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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포럼·강좌·워크숍

제9회 월봉서원 유교 아카데미 2편

월봉서원 주변 알기

 

- 고봉학술원 강기욱 실장 -

 

2014. 3. 9

 

 

 

 

 

 

 

 

 

 

 

 

 

 

 

 

 

귀후재 가는 길

 

 

 

 

 

 

 

 

 

 

 

귀후재 석간수

 

 

 

 

 

 

 

 

 

 

 

 

 

 

 

 

 

 

 

 

 

 

 

 

 

 

 

 

 

 

 

 

 

 

 

 

 

 

 

 

 

 

 

 

 

 

 

귀후재(歸厚齋)

 

장암 정호의 제자이자 존재 위백규의 스승이었던 병계 윤병구 선생의 서체.

 

월봉서원 마을 곁 아늑한 숲 속에 자리한 행주奇씨 가문의 전용 글방.

'귀후(歸厚)'는 '사람이 나이들어 학문이 깊어지면

원칙주의 보다는 인간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게 된다'는 의미를 담고있다.

 

   

 

1900년대 초 백두산의 홍송을 뗏목으로 운반하여 지었다고 한다.

 

 

 

 

 

 

 

 

 

 

 

 

 

 

 

 

 

 

 

칠송정(七松亭)

 

기고봉의 장자 함재 기효증 공이 시묘살이를 하던 곳에 1587년 정자를 짓고

일곱주의 소나무를 뜰 앞에 심고나서 칠송정이라 이름하였다고. 1905년 중수, 1979년 복원하였다.

 

 

 

 

 

 

 

고봉학술원

 

 

 

 

 

 

 

 

 

 

 

 

 

 

 

 

 

 

 

 

 

 

 

 

 

 

 

 

 

 

 

1905년 고봉의 11대손 동준이 찬한 중건기와 8대손 봉국의 시가 걸려있다.

 

 

 

애일당 명상로

 

 

 

 

 

 

 

 

 

 

 

죽로차밭 앞에서

 

 

 

 

 

 

 

 

 

 

 

 

 

 

 

 

 

 

 

 

 

 

 

 

 

 

 

 

 

 

 

 

애일당

 

 

 

강기욱 실장께서수강생 모두에게 '고봉학술원' 편저

"실록 고봉 기대승'"한 권씩 선물.

 

 

 

 

 

 

 

애일당 편액은 성당(惺堂) 김돈희(金敦熙)의 서체이고

주련은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의 서체이다. 

 

 

 

 

 

 

 

 

 

 

 

 

 

 

 

고봉 기대승의 13대손 기세훈 박사의 고택이자 '사단법인 고봉학술원'의 산실.

고봉의 6대손 기언복이 숙종연간에 처음 터를 잡아 300년의 가계를 이어오는 곳으로

계산풍류(溪山風流)의 선비 정신이 살아 숨쉬는 대장원의 전형을 엿볼 수 있다.

 갑오년 현재, 고봉학술원 강기욱 실장께서 오래토록 애일당을 지켜오고 있다.

 

 

 

 

 

 

 

이안당 怡安堂

 

 

 

 

 

 

 

 

 

 

 

 

 

 

 

 

 

 

 

 

 

 

 

 

 

 

 

 

 

 

 

 

 

 

 

모두 세 차례에 걸쳐 이건하였다는 월봉서원.

고봉 사후 7년(1578 선조 11), 바로 앞에 보이는 산 너머 고마산 아래 '망천사'를 건립하여

고봉의 위패를 봉안한 게 서원의 시초.

그 때 전라도 관찰사로 있었던 황강 김계휘(1526~1582)가 30석 전답을 서원에 귀속시켰고,

송강 정철(1536~1593)이 전라감사로 재직시 노비와 전답을 서원에 귀속시키는 등

서원의 경제적 토대를 마련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1646년(인조 24)에 지금의 위치로 옮겼으며, 1654년(효종 5)에 사액서원이 되었다.

1671년(현종 12) 박상(朴祥)·박순(朴淳)의 위패를 옮겨 봉안했으며, 1673년 사계 김장생(金長生)·

신독재 김집(金集)을 추가 배향했다. 1654년(효종 5) 유림이 상소를 올려 사액을 받았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38년 이후 복원되었다

 

임란으로 망천사가 소실되었던 것을 광산구 비아동 월봉마을로 옮긴 것이 두번째이고

1938년 행주기씨문중이 힘을 합해 서원 복원을 추진, 현재의 너부실(광곡)마을로 이건.

사액을 받을 당시 월봉(月峯), 도산(道山), 동천(桐川)을 놓고 도산(道山)으로

결정되었으나, 후일 '월봉'으로 최종 낙착되었다고 한다

 

아래는 정조(正祖)가 정무신년(1788) 4월 11일

예조좌랑 박흥복(朴興福)을 통해 고봉에게 내린 제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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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理氣)의 근원과 전례(典禮)의 상변(常變)을 명쾌하게 분석하였으니 선배도 두려워 하였다.

엄정하게 조정에나아가니 간사한 무리들이 숨을 죽였다. 군신의 의리가 밝았고, 행동에도 여유가 넉넉하였다.

남쪽으로 고향에 돌아가나 명예와 절조가 높았도다. 내가 유서를 읽으니 그것이 "논사록"이라.

사관이 모아서 기록한 것을 성조(聖祖)께서 명명(命名)하셨네. 훌륭한 그 말씀이여, 같은 시대에 태어나지 못함이

한스러워라. 촛불을 여러번 바꾸어 켜고 책을 읽으며 서너번이나 무릅을 치고 감탄하였네. 서로 먼 세대에 감동되니

내 그리움은 더욱 두텁네. 이는 실로 정신끼리 사귄 것이니 어찌 옛날과 지금의 간격이 있을손가.

높은 풍운(風韻) 아직도 없어지지 않았으니, 저 호남 마을에 선생의 사당(祠堂) 우뚝 솟아있네.

선생의 덕은 산처럼 높고 물처럼 깊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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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ao Sasak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