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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탐매

정유탐매(丁酉探梅) 4편


정유탐매(丁酉探梅) 3



 송덕매(德梅) / 취백매(翠白梅) /도암매(道岩梅)  



2017. 3. 26


고창 무장읍성(茂長邑城)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35호)


사적 제346호. 지정면적 182,596㎡. 고려시대까지 무송()과 장사()의 두 고을을 합하여

 무장이라 이름짓고 효과적인 고을의 방어를 위해 승려와 장정을 동원 1417년(태종 17) 성을 축조하였다고.






 둘레 1,470척(), 높이 7척의 성벽을 쌓고, 성 위에 높이 1척짜리 여장( : 성위에 낮게 쌓은 담) 471개를

만들고, 옹성( : 성문의 앞을 가리어 적으로부터 방어하는 작은 성)을 갖춘 남문과 동·북문을 세웠다.








진무루()

무장읍성의 남문으로 근래에 옛 모습으로 복원을 마친 모습.


성벽 밖으로는 둘레 2,127척의 해자( : 성 밖으로 둘러 판 못)를 파서 견고히 하고, 병마사가

현감을 겸직하는 진()을 베풀었던 곳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둘레가 2,639척이라 하였다.

성안에는 뱀의 두 눈처럼 생긴 지형에 두 곳의 샘을 마련하였다고도 한다.




 


성안에는 옛 고을의 풍모를 알 수 있는 객사와 동헌이 있는데,

객사는 송사지관(沙之)이라 하여  옛 무송·장사의 끝자를 따서 이름지었다고.

성안에는 조선시대의 각종 건물터와 사직단·여단()·성황단 등의 터전이 그대로 남아 있다.








조선시대의 읍성으로는 그 유례를 보기 어려운 확실한 연혁을 가지고 있어

학술적·역사적 중요성이 매우 크다. 성안의 중요한 건물들은 별도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무장읍성비석군

객사 왼편에 한 줄로 세워져 있다. 

형태는 갓석이 올려진 것도 있고, 조각 형태로 되어 있는 것도 있다.


  철비로 된 ‘전참봉 김영곤 선행불망비’가 있고,

 그 옆으로 ‘행군수 이창익 청덕영세불망비’, ‘현감 최효용 청덕선정비’, ‘현감 정권영 영세불망비’,

 ‘군수 이희하 청덕애민선정비’, ‘현감 오섬 청덕선정비’, ‘어사 심상학 만세불망비’, ‘이교인 선정비’,

 ‘현감 이수현 청덕선정비’, ‘현감 임득렬 청백비’, ‘현감 유진오 영세불망비’,

 ‘행현감 이찬하 애민선정비’, ‘김상운 시혜불망비’가 있다.







송덕매((德梅) 

비석군 중간 부분 뒷편에 선 백매로 주변의 큰 나무 그늘에서 고군분투 생을 이어왔으나

태풍에 가지가 부러지고 종래엔 몸통이 베어져 나가 예전의 모습은 찾을길 없다.

남아있는 근원부(根源部)의 직경을 보면 한 자가 훨씬 넘어 보이는데 썩고, 쫄아들고

버혀지는 과정등을 거친 결과가 현재의 모습이다.








지난 2000년 송덕매의 모습.







2014년 태풍으로 왼편 줄기 하나가 부러져 나가더니만

1015년 급기야는 몸통까지 잘려 나가버렸다.






잘려진 몸통에서 새 가지가 여럿 나와 꽃송이가 어지럽게 피어났다.







무장읍성의 객사 송사지관(松沙之館)

일제 때부터 무장초등학교와 면사무소 등으로 쓰이다가 언제부터인가

예전의 읍성 모습으로 복원이 진행 중이다.






취백당(堂)

무장읍성의 '동헌' 건물이다. 예전 이 건물 앞쪽으로 초등학교가 들어서 있었다.






취백매(白梅)

무장읍성 복원으로 우여곡절을 겪어낸 2017년의 '취백매'의 모습.

 





배롱나무, 단풍나무와 함께 손바닥만한 구역 한켠에 서서 고단한 삶을 이어가느라 고사 직전이다.

상당 부분 줄기와 가지가 말라버렸는지라 언제 생의 끈을 놓을지 안타깝기만 하다.







