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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포럼·강좌·워크숍

제13회 월봉서원 유교 아카데미 2편

13회 월봉서원 유교 아카데미

2

 

高峯學 硏究의 現況과 問題點 

 

강사 : 기 호 철(奇浩喆) 

 

2014. 4. 6

 

 

 

 

 

 

강사 : 기 호 철 (前 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

 

 

 저는 고봉 선생의 아버지 물재공 기진의 형님 기원의 종가 후손입니다.

저의 아버지가 행주 기씨 대종손이니 고봉 선생댁은 작은집이 되겠습니다.

 강의에 앞서 전제 할 것은 지역 안배나 가문에 대한 배려는 일체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여러분 들이 아시는 것과 상당히 다르고 거슬리는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같은 집안 이전에 저는 학자이기 때문에 앞의 전제는 너무도 당연한 것입니다.

 

기존 고봉 선생의 모습은 거의 성리학자로만 그려져 온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고봉은 성리학자일 뿐만 아니라 문인이자 교육자이며 정치가 이기도 합니다.

헌데 고봉의 학문을 계승한 제자가 누구냐고 물으면 한 두 명에 그치는게 대부분일 것입니다.

고봉 선생에 대한 기초 연구가 얼마나 미진한가를 잘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제가 한국고전번역원(구 민족문화추진회)에 근무할 당시 '고봉집' 번역이 한 번 있었고,

이후 '고봉전서'를 번역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두 차례의 번역이 거의 유일한 것입니다.

 

 주변 학자들에 의해 발췌 번역이 이루어진게 몇 건 있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번역이 제데로 이루어 진게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고봉집'과 '고봉전서'를 짜집기 한 수준이라는 말씀입니다.

 '고봉전서'는 텍스트 서비스 조차 없습니다. 

한국고전번역원의 '한국고전 DB' 에는 '고봉집'만 입력되어 제공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시와 구 등이 발주한 내용의 '텍스파일'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연구비를 제공 받은 학자나 기관이 만든 자료들은 반드시 '텍스파일'을 제출해야 하는게 도리이자

당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단 한 건도 제출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심각한 도덕성의 문제입니다.

상당한 연구비가 투자 제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심한 표현을 빌리자면 도적질을 당한 것입니다.

 

광산구에서는 앞으로 모든 데이터파일을 챙겨 일반인 들에게 웹서비스를 제공하는데

역점을 두겠노라 제게 약속했습니다.

 

 참고로 '퇴계전서'를 예로 들면,

완벽한 텍스트 운영을 거쳐 판본별 비교 대조를 통한 교열 교감을 하고,

16종 표점과 각각의 정보를 주석하여 정본화를 이루었습니다.

이 정본화는 연구의 기본이며 목표의 종결 이기도 합니다.

 

 

 

 

 

 

 

 

송순의 '면앙집'을 예로 들면,

 성리학적 詩가 두 편 실려있는데 놀랍게도 그것은 가짜이다.

하나는 율곡의 것을 편집하여 후손들이 끼워 넣고, 또 하나는 송우암의 詩를 편집한 것이다.

후손들이 선조를 성리학자로 위대하게 포장하려한 대표적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예가 바로 연구를 통한 교열 교감이 꼭 필요한 것이다.

 

각종 문집이 후대의 필요성에 따라 판본의 내용이 달라짐에 유의해야 한다.

 원본에 충실한 해석과 전달을 위해선 정확한 표점을 찍어야 하는데,

 문제는 그에 대한 역량을 갖춘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고전번역원'에서 16종 태점을 찍기 위한 전국의 인물을 모았는데 30명에 모자랐다.

 

"양선생 사칠기왕복서"의 내용도 '퇴계집'의 내용과 '고봉집'에서 발행한 내용이 다르다.

후대의 누군가가 '사칠기왕복서'의 내용에 손을 대고 고쳤다는 말이다.

똑같은 내용인데 왜 다르느냐에 대한 연구가 꼭 이루어져야 한다.

 

오역은 번역자의 숙명이라는 말도 있지만,

이 모든 것들을 위해선 반복된 토론과 연구 수정을 거쳐야 좋은 번역이 나오게 된다.

 '고봉집'의 현실은 어떤가?

 심지어는 오역으로 인해 고봉의 제자인 정즐이 스승으로 바뀐 경우도 있을 정도다

좋은 번역이라는 평가받는데도 말이다.

 

 

 

 

 

 

 

조선시대의 '문벌'을 따지는데 있어 그 기준은 뭘까?

같은 양반끼리도 분명 급이 존재한다. 그것은 벼슬도 아니고, 경제력도 아니다.

지난 이십여년 동안 내가 연구한 바로는 그 집안에 '왕실의 피'가 흐르느냐의 여부였다.

