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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포럼·강좌·워크숍

2011 문화재 생생사업 담당자 워크숍 ~3~

         ▶ 필암서원 ▶ 요월정 ▶ 철학자의 길(고봉묘소)

 

 

필암서원

 

장성군 황룡면 377  원필암마을 (사적 제 242호)

하서 김인후를 배향한 서원으로 1590년(선조 23) 문인들의 발의로 장성읍 기산리에 세워졌으나

1597년 정유래란으로 소실되었으며 1624년(인조 2) 황룡면 증산동으로 위치를 옮겨 복설하였다.

1622년(현종 3) 유생들의 상소로 '筆岩'이라는 賜額(사액)을 받았으며,  1672년 수해의 우려로

지금의 필암리로 옮겨 다시 세웠다. 1786년(정조 10) 하서의 제자 고암 양자징이 추가로 배향되었다.

 

 

날아오를 듯 경쾌한 처마선이 눈 맛을 시원하게 한다,

약간 고개를 숙여고 드나들도록 만든 출입문은 이 곳이 강학의 공간이요

성현의 주향처니 마음을 낮추고 예를 갖추라는 뜻.

문루(門樓)에 내걸린 편액 廓然樓(확연루)은 우암 송시열(尤庵宋詩烈)의 서체다.

 

 

 서원에 들려면 자연스레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는 높이다.

 

 

 '확연루' 서체를 보면은

 초상화 속의 송시열과 저어쩌면 저리도 잘 어울리는지...!.

 

 

문화유산해설사 김채림 님의 자상한 해설 

 

 

 

 

 

 

계생비(繫牲碑)

 

향사의 제물로 쓰일 가축을  이 비 앞에 가져와 충둔례를 행한다.

 비문은 연재 송병선이 지었고,  전서는 동강 김영한이, 앞면의 글씨는 봉사 송일준,

뒷면의 글씨는 해관 윤굥구가 각각 썼다.

 

 

 

 

 

 대청 안 쪽에 걸린 청절당 편액은 동춘당 송준길이 썼으며

바깥쪽의 필암서원 사액 편액은 병계 윤병구(장암 정호의 제자)가 쓴 것이다.

 

 

 

 "하서집을 읽고"   -고경명- ( 내부 편액)

 

 

高矣河西子。如天不可階

높도다 하서 선생이여, 하늘같이 높은 경계라서 감히 오를 수  없네.

 

斯人今寂寞。此道已沈埋。

선생께서 이제 돌아가셨으니 선생의 도 또한 묻히고 말았네.

 

寶稿披蘭雪。虛襟罄沐齋

보배같은 유고 난초  흰 눈을 펼쳐놓은 듯,  맑은 심성 씻어낸 듯 깨끗하구나.

 

文章方日下。三復有餘懷。

햇살 가득한 선생의 문장,  세 번 되내어 읽어도 미련만 남네

 


 

경장각 (敬藏閣) 

 

하서 김인후선생을 문묘에 배향코자 할 때 정조가 내탕금(內帑金)으로

경장각을 세웠으며 인종이 하사한 묵죽도의 판각을 보관하는 곳이다.

팔작지붕으로 귀공포와  네 모서리엔 용머리가 들어있다.

 

 

 

경장각 내부

 

 

경장각 내부

 

 

원진각

필암서원 유물 전시관

 

 

 

인종이 세자 시절 스승인 하서에게 내렸다는 묵죽도(墨竹圖)

 

34세 때 홍문관 박사(博士)에 시강원 설서(設書)로 세자를 가르치게된 하서.

  군왕의 자질이 충만한 세자와 현신(賢臣)의 궁합은 가히 환상이었던 모양, 

하서의 인품과 학문에 감공한 세자는 온갖 예우를 다 했고,

 손수 묵죽도(墨竹圖)'까지 그려 선물하는 정성에다

궁중에 있던 <주자대전> 한 질까지 하서에게 선물하는 등 온갖 정성을 쏟았다고.

