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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포럼·강좌·워크숍

제4회 월봉서원 유교 아카데미 3편

제4회

월봉서원 유교 아카데미

 

- 3편-

- 유교 사상과 서양사상 2 - 

 

                                                                                                                                                                        2014. 2. 2

 

담장을 따라 월봉서원을 한 바퀴 돌아봅니다.

 

 

 

망천문 앞에서 오른쪽으로.

 

 

 

 

 

 

 

 

 

 

 

빙월당

 

 

 

 

 

 

 

 

 

 

 

숭덕사

 

 

 

 

 

 

 

 

 

 

 

 

 

 

 

 

 

 

 

월봉서원 교육관

 

 

 

 

그리스 비극과 유교 - - 운명에 대처하는 자세

 

양진호 (지혜학교 철학교육연구소)

 

 

지난 시간의 강의 내용은 고대 그리스인들과 그들의 자유에 관한 것이었다.

내적 자율, 내적 자치 등이 자유의 본질이라 한다면 내 의지와 관계없이 나를 밀어가는 압박과 힘을 비롯한

외적인 것 들을 밀쳐내고 그것에서부터 해방되는 두가지 조건이 교묘하게 어우러져야 ‘자유’의 상태에 이름을 알게 된다.

‘자유인’이라는 것도 내 외적인 상황이 맞아 떨어져야 함은 두 말할 나위가 없겠다.

태어나면서부터 ‘자유인’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물론 인간의 존엄성을 비롯한 속성들을 보면

‘자유인’이라는 딱지는 가지고 있지만, 언필칭 ‘사단칠정’의 여러 조건들이 발현되어지지 않는다면

것은 항상 가능성에만 머물러 있는 時 같은 것에 불과한 것이다.

 

오늘은 동서양 문명에 관계된 ‘인물열전’을 준비했다.

첫 번째로 유럽인들의 교과서라 불리우는 BC 8세기 호메로스 “일리야스” 대 서사시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서양문명의 두 줄기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로 내려가는 전통이지만 다른 하나는 바로 기독교 전통을 들 수 있겠다.

이 두 줄기의 융합이 유럽문명을 형성해 왔다. 유대인과 히브리인들의 한 에피소드 ,그리고 동양 쪽 에서는 삼국지와

초한지 등을 살펴보기로 하는데 오늘 주제도 역시 지난 시간과 마찬가지로 ‘자유’라 할 수 있겠다.

 

 

 

 

BC 8세기 최초의 문학작품으로 남아있는 호메로스 "일리야스"를 설명하기 위해

수사학자이자, 웅변가, 문학평론가이기도 했던 '롱기누스'의 "숭고에 관하여"를 가져왔다.

다 아시다시피 작품 배경은 "트로이 목마"이다.

유럽 국가들의 교과서라 할 수 있는 책이 바로 '일리야스'이다.

지금도 유럽인들은 ‘일리야스’를 외우며 그 안에서 인간의 용기와 삶의 지혜를 배운다고 한다.

 전쟁 영웅에 관한 '롱기누스'의 칭송을 한 번 들어보자.

 

친구여~~~~

 

 

 

 

 

 

 

 

 

 

호메로스 [Homeros]

 

(영) Homer. ?~ ?

BC 9세기 또는 BC 8세기경에 활동한 고대 그리스의 시인.

 

 

서사시의 걸작 〈일리아스 Iliad〉·〈오디세이아 Odyssey〉의 저자로 추정된다.

그리스인들이 이 2편의 서사시에다 호메로스라는 이름을 결부시켰다는 사실말고는, 그에 대해서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호메로스에 대한 객관적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에, 몇 가지 추측이 나오게 되었다. 예를 들어 독일의 비평가 겸 문헌학자는

이 2편의 서사시가 원래는 모든 민족에 자연발생적으로 나타나는 일종의 문화적 소산이라고 주장했고, 새뮤얼 버틀러(1835~1902)는

〈오디세이아〉의 저자가 여성이라고 주장했다. 호메로스라는 이름의 시인이 있었고, 그가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의 형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만은 있음직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전제가 받아들여진다면, 호메로스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학 예술가들 가운데 한 사람임이 분명하다(→ 색인 : 호메로스 서사시, 그리스 문학).

 

또한 호메로스는 넓은 의미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하다.

