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교 수도회 제3차 수련
(1편)
장소 : 강릉 수도원
일시 : 포덕 157년 6월 24일 ~ 27일
7월 24일 오후 5시 강릉 수도원 도착
수도원 옥상에서 바라본 강릉 시내 일원
도착 심고와 담소
저녁 기도식
수도원 앞 남산공원에 자리한 오성정
수도원 앞마당 격인 남산공원 산책코스
오죽헌
문성사
오죽헌 구역내 율곡의 영정을 모신 사당.
오죽헌 (보물 제165호)
이 건물은 1452년(문종 2)에 등제하여 대사헌까지 지낸 최응현(崔應賢)의 고택에 딸린 별당으로,
1536년(중종 31) 이이가 태어난 유서 깊은 곳이다. 평면구조는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된 일자집이며
대청·온돌방·툇마루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이가 태어난 방은 몽룡실(夢龍室)이라고 한다.
율곡매(栗谷梅)
나라 안 네 그루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매화 중 하나로
2007년 10월 8일에 천연기념물 제484호로 지정되었다.
오죽헌이 들어설 당시인 1400년경 이 매화나무도 같이 심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과 율곡(栗谷)이 직접 가꾸었다고 전해진다.
신사임당은 고매(古梅)에 대한 추억을 살려 고매도(古梅圖), 묵매도(墨梅圖) 등
여러 매화 그림을 그렸고, 맏딸의 이름도 매창(梅窓)으로 지을 만큼 매화를 사랑했다고 전한다.
연분홍 색감의 홍매(紅梅)를 피워내며, 매실의 크기가 거의 살구만 하다.
이파리도 토종 매화 보다 크며, 목질부의 형태도 상당히 다름을 볼 수 있다.
개인적인 생각으론 이 '율곡매'는 중국에서 들여온 당매(唐梅)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본다.
오죽헌 건물 뒷편에 자라는 오죽(烏竹)
오죽헌 사랑채
단종 때 병조참판과 대사헌을 지낸 최응현(崔應賢, 1428∼1507) 고택이라고 불리는 점으로 미루어,
적어도 15세기 후반에는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전기의 결혼제도는 서유부가혼(壻有婦家婚)으로
남자가 결혼을 하면 부인의 집이나 그 근처에 살고 처가의 재산을 물려받는 풍습이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최응현의 집은 그의 사위이자 신사임당의 외조부였던 이사온(李思溫)에게 물려지게 되었다.
이사온과 같이 살던 사위 신명화(申命和)에게는 딸이 둘 있었는데, 첫째 딸인 신사임당은
덕수이씨 집안의 이원수와 결혼을 하였고, 둘째 딸은 안동권씨 집안의 아들과 결혼을 하였다.
이사온의 집을 물려받은 신명화의 부인 용인이씨는 외손인 이이와 권처균(權處均)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었는데, 그 중 오죽헌이 속해 있는 고택은 묘지를 관리하는 조건으로 권처균에게 분재되었다.
이때부터 이 고택의 소유권은 안동권씨 집안의 후손들에게 물려졌다.
기둥의 주련글씨는 추사 김정희가 쓴 것으로
정면 앞기둥에 4개, 뒤에 3개, 측면에 3개로 총 10개가 걸려있다.
주련의 내용은 명나라 진계유(陳繼儒, 1556~1639)의 암서유사(巖棲幽事)이다.
客過草堂,叩餘岩棲之事,余倦於酬答,但拈古人詩句以應之。
객이 초당을 지나다 바위산에 사는 일에 관해 나에게 묻길래
내가 답하기 싫증나 그냥 고인의 시구를 가지고 응답했다.
사랑채 내부에 걸린 서예 작품 들.
이이의 사상과 학문은 사계 김장생(金長生)을 거쳐
김집, 안방준, 우암 송시열-수암 권상하-한원진-(韓元震) 등서인 노론으로도 이어졌고,
우계 성혼의 문인들과 결속한 사계 김장생(金長生)과 김집의 또다른 문하생 일부
윤황과 윤선거 등을 통해 서인 소론에게도 계승되었다.
율곡의 학문 즉 성리설의 특징은 논리적이다.반면에 퇴계는 체험을 중시한 것이었다.
이이는 학문에 대하여 실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학문을 참된 학문이라고 규정하였다.
아무리 훌륭하고 고결한 이론이라고 해도 현실에 적용이 불가능하다면 이는 헛된 공리공담이라는 것.
그러나 그의 후배인 서인은 그의 실용사상을 사장시키고 관념적이고 교조적으로 나아가
결국에는 당쟁을 격화시키고 만다.
이이는 유교나 성리학의 남녀 차별에 반대하였다.
여성 역시 하나의 인간이자 인격체로 간주하였고, 여성에게도 유교와 성리학을 가르쳐
인의예지와 도덕적 소양을 가르쳐야 된다고 확신했다. 그의 이런 사상은 집안의 여성들에게
사서삼경을 직접 가르치는 것으로도 나타났다.
