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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산행·여행·풍경

제2차 조선팔도 선비문화교류 - 2편 -

2012년 제2차

 

조선팔도 선비문화교류

 

- 2편 -

 

 

 

           _ 주최 : 광주광역시 광산구  

           - 주관 : 교육문화공동체 '결'

           - 후원 : 문화재청, (재)고봉학술원, 행주기씨문헌공종중, 광곡마을 주민,

                       광산문화원, 광주향교여성유도회, 광산구문화유산 해설사회

 

 

 

■ 답사일 : 2012. 10. 11 ~ 12    ■ 답사지 : 부여백제문화단지  / 강화도

 

- 둘째 -

 

 

강화 전등사 템플스테이 이튿날 아침

 

 

 

 

 

 

 

 

 

 

 

 

전등사 마당에서의서울 삼각산 조망이라...

 

 

 

 

 

 

 

 

 

 

 

 

 

 

 

 

 

 

정족산사고(鼎足山史庫)

 

 
 

 

 

 

 

 

 

 

 

 

 

 

 

 

 

정족산사고에서의 조망

 

 

 

 

 

 

삼각산 라인이 선명하게 다가오고...

 

 

 

 

 

 

 

 

 

 

 

 

 

 

 

 

 

 

 

 

 

 

 

 

 

 

 

 

 

누리장나무 열매

 

 

 

 

 

 

삼랑성(정족산성)

 

 

 

 

 

 

 

 

 

 

 

 

 

 

 

 

 

정족산 삼랑성에 올라 바라본 전등사 일대

 

 

 

 

 

 

 

 

 

 

 

 

 

 

 

 

 

 

 

 

 

 

 

 

 

 

 

 

 

 

 

 

 

 

멀리 보이는 석모도

 

 

 

 

 

삼랑성 서문

 

 

 

 

 

 

 

 

 

 

 

 

 

 

 

 

 

 

 

 

 

 

 

 

전등사 은행나무 전설

 

 

강화도령 철종 임금 때의 일.조정에서는 전등사에 은행을 스무 가마나 바치라고 요구한다.
 기껏해야 열 가마밖에 열매를 맺지 않는데...
 하는 수 없이 백련사에 있는 추송 스님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추송 스님은 도력이 높기로 소문이 난 분.
며칠 후 추송 스님이 전등사에 나타나 기도를 끝내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이제 두 그루의 나무에서는 더 이상 은행이 열리지 않을 것이오.”
그 때부터 전등사 은행나무는 열매를 맺지 않았다고...










 

마니산 정수사(淨水寺)

 신라 선덕여왕 8년(639) 회정선사가 세웠고 조선시대 세종 8년(1426)에 함허대사가 다시 지었다.

 

 

 

 

 

 

 석가모니불상을 모신 대웅보전으로, 1957년 보수공사 때 숙종 15년(1689)에 기록을 찾아냈다. 기록에 따르면 세종 5년(1423)에 새로 고쳐 지은 것이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4칸이지만 원래는 툇마루가 없이 앞면과 옆면이 3칸 건물이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고, 지붕 무게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앞뒷면이 서로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앞면 퇴칸이 후대에 다시 설치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건물 서쪽에서 맑은 물이 솟아나는 것을 보고 이름을 정수사라 고쳤다고 한다. 

 

 

 

 

 

 

 

정수사 석간수는 좋은 찻물로 이름이 높다.

 

 

 

 

 

 

 

 

 

 

 

 

대웅전 앞쪽 창호의 가운데 문은 꽃병에 꽃을 꽂아 놓은 형상으로

 화려한 조각은 뛰어난 솜씨를 엿보게 한다

 

 

 

 

 

 

 

 

 

 

 

 

법당 안쪽에서 바라본 꽃창살

 

 

 

 

 

 

 

 

 

 

 

 

 

 

 

 

 

약 1시간 30분 정도 소요.

 

 

 

 

 

 

강화학파 이건창 생가

 

가학(家學)을 이어 양명학(陽明學)을 연구했으며, 조선시대 당쟁 연구에 필요한 〈당의통략 黨議通略〉을 지었다.

본관은 전주. 초명은 송열(松悅). 자는 봉조(鳳朝:鳳藻), 호는 영재(寧齋).