2편의 서사시는 고전시대 전반에 걸쳐 그리스의 교육과 문화의 토대가 되었고,

로마 제국 시대에 그리스도교 신앙이 널리 퍼질 때까지  사실상 인문 교육의 뼈대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색인 : 교육사).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간접적으로는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Aeneid〉(이 작품은 대체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느슨하게 모방해 만들어졌음)를 통해, 직접적으로는 8세기말부터 두 작품을 되살린 비잔틴 문화를 통해, 그후에는 오스만 제국에서

 서쪽으로 망명한 그리스 학자들이 이탈리아로 가져온 두 작품을 통해,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문화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이때부터 수많은 번역이 이루어졌으며, 두 작품은 유럽의 고전문학 전통에서 가장 중요하고 베르길리우스와 단테의 작품들보다도

더 뛰어난 업적으로 평가되었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고대 그리스 문화 자체에 미친 영향을 통해 서양의 윤리와 사상에

가장 미묘하게 영향을 미쳤다. 그리스인들은 이 위대한 서사시들을 문학작품 이상의 것으로 보았다. 그들은 이 서사시들을 거의 다 외었고,

그것을 그리스 문화의 통일성과 영웅주의의 상징으로 뿐만 아니라 도덕적 가르침과 실천적 교훈의 오랜 원천으로 존중했다.

서사시는 민간 전승에 그 뿌리를 두었고, 따라서 시의 부자연스러운 말투를 좀더 합리적인 행동규범으로 바꾸려고 애쓴

플라톤에게 호메로스는 커다란 걸림돌이었다.

 

- 브리테니커 -

 

 

 

일리야스(Ilias)

요약
고대 그리스 호메로스의 작품으로 유럽인의 정신과 사상의 원류가 되는 그리스 최대 최고의 민족 대서사시.

1만 5,693행, 24권. 각권마다 그리스 문자의 24 알파벳순(順)으로 이름이 붙어 있다.

옛날에는 각권마다 그 내용에 부합되는 이름이 붙어 있었고, 알파벳순으로 이름을 붙이는 방법은 BC 3세기에 처음으로 쓰인

권별법(卷別法)이었다. 《일리아스》는 도시 트로이의 별명 일리오스(Ilios)에서 유래한 것이며, ‘일리오스 이야기’라는 뜻이다.

10년간에 걸친 그리스군의 트로이 공격 중 마지막 해에 일어난 사건들을 노래한 서사시이다.

스파르타왕 메넬라오스의 왕비로 절세의 미인인 헬레네를 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유혹해 간다.

이에, 그리스인들은 총사령관 아가멤논의 지휘로 1,000척의 배를 거느리고 트로이를 공격하지만 트로이 성(城)은 함락되지 않는다.

자신을 섬기는 사제 크라이세스의 딸 크라이세이스가 아가멤논에게 잡혀가자 격노한 아폴론 신(神)이 벌로 액병(厄病)을 내린다.

이 수습책 때문에 벌어진 말다툼에서 아가멤논에게 모욕을 당한 그리스 최고 영웅 아킬레우스가 노하여 싸움에서 손을 뗀다.

 이 아킬레우스의 이탈이 바로 《일리아스》의 주제이다. 아킬레우스의 어머니인 바다의 여신 테티스의 간청으로

주신(主神) 제우스는 신(神)들에게 양군을 원조하지 말도록 명하여 그리스군을 패배케 한다.

패배한 그리스군의 참상을 좌시할 수 없어 아킬레우스의 친구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의 무구(武具)와 전차를 빌려

그의 군대를 이끌고 출전하여 적을 패주(敗走)시켰으나 그는 트로이의 장수 헥토르에게 살해된다. 이 소식에 접한 아킬레우스는

복수하기 위하여 헤파이스토스가 특별히 만들어준 갑주를 입고 출전하여 헥토르를 살해하고 그 시체를 욕보인다.

헥토르의 아버지 프리아모스왕은 신들의 비호(庇護)로 야음(夜陰)을 틈타 아킬레우스의 막사를 찾아가

헥토르의 시체를 받아 가지고 돌아오는 것으로 끝맺는다.