그는 어머니 신사임당의 영향을 받았는데,
이는 딸들에게도 유교와 성리학을 가르쳤던 외할아버지 신명화의 영향력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러 명의 첩을 거느리는 그의 이중적인 행태에는 할 말을 잊는다.
율곡의 사상은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로 대표되며퇴계의 사단칠정(四端七情)설로서
이기호발설을 배격하였다. 그가 23세 때 지은 《천도책(天道策)》에 이미 그 바탕이 드러나 있다.
즉 율곡은 이황이 기(氣)와 이(理)는 서로 독립되어 있다는 데 이설(異說)을 제기하여
우주의 본체는 이기이원(理氣二元)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은 인정하나
이와 기는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분리되거나 선후(先後)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따라서 이와 기는 최초부터 동시에 존재하며 영원무궁하게
떨어질 수 없는 것이어서 이는 조리(條理), 즉 당연의 법칙으로 우주의 체(體)요, 기는 그 조리를 구체화하는
활동이니 우주의 용(用)이라 주장하였다. 즉 이황의 설은 호발설이고 이이는 일도설이었다. 하지만 이황의
칠정설인 기발이승설만을 취한 것이다. 반면에 그의 사단설인 이발기수(理發氣隨)설을 비판하였다.
또한 그것은 이황과 사단칠정설논쟁을 벌인 고봉 기대승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또한 서경덕에 대해서도 기중심의 설로서 독창적이지만 문제가 있다며 비판한다.
그의 설은 기가 운동하고 이는 그 원인이 된다는 설에 근거한 것이다.
그는 자기의 주장을 발전시키면서 이 주장이 주자의 뜻과 어긋나면
주자가 잘못 된 것이라고까지 하는 자신을 얻게 된 것이다.
-백과사전에서 발췌 정리한 내용-
어제각
처음으로 수도회에 참여하신 화성당 김정화 동덕님
오죽헌 시립박물관에 전시된 신사임당의 초충도(草蟲圖 )
신사임당의 초충도 8곡병
이 작품은 나비·벌·매미·방아깨비·메뚜기·잠자리·하늘소 등과 같은 곤충이 패랭이꽃·맨드라미·
나팔꽃 등의 식물과 단촐한 구도를 이루며 어우러진 것으로, 신사임당 특유의 섬세한
필치와 단정한 채색이 돋보이는 작품.
- 신사임당 : 내가 죽은 뒤에 당신은 다시 장가를 들지 마시오. 우리에게 이미 아들 다섯, 딸 셋, 8남매의 자녀가
- 있는데, 다른 자식이 필요하며 또 다시 무슨 자식을 더 두어 예기에 가르친 훈계를 어길 수가 있겠소?
- 이원수 : 공자가 아내를 내보낸 것은 무슨 예법에 합하는 것이오?
- 신사임당 : 공자가 노나라 소공 때 난리를 만나 제나라 이계라는 곳으로 피난을 갔는데, 그 부인이 따라가지 않고 바로
- 송나라로 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자가 그 부인과 다시 동거를 하지 아니했을 뿐 아주 내쫓았다는 기록은 없소.
- 이원수 : 공자가 아내를 내친 기록이 없다? 그러면 증자가 부인을 내쫓은 것은 무슨 까닭이오?
- 신사임당 : 증자의 부친이 찐 배를 좋아했는데 그 부인이 배를 잘못 쪄서 부모 봉양하는 도리에 어긋남이 있었기 때문에
- 부득이 내쫓은 것입니다. 그러나 증자도 한 번 혼인한 예의를 존중하여 다시 새 장가를 들지는 아니한 것입니다.
- 이원수 : 주자의 집안 예법에는 이같은 일이 있지 않소?
- 신사임당 : 주자가 47세 때 부인 우씨가 죽고 맏아들 숙은 아직 장가를 들지 않아 살림할 사람이 없었지만
- 다시 장가를 들지는 않았습니다.
위는 <동계만록>에 적혀 있는 신사임당과 그의 남편 이원수의 대화이다.
신사임당은 남편이 다른 여자와 결합하는 것을 몹시 꺼려했고, 자신이 죽은 후에도 남편이 재혼하지 말 것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신사임당은 예법과 자녀 교육을 들어 남편의 재혼이나 외도를 강력히 거부하고 있지만,
결국 현실은 그녀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신사임당의 남편 이원수는 주막집 여인 권씨를 만나 딴살림을 차렸고,
신사임당 사후에는 그녀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남편의 첩이지만 자유분방했고 술주정까지 심한 권씨를
사임당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경포대(鏡浦臺)
정면 5칸, 측면 5칸의 팔작지붕건물.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6호.