위의 묵죽도 왼쪽 하단에는 세자의 청으로 하서가 쓴 시가 들어있다.

이를테면 세자와 스승의 합작도인 셈

 

 

                    

根枝節葉盡精微

뿌리 가지 마디 잎이 정밀도 하여

                

 石友精神在範圍  

굳은 돌은 벗인양 주위에 들어 있네  

                           

 始覺聖神모造化 

성스런 우리 임금 조화를 짝 하시니     

                           

一團天地不能違  

천지와 함께 뭉쳐 어김이 없으셔라

 

 

 

집성관

 

 

 

 

 

 

맥동마을 앞  느티나무 사이로 바라본 난산(卵山)

 

고향에 은거한  河西는 매년 7월1일 인종의 기일이면

마을 앞 난산(卵山)에 올라 망배단(望哭壇)을 쌓고 북쪽을 바라보며 통곡 하였다고 한다. 

 

 

 

통곡단(痛哭壇)

 

숨을 거둘 때까지 15년간을 계속했다는 망배통곡, 단 하나의 主君이 道의 표상이었을때

 하서는 의로운 길을  택해 그 길을 표표히 걸어 갔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인후 난산비(長城 金麟厚 卵山碑)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41호,

 

 

 

비문은 비제(碑題)를 포함하여

모두 31행(전 10행, 좌 5행 후 10행, 우 6행), 1행 26자이다.

난산비는 선생의 행적과 정신을 알 수 있으며 국상(國喪)에 따른 당시 제도사를 알 수 있는 등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크다. 2003년에 전라남도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난산 통곡단으로 오르는 초입에 자리하고 있다.

 

 

 

요월정원림 (邀月亭園林)

시도기념물 제70호 (지정일 1985.02.15)
전남 장성군 황룡면 황룡리 171.  면적 : 14.840㎡(4,489평

 

 

 

요월정을 건립하였던 金景愚 선생의 9세손인 京燦(1796∼1819)은 요월정을 다시 중건하면서

경치가 빼어남을 찬양하여 다음과 같이 요월정 重修韻을 지었다.


百日花紅度幾秋 重光重喜且重修

백일홍꽃 붉어서 몇 가을을 지냈는고 세월이 지나고 또 지나서 집을 고치는도다


朝鮮第一黃龍里 夜月更三白鷺洲

조선제일 황룡리요 달 밝은 깊은 밤에 백로 노는 물갓이라


好個東山還舊主 超然南國有名樓

좋은 동산에 옛주인이 돌아오니 남쪽의 유명한 누각이 더욱 뛰어나구나


鳳凰己去臺空在 安得詩仙與共遊

봉황은 이미 떠나고 집은 비어 있으니 어느 때나 시선을 만나 함께 놀아 볼까.

 

 

 

위 詩 중 '朝鮮第一黃龍里'란 대목이 문제가 되어

왕도(한양)를 능멸했다는 모함을 받아 임금님께 불려가게 되었다.  

 

"朝鮮第一黃龍里라 한 것이 사실이냐?"는 질문에

"예"하고 대답하자

 

"그러면 한양은 어떤고?"하고 다시 묻자 "天下第一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중국의 장안은 어떤고?"하니 "萬古의 第一입니다."

라고 답하여 위기를 모면했다는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아래는 하서 김인후가 요월정을 읆은 시다.

 

 

 

月色當軒白

달은 툇마루에 마주쳐 희고 

 

月色當軒白

가을빛은 눈에 서려 파랗군 그래 

  

秋光入眼靑

이 날 밤 정자에 이 경치 보니 

    

登臨此夜景

세상의 부평이 가소롭구려. 

 

    

 

 

요월정 낙화암

 

예전 요월정 아래로 황룡강이 흐를때는 명주실꾸리 3개가 들어갈 만큼 깊었다고.