《일리아스》는 비극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사건에 집중하여, 트로이 공방 50일 동안의 이야기 속에 10년의 전망을 담았으며,

과거를 뒤돌아보고 미래를 암시함으로써 비극성을 강조하였고, 여러 가지 비유로 자연계와 인간계의 관계를 특색 있게 묘사하였다.

무용(武勇)을 노래하고 그리스 기사도를 찬양한 이 시는 방랑 시인 호메로스에 의해 BC 900년경 쓰여진 작품이다.

그리스인들에겐 오디세이아(Odysseia)와 함께 그리스 민족의 단일성과 영웅적 자질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유럽인의 정신과 사상을 낳은 원류가 되고 있다. 이 시는 사고하는 방식에 있어 신의 눈이 아닌 인간의 눈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함으로써

인간주의적 접근을 시도한 최초의 작품이며, 냉혹한 사실주의적 표현으로 인해 플라톤은 일찍이 아이들에게는 금서로 할 것을

제안한 바 있다. 유럽 서사시의 모범으로서 라틴 문학을 거쳐 유럽 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 두산백과 -

 

 

 

카시우스 롱기누스(Kassios Longinos)

 

요약 
고대 그리스 말기의 문헌학자 ·수사학자. 아테네에서 가르쳤고, 신플라톤학파의 철학자 포르피리오스도
제자 중의 한 사람이다. 《원리에 대하여》, 《궁극목적(窮極目的)에 대하여》 등의 저작이 있다.  

아테네에서 가르쳤고, 신플라톤학파의 철학자 포르피리오스도 제자 중의 한 사람이다.

 

《 원리에 대하여》 《궁극목적(窮極目的)에 대하여》 등의 저작이 있다. 한편, 《숭고한 문체에 대하여 Peri Hypsūs》의

 

저자로   잘못 알려짐으로써 그의 이름은 더욱 유명하게 되었다. 이 책은 그 내용으로 보아 1세기 후반경의 어느 이름을 알 수

 

없는 그리스 수사학자의 저작이다. 문학에서의 숭고함은 무엇으로 구성되는가를 논하면서 그것을 위대한 발상, 강한 정서, 예술적 구성,

 

고귀한 언어 구사 등에서 구하고
호메로스 이래의 그리스 고전문학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적절한 논평을 가한

 

고대 최고의 문학 비평서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 백과사전에서 발췌한 내용 -

 

 

오이디푸스 (Oedipus)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

테베의 왕으로, 자신의 부모인 줄 모르고 아버지를 살해한 뒤 어머니와 결혼했다.

호메로스에 따르면, 그의 어머니는 오이디푸스와의 진정한 관계가 밝혀지자 목을 매어 자살했으나 오이디푸스는 죽을

때까지 테베를 통치했다고 한다. 호메로스 이후 오이디푸스에 관한 내용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Oedipus Rex〉·

<로노스의 오이디푸스 Oedipus Coloneus〉가 유명한데, 강조점이나 구체적인 사항에 있어 예전과 다소 차이가 난다.

전설에 따르면, 테베의 왕 라이오스는 아들에게 살해될 것이라는 신탁을 들었다.

따라서 아내 이오카스테(호메로스 서사시에서는 에피카스테)가 낳은 아들을 키타이론 산에 버렸다.

그때 그는 아이의 두 발목을 한데 못질했으며, '부풀어오른 발'을 의미하는 오이디푸스라는 이름은 거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아이는 한 목동에게 발견되었고, 코린트의 왕 폴리보스의 양자가 되어 자라났다. 청년이 되어 델포이를 방문한 그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될 운명을 갖고 태어났다는 것을 알게 되어, 결코 코린트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방랑의 길에

올랐다. 테베로 가던 중에 만난 라이오스가 싸움을 걸어 결국 오이디푸스는 라이오스를 죽이게 되었다. 여행을 계속하던 중 그는

스핑크스 가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아 수수께끼를 내서 풀지 못하면 죽여버림으로써 테베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오이디푸스가 그 수수께끼를 풀자 스핑크스는 자살했다. 이에 대한 보상으로 그는 테베의 왕이 되었으며 미망인이 된 왕비