할아버지는 이조판서를 지낸 시원(是遠)이고, 아버지는 상학(象學)이며, 어머니는 윤자구(尹滋九)의 딸이다.

 개성에서 태어났으나 집안의 세거지(世居地)는 강화였으므로 계속 강화에서 살았다. 형제인 건승(建昇)·건면(建冕) 및 종형제인

건방(建芳) 등과 함께 할아버지로부터 가학인 양명학을 전수받았으며, 강위(姜瑋)·김택영(金澤榮)·황현(黃玹) 등과 교유했다.

  1866년(고종 3) 15세 때 별시문과에 급제했으나, 나이가 너무 어려 19세 때인 1870년에야 홍문관직에 나아갔다. 1874년

 서장관(書狀官)으로 뽑혀 청나라에 가서 청의 문장가인 황각(黃珏)·장가양(張家驤)·서보(徐郙) 등과 교유했으며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이듬해 충청우도암행어사로 나가 감사 조병식(趙秉式)의 비행을 조사하고 임금에게 직접 보고하여 파면시켰다.

 그러나 조병식의 사주에 의한 무고로 벽동군에 유배되었다. 1년 뒤에 풀려나 공사(公事)를 철저히 수행하다가 권세가들의  

공격으로 귀양까지 가게 되자, 그뒤 벼슬길을 멀리했다. 그러나 왕이 간곡한 말로 부르자 1882년 경기도암행어사로 나가

 관리들의 비행을 파헤치고, 흉년을 당한 농민들의 구휼에 힘쓰는 한편 세금을 감면하여 주기도 했다. 그뒤 부모의 상을 당하여

 6년간 집상(執喪)을 마치고 1891년 한성부소윤이 되었다. 이때 외국인이 서울의 가옥과 토지를 매점(買占)하는 일이 있자,

 이를 금지해야 한다는 상소를 하여 청국공사(淸國公使)의 항의를 받았으나, "나는 내 서울 백성하고 말하는 것이지 외국과 맺은

 조약과는 무관한 일"이라고 일축했다. 그러나 청국의 압력으로 이듬해 보성으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1893년 함흥부에 안핵사로 내려가 난민을 다스리고, 관찰사의 잘못을 낱낱이 조사하여 파면시켰다. 갑오개혁 이후

 새로운 관제에 의한 각부의 협판·특진관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퇴했으며, 1896년 해주관찰사에 제수되었을 때도 사양타가

 고군산도로 유배되었다. 특지(特旨)로 2개월 뒤에 풀려나 향리인 강화에서 은거하다가 2년 뒤 47세로 사망.

 

 

 

 

 

 

 

 

 

 

'명미당' 현판은 이건창의 친구였던 매천 황현의 서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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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험견학연구소' 홍남일 선생께서 현장 안내와 해설을 맡아 주셨습니다.

 

 

 

 

 

이건창 생가 앞 길 건너편에 자라는 탱자나무(천연기념물)


 

 

 

 

 

 

 

- 주자학을 숭상한 조선의 지배층들이 양명학을 이단시한 이유는 무엇이죠?

"양명의 사민평등사상 때문이에요. 왕양명은

사농공상의 우열을 인정하지 않았죠."

- 중국의 양명학파와는 달리 정제두는 신분타파까지 주장하는 혁명적인 요소는 없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양명학이 이단으로 몰리지 않고 주자학과 함께 쌍벽을 이뤘지만, 조선에서는 사정이 달랐죠.

그렇기 때문에 외주내양한 것이고요. 정제두도 살아생전에는 책 한권 내지 못하고 필사본만 있었죠."

- 정제두가 61세 되던 1709년에(숙종 35년) 강화도로 이주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정제두는 정치를 의식적으로 멀리했죠. 섣불리 당쟁에 휘말렸다가는 자신의 사상 때문에 살아남기 힘들 거라 여겼을겁니다."

- 양명학을 따랐던 대부분의 학자들은 공개적으로 자신의 신념을 드러내지 못하고 외주내양

(겉으로는 주자학, 안으로는 양명학)

했는데, 정제두가 외양내양한 데는 어떤 사연이 있나요?

"위독한 병에 걸려서 유언 식으로 커밍아웃을 한건데, 죽지 않았던 겁니다. 그 뒤로 협박성 편지를 많이 받지만 소

신을 굽히지 않고 사상논쟁을 벌여나갔죠. 정제두를 빼면 조선의 양명학자들은 외주내왕을 했지요."

