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1-25 16:00
경북 경산 소재 80만 평 이상의 광활한 켐퍼스 를 소유한 영남대학교를 들어 섭니다 |
이재성 부총장님 집무실로 안내되어 담소를 나눕니다. 장성 축령산의 편백림을 보러 오셨다가 이 숲을 조성한 "춘원 임종국"선생의 노고에 감동, 처음으로 국가유공자 지정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제의를 내 놓으셨고, 그에 화답한 청담 변동해 선생의 유공자 지정 서명 운동을 이끌어 내신 분이기도 합니다. 그런 인연으로 각종 자료를 전달 해 드림과 아울러 추진 상황과 부총장님의 고언을 듣고저 이 자리가 마련된 것입니다. 참고로 몇몇 지상에 보도된 내용 중 하나를 옮겨봅니다. -중략-ㅇ # 임종국의 혼신 담긴 숲 오늘날의 축령산 편백숲을 있게 한 주인공은 육림가 춘원(春園) 임종국(1915~87)이다. 임씨가 축령산에나무를 심기 시작한 것은 1956년이다. 숲이 소중한 자원이 될 것으로 내다본 그는 주택과 전답을 처분하고 빚까지 지는 어려움 속에서도, 작고할 때까지 조림을 계속했다. 평생 심혈을 기울여 축령산 일대 569㏊에 250만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 대부분이 편백나무이고 삼나무가 일부를 차지한다. 처음에는 논밭을 팔았고, 나중엔 살고 있는 집까지 팔았다. 그리고 가족과 산 속에 움막을 짓고 살았다. 끝내는 빚까지 내야 했다. 그리고 가뭄이 들어서 나무가 말라 죽어가면 온 가족이 물지게로 물을 져 날랐다. 심지어 달밤에도 물을 져 날랐다고 한다. 그렇게 심혈을 기울여 키웠지만 결국 재정난으로 편백숲은 여러 사람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고, 한 때 벌목 계획이 세워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산림청이 사유림 경영의 역사성과 학술적 가치 등을 인정해 직접 보전·관리하기로 하고, 2002년 4월 조림지의 45%(260㏊ 정도)를 매입하게 되면서 위기를 넘겼다. 춘원이 그처럼 심혈을 기울여 조성한 편백숲은 이제 그 값을 따지기도 어려울 만큼 가치를 지닌 귀중한 자원이 되고 있다. 경제·휴양·관광 가치를 수백억원으로 추산하기도 하지만, 먼 훗날을 생각하면 그 가치를 환산할 수도 없을 것이다. 춘원은 2001년 산림청의 '숲의 명예전당'에 모셔졌고, 지난해 11월부터는 국가유공자로 추서하려는 서명운동이 추진되고 있다. 이재성 영남대 부총장의 제안으로 시작된 서명운동은 다음달까지 11만명의 서명을 받아 국가보훈처에 청원, 오는 식목일에 국가유공자로 지정받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축령산 편백숲이 좋아 축령산 자락에 오두막 '세심원'을 짓고, 매일 오가면서 편백숲과 함께 살아가는 '축령산지기' 변동해씨(53)는 "100년, 200년 앞을 내다본 임종국 선생님 덕분에 축령산 편백숲이 장성의 명소가 되었고,편백숲의 가치는 갈수록 더해갈 것"이라며 "임 선생님이 숲의 명예전당에 헌정됐지만,국가유공자로도 지정돼 그 뜻을 길이 기려야 함이 마땅하다"고 말했다. * 이상은 영남일보 김봉규 기자가 쓴 내용인데 취재 현장엔 저와 세심원의 변동해 선생, 고인돌 화가로 널리 알려진 황순칠 화백이 함께 했었습니다.* |
이어 영남대학교가 자랑한다는 박물관으로 안내됩니다. |