이오카스테, 즉 그의 어머니를 취하게 되었다. 그들 사이에서 에테오클레스·폴리네이케스·안티고네·이스메네 등 4명의 아이들이

 태어났다. 그후 진실이 밝혀지자 이오카스테는 자살했으며, 오이디푸스는(다른 출전에 따르면) 자신의 눈을 찔러 눈을 멀게 한 다음,

처남 크레온을 섭정으로 남기고 딸 안티고네·이스메네와 함께 나라를 떠났다고 한다. 마침내 그는

아테네 근처 콜로노스에서 죽었으며, 곳 땅이 그를 삼켰고 그는 땅의 수호신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오이디푸스 전설은 역사적인 사실을 기초로 한 것일 수도 있으나, 민담의 요소를 빼면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오이디푸스 이야기는 알바니아·핀란드·키프로스·그리스 등의 민간설화에도 나온다. 이 고대의 이야기는 대단한 극적 매력을 지녀,

세네카를 거쳐서 피에르 코르네유, 존 드라이든, 볼테르 같은 극작가들에게 전해졌다. 20세기에도 그 인기는 퇴색하지 않아,

이고리 스트라빈스키의 세속적인 오라토리오 〈오이디푸스 왕 Oedipus Rex〉, 앙드레 지드의 〈외디프 Oedipe〉,

장 콕토의 〈폭탄 La Machine infernale〉 등도 이 이야기를 소재로 했다. 지크문트 프로이트는 아들이 어머니에 대해 애정의

감정을 느끼면서 아버지에 대해서는 질투와 혐오를 지니는 경향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고 했는데,

실상 이것은 오이디푸스의 행동 동기나 성격을 좌우한 감정과는 상관이 없는 얘기이다.

 

- 브리태니커 -

 

 

 

 

“우리가 죽는 것이 그대의 기쁨일진대 제발 밝은 데서 죽이소서!”

 

이것은 실로 대단한 용맹이요, 가히 신들도 쫄법한 당당함이 아니겠는가?

나는 위 대목을 읽으면서 소름이 돋았다.

내용의 실제 여부를 떠나 그리스인들이 위와 같은 내용의 時를 읽고 외며, 용기를 기르고

서로를 격려했다는 사실에 감동 했다는 뜻이다. 여기서 신과 인간의 관계가 다시 한번 정리되고 있다.

신의 명령에 불복하지는 않는다. 다만 내 정신과 명예의 크기에 따른 죽음을 달라는 것이다.

그리스 영웅의 용기와 용맹의 표상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라 보면 되겠다.

영웅의 표상 반인반수의 아킬레우스 조차도 절대 신에게 불복하는 일은 없었다.

 한 마디로 고대 그리스 모든 것들은 신과 신화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어떤 학자는 그리스 신화를 이렇게 해석하기도 한다.

“신의 세계는 인간세계의 원인이고, 원인에 따라 인간세계에 그 결과로 나타날 뿐이다.”

영웅은 있되 아직 진정한 ‘자유인’의 모습을 볼 수 없는게 BC 8세기의 모습인 것이다.

 

 

 

 

 

3. 그럼 히브리인들은?

 

기드온이 말하였다. (구약 사사기 6장14-21절)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제가 어떻게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가?"

 

기드온은 "벌채" 또는 "벤다"는 뜻이다. 므낫세지파 요아스의 마지막 아들이었다(삿6:11).

그는 농장과 과수원을 가진 순수한 농부였다.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곳도 타작마당이었다.

그는 독실한 신앙때문에 하나님께 선택되었고 큰 사명을 감당하게 되었다. 히브리서 11장에서도 믿음의 선배들을 소개할 때

기드온을 꼽고있다(히11:32).기드온은 상당한 능력이 있는 사람인데 도 그 개인과 자기 가문을 가장 약하고 작은 자라고 소개하여

 자기가 소유하고 누리는 인생의 여건보다 훨씬 겸손한 태도를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러한 기드온에게 하나님은 미디안에서 내 백성을 구원하라고 사명을 허락하였다.