왕실의 족보에 이름이 올랐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문벌을 가르는 첫 번째 기준이다.

왕실의 족보인 '선원보(璿源譜)에 이름이 올랐느냐가 문벌의 최대 쟁점이라는 말이다.

바로 이왕실의 족보에 올라야 '당상관'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고봉 기대승의 경우도 당상관에 올랐다.

유성룡, 정철, 박순, 박수량 등도 당상관에 올랐지만 고경명은 오르지 못했다.

 

고봉의 경제력은 어떤가?

지금 남아있는 것들로 봐선 양반 가문으로선 그다지 부유하지 못했다고 본다.

당시 호남의 최대 부자는 고경명 집안이었고 두 번째는 하서 집안이었다.

'미암일기'에 따르면, 미암이 고봉에게 사돈을 제의 했지만 거절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고봉은 1558년 문과 을과 1등, 전체 4등으로 합격한다.

그 시절 문과에 합격한 사람들로 유명한 사람이 많다.

전체 장원이 고경명이었고, 중 하위권에 윤두서도 보인다.

 

 

 

 

당시 정치적인 상황은 '을사사화'로 사림을 비호했던 문정왕후 윤씨 일파가

 소림을 이끌었고 이량까지 가세한 소인이 전횡하던 시대였다.

'을사사화' 가해자와 피해자는 아직도 모르는 상태다.

하지만 오늘날 까지도 연구를 거부하는 세력이 이땅에 버젓히 존재한다는 사실.

 

퇴계의 노비는 900名에 이르고 논은 삼천마지기에 이른다.

그런 퇴계이지만 회재에 비교하면 아주 검소한 수준이다.

남인이었던 해남윤씨의 재산은 상상을 초월한다.

노비가 2,000名에 이를 정도. 해남, 강진, 완도, 진도 등에서는

해남윤씨의 땅을 밟지 않으려면 날아가는 것 이외엔 방법이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이들이 대토지 소유자 였으며 대규모 노비를 거느림으로써 양인이 격감하게 된다.

조선시대는 신분의 사회였기 때문에 노비종로법(賤者隨母法)을 따른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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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종로법(賤者隨母法)

 

노비 자녀의 신분·역처(役處)·상전(上典) 등을 결정할 때 모계를 따르도록 규정한 법.

고려시대 이래 전통적으로 노비의 결혼은 노비와 양민 사이에는 허용되지 않고 노비 사이에서만

허용되었다. 노비의 자녀가 종사하여야 할 역처 또는 그 주인을 결정하기 위한 방법으로

1039년(정종 5) '천자수모법'(賤者隨母法)을 제정하여 노비는 그 모(母)를 따르게 하였다.

그뒤 양인과 노비 간의 결혼이 점차 증가하자 노(奴)와 양처(良妻) 사이의 자녀에게는 '종부법'(從父法)

적용하였다. 결국 부모 중 한 쪽만 천인이면 천계(賤系)를 따르도록 규정한 것이다.

그 결과 천민의 수는 점점 증가하는 반면에 군역을 부담하는 양인의 수가 감소하자,

 1414년(태종 14) 양인증가책으로 양인이 비자(婢子)와 결혼하는 경우에는 종부법을 적용하도록 했다.

 그러나 세조 때 이를 다시 금지하고 종모법으로 환원했다.

 

조선 후기에 들어 사회경제가 변화하면서 신분제에도 변동이 생겨 혼인에 있어 사회신분보다는

경제력이 크게 작용하게 됨에 따라 양녀(良女)로서 노비의 처가 되는 경우가 늘어났다.

이에 1669년(현종 10) 당시 서인 집권층은 양역 인구를 증가시키기 위하여 노비와 양처 사이의 자녀에게

적용되던 예외규정인 종부법을 폐지하고,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 양역에 종사하도록 했다.

이에 노비와 주인 간의 분쟁을 이유로 '종모역법'(從母役法)을 반대하던 남인이 정권을 잡자

 다시 종량(從良)된 노비를 환천시키기도 했다. 이후 서인과 남인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종량과 환천이

반복되다가, 결국 1731년(영조 7) 종모법으로 확정되었다.

 이에 따라 종모법은 조선 후기 노비제가 해체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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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위와같은 법을 악용하여 대토지 소유자들이 재산을 증식한 것.

각종 편법을 동원, 심지어는 양녀와의 결혼을 강요하여 노비를 소유하고 재산을 늘려간 것이다.

이로인한 양인의 격감으로 왜구 준동시 전쟁에 나갈 사람이 없어질 정도.

해서 경국대전'을 개혁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는데도,

이들 세력자들은 '경국대전'이 불변의 것이라면서 반대했던 것이다.