광개토대왕 비문 탁본으로 실제 모양을 구성했다고...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갈 사실, 마침 이날은 박물관 휴관일이었는데 부총장님의 특별 부탁과 박물관 측의 특별 배려로 아예 전담 해설자 까지 붙여 주시는 호의를 배풀어 주셨습니다 |
석굴암 내부를 형상화 했다는 로비
교내 약 2만 평에 조성된 야외박물관인 "민속원" 사진은 -까치구멍집- 부총장님의 안내로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안동댐 수몰시 옮겨 지은 집이라는 설명이고 지금은 거의 볼 수 없는 모습인데 추운 지방의 산촌에서 집 내부에 심지어는 외양간까지 들여 놓은지라 공기 순환 차원에서 양쪽으로 뚫어 놓았답니다. |
안동의 도산면 의인 마을에서 옮겨왔다는 의인정사(宜仁禎舍) |
마당 한 켠엔 선비의 상징 매화가 서 있습니다 |
신라 때 우물을 발굴하고 옮겨 복원 해 놓은 모습 |
안동 월곡에서 옮겨왔다는 구계서원
고려말 유학의 큰 스승 역동(易東) 우탁(禹倬)선생을 모신 서원
국보 제285호 반구대 암각화를 찾아가는 일행,
초청자 중의 한 분이신 유재원 님의 안내를 받습니다.
울산시의 공업용수로 쓰이는 사연댐으로 인해 갈수기 2~3개월 정도 볼 수가 있고 나머지는 물 속에 잠겨 볼 수가 없다고 합니다. |
그러나 막상 가까이 가 보아도 앞에 흐르는 대곡천 때문에 건너 갈 수도 없고 문양을 선명하게 볼 수도 없습니다 |
저 가운데 맨질맨질한 두 부분에 새겨져 있지만 맨 눈으로는 볼 수가 없고
건너편에 서 있는 커다란 쌍안경을 이용 확인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커다란 입간판에 실제 모습을 가까이 볼 수 있도록 해 놓았습니다. 내용은 인물상, 동물상, 도구상 등이었는데 고래나 호랑이등의 모습이 인상적이었고 신석기 말 부터 청동기 시대에 조성되었으리라는 추정을 한답니다. 고래가 이 곳까지 올라왔다가 바위에 걸리기나 해서 고래 잡이가 시작되었으리라는 추정도 한답니다. |
경사가 심한 바위면에 새겨진 문양은 동물상이 주고 인물상과 물고기 형상등이 있었습니다. |
칙칙한 날씨에다 어두워지니 마음이 바쁩니다만 초청자께선 강행군을 해야만 된다면서 데려다 주신 곳은 국보 제147호로 지정된 울산광역시 을주군 소재 "천전리 각석" 앞 입니다. |
푸석대는 바위인지라 많이 떨어져 나갔고 또 후대에 새겨진 것도 있는 듯 했습니다.
이 곳 역시 입간판에 세세하게 복원한 모습을 그려놓았습니다. |
여기까지의 답사를 숨가쁘게 달려와 오늘 일정의 끝으로 삼고 울산 해안을 거쳐 숙소를 향합니다. |
반대쪽에서 바라본 모습 |
숙소에 도착하니 그 귀하다는 고래고기가 기다리는 행운을 마주합니다. 사진을 한사코사양하셔서 카메라에 모습을 담진 못 했지만 성함 만이라도 밝혀야겠지요? 신 여사님, 구체적으론 신동연 선생님. 너무너무 고맙습니다. 오늘의 영남 도반 여러분을 잠시 소개해 올리자면......... 위의 신동연 선생님, 길상원의 박복귀 선생님, 미술 전공의 박현수 선생님, 그의 짝이신 이숙이 선생님, 울산 세무서의 유재원 선생님, 일천산을 끝내셨다는 씨름인 출신의 거한 손병원 선생님, 오두희 선생님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당연히 술은 세심원에서 빛은 청주였고 그 양은 정확히 한 말 이었습니다. 그리고 깨끗하게 비웠습니다. 그 비움에는 당연히 이 사람도 일조를 했구요. |
열띤 대화와 마지막 잔을 비우고서 바로 앞에 펼쳐진 동해안의 밤바다로 산책을 나갔습니다. |
일출 시간에 맞춰 베란다에 나와 동해안에 시선을 던져 보지만 틀렸음을 직감합니다.