- 강화학파는 어떻게 형성된 건가요?

"정제두가 정치와 담을 쌓고 강화로 옮겨 온 뒤에 이광명, 신대우 등 소론계 학자들이 이주하면서 강화도는

주자학이 판치는 조선에서 학문의 자유가 숨쉬는 유일한 공간이 되었죠. 양명학은 이후 정제두의 가학으로 전승되면서

맥을 이어갔는데, 역사의 음지를 찾았던 양명학이 끼친 영향은 가학을 뛰어넘었어요. 조선이 멸망의 위기에 처하자

강화학파의 후예들은 대거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는데, 이상설, 박은식, 정인보 등이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지행합일을 중시한 양명학자들은 이처럼 조선이 멸망한 후 독립운동의 전면에 나선 경우가 많은데, 강

화학파의 계보를 잇는 위당 정인보 선생이 해방직후 백범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을 환영하는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곤륜산을 타고 흘러내린 차가운 물사태가 사막 한가운데인 염택에서 지하로 자취를 감추고, 지하로 잠류하기 또 몇 천리,

청해에 이르러 그 모습을 다시 지표로 드러내어 장장 8천8백리 황하를 이룬다."

사상의 음지에서 역사의 양지로 되살아난 강화파의 감회가 풍기는 환영사가 아닌가 싶다.

강화에는 또 한명의 강화학파를 만나기 위한 답사 코스가 있다. 바로 정제두의 제자인 이광사의 후손인 이건창의 생가다.

천연기념물 사기리 탱자나무 인근에 자리한 생가의 앞마당에 있는 우물도 마니산의 정기를 담아서 지하로 흐르고 흐르다

 샘물로 솟구치고 있는 것이리라.

강화에서 출생한 영재 이건창(1852~1898)은 15세의 나이인 1866년(고종3)에 문과에 급제할 정도로 학문에 조예가 깊었다.

병인양요 때 조부인 이조판서 이시원의 자결을 목도했던 이건창은 외세의 침략과 이웃나라에서 부강을 구하는 비주체적인

 개화를 철저히 배격했다. 호랑이 암행어사로 이름을 떨치기도 한 이건창은 당대 최고의 리얼리스트 문인이기도 하다.

이건창은 강화도 민초들의 삶을 생생하게 기록하기 위해 애를 썼다. 강화도에 서양군대가 몰려오자 장수들이 도망가는데

홀로 술을 마시고 군복까지 차려입고 나와서 길목을 막고 섰다가 죽임을 당한 이수칙에 대한 이야기도 그 중 하나이다.

이덕일의 <시원하게 나를 죽여라>에는 이건창의 선조인 이광사가 등장한다. 영조 즉위 뒤에 소론 계열이었던

이광사의 부친은 전라도 에 유배 갔다가 영조 3년에 죽고 만다.

 역적집안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아야 했던 이광사는 관직엔 오를 길이 없게 되자 정제두를 찾아 강화로 간다.

과거를 포기한 채 양명학과 서예에 몰두하던 이광사는 영조 31년 발생한 나주벽서사건에 연루가 되어 투옥되는데,

이 충격으로 부인 유씨가 마흔 둘의 나이로 세 아이를 남겨주고 자결한다. 이광사는 겨우 목숨을 건지고 유배를 가면서

 '죽은 부인을 애도함'이란 시를 써서 부인의 영혼을 달랬다.

"내가 비록 죽어 뼈가 재가 될지라도
이 한은 결코 사라지지 않으리

 내가 살아 백 번을 윤회한대도 이 한은 정녕 살아 있으리……."

"주자학 이외의 사상을 용인하지 않았고, 철저한 숭명사대주의 노선을 걸으면서 안으로는 일당독재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물불을 안가리고, 백성들은 철저히 억압한 세력이 바로 조선 후기 집권층인 노론세력입니다.

게다가 이들은 이백여년 동안 권세를 누리다가 나라가 망하자 대거 친일파에 가담했어요.

 일본으로부터 작위를 받거나 돈을 받은 이들은 대부분 노론자들입니다."

- 오마이뉴스 기사에서 발췌 정리한 내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