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 13
부산 대연교구 신년 특별 수련회
재개발로 대연교구가 역사 속으로...
홍암 라인협 선생 묘지표지석
▲ 유재원 천도교 대연교구장이 교구 내에 모셔진 라인협 선생의 묘지 표지석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정종회 기자 jjh@ |
부산 남구 수영로를 따라 대연동에서 문현동으로 오다 보면 대연고개를 넘게 된다.
대연고개 오른쪽으로는 재개발 사업이 한창 진행 중이다. 다른 재개발 구역과 다를 바 없는 곳이지만, 40년 전 이곳에는 커다란 묘가 있었다. 바로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이름을 올렸던 홍암(泓菴) 라인협(羅仁協) 선생의 묘다.
■홍암 라인협은 누구인가?
1872년 평안남도에서 태어난 홍암은 19세에 동학에 몸을 담았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평안도에서 지도적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당시 '척양척왜'(斥洋斥倭)를 외치며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동학은 일제의 극심한 탄압을 받게 되고, 이를 피해 동학은 '천도교'로 이름을 바꾸고 종교단체로 등록한다.
독립투사 홍암 라인협 선생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
만세 삼창 외친 후 2년간 옥고
6·25 때 부산 피란 후 민중 교화
지역 곳곳에 항일 흔적 남아
대연고갯길 그의 호 따 '홍암길'로
1919년 2월 25일 천도교 기도회 종료보고와 고종 국장 참배를 위해 서울로 올라온 홍암은 천도교 지도자인 손병희, 오세창 등을 만나 3·1 독립만세운동 계획을 듣게 된다. 27일에는 최린 등 동지들과 함께 '독립선언서' 등의 초안을 검토했고,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이름을 올린다.
3월 1일 오후 2시, 서울 인사동 태화관에 모여 만세 삼창을 외친 후에는 일본 경찰에 자진 출두해 서대문 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르게 된다. 출옥 후에는 천도교 도사(道師)로 활동하면서 포교와 민중교화운동에 힘썼다.
■홍암의 묘가 부산에 조성된 이유는?
출옥 후 평양에서 포교 활동을 하던 홍암은 6·25 전쟁이 일어나자 1·4 후퇴 때 막내아들과 함께 부산으로 피란했다. 동구 범일동 변전소 뒷산에서 머무르며 제대 군인, 상이군경, 휴가 군인 등을 상대로 주로 강연을 펼쳤다. 홍암의 증손자인 라명재(50·경기도 평택시) 씨는 "당시 한창 전쟁 중이라 나라가 망하는 것 아니냐는 위기의식이 많이 퍼져 있어서 최전선에 있던 군인들을 상대로 이들의 의지를 다지고 민족성을 고취하는 강연을 주로 하셨다"고 설명했다.
부산에서 2년 가까이 머무르던 1952년 4월 16일 아침, 홍암은 평온하게 숨을 거두었다. 라 씨는 "저녁 식사 후 술 한 잔을 들고 주무셨는데 그 다음 날 환원(還元:'별세'의 천도교식 표현)하셨다고 들었다"며 "평생 수양하시며 민족에 봉사하셔서 좋은 환원을 맞으신 것 같다"고 전했다.
1952년 4월 20일 부산에서 사회장으로 치뤄진 라인협 선생의 장례식 장면. 증손자 라명재 제공 |
전쟁 중이었지만 그의 장례는 예우를 갖춰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부산진역에 빈소를 차리고 초량역 광장에서 영결식을 치렀다. 당시 지관은 대연동 산에 묘를 쓰라는 의견을 냈고, 지금의 대연동 1600-464(홍암1길 74)에 묘지를 쓰게 됐다. 땅을 소유하고 있던 부산방송국은 이 땅을 유족 측에 넘겼다.
■홍암의 묘, 이북의 피란민과 아이들을 보듬다
1962년 정부는 그의 독립운동 업적을 인정해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전쟁 통에 비석 하나 없던 그의 묘에 묘비가 세워지게 된 것도 이맘때 일. 천도교 대연교구에는 1962년 8월 19일 홍암 라인협의 묘비 제막식이 열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선생의 묘지 비석 제막식 기록이 적힌 천도교 대연교구 약사. 정종회 기자 jjh@ |
전쟁 때 피란을 와 지금까지 이곳에 사는 이성희(81) 할머니는 당시 제막식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무덤은 50평이 넘는 넓이에다 높이가 3m가 넘을 정도로 엄청나게 컸어. 제막식 때는 사람들이 밟힐 정도로 많이 왔지. 군악대도 오고 아주 성대하게 행사를 했어."
