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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산행·여행·풍경

밥상머리 선비교육 회초리 回 . 初 .理 (1편)

과거를 통해 미래를 배우는 여행

밥상머리 선비교육 회초리  回 . 初 . 理  (1편)

 

2016. 4. 1 ~ 2

목포 '문학동인 창' 과 함께

 

 

 첫번째 행선지는 요월정 원림(邀月亭園林)

 

 

 

 

 

왼편의 절벽을 '낙화암'이라 부른다.

임란시, 왜놈들의 겁탈과 능멸에서 자신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

부녀자들이 몸을 던졌다는 슬픈 역사의 현장. 

 

 

과거엔 명주실꾸리 3개가 들어갈 만큼 깊었다는데

황룡강의 직선화로 인해 지금은  아담한 소(紹) 정도에 그칠 뿐.

 

 

요월정원림 (邀月亭園林)
시도기념물 제70호 (지정일 1985.02.15)
전남 장성군 황룡면 황룡리 171 (일원) 면 적 : 14.840㎡(4,489평)
황룡강의 북서쪽 기슭 위 강쪽으로 세워진 요월정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형 건물로   정(亭) 보다는 당(堂)에 가까운 건물로 볼 수 있으며 현재의 건물은 1925년에 고쳐 지은 것이라고.

 

 

550년(명종 20년) 공조좌랑 김경우 선생이 낙향하여  지은 요월정. 당대 선비들의 집합처로 수 많은 시문과 담론이 생산되어 오늘에 전한다. 김경우는 사화로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한 김숭조의 손자이l며 중종 때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활발한 언론 활동을 펴면서 나라를 바로잡으려던 김기의 아들이다


김숭조나 김기는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황룡에 머무른 기간은 짧았으나

 김기의 아들인 김경우는 벼슬이 정3품인 퉁훈대부로 공조좌랑을 역임했으나 일찍이 낙향하여

 황룡마을에 요월정을 짓고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송천 양응정과 더불어 시문을 짓고 자연을 벗삼았다.

 

 


요월정을 건립하였던 金景愚 선생의 9세손 京燦(1796∼1819) 이 요월정을 중건하면서 지은 요월정 重修韻.

百日花紅度幾秋 重光重喜且重修

백일홍꽃 붉어서 몇 가을을 지냈는고 세월이 지나고 또 지나서 집을 고치는도다

 

朝鮮第一黃龍里 夜月更三白鷺洲

조선제일 황룡리요 달 밝은 깊은 밤에 백로 노는 물갓이라

 

好個東山還舊主 超然南國有名樓

좋은 동산에 옛주인이 돌아오니 남쪽의 유명한 누각이 더욱 뛰어나구나

 

鳳凰己去臺空在 安得詩仙與共遊 

봉황은 이미 떠나고 집은 비어 있으니 어느 때나 시선을 만나 함께 놀아 볼꺼나.

 

 

 

 

위 글 중 '朝鮮第一黃龍里'란 대목이 문제가 되어

 왕도(한양)를 능멸했다는 모함을 받아 임금님께 불려가게 되었다.

  

"朝鮮第一黃龍里라 한 것이 사실이냐?"는 질문에 "예"하고 대답하자 "

그러면 한양은 어떤고?" 하고 묻자 "天下第一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중국의 장안은 어떤고?"하니

 "萬古의 第一입니다."라고 답하여 위기를 모면했다는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이런 저런 사연과 제선충 피해로 요월정 노송들이 많이 사라졌다.

 

 

봉암서원 (鳳岩서원)

지방기념룰 제96호, 장성읍 장안리 19

조선 숙종 23년(1697)에 망암(望菴) 변이중 선생(1546-1611)의 학덕을 기리고

후학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창건했다.

 

 

변이중 별세 후 87년 만인 1697년(숙종 23) 호남의 유림과 후손이 주도하여 봉암서원을 건립했다.

1705년에 신실(神室)과 신문(神門)을 중수했고, 1707년에 변이중의 아들 변경윤을 배향하고 전사청을 세웠다.

 1729년에 윤진(尹軫)과 변이중의 현손(玄孫) 변휴를 추가로 배향했다. 도내의 유생들이 상소하여

 서원에 사액해 줄 것을 청하여 임금의 윤허를 받았으나 시행되지는 않았다.


시징당 (是懲堂)

이곳에는 왜군의 조총을 능가하는 화차 3종과 총통 14종, 화살 11종, 신기전 6종, 포통 8종 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 장안리 출생인 변이중선생은 47세 때 어천찰방 재직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군의 화력보다 앞선 무기를 만들고자 상의원직장이란 벼슬을 지낸 사촌 동생 휘암 변윤중과 함께

튼튼한 나무에 쇠로 장갑을 씌워 4면에 40개의 총구를 만들어 40발을 연이어 쏠 수 있는

화차 300량을 만들어 그중 40량을 행주산성 권율장군에게 보내 행주대첩의 승리를 이끌어냈다.

