부 현감에 올라 수탈의 대명사가 되었던 그가 어느새 법복을 입고
동학혁명을 심판하게 된 가슴 아픈 역사의 아이러니...
'최보따리'는 해월 최시형(崔時亨, 1827~1898) 선생이
끝없는 잠행과 도피 과정을 거치며 보따리를 자주 싸게된데서 붙게된 별칭
해월신사의 발자취를 찾아나선 천도교 수도회 일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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