또한 미디안 사람치기를 한 사람치듯 할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그때에 염소와 무교전병과 고기와 국물을 반석을 통해 드렸는데

 여호와의 사자가 지팡이끝을 재물에 대어 하나님의 응답을 불로 확인시켰다. 그러나 기드온은 다시 마당위에 놓인 양털로

이슬을 통해 하나님의 허락을 재차 확인하였다. 그후에 3만2천명 중에서 3백명을 선발하여 항아리와 횃불을 통해 미디안을 친 것은

큰 승리중의 하나였다. 또한 바알의 단을 훼파하여 여룹바알이라는 별명을 들었는데 이는 바알과 싸우는 자라는 뜻으로

그의 영적 입지를 더욱 견고케 해주고 있다. 그러나 70명의 아들로 슬픈 기록을 남겼다

 

- 교훈 -

 

1. 크게 타락한 시대에도 역사를 이어가는 믿음의 의인들이 남아있었다

2. 기드온은 공적인 사명자로서는 성공하였는데 도덕적인 사생활은 본이 되지 못했다. 깨끗이 살자.

 

 내용출처 : KCM

 

  

 

 

4. 비극적 영웅 - 소포클레스 "오이디푸스 왕"

 

고대 그리스어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말이 ‘운명(Moira)’이다.

 우리 말의 가장 편안한 번역은 ‘몫’이라 하겠다.

 내용은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우주에서 내게 주어진 몫이라는 뜻이다.

 즉 서양인들이 운명이나 신에 대처하는 자세에서 오늘의 주제인 '자유인'의 모습을 살펴보려는 것이다.

BC 8세기 이후 왕정에서 그리스가 민주정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이라는 작품이 있고,

그 속에 바로 우리가 말 하고 있는 ‘자유인’의 모습이 싹을 틔우기 시작하는데,

이를테면 외적인 운명에 대처하는 유럽인들의 독특한 방식이 분출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오이디푸스 왕‘

 

그것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취해 산다는 그야말로 막장드라마의 원조격.

하지만 우리는 그 내용을 통해 운명에 대한 통찰을 해보게 된다.

운명으로 대변되는 모든 외적인 것들에 대해 이 시간 이후로는 그 어떤 외부적 요인에도나는 굴하지 않으리라.

오직 내가 내 스스로를 다스려서 내 한 표를 행사하리라. 라는 각오를 다지지 않았다면

위와같은 막장드라마가 어떻게 시민들에게 어필 할 수 있었겠는가? 라는 하나의 가설을 던져본 것이다.

왕정에서 민주정으로 넘어가는 과정, 자신의 존엄성을 표출하려고 애쓴 비극적 영웅의 삶을 통해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리게 되는 문명사적 과정 등을 그리스 문학을 통해 살펴 보았다.

 

 

 

 

 

 

사마의司馬懿 - 복응유교(服膺儒敎)

 

 

한(後漢) 안제(安帝, 재위 106~125) 때 정서장군(征西將軍)을 지낸 사마균(司馬鈞)의 후손.

 "유학(儒學)의 가르침을 늘 깊이 간직하고 따랐다(服膺儒敎)"고 전해진다.

 

220년 조조가 죽고, 조비가 왕위에 오르자 중용되었으며, 224년에는 상서(尚書)로 임명되었다.

 226년 조비가 죽자, 조진(曹眞)ㆍ진군(陳群)ㆍ조휴(曹休) 등과 함께 보정대신(輔政大臣)으로 명제(明帝) 조예(曹叡)를 보좌하였다.

231년 조진이 죽은 뒤에는 대장군(大將軍)의 지위를 이어받아 제갈량(諸葛亮, 181~234)이 이끄는 촉군(蜀軍)의 공격을 물리치는

공을 세웠다. 238년에는 요동(遼東)의 공손연(公孫淵)이 반란을 일으키자 관구검(毌丘倹), 호준(胡遵) 등과 함께

 이를 정벌하여 요동(遼東) 지역을 위(魏)에 병합하였다.

239년 명제(明帝)가 임종할 때 조진의 아들인 조상(曹爽,  ?~249)과 함께 애제(哀帝) 조방(曹芳)의 보좌를 부탁받았다.

조상은 사마의를 태부(太傅)로 전임시키며 군권(軍權)을 빼앗으려 하였으나, 그는 오(呉)의 공격을 물리치며 기병(騎兵) 중심의

 군사력을 유지하였다. 그 뒤 병이 든 것처럼 꾸미며 은인자중(隱忍自重)하였으나, 249년(正始 10년) 조상(曹爽)이 애제(哀帝)와 함께

고평릉(高平陵)을 방문한 틈을 타서 정변(政變)을 일으켜 조상(曹爽)을 살해하고, 위(魏)의 권력을 장악하였다.