5엽 청매로 고태미가 물씬 풍기는 무장읍성의 대표격 수종인데

이젠 이 모습도 몇 년 후면 보기 어려울 게 분명해 보인다.






마지막 힘을 다해 피워올린 몇 송이 청매.















부디 올해가 마지막이 아니길 '취백매' 前에 빌고 또 소원해 본다.







 취백송(翠白松)

읍성 뒷편 담장가에 독야청청 홀로 선 '취백송'





가지 하나의 휨새가 거의 아크로바틱 수준.







자연적으로 이런 형태의 가지 휨새를 보이는 국내 유일의 소나무 아닌가 싶다.







 물총새 취(翠) 자에서 물총새의 부리를 떠올린다면 이해가 가지 않을까....?







객사 구역을 오르는 돌계단 소맷돌에 새겨진 호랑이 부조(왼편).







오른편의 부조.








도암서원(道巖書院)

- 고창군 공음면 칠암리 갑촌마을 소재 -


도암서원은 안동김씨의 서원으로

 1613년(광해군 5)에 김질()의 효성과 학문을 기려 그의 집터에 창건하였다.

이후 1835년(헌종 1)에는 정유재란과 이괄의 난 때에 의병을 일으킨 증손 김경철()을 배향하였으며,

 1857년에는 김경철의 아우로 임진왜란 때에 왕을 호종하였으며, 병자호란 때에 의병을 일으킨

김익철()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도암매(道岩梅)





개화가 시작되고 있는 도암매.























몸통 경사면 뒷편에 예전엔 볼 수 없었던 구멍이 생겼다.

아마도 딱따구리가 뚫어놓은 것으로 보이는데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 몰라도

충전재를 채워 더 이상의 목질부 손상을 막아야 할텐데...






이 고매(古梅)를 찾아내어 처음 세상에 알릴때의 가슴 설렘이 지금도 생생하기만...







태풍으로 인해 줄기 윗 부분이 부러져 나가기 전의 모습도 소개한 바 있다.
















며칠 뒤 한 번 더 찾을 생각이다.








김질은 조선 전기의 학자로 본관은 안동이며, 자는 문소(), 호는 영모당()이다.

천성이 온순 단정하며, 효심이 지극하여 양친을 지성으로 모셨다.

1508년(중종 3) 모친상을 당하여 여막()에 있는데, 밤 사이에 한 길이 넘는 눈이 내렸으나

여막 둘레에만 내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그곳을 제청산()이라 불렀다.







'도암매' 바로 옆에 서서 세력을 키워가던 은행나무는 사라졌지만 주변의 나무들도

좀 더 정리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수 년 전부터 탐매에 열정을 쏟아오신 이 남 교수님과 함께

'도암매'를 찾아 온 것.







도암서원에 배향된 김질은 조정 및 중국에 잘 알려진 대효()일 뿐만 아니라

충()을 겸하여, 녹권을 보관한 봉안각이 세워졌다. 그 외 영모당, 정려, 봉안각 등의 건물등이 있다.









인촌(仁村) 김성수 생가

- 전라북도 기념물 제39호 -








 안채, 사랑채·곳간 등 여러 채의 건물로 이루어져, 호남 토호의 집 규모를 보여준다.
1907년 그의 일가는 당시 이 고장을 휩쓸던 화적의 행패와 귀화의 출몰로 현 부안군 줄포면 줄포리로 이사하였다.

이 집은 마을 사람에게 맡겨 보존해오다가, 1977년 김성수의 동생 수당 김연수(:1896~1979)가

옛 모습 그대로 보수함과 동시에 복원하였다.

인촌 김성수(:1891~1955)가 1891년 작은집 안채에서 출생하였다고.






짙은 '청매향'에 휩싸인 일포 선생님 댁.







해질녘의 청매향을 가슴에 끌어 안고....







'삼지닥나무'의 고아한 자태.















탐매 일정의 마무리는 홍탁삼합.








담 날 새벽, 묵방매향(默芳梅香)으로 샤워를 마치고....








열린교구 성화실에 좌정하신 일포장님과 청암장님.








 빗방울을 매단 청매향을 뒤로 하고 귀로에....










Quilt - Daniel Kobial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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