당시 대연동 일대는 이북에서 온 피란민들이 주로 모여 살던 곳이었다. 천도교가 주로 이북에서 교세를 떨쳤던지라 교인이 많았다. 홍암의 묘는 천도교인과 동네 주민들이 함께 만들었다. 홍암의 묘 주변으로 천도교인들이 모여 사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
이 할머니가 기억하는 홍암의 묘는 아이들의 놀이터이자 동네 앞마당과 같은 곳이었다. "묘에는 울타리가 쳐져 있어서 못 들어가도 그 앞에 마당은 꽤 넓었거든. 그때 놀이터가 있나, 뭐가 있나. 애들은 맨날 고개에 올라가서 놀고, 연휴 때는 가족들끼리 올라가서 쉬다가 가기도 하고, 교인들도 찾아오고."
■홍암, 다시 부산과 만나다
1973년 10월 31일, 홍암의 묘는 유족들의 요청으로 국립묘지로 이장하게 된다. 이장 후 묘지 터에는 주택이 들어섰다. 그러면서 대연고개 근처에 홍암의 묘가 있었다는 사실은 점점 잊혀 갔다. 이를 다시 기록으로 끄집어낸 것은 공기화(68) 부산교대 명예교수다.
공 교수는 2012년 '남구 향토사'를 쓰면서 홍암의 묘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 나도 그곳에서 놀았지만, 당시에는 누구의 묘인지도 몰랐다"며 "정년퇴임 이후 남구 향토사를 쓰면서 그 동네 출신 후배들에게 묻다 보니 그곳이 홍암의 묘였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성희 할머니가 선생의 묘지가 있었던 곳을 가리키고 있는 모습. 정종회 기자 jjh@ |
원래 이성희 할머니의 집 바로 아래에는 '홍암 라인협 선생 묘 입구'라고 쓰인 묘지 표지석이 있었다. 국립묘지 이장 후 그 역할이 사라지게 된 표지석은 현재 대연교구 마당으로 옮겨졌다. 이 표지석은 부산에 홍암의 묘가 있었음을 알려 주는 유일한 유형자산이다.
하지만 그를 기리기 위한 노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부산시는 도로명 주소로 전환하면서 홍암의 묘가 있던 대연고갯길을 '홍암길'로 이름 붙였다. 산비탈에 위치한 홍암길을 걸으면서 그의 행적을 다시 한 번 기려 본다. 부산일보 박진숙 기자 true@busan.com
방문 소개와 인사
수련
수련회에 참석하신 송봉구 교수님의 저서
<약력>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졸. 성균관대 유학과 석사. 성균관대 유학과 박사
한국동양철학연구회 회원. 한국유교학회 히원. 영산대학교 자유전공학부 교수
<저서>
주자의 공부방법론 연구. 처음 만나는 논어이야기. 동양고전탐구. 처음 만나는 명심보감
<논문>
맹자의 호연지기 연구. 정이천의 심성 거경궁리론 연구. 정이천의 수양론 연구.
주자의 겨경에 관한 연구. 주자의 거경궁리론 연구.
부산 자갈치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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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월당님을 비롯,
선수당님, 한울연대 고운당 상임대표님, 학암장 김학봉 선생님.
대연교구 동덕 여러분에 이르기까지.
모두들 정성으로 반겨 주심에 황송함을 넘어 그저 몸둘 바 어려웠습니다.
'감천문화마을' 안내와 해설을 도맡아 주시는 것으로도 모자라
숙소 제공에다 산해진미의 호사까지 안겨주시느라 물심 양면으로 애써 주신
남월당님의 수고로움과 자애로운 배려에 다시 한 번 머리 숙여 감사드리구요.
포덕 155년, 대신사 순도 150주년. 갑오동학혁명 120주년.
신년 특별 수련이 진행되고 있는 천도교 대연교구 성화실에서의 주문수련.
동덕 여러분과 주고 받은 성(誠) . 경(敬) . 신(信) 의 나눔의 장.
갑오년 남녘 여행길에 반겨 주신 부산의 동덕 여러분께
수심정기(守心正氣)하여 크게 감사드리옵니다.
동학 천도 만세. 한울연대 만만세.
- 茶泉 모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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