그 뒤 안평군공(安平郡公)에 봉해졌으나, 251년(嘉平 3년)에 병으로 죽었다. 

 

 

 

한신(韓信) - 과하지욕(誇下之辱)

 

진나라 말 나라의 국운이 기울면서 난세가 되자 항우(項羽)가 그의 숙부인 항량(項梁)과 함께 군사를 일으켰는데

한신은 이에 가담하였다. 하지만 한신이 미천한 신분이라는 이유로 요직에 중용되지 못했고 한직으로 전전했다.

한신이 불우하던 젊은 시절에 시비를 걸어오는 시정(市井) 무뢰배의 가랑이 밑을 태연히 기어나갔다는 일화 때문에 자신의

재능보다 무시되기도 하였다. 그 이 일화로 과하지욕(誇下之辱)이라는 고사가 생겨 날 정도로 한신과 관련된 유명한 일화다.

이런 이유 뿐만아니라 항우의 성품이 거만하여 자신의 재능을 알아보지 못하자 결국 항우를 떠나 유방(劉邦)의 진영에 가담하였다.

 

하지만 유방의 휘하에서도 인정을 받지 못하다가 군법을 어긴 죄로 목숨이 경각에 달했는데 하우영이 한신의 탄식을 듣고

살려주었다. 하우영은 한신의 재능을 알아보고 승상 소하(蕭何)에게 추천하였고 소하는 한신의 재능을 인정하였다.

소하는 유방과 함께 군사를 일으킨 사람으로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는 인물이었다. 소하는 한신이 한나라 진영에서 달아나자

그를 다시 데려와 유방에게 천거하였고 파격적으로 삼군총사령관인 대장군에 임명하였다.


한신은 해하(垓下)의 싸움에 이르기까지 유방의 군사를 지휘하여 한(韓), 위(魏) 등 제국(諸國)의 군세를 격파하였다.

특히 조(趙)나라와의 싸움에서 한신의 재능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한신은 불과 2만의 군사로 배수진을 치고 그 10배인 조나라를

제압했으며 조나라의 명장이자 전략가인 이좌거를 부하로 얻게된다. 한신의 기세가 날로 커지자 항우와 유방의 싸움에서 새로운

변수로 떠오르게 되었다. 한신은 이어 제(齊)나라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는데 이때 외교술로 전투없이 공략하려던 유방의 뜻과 달리

 무력으로 제나라를 굴복시켰다. 한신은 군사면에서 크게 공을 세우자 유방에게 제나라 왕(齊王) 자리를 요구했다.

유방은 항우와의 싸움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할 수 없이 한신을 제나라 왕으로 임명했고

후일 이일로 한신과 유방이 등을 돌리는 요인이 되었다.

 

유방이 항우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한(漢)나라의 황제로 등극하자 한신의 병권을 빼앗고 초(楚)나라 왕으로 임명하였다.

초나라 왕은 병권이 없고 제왕으로 명분만 있는 자리였다. 한신은 고향인 초나라 왕으로 금의환향하면서 예전 자신이 불우한

시절에 밥을 먹여준 표씨 여인에게 천금으로 은혜를 갚았는데 이를 두고 일반천금(一飯千金)이라는 고사가 생겼다.

그리고 자신을 가랭이 밑으로 기어가게 한 무뢰배에게는 치안을 담당하는 중위(中尉)로 임명하였다.

 이 일로 한신은 초나라에서 덕망이 높고 고매한 인품을 가진 왕으로 칭송되었다.


그러나 한제국(漢帝國)의 권력이 확립되자 유방과 참모들의 견제를 받았다. 유방이 황제로서 제후국을 순회하며

초나라를 방문하자 한신은 자신에게 위협이 될 것으로 짐작하였다. 한신은 유방을 안심시키고자 자신에게 의탁해온

종리매(鐘離昧)의 목을 베어 유방에게 바쳤다. 종리매는 항우 휘하에 활약했던 유명한 장수로 유방의 진영을 괴롭혔던 인물이었다.

그는 항우가 죽자 친구 한신에게 의탁하여 초나라에 머물고 있었다. 하지만 이일은 오히려 한신에게 불리하게 작용하여

민심을 잃었고 유방은 한신을 모반죄로 체포하여 장안(長安)으로 압송하였다.