고봉 역시 반대편에 섰다. 당시 고봉의 내외종간 상당수 당산관들이 고봉 집안이었다.

한 마디로 실권과 정치적 영향력이 대단했다는 말이다.

 

명종대 고봉의 구체 활동에 대한 연구는 전무한 실정. 

 "명종실록"에 전하는 고봉에 대한 사론을 살펴 보면,

 

『학문이 해박하고 문장이 뛰어나 당세에 이름이 났다. 

다만 논의를 주장함에 이기기를 좋아하는 병통이 있었다.』 

 

 이것은 율곡 이이가 쓴 것이다.

두 사람 사이를 잘 알게 해 주는 대목이다.

 

 

 

 

 

'을사사화'의 협력자를 살펴보면

이언적, 이황, 권벌, 임백령, 허자, 송순, 고경명, 등이 있다.

이황 문인들은 이런 사실을 지우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다. 실로 존경스러울 정도.

그러나 딱 두 군데 그 기록이 남아있다.

 

회재 이언적의 막강함을 최초로 건드린 사람이 율곡 이이다.

이것으로 인해 나중 문묘에 배향되었다가 몇 번인가 출향을 당하기도 한다.

율곡과 이황을 동시에 건드린 사람이 바로 매향 정인홍이다.

 이들 두 사람를 '을사사화'의 간융으로 규정, 문묘5현 배향을 반대한 것이다.

 이로인해 정인홍은 부관참시를 당하고 만다.

 

소윤 반대를 주장했던 거의 유일한 학자가 산천재의 남명 조식 선생이다.

그 밖에 송순, 정철, 유희춘 등이 '을사사화'의 피해자라 볼 수 있다.

 

현실도피 세력의 대표격으로는 하서 김인후를 들 수 있다.

그 외 이런 저런 사람들이 도피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모두 가짜라고 보면 된다.

도피했노라 주장하는 사람들을 역으로 보면 모두 협력자 들인 것이다.

나중, 사림의 지탄을 피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명종 초, 이황과 회재는 소윤의 전횡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한 정황이 보인다.

속된말로 '어용학문' 이라는 것이다.

 

 

 

 

 

 

 직접 번역한 詩로. 韓愈의 詩에 대한 대구로 해석하는게 옳다.

숨은 의미의 정확한 해석이 따라야 하는 것이다.

 

 

 

위 시는 기존의 번역으로 앞뒤 뜻의 연결이 안된다.

 

 

 

 

 

 

 

 

고봉집 초간본에는 일제 李恒이 나오고 있으나 후본에는 빠져있다.

하지만 일제 이항의 문인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 할 것이다.

일제 이항을 처음엔 선생으로 표현했으나, 나중엔 선생이라는 표현이 삭제되어 있음도

연구 해 볼 대목이라고 본다. 성리학적 스승이자 도반이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본다.

 

 

 

엄밀히 말해서 주자학은, 원시 유학이라는 기본 베이스에

도교의 태극도설과 불교의 성즉리를 훔쳐다 결합시킨 학문이라고 말하면 거의 정확하다.

 

 

 

 

 

 

 통념적으로 고봉이 먼저 편지를 보냈을 것으로 짐작하는데

사실은 퇴계가 먼저 고봉에게 편지를 보낸게 사칠론의 시발이다.

실질적으로 두 사람의 학문적 결합은 첫 번째 서간이 마지막이다.

후로 단 한 번도 서로의 주장을 바꾸지 않았다는 말이다.

하지만 '심성설'에 대한 연구 수준은 대단히 높아지게 되었다.

 

단언컨데,

오천년 우리 역사에서 가장 높은 수준에 이른 학문은 '심성설'이 유일하다.

 

 

 

 

'고봉집'에는 율곡의 시가 한 편 실려있으나,

 반대로 '율곡집'에는 고봉의 시가 단 한 편도 실려있지 않다.

"어쩌다 운좋게 알았다"라는 말로 미루어 볼 때, 정치적 입장에 따른 것임을 금새 알 수 있는 것이다.

 

 

 

사실은 필암서원에 모셔진 대부분의 인물이 고봉의 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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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집안 광내기에 바쁜 사람들에게 이런 저런 오해와,

자칫 멱살을 잡힐 수준의 발언에도 거침이 없었던 기호철 박사의 강좌.

 

오랜 기간 '한국고전번역원'에 몸담아서인지 몰라도,

그의 학문적 양심은 실로 대단한 지경이었다.

 

모두가 추앙하는 자신의 선대와 동 시대 학자들에 대한 가감없는 발언.

과연 고봉과 노사를 배출한 행주기씨 문중의 정직한 후손답다는 생각.

 

박사의 강의 내용을,

수강생인 내가 다소 순화(?) 시켰다는 표현이

결코 어색하지 않으리만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