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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포럼·강좌·워크숍

고사성어로 통찰하는 인간의 가치 <1講>

전라남도교욱청 장성공공도서관사유와 성찰이 있는 인문학 학당

  

 

- 지혜의 샘 인문고전 읽기 -

 

고사성어로 통찰하는 인간의 가치

(1강)

 

 

 

 

 

 

 

 

 

 

 

 

 

 

 

 

 

 

 

 

강사 : 김 영 수 박사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고대 한 . 중 관계사로 석사, 박사 과정 수료.

중국 소진학회 초빙이사, 중국 사마천학회 회원, 전 영산원불교대학교 교수.

20년 동안 중국을 다니며 중국사의 현장과 연구를 접목, 사마천과 사기史記 연구에 매달려 왔다.

 

 

 

 

『사기 』는 중국사 3천 년을 다룬 최초의 통사로서 중국을 알려면 반드시 읽어야 할 역사책이다.

또한 사람을 알고, 세상 돌아가는 흐름을 파악하는데 큰 도움을 주는 폭과 깊이를 갖춘 최고의 고전이다.

그 결과 지금까지 사마천 『사기 』와 관련하여 1999년 『지혜로 읽는 사기 』를 시작으로 2006년에는

연구의 한 획을 긋는 『역사의 등불 사마천, 피로 쓴 사기 』를 출간했고 2007년부터는 『사기』의

대중화로 눈길을 돌려 『사기의 인간경영법 』을 선보였다.

EBS 특별기획 '김영수의 사기와 21세기'를 32회에 걸쳐 강의한 바 있다.

 

 

 

 

중국과 중국사람을 이해하는데 '사기'만한 책이 없다.

우리 경제의 사분의 일이 중국과 관련되어 있을 정도이다.

조정래의 '정글만리'가 백만 부 이상 팔리다 보니 이제야 중국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국가 정책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특히 중국에 대한 공부를 심도있게 해야 한다.

남북 분단 가운데 북한은 경제에 관해선 중국에 거의 80%를 의존하고 있다.

 

 

 

 

 조부께서는 평생 '동학'을 하신 도인이셨다.

할아버지께서는 늘 한학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지만 그 때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20세가 넘어서야 중국 고전에 관심을 갖게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사기' 중 가장 오래된 판본은 천년 전 송나라 때 것이다.

오십이만육천오백자로 기록되어 있으며,

 3천 년 역사를 총 7권에 담았으리만치 고도로 압축된 파일이라고 보면 틀림없다.

인쇄술의 발달 이전의 여러 정황을 감안 하더라도 현재 전해지는 '사기'의 94%는 원문이라 할 수 있다.

 

중국사람들은 사자성어로 이루어진 고사성어를 즐겨 써 왔다.

일례로 관중과 포속아의 사귐을 뜻하는 관포지교(管鮑之交)를 들 수 있겠다.

이 네 글자 속에 50 년 간의 이야기가 들어있으며 그 압축을 헤제하면 물경 2 시간 분량이다.

사자성어의 스토리텔링에는 중국인의 역사, 기질, 생활, 배신, 원한 등 여러 가지가 축약 되어 있다. 

 

'사기'는 인간 내면의 본 모습을 드러낸다.

* 이상적인 존경상  * 미움상 * 나와 닮은상 등이 망라되어 있으며 4천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거기에 제왕만 90명이 넘고, 200명의 제후, 국가 지도자는 3백 명이 등장하고 120명의 비극적 인물이 나온다.

 

 

 

위는 '사기' 가운데 고조선의 멸망사를 언급 한 부분이다.

 160권 중 사람을 다루는 부분이 물경 130권에 달하리만치 '사기'는 사람을 다루는 학문이다.

그저 그렇게 다루는 게 아니고 인간의 본질과 내면을 속속들이 파헤치고 있다.

'사기'를 읽으면 최소한 세 종류의 인간을 만날 수 있다.

 

가장 존경할 만한 인물. 가장 증오스러운 대상. 그 다음으론 놀랍게도 나와 너무 닮은 사람.

 

또한 '사기'는 읽는 연령대에 따라 받아들이는 감수성의 폭이 천차만별이다.

리더십의 교과서라 봐도 전혀 하자없다는 말이다.

 

기원 전 109년 한나라 무제가 고조선을 공격, BC 108년 고조선은 내분으로 망하게 된다.

기원전 145년 출생한 사마천. 기원 전 108년은 사마천 나이 서른 여덟이었다.

역사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은 한나라가 고조선을 칠 대 사마천이 직접 현장에 있었을 거라고 본다. 

