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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축제·전시·공연

어진(御眞)과 플라맹코(flamenco)

                                                                                                               
      2012. 7.20                                                                                             


전주 경기전 와룡매
 
 
 
 




올(2012년) 4월 14일 와룡매의 모습
 






 
경기전 내에 문을 연 어진박물관에서



1872년/비단에 채색/220×151㎝/국보 317호

 
현존하는 유일한 태조어진으로 1872년(고종 9)에 모사한 진본이다.

  평상시 집무복인 익선관과 청룡포 차림으로, 백옥대와 흑화를 착용한 전신상 어진이다.
태조는 키가 크고 몸이 곧바르며, 귀가 아주 컸다고 한다.
태조 이성계는 고려 말 혼란기에 큰 전공을 세우고 영웅이 되어 조선을 건국하였다.

전주는 태조의 본향으로 그 선대들이 살았던 곳이다.
이를 기념해 1410년(태종 10) 태조어진을 전주에 봉안하였으며, 1872년 구본이 낡아
박기준, 조중묵, 백은배 등 8인의 화사가 새로 모사해 경기전에 모셨다.




조선왕조는 건국 후 태조어진을 한양을 비롯해 고구려의 수도 평양, 신라의 수도 경주,  
고려의 수도이자 태조가 살았던 개성, 태조의 출생지 영흥, 태조의 본향 전주 등 모두 6곳에 봉안하였다.

전주에 태조어진을 봉안한 것은 조선 초인 1410년(태종 10)으로, 경주 집경전의 태조어진을 모사하여 모셨다.
조선왕조는 건국자인 태조의 어진을 전주에 봉안하여 이곳이 왕실의 고향임을 분명히 하였다.
현재의 태조어진은 1872년(고종 9)에 새로 모사한 것이다.
조선 초의 태조어진은 너무 오래되고 낡아서
그림을 물에 씻어내고 백자항아리에 담아서 경기전 북계상(北階上)에 묻었다.




조선시대에 태조어진이 많게는 26점까지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전주 경기전에 봉안한 태조어진이 유일하다.  
전란과 화마의 위기 속에서도 경기전의 태조어진이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지역민들이 사력을 다해 수호한 결과이다.

 

임진왜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기전 태조어진을 『조선왕조실록』과 함께

정읍 내장산으로 이안하여 1년간 수호하였다.

이후 어진을 아산객사로 이안했다가 강화도를 거쳐 묘향산 보현사 별전에 봉안하여 화를 면하였다.

 

 

 

정해년 대화재
1767년(영조 43) 정해년에는 전주에 큰 불이 일어나 민가 1천여호를 불태우고 불길이 경기전에 미치자

태조어진을 향교 명륜당으로 이안하여 화마를 피하였다.

 

동학농민혁명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는 전주성이 전란에 휩싸이자 태조어진을 위봉산성으로 이안하여 화를 면하였다.

위봉산성은 유사시 태조어진을 수호하기 위해 숙종 때 수축한 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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