임진왜란시 왜구들이 이 곳까지 쳐들어와 연약한 부녀자들을 겁탈을 하려 들었다고,

절개를 소중하게 여기는여인들, 그럴바엔 차라리 자결을 하는 것이 났다고 다짐.

 요월정 앞으로 모여 바위 위에서 자미화 꽃잎처럼 몸을 날렸다고 한다.

 

 

 

 

 

요월정의 주인공인 김경우는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한 김숭조의 손자이며 중종 때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활발한 언론 활동을 펴면서 나라를 바로잡으려던 김기의 아들이다.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송천 양응정 등이 래왕하면서 시문을 읊고 세상을 한탄하며

서로의 충절과 도타운 의리를 소중히 했다는 유서깊은 현장이다.

 

 

 

- 고봉이 쓴 요월정의 쥔 김경우에 대한  만시 -

 

 

  邀月亭中幾醉醒 

  요월정 속에서 몇 번이나 취했던가

 

  人間萬事付流萍 

 인간의 모든 일 부평에 부치노라 

 

  靑山滿目秋光冷

 청산은 눈에 가득 가을 빛 차가운데  

 

  惆悵銀蟾入夜凉

쓸쓸한 흰 달빛 밤중에 들어오네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송천 양응정, 문곡 김수항 등 명현들의 시가 가득 걸려있다.

 

   

 

 

 

  

 

 

 

 

요월정 송림을 오르는 워크숍 참석자 일행.

 

 

 

 

 원림 가운데 가장 많은 배롱나무 개체수를 자랑하는 곳이기도 하다.

 

 

월봉서원(月峯書院)

 

모두 세 차례에 걸쳐 이건하였다는 월봉서원. 고봉 사후 7년(1578 선조 11),

지금의 서원이 위치한 산 너머 고마산 아래 '망천사'를 건립하여 고봉의 위패를 봉안한 게 서원의 시초.

그 때 전라도 관찰사로 있었던 황강 김계휘(1526~1582)가 30석 전답을 서원에 귀속시켰고,

송강 정철(1536~1593)이 전라감사로 재직시 노비와 전답을 서원에 귀속시키는 등

서원의 경제적 토대를 마련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1646년(인조 24)에 지금의 위치로 옮겼으며, 1654년(효종 5)에 사액서원이 되었다.

1671년(현종 12) 박상(朴祥)·박순(朴淳)의 위패를 옮겨 봉안했으며, 1673년 사계 김장생(金長生)·

신독재 김집(金集)을 추가 배향했다. 1654년(효종 5) 유림이 상소를 올려 사액을 받았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38년 이후 복원되었다

 

 

임란으로 망천사가 소실되었던 것을 광산구 비아동 월봉마을로 옮긴 것이 두번째이고

1938년 행주기씨문중이 힘을 합해 서원 복원을 추진, 현재의 너부실(광곡)마을로 이건.

사액을 받을 당시 월봉(月峯), 도산(道山), 동천(桐川)을 놓고 도산(道山)으로

결정되었으나, 후일 '월봉'으로 최종 낙착되었다고 한다.

 

 

 역대 고금명가 필적 700여 점을 1926년 백두용, 정도영이 6책으로 엮어 

한남서림(翰南書林)에서 펴낸"해동역대명가필보(海東歷代名家筆譜)"에 실린

고봉 친필 목판본의 시작품 '만망(晩望)'이다.

오언절구 2수로 이루어진 시작품으로  힘찬 필치로 써 내려간 고봉의 초서. 

 

晩望

석양을 바라보자

 

- 高峯 草 -

 

 

春花到茅茨

띳집에 봄꽃 피어나고

三峰住夕暉

봉우리 셋마다 노을빛 걸렸네.

秋天獨依杖

가을날에 지팡이 홀로 집자니

白露濕人衣

흰 이슬에 걸친 옷 적시네.

