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5. 12
장흥동학농민혁명 기념관에서
일포 이우원 선도사 님/ 정심당 변주원님 / 청해 오재벽님
- 동학농민군 최후의 전투지 장흥 석대 -
일주일 가량 계속된 우금치 전투에서 숫자상으로는 훨씬 많았던 농민군이지만
최신 무기의 일본군에게 물경 1만 여명의 희생자를 내게 되었다. 남으로 쫓겨 내려온
농민군이 도착한 곳은 광주. 하지만 광주의 가장 큰 세력이었던 손화중은 마침내 농민군의 해산을
명령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데, 남은 농민군이최후로 모여들 수 밖에 없었던 곳이
다름 아닌 장흥의 석대였던 것이다.
우금치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던 장흥의 이방언은 용산면 도르뫼 들판에서 농민군을 훈련시키고 있었고,
이사경은 용반리 앞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병영성의 우후를 불러다 징치하고, 탐관오리와 횡포한 부호의
죄상을 별하곤 하였고 이인환은 대덕을 중심으로 이미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었던 터.
이전 동학 지도부는 대부분 피신해 있거나 관군에 잡혔지만 장흥으로 몰려든 농민군은 회령진성을 함락.
이어 벽사역까지 점령하게 된다. 그리고 농민군은 전라남도 최대의 군사기지 병영성까지 점령한다.
마침내 농민군과 조일연합군이 장흥 석대에서 맞붙게 된다.
3만여 명의 농민군과 650명의 일본군이 싸웠지만 무기의 열세를 극복치 못하여 약 2,000명 내외의
희생자를 내고 만다. 이후에도 크고 작은 여러 싸움이 벌어졌지만 동학농민군 최후의 전투는
이곳 장흥 석대 전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전시관 로비에 걸린 작가 박진화님의
사인여천(事人如天 - 무량화(無量花) 규격 600 ※ 270cm. 2014년작 유화
장흥 군청 이대흠님(좌)께서 안내와 해설을 맡아 주셨습니다.
- 장흥동학농민혁명 기포와 전개과정 -
1. 장흥 1차 기포
갑오년(1894) 정월 초사흘 동학농민군이 고부성을 점령한 후 무장에서 기포하자, 장흥에서는 4월 18일
이방언. 이인환. 강봉수 접주 등이 1천여 명을 이끌고 동학농민군 본영인 백산(전북 부안 백산면)으로
출발한 것이 1차 기포에 해당된다. 이방언 접주를 비촛한 장흥 농민군이 동학혁명사에 뚜렸이 주목받는
장성 황룡강을 사이에 두고 관군과 결전을 벌였다. 당시 이방언은 미리 준비한 '장태'를 활용하여 관군을
공격하였다. 관군은 전혀 예상치 못한 농민군의 기습과 신무기 '장태'로 인하여 크게 패하였다. '장태'란
닭을 가두기 위해 사용하는 닭우리인데 대로 만든 것이었다. 이를 활용하여 만든 '장태'는 이방언이 고안한
것으로, 이를 계기로 '장태장군'이란 별호를 얻었다. 황룡강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의 승리는 4월 27일
전주성 점령에 절대적 요인이 되었다.
2. 전주화약과 집강소
1894년 음력 4월 27일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전주성을 함락했다. 동학농민군이 서울로 진격할
기미를 보이자, 무능한 정부 관료들은 청군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로 인해 일본군까지 국내로 들어오자
전봉준은 전주성에 집결한 농민군을 해산해서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 패정개혁을 추진하기로 합의한 것.