 

그 시절 한나라의 가장 버거운 상대는 '흉노'였다. 그래서 한나라는 흉노와 화친정책을 맺고

화친정책의 일환으로 공주를 시집 보내게 된다. 말 하자면 '흉노'를 사위의 나라로 만든 것이다.

사마천의 위 기록이 오늘날, 한중일 세나라의 갈등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맨 마지막 줄의 기록이 바로 한사군(漢四郡)에 관한 내용이다.

 

진시황이 만든 군. 현 제도가 오늘 날 바로 우리가 쓰는 군(郡)이다.

 한나라가 설치한 네 개의 군이 바로 한사군인데, 문제는 그게 어디라는 사실을 사마천은 기록하지 않았다.

이것을 빌미로 일제는 '한사군'을 '동북삼성'이 아닌 한반도 내부로 한정시켰고, 경성대와 서울대.

이병도 라인으로 이어진 친일사학자들의 교육으로 우리 역사에서 대륙이 사라지고,

단 한 번도 반도땅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식민사관'이 주입된 것이다.

 

 

한사군 [漢四郡]

고조선 멸망 후 고조선과 예맥(濊貊)의 땅에 한(漢)나라가 설치한 4개의 군현.약 1년에 걸친 전쟁 끝에 고조선을 멸망시킨 한나라는 BC 108년 고조선의 옛 땅에 낙랑(樂浪)·진번(眞蕃)·임둔(臨屯)의 3군(郡)을 설치했고, 이어 BC 107년에는 20여 년 전 창해군(滄海郡)을 설치했던 예맥의 땅에

현도군

(玄菟郡)을 설치했다. 그리하여 4군을 유주(幽州) 관할 아래 둠으로써 오랜 야욕이던 동방경략을 완성했다. 한은 4군의 산하에 많은 현(縣)을 두고 중앙정부에서 군태수(郡太守)·현령(縣令)·속관(屬官)을 직접 파견해 다스렸다. 출처 : 브리테니커

 

 

 

 

 

중국의 '역사 상한선 끌어올리기'는 과연 어디까지 진행될 것인가에 주목하고 있다.

25가지의 중국 역사書에서 첫 번째로 꼽는 正史書가 바로 이 사마천의 사기史記요, 이를 일러 기전체(紀傳體)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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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전체 (紀傳體)

역사 기술·편찬의 한 체재.

편년체(編年體:〈춘추〉·〈자치통감〉 등)·기사본말체(紀事本末體:〈통감기사본말 通鑑紀事本末〉·〈역사 繹史〉 등)와 함께 동양에서 사서편찬법의 정통을 이루는 형식으로, 전한(前漢) 때에 사마천(司馬遷)이 편찬한

사기〉에서 시작하여 후한(後漢)의 반고(班固)가 편찬한

〈한서 漢書〉

에서 그 정형이 완성되었다. 이후 중국 역대 왕조의 정사(正史)로 편찬된 25사가 모두 기전체로 편찬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

가 현전하는 기전체 사서 가운데 가장 오래 되었다. 고려가 멸망한 뒤, 관찬사서인 〈고려사〉가 기전체로 편찬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학자 개인에 의해서도 고려 이전의 역사가 기전체로 편찬되었는데, 16세기 오운(吳澐)의 〈동사찬요 東史纂要〉, 17세기 후반 허목(許穆)의 〈동사 東史〉, 18세기 후반 이종휘(李鐘徽)의 〈동사〉 등이 있다.

출처 : 브리테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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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군왕 중에서는 유일하게 정조가 '사기'에 관심을 보였다.

박제가와 정약용에게 '한서'를 한 질 보내면서 '사기'를 슬그머니 끼워 보낸다.

우리나라 학계에선 '사기'에 대한 전문연구서가 전무하다.

우리나라에서 '사기'를 연구하는 학자는 나와 한양대학교의 이인호 교수가 거의 유일한 실정이다.

참고로 이인호 교수는 이 고장 장성 출신 학자이다.

 

 

 

 

 

 

 

 

 

 

 

 

 

 

99년 사마천의 고향과 사묘를 찾고나서 인생의 전환점이 찾아왔다.

다녀온 것을 계기로 '지혜로 읽는 史記'라는 책을 내게 된 것이다.

두 번째 사마천의 고향을 찾았을 때,  엄청나게 비가 쏟아졌고 안내를 위해 나온 분이 바로 사마천의 후손이었다.

헌데 사마천의 18대 후손이라면서 정작사마씨가 아닌 同 아무개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게 아닌가?