 거북선, 비격진천뢰와  더불어 3대 발명품의 하나인 화차(오늘날 탱크와 같은 무기)가 발명됨으로써

 왜구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무서운 신무기로 큰 공헌를 하게된다.

 

 

 

 

 화차 발사 시연

 

 

서원의 중심 건물인 종앙사(宗仰祠)에는 망암(望菴) 변이중(邊以中), 율진 윤진(尹軫), 휴암 변윤중(邊允中),

 자하 변경윤(邊慶胤), 명산 변덕윤(邊德胤), 청류당 변휴(邊烋), 묵포 변치명(邊致明)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변이중을 주벽으로 모시고 다른 여섯 분은 배향으로 모시고 있다. 임진왜란과 관련이 있는 인물은

 변이중, 변윤중, 윤진 등 3인인데 윤진은 정유재란 때 입암산성에서 성을 지키다 순절한 무인이다.

 

 

황주변씨삼강정려(黃州邊氏三綱旌閭)

전라남도 기념물 제54호, 장성읍 장안리 봉암서원 앞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평안도 용만까지 피난길에 올랐다.

이때 변윤중은 종형 변이중과 함께 선조를 수행했다.

정유재란이 발발해 왜적들이 장성으로 쳐들어오자 가속들과 장정 200여명을 모아 장안리에서

10 여 일 동안 혈전을 벌였으나 중과부족으로 장졸들이 몰살을 당하는 치욕적인 패배를 당하자

적에게 잡혀 능욕을 당하느니 의롭게 죽자하고

마지막 격전지였던 부엉바위에 올라가 황룡강에 투신하여 순절하였다.

 

 비보를 전해들은 그의 부인 성(成)씨도 남편을 따라 스스로 남편이 뛰어든 곳에 올라가 몸을 던졌다.

 아들 현윤과 며느리 서(徐)씨 부인이 이 소식을 듣고 급히 부엉 바위로 가서 보니

부모님의 시신이 나란히 떠 올라있고 아들 형윤 또한 뒤를 따라 죽으려 하자

그의 아내 서(徐)씨가 집안의 후사를 이을 외아들이라며 극구 만류하고 대신 강물에 몸을 던졌다

.

하늘도 이들의 충, 효, 열에 감동하였는지 갑자기 먹구름이 덮이고 무지개가 서는 이상한 현상이 계속 나타났다.

그 뒤 시어머니의 손을 꼭 움켜잡고 죽어있는 시신을 발견했다고 전한다.

 

고종 조에 당시 전라 감사 조종필이 살아서도 충절, 죽어서도 충절을 지켰던 변윤중을 충신으로,

그 부인을 열녀로, 며느리 서 씨 부인을 효부로 올려 왕명으로 변윤중을 이조 참의로 증직하고

삼강 정려의 명을 받아낸 세상에 보기 드문 일문삼절의 영광이었다.

 

 

 

서원은 1868년(고종 5) 서원 철폐령에 의해 1871년에 철거되었다.

철거된 지 100여 년이 지난 1975년 장성군의 유림과 후손들이 변이중 종가에 모여 서원을 다시 세울 것을

발의했고, 이듬해인 1976년에 복원공사를 시작했다. 공사 7년 만인 1983년에 복원공사를 완료하고

 1984년 2월에 봉안식을 거행했다. 이때 종앙계(宗仰契)를 창립했다.

 

 

 

경내에는 외삼문, 강당, 동재, 서재, 내삼문, 사당 종앙사가 전학 후묘의 배치를 이루어 건립되어 있다.

대문 격인 외삼문을 들어서면 앞쪽에 교육 공간을 조성하고 뒤쪽에 제사 공간을 배치했다. 유림의 회합 장소이면서

 유생들이 글을 배우던 강당 성경당(誠敬堂)과 유생들이 숙식하던 곳인 동재 경의재(敬義齋)와

 서재 훈덕재(薰德齋)가 있다 해마다 2월과 8월에 제사를 지낸다.

 

 

 

변이중은 1546년 5월 17일 장성군 장성읍 장안리에서 태어나 1573년 28세에 사마시에 합격했다.

임진왜란 때 예조정랑에 임명되었고 선조 임금의 파천 길을 수행했다. 3차에 걸쳐 일본군 토벌대책을

상소했으며 1592년 10월 윤두수의 천거로 전라도 소모사(召募使)가 되어 내려왔다.