1326년(충숙왕 13) 강원도 존무사(存撫使) 박숙정(朴淑貞)에 의하여 신라 사선(四仙)이 놀던
방해정 뒷산 인월사(印月寺) 터에 창건되었으며, 1508년(중종 3) 강릉부사 한급(韓汲)이
지금의 자리에 옮겨지었다고.
송강이 관동별곡(關東別曲)에서 경포대를 관동팔경중 으뜸으로 쳤다는 사실.
하늘, 바다, 호수, 술잔 그리고 님의 눈동자까지 합쳐
물경 다섯개의 빈대떡 같은 달이 뜬다는데....
유한지(兪漢芝)가 쓴 ‘第一江山’
‘第一’과 ‘江山’의 필체가 확연히 다르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경포대와 팔선녀 그리고 두 분의 마당쇠
思 親
어머니를 그리며 (신사임당)
千里家山萬疊峰
산 첩첩 내고향 여기서 천 리
歸心長在夢魂中
꿈 속에서도 오로지 고향 생각 뿐
寒松亭畔孤輪月
한송정 언덕위에 외로히 뜬 달
鏡浦臺前一陣風
경포대 앞에는 한 줄기 바람
沙上白鷺恒聚山
갈매기는 모래톱에 헤어졌다 모이고
波頭漁艇各西東
고깃배는 바다 위를 오고 가겠지
何時重踏臨瀛路
언제쯤 강릉길 다시 밟아가
更着斑衣膝下縫
어머니 곁에 앉아 바느질 할꼬
경포해수욕장
허균, 허난설헌 기념공원의 '초희전통차체험관'
허난설헌 생가터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학산(鶴山)·성소(惺所)·백월거사(白月居士).
아버지는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으로서 학자·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던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엽(曄)이다.
어머니는 강릉 김씨(江陵金氏)로서 예조판서 광철(光轍)의 딸이다.
임진왜란 직전 일본통신사의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성(筬)이 이복형이다.
문장으로 이름 높았던 봉(篈)과 난설헌(蘭雪軒)과 형제이다.
허균이 금산 군수에게 보낸 편지
관직과 파직 그리고 산천경개 유람과 기생 계생(桂生)과 촌은 유희경(柳希慶)과도 교분.
'홍길동전'의 저자 그리고 끝내는 능지처참으로 생을 마감한 교산 허균. 한때 이론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그보다 18년 아래인 이식(李植)이 지은 『택당집(澤堂集)』의 기록을 뒤엎을 만한 근거가 없는 이상
그를 「홍길동전」의 작가로 봐야 한다는 게 대체적인 평.
허균은 예교(禮敎)에만 얽매어 있던 당시 사회상에서 이단시할 만큼 다각문화에 대한 이해를
가졌던 인물이며, 편협한 자기만의 시각에서 벗어나 핍박받는 하층민의 입장에서
정치와 학문에 대한 입장을 피력해 나간 시대의 선각자였다.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 ~ 1589년 3월 19일)
1606년(선조 39) 허난설헌이 별세한 후 18년 뒤에 최초로 중국에서 간행되었다.
허난설헌의 작품은 상당히 많았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임종 때 그의 유언에 따라 모두 소각되었다.
다행히 동생 허균(許筠)이 친정에 보관되어 있던 작품들을 편집,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양유년(梁有年)
에게 보여 출간하게 함으로써 처음으로 중국의 문사들에게 허난설헌의 시가 소개되었으며,
≪열조시집 列朝詩集≫·≪명시종 明詩綜≫ 등에도 허난설헌의 작품이 수록되었다.
앙간비금도(仰看飛禽圖)와 난설헌의 친필
난설헌은 1589년(선조 22년) 3월 19일 한성 자택에서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남동생 허균은 그를 그리워하며 추모하는 시 한수를 남겼는데.
//
옥(玉)이 깨지고 별이 떨어지니 그대의 한 평생 불행하였다.
하늘이 줄 때에는 재색을 넘치게 하였으면서도
어찌 그토록 가혹하게 벌주고, 속히 빼앗아 가는가?
거문고는 멀리 든 채 켜지도 못하고
좋은 음식 있어도 맛보지 못하였네
난설헌의 침실은 고독만이 넘치고
난초도 싹이 났건만 서리 맞아 꺾였네
하늘로 돌아가 편히 쉬기를
뜬 세상 한순간 왔던 것이 슬프기만 하다.
홀연히 왔다가 바람처럼 떠나가니
한 세월 오랫동안 머물지 못했구나
//
강릉의 대표음식 초당 순두부 맛기행.
★ 2편으로 이어집니다.
'영성 > 동학 천도의 세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삼천포 교구 방문 (0) | 2016.07.04 |
---|---|
천도교 수도회 제3차 수련 (2편) (0) | 2016.06.29 |
international 하는님들의 출동 (0) | 2016.06.21 |
제2회 방정환 이야기마당 (0) | 2016.05.27 |
장흥동학농민혁명 (0) | 2016.05.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