자진 해산한 동학농민군은 각기 고향올 돌아가 집강소를 설치했다. 전라도에서는 나주와 운봉을 제외한
모든 군현에 집강소가 설치되었는데, 장흥의 경우 1894년 6월 이사경 대접주의 근거지인 자라번지
집강소가 처음으로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이 외에도 장흥의 남상면, 고읍면, 대흥면 등에도 집강소가
설치 되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3. 장흥 2차 기포
한반도에서 청일전쟁을 자행한 일본이 경복궁을 불버적으로 점령하여 친일정권을 수립시키고 내정을 간섭하자
전봉준은 일본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2차 봉기를 선언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장흥지역에서도 대접주 이방언이
5천명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2차 봉기에 가담하였다. 한편, 이 틈을 노린 장흥도호부. 강진 병영. 벽사역 등의
수성군은 장흥 지역에 잔류한 농민군과 동학교인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이 소식을 접한 금구 대접주 김방서가
상당수의 농민군을 이끌고 장흥 외곽인 흑석장터(현, 장평면 봉림리)까지 진출하여 수성군의 공격에 대비한 바 있다.
4. 장흥 현지기포
공주 우금치전투에서 대패한 전봉준이 지휘한 농민군은 11월 25일 금구 원평, 11월 27일 태인전투에서
다시 패함으로써 재기불능의 상태에 빠졌다. 이러한 소식을 전해들은 장흥지역의 동학농민군이 대회전에
나서기 위해 세력을 규합하였다. 11월 25일에는 이인환이 대흥면에서 기포하여 회진의 회령진에 무혈 입성.
이들은 무기와 식량을 확보한 후 고읍면과 남면을 거쳐 11월 27일경 구교철의 농민군과 합세하였다.
- 장흥 동학의 주요 인물 -
이방언(李芳彦, 1838~1895)
대접주. 장흥군 용산면 묵촌리 生. 본명은 민석(民錫)이라 하였다. 본관은 인천.
일찍이 동학에 들어가 교구장이 되어 포교하다가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이인환 이사경 등과
장흥 거병을 상의하고 1,000여명을 이끌고 전남북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특히 장성 황룡촌 전투에서
'장태'를 이용하여 관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둠으로써 '장태장군'이라는 별호를 얻었다.
장흥 전투의 총지휘관을 맡았다. '남도장군'이라고도 칭한다.
이사경(李仕京, 1860~1895)
장흥 용계면(현 부산면)용반리를 기반으로 한 대물림 접주로, 본명은 관근이라 하였다.
본관은 인천, 아버지 이호인 접주로 부터 접주 자리를 물려받았다. 1894년 6월경 용반마을 근처에 있는
자라번지라는 곳에 집강소를 설치한 후, 병영성의 우후(虞候)를 잡아다 징치하기도 하였다.
12월 4일 벽사 전투, 12월 5일 장녕성 전투, 12월 7일 강진전투, 12월 10일 강진병영전투 등에
참여하였으며 12월 15일 장흥 석대 전투, 12월 17일 옥산전투 등에 참여하였으며 12월 15일 장흥
석대 전투, 12월 17일 옥산전투 등에 참여하였다가 이후 용반리로 피신하였다가
근처의 기역산에 은신하였으나 체포되었다.
이인환(李仁煥, ?~1895)
대흥대접주. 천도교 장흥교구에서 일제 시대에 제작한 <갑오동학혁명혈사>에는 이인환 대접주가
나주군 남평면에서 출생한 인물이나 가족은 물론 처가의 식구까지 장흥으로 데려왔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본관은 인천. 그는 무기와 화약을 잘 다루었고 병법이 탁월했다고 전한다. 석대들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이
조일연합군에 패배한 후 천관산 동굴에 숨어 있다가 체포되었다.
구교철(具敎徹)
웅치대접주(현 보성군 웅치면)로 장평 사창에서 이방언, 김방서군과 함께
장평 사창에서 집결한 후 장흥 석대 전투에 지휘자로 참전하였다.
문남택(文南澤)
유치 출신의 대접주로 1891년 동학에 입교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자세한 인적사항이나 활약상에
대해선 알 수 없다. 구전에 의하면, 조양 1구 절터골이 동학군의 훈련장이었다고 전해지며,
유치면지에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 조양2구 마을에서 초기.탄약등을 제조하여 지원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문남택 접주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학삼(金學三, 1852~1894)
장흥 고읍(현 관산읍) 출생으로 1차 기포 때부터 이방언과 함께 했다. 본관은 김해. 족보명은 상휴(相休),
학삼(學三)은자이다. 접주로서 이방언 장군과는 내종당숙질 사이였으며, 장령성(12월 5일)과
강진현(12월 7일), 강진병영(12월 10일)전투에 참여 하였고, 석대 전투 패배 후 처가가 있던
관산 방촌에서 체포 되었다.