근 40여 일 동안 6천 명에 달하는 병사를 모집했으며 12월에는 병사들을 이끌고 서울 방면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의 의병부대는 1593년 1월말 경기도 안성 일대에서 있은 죽산전투에서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이끄는 일본군에게 패했다. 당시 그의 부대는 소가 끄는 화차로 죽산성을 공격하여 적진을 교란시켰지만

목제 무기임을 간파한 일본군이 화차에 불을 던져 다수의 조선병사들이 사상하는 피해를 입었다.

경기 독운사(京畿督運使) 등을 역임하며 의병을 일으키고, 수만의 정병을 모집했으며 3만여 석의 군량을 조달했다.

그는 의주 행재소에서 임금으로부터 소모어사의 명을 받고 전라도에 내려와 많은 의병과 양곡을 모아 전선으로

 보내는 한편 경기도 수원에 진을 치고 기호지방의 일본군과 접전을 벌였다.

그는 총통화전도설(銃筒火箭圖說)과 화차도설(火車圖說)을 저술했으며 종제인 변윤중의 재정적 도움을 받아

 화차  300대를 제작했다. 그리고 당시 위급한 상황에 처해 있던 권율 장군에게 40대를 보내

행주산성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학자이자 발명가인 변이중은 1603년 함안군수가 되었다가 2년 후에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전란 후에 호성원종공신 1등, 선무원종공신 2등에 녹훈되었으며 고향마을에서 ‘장성 향헌 20조’를 만들어

전란으로 피폐해진 민심을 수습하고 향속과 풍습을 순화하는 데 힘쓰다가 1611년(광해군 3)

 66세의 나이에 별세했다. 조정에서는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이조참판의 벼슬을 내렸다.

 

 

일정에 참여해 주신 성균관대학교 유교문화연구소 강중기 박사

 

 

필암서원(筆巖) 개요 / 해설 : 문화해설사 김채림 선생

 

 

필암서원(사적지 제242호)은 1590년 하서 김인후(1510-1560)의 후학과 호남 유림들이

중심이 되어  건립되었으며, 1786년 하서의 사위이자 문인인 고암 양자징(1523-1594)을 추배하였다.

 1659년 필암으로 사액을 받았으며, 하서 김인후 선생은 호남에서 유일하게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호남 선비 문화를 대표하는 서원으로 선현에 대한 제사 공간과 교육 및 학문 수련의 공간, 휴식공간

그밖에 장서 보관 기타시설 등 조선시대 서원의 기본구조를 잘 갖추고 있다.

 

 

원진각

 보물 제587호로 지정된 고문서

(노비보, 원장선생안, 집강안, 원적, 봉심록, 서원성책 등)와 인종이 하서 선생에게 하사했다는

묵죽도, 하서유묵 등 60여건의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인종과 하서

 

 

 

 

 

 

 

 

필암서원 해설사 여러분

 

 

원진각 유물 관람을 마치고 서원으로 향하는 목포 문인 여러분

 

 

선비교육 체험에 앞서.

 

 

 

 

 

홍살문 너머 확연루의 현판은 우암 송시열이 쓴 것.

 

 

 

 

 

1597년 정유재란으로 불타 버렸으나 인조 24년(1624)에 다시 지었다.

 현종 3년(1662)에 임금이 ‘필암서원’이라고 쓴 현판을 직접 내렸으며, 1672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공부하는 곳을 앞쪽에, 제사지내는 곳을 뒤쪽에 배치한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로서

휴식처가 되는 확연루를 시작으로 수업을 받는 청절당, 그 뒤에 학생들이 생활하는 공간인 동재와 서재가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그 북쪽으로는 문과 담으로 별도의 공간을 만들어 사당을 두고 제사를 지낸다.

 

 

경내의 건물로는

사우·신문(神門)·동서 협문(夾門)·전사청(典祀廳)·장서각(藏書閣)·경장각(經藏閣)·진덕재(進德齋)·

숭의재(崇義齋)·청절당(淸節堂)·곽연루(廓然樓)·장판각(藏板閣)·한장사(汗掌舍)·고직사(雇直舍)·

·홍살문·계생비(繫牲碑) 등이 있다. 왼편에 보이는 경장각(經藏閣)의 편액은 정조의 친필이다.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958개 서원 중 47개소만 남게 되었는데

그 중 미훼철 서원이었으며, 일제시대나 6.25사변 때에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

 

 

 

 

 

 

 

필암서원을 방문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처마밑에 윤봉구가 쓴 ‘필암서원’현판이 걸려있고,

 대청마루에는 동춘 송준길이 쓴 '청절당'  현판이 걸려있다.

 

 

 

 

 

해설사의 안내에 따라 도복 착용에 나서는 문인 여러분

 

 

 

 

 

 

 

 

 

 

 

 

 

 

 

 

 

 

 

사당 참배에 나서는 문인 여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