 

 

古郡無城郭

옛 고을에는 성곽도 없고

山齋有樹林

산속 집에는 수풀만 우거졌네.

蕭條人吏發

적막함에 사람들  떠나려는데

隔水禱寒砧

차가운 다듬이 소리 물을 건너오네.

 

 

 

철학자의 길

 

 

철인의 향기로 가득찬 백우산(청량산)숲길.

철학적 상징 속에서 자신을 들여다 볼 수 있는 특급 산책로.

 

 

고봉 묘소

 

 왼편이 고봉선생의 묘이고 오른쪽이 정부인 함평이씨의 묘이다.

 

1572년 3월 3일 고봉은 한양을 떠나 10월 10일 천안에 도착하자, 그간 앓았던 지병이 갑작스레

도지면서 운신하기 쉽지 않았다. 10월 15일에 겨우 전북 태인에 도착하여 관사에서 머무르다가

10월 28일 사동인 매당 김점의 거처로 옮겼으나 11월 1일에 운명하였다. 이듬해 2월 8일 현재

묘소에 동쪽에서 서쪽을 향한 묘좌유향(卯坐酉向)으로 안장하였다. 현재 묘소는 쌍분(雙墳)으로

 부인인 함풍 이씨(咸豊 李氏)와 나란히 모셔져 있다.

 

 

 

부음이 한양에 알려지자 간원(諫院)에서는 이렇게 그의 행적을 말한다.

 

대사간 기대승은 젊어서부터 성현의 학문에 종사하여 식견이 고명하였으므로,

이황이 더불어 의리를 논변하는데 있어서, 옛사람이 미쳐 발명하지 못한 것을 많이 발명하였습니다.

그가 경악(經幄)에 입시하여 충성으로 진술하여 임금을 인도하였던 것은 요순(堯舜)과

삼왕(三王)의 도 아닌 것이 없었으므로 온 세상이 그를 추증하여 유종(儒宗)이라고 하였습니다.

. . . 

 

그는 가세(家勢)가 청빈하여 치상할 수 없으니, 관에서 상례와 장례를 주선하여 주어

국가에서 선비를 높이고 도를 중히 여기는 뜻을 보이소서.

 

 

철학자의 길목에 자리 잡은 고봉 묘소에서

고봉학술원 강기욱 실장님의 특강.

 

 

 

 

고봉의 부음에 부친 율곡의 만사(輓詞)는 애닯기만 하다

 

 

남쪽나라 높이 날으는 채색 날개

신선 자태에 맑은 세상이라 뜻이 형통했건만.

영재로서 가슴에 쌓인 포부를 펴지 못하고,

남다른 은총이 죽은 후에 내렸을 뿐이네.

문장은 강하를 압도해 간책이 빛나고,

기개는 우두를 능가해 은하에 넓었도다.

화산의 한 번 작별이 유명을 달리하니,

초혼은 할 길 없어 눈물만 뿌린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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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백리 박수량을 기념하는 청백당에서 하룻밤을 묵은 워크숍 참석자 일행.

이튿 날 첫 일정은 필암서원 방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문화유산해설사 김채림님의 해설 속에 서원탐방을 마치고

요월정 원림의 배롱나무 숲과 송림을 산책한 후 월봉서원으로 이동,

 

서원 뒷편 백우산 자락을 걷게되는 철학자의 길을 따라 고봉 묘소에 당도,

 고봉학술원 강기욱 실장님의 특강을 마지막으로 연 이틀간에 걸친 워크숍을 접는다.

 

명색, 문화재 생생사업을 이끌어 가는 대단한 안목들이신지라

하나를 들이밀면 가히 열을 헤아리는 혜안을 보여 주고 있었다.

 

 답사의 고수들과 함께 하며,

그들이 무얼 살피는지를 들여다 보는 또다른 즐거움.

역사와 자연 그리고 인간탐험을 동시에 아우른 뜻깊은 일정이었노라 정의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