이소사(1873~1894)
일본에서 발행한 「국민신문」 1895년 3월 5일자에, "동학당에 여장부가 있다. 동학당의 무리 중에
한 명의 미인이 있는데 나이는 꽃다운 22세로 용모는 빼어나기가 경성지색의 미인리라 하고
이름은 이조이라 한다"고 보도했으며, 조일신문에는 "이때 이조이란 여인이 앞장서서 싸워 동학군의
사기를 진작시켜 큰 전과를 거두었다"고 한다.
최동린( ?~ 1894)
최동린(崔東麟) 또는 최동(崔童) 혹은 최신동 소년장군으로 불리며, 13세의 나이로 농민군을 지취했다.
그는 석대들 전투에 참여한 후 관산, 옥산전투를 지휘하다가 일본군에 체포되었다. 그후 최동린은
나주 일본군 진영으로 압송되어 12월 28일 처형되었다.
윤성도(1878~1965)
석대들 전투에서 패한 동학농민군들이 뿔뿔이 흩어지자 관군의 철저한 수색이 시작되었다.
당시 약 500명의 동학농민군이 회진면 독도(德島)라는 작은 섬에 숨어 있었다.
덕도까지 관군의 수색망은 좁혀들자 당시 열여섯살 소년 뱃사공이던 윤성도는 밤을 틈타 목숨을 걸고
덕도에 있던 농민군들을 인근의 금당도. 생일도. 약산도 등으로 피신시켰다.
동학농민군의 주요 무기를 살펴보면, 화승총은 흑색화약과 탄환을 총신 내에 장전한 다음,
점화구에 불이 붙어 있는 화승을 가져다 대면 총신 내의 화약이 점화되어 탄환이 발사되었다.
비가 오면 화승이 젖어 사용할 수 없었다. 죽창은 긴 대나무의 끝을 날카롭게 깎아서 상대를
공격하는 무기이다. 대나무는 통통하고 곧은 청죽을 사용하고, 끝이 굵은 쪽은 창날로 사용
하였다. 대나무를 쉽게 구할 수 있어 누구나 간단히 만들 수 있었다. 역사적으로 무기를 갖지
못한 민중들이 주로 사용하였다.
동학농민군과 일본군의 화력은 250 : 1 또는 500 : 1 이었다고 한다.
일인 병사 1명이 동학농민군 250명 도는 500명을 상대할 수 있었다는 뜻.
1894년 1차 봉기 당시 조선을 침공했던 일본군은 약 8천 명이었다. 2차 봉기 이후인 11월 부터
동학농민군 진압에 직접 동원된 일본군 주력부대는 후비 보병 제 19대대였는데, 이들을 포함하여
약 3천 명의 일본군이 농민군 진압에 투입되었다. 세계적인 수준의 근대식 화기를 지닌 일본 정규군과
죽창이나 화승총등 보잘 것 없는 무기를 지닌 동학농민군은 전력과 전술 면에서 극명한 차이가 있었다.
장흥지역 동학농민군의 희생자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전투뿐만 아니라 이후 토벌과정에서도끝없는 살육이 있었다.
대략 장흥에서 동학농민군 희생자가 1,000 ~ 2,000 명이라 구전되고 있다.
정리작업을 통해 실명이 밝혀진 희생자는 345명으로 확인되었다.
장흥 지역의 동학을 연구한 위의환에 의하면 1,510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희생자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그들의 넋을 추모하는 불꽃
천도교 장흥교당
장흥 교당 마당 한편에 피어난 작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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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을 '義'와 불의(不義).무엇이 옳고 그름인지 사전적 의미는 너무도 명료하다.
'동학농민혁명'은 바로 불의(不義)를 타파(打破)하고 옳음을 세우고자 함이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현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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