마을 촌장으로 바로아래 사진에 나오는 분이다. 

 위 사진 상에 나오는 '법왕패궁행방'은 우리의 홍살문에 해당하는 것이다.

헌데 한족이 세운게 아니라 만주족이 세워 준 것이라고. 한족의 위정자들은 '사기'를 불편해 했다는 말이다.

 

 

 

 

사마천의 후손이 사(司)라는 성을 쓰지않고 동(同)이라 부르는데는 위정자들로 부터 살아남기 위한

고육지책의사연이 숨어있다면서 촌장이 들려준 얘기다.

사마천이 죽임을 당한 후 고향을 떠나 피신해 있던 후손들이 잠잠해진 후 고향으로 다시 돌아와

마을을 상. 하 둘로 나누었고 아랫마을에서 작대기 하나를 떼어 윗마을에 붙여 司에서 同이라는 성씨로 바꾸었다고.

 

18대 후손의 미스터리(?)는 당시엔 살아남기 위해 족보를 만들지 못했고 ,

명나라 때에 와서야 비로소 족보를 만들게 되었기에 그리된 것이라고.

 

 

 

 

 

 

 

 

 

 

 

 

 

사마천 고향마을 앞에 보이는 다리 건너가 황하강이다.

 

 

 

사마천 마을의 변천사

 

 

 

 

사진상 맨 왼편이 박물관을 짓고 있는 모습이다.

 

 

 

 

엄청난 스케일의 사마천 동상이 세워진 모습.

 

 

 

 

중국 3대 제사로 승격된 사마천 제사가 매년 청명절에 열린다.

전세계 화교들이 몰려들어  딱 하루 제사 때 내 놓는 돈의 액수가 어마어마 하다고. 

현 중국 주석 시진핑의 고향이 여기서 한 시간 거리에 있다는 사실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거기에다 매년 수 천억원의 돈이 이 곳에 투자되고 있다.

 

 

 

 

 

 

 

 

 

 

 

 

 

사마천의 후손들

 

 

 

처음으로 방문했을 때 안내를 맏아주었던 분.

 

 

 

 

중국 사마천학회 여러분.

 

 

 

 

 

 

 

 

 

국가 제사로 승격된 뒤 부터는 사마천의 후손들은 행사에 참여치 못하는 아이러니가....

 

 

 

 

 

 

 

 

 

 

 

 

 

 

 

 

 

 

 

 

 

 

 

 

'사기' 이전의 역사서는 사건만을 다룬 것이거나, 각 지방의 기록이거나, 한 시대의 기록에 지나지않았다.

'사기'는 사마천이 알고 있는 시간 내에서 인류 전체가 자신의 문화를 가진 이래 수천 년의 총체적 활동을

용광로에 녹여낸 것이다. 이로부터 역사를 전체로 인식하고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인. 한 통일 이후 문화가 상당한 정도로 발전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관념이 나타날 수 없었을 것이다.

사마천이 이러한 기운을 타고 나타난 것이다. '사기'는 실로 중국통사의 창시자다.

 

중국 근대 개혁사상가 -  양계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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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강자의 질문에 자신의 소신을 명쾌하게 내놓는 김영수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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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도 한족이 통치하지 못했던 동북 3성에 대한 역사적 컴플렉스 때문에

중국은 지금 '동북공정'을 비롯, 서북공정, 서남공정을 벌이고 있다고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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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저서 "사마천, 인간의 길을 묻다"는

"『삼국지』 백 번 읽는 것보다 『사기 』 한 번 읽는 것이 낫다."로 시작되고 있었다.

소설과 역사서를 비교한다는 자체가 무리지만 그의 안타까운 심중을 읽을 수 있는 대목.

 

오늘날의 중국을 이해하고 정리하는데 있어,

  김교수의 아래 논지 이외 무슨 더 할 말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중국 문화란 표현이 추상적이고 모호하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이 있다면 '중국 문화'를

'중국 정신'으로 바꾸어 보라. 그것도 잘 안 들어온다면 '중화주의'로 치환시켜보라.

지금 중국과 중국인이 '史記'를 안고 가려는 방향과 목표가 바로 '신중화주의'를 앞세운 세계 최강대국 그것이다.』

 

 

매주 한 번씩, 앞으로 약 이십여 講 계속될 거라는 김영수 박사의 사마천 강좌.

전혀 예기치 않았던 수강이었지만,

기왕 발을 적신김에, 아예 사마川 (?)에 퐁당 빠져볼 요량.

 

 

2014. 3. 12

 

 

 

Loving You - Oscar Lope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