 이때 한신은 유방을 원망하며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는 말을 남겼다.

 

 

 

 

오자서 (伍子胥) - 일모도원(日暮途遠)

 

자서(子胥)는 자이고, 이름은 원(員)이다. 중국 춘추시대 초(楚)나라에서 오사(伍奢)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오사가 평왕의 아들인 태자 건(建)의 스승으로서 태부(太傅) 직책에 있을 때, 평왕이 비무기(費無忌)의 참언으로

 태자를 죽이려 하고 오사를 감옥에 가두었다. 비무기는 평왕을 부추겨 오사를 인질로 삼아

그의 큰아들 오상(伍尙)과 오자서를 불러들여 죽임으로써 후환을 없애고자 하였다.

 오상은 이것이 함정인 줄 알면서도 부름에 따라 아버지와 함께 살해되었으나

 오자서는 복수를 기약하며 도주하였다.

송(宋)나라와 정(鄭)나라를 거쳐 오(吳)나라로 간 오자서는 합려(闔閭)를 보좌하여 오나라를 강국으로 키웠다.

BC 506년 오나라가 초나라를 함락시킨 뒤, 오자서는 평왕의 아들 소왕(昭王)을 잡으려 하였으나 이미 도망친 뒤였다.

이에 평왕의 묘를 찾아 시신을 파낸 뒤 채찍질을 300번 함으로써 복수하였는데,

굴묘편시(掘墓鞭屍)는 여기서 유래된 고사성어이다.

 

오자서는 그의 혹독한 행동을 나무라는 친구 신포서(申包胥)에게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멀어 도리에 어긋난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답하였는데,

 여기서 일모도원(日暮途遠)이라는 고사성어가 유래되었다.

오자서는 초나라를 함락시킨 공으로 신(申) 땅에 봉해져 신서(申胥)라 불리게 되었다.


사마천은 《사기(史記)》〈오자서전(伍子胥傳)〉에서

소의(小義)를 버리고 큰 치욕을 갚아 명성이 후세에 전해졌으며, 모든 고초를 참고 견디며 공명을 이룬

강인한 대장부라고 평가하였다. 당(唐)나라 때에는 영렬왕(英烈王)으로 추존되었으며, 그와 관련된 여러 고사성어가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장쑤성 쑤저우에 후세 사람들이 그를 기려 세운 사당 우샹츠[伍相祠]가 남아 있다.

 

- 백과사전에서 간추린 내용 -

 

 

 

 

 

- 강의를 마치고서의 담론 -

 

 

사회 : 강기욱 (고봉학술원)

 

삶과 죽음의 문제가 모든 공부의 종결점이라는 생각입니다.

생사 문제를 정리하지 못하면 결국 헛공부가 아닐까요?.

죽음에 이르러 얼마만큼의 노트정리가 되어있는가가 인생의 성적표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성적표를 가지고 내생에 다시 태어날 거라는 생각입니다.

운명으로 받아들이던, 선택으로 받아들이던 간에 그것이 바로 조선의 '생사학'이 될 겁니다.

 우리가 공부했던 지금까지의 내용들이 모두 이미지로 저장될 터인데,

이미지의 극치는 오장육부의 울림을 통한 공연인 것 같습니다.

 

 

 

질의자 : 오이디푸스의 운명론이 사실에 근거한 것인지 전적인 소설인지가 궁금하다.

 

강사 : 기록상으로 오이디푸스 왕이 있었던 것은 맞지만 전체적인 내용 중에

 실제와 신화가 많이 섞여 있다고 보면 된다.

 

 

질의자 : 실제로 자식이 어머니를 범했겠는가? 운명에 대한 자연에 대한 당시의 사회상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작품의 극화를 위해  꾸몄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눈을 찌르고 자유를 외쳤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나는 사회상을 어머니로 본다. 즉 운명을 부모로 보는 것이다.

 

강사 : 작품의 극화를 위해 꾸민 충격적 내용이라는 질문자의 의견에 공감한다.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라는 생물학적인 것들을 하나 하나 제거해 나가는 것이다.

심지어 아들까지도 버리는 당당한 대 자유인의 길을 우리 모두에게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Thors - In Harmon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