한참을 서성이니 진즉에 솟은 해가 살짝 윙크를 던지고 이내 사라집니다.
차를 달려 도착한 곳은 대왕암 |
새벽 바다가 싱그럽습니다. |
모두 철수하고 대포꾼 두어명 만이 서성이고 있는 해변
초청하신 도반께서 거의 분 단위의 세심한 일정을 세워놓으시고 다음으로 안내한 곳은 대왕암과의 궁합을 확실하게 물증으로 제시하는 감은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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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이 된 문무왕이 물길을 타고 오르내렸다던가?
언제고 찾아와도 늘 감동을 주는 웅장한 감은사 탑이여 부디 영원하시길.... |
이어서 찾은 곳은 경주시 양북면 소재 동우요 |
작품을 감상하며 익숙한 쥔장과의 대화 그리고 차 한잔을 나눕니다.
맘에 드는 몇몇 작픔에 들이대 봅니다.
상감 처리된 도자기찻상과 다구가 가장 마음에 들어 입맛을 다시고 또 다셨습니다만. 엽전이 문제라...
동우요에서 나와 도착한 곳은 감포항, 생복을 토막친 복지리로 어젯밤 아르꼬르 잔해를 모조리 씻어냅니다. |
때는 바야흐로 과메기의 계절이로구나.
너무 꾸득꾸득하게 말라버리면 맛이 없고 핏기가 거의 남아있어야 맛이 좋다나 어쩐다나...?
복지리로 뱃속을 정갈히 한 다음 도반 여려분께서 다음 일정으로 제시한 곳은 양산 영축총림 통도사 |
차를 버리고 걸어야만 한다는 모두의 주장에 동감 또 동감하며
솔바람 소리 그윽한 소나무 숲길을 걸어 올라 성보 박물관 부터 들어 섭니다.
영축산을 배경으로한 통도사 전경 |
자 ! 이제부턴 영축산 19암자 중 괜찮은 3곳의 암자를 엄선하여 암자 순례길에 오릅니다. |
위 아래로 아치를 그리는 모습 |
벽화 |
청자로 조성된 두 수행자(?)가 정겹습니다. |
용마루 끝을 장식하는 치마가 웅장합니다
은 입사 정병에 시선이 가 닿으니 거의 전율 할 지경입니다. |
청도 출신 화가의 작품전이 박물관 내부에서 열리고 있었는데 몇 백호짜리 대작이 여러점 내 걸렸습니다 |
박물관 마당의 부조 |
제일 면저 당도한 곳은 "비로암" 고려 충렬왕 1년 (1345년) 창건되었고 주불은 "비로자나불" |
두번때로 들어선 곳은 극락선원이 있는 "극락암"에서 오늘의 답사꾼 도반 여러분을 세우고 한방 |
어떤이의 강권으로 한방... 이거 쑥스럽구먼^^** |
오늘의 마지막 암자 순례지 자장암에 당도 원형의 석문을 통과합니다.
자장암에서의 영취산 조망 |
1,800년대에 조성되었다는 석불 |
자장율사가 손가락으로 구멍을 뚫어 "금와보살" 즉 금개구리를 살게했다는 문제의 바위구멍을 애일당 강선생님께서 들여다보는 모습. 근데 어떻게 저 작은 굴 속에서 개구리가 사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만 분명한건 불심이 돈독한 사람에겐 모습을 보여주고 찍은 사진도 분명히 있습니다. 사진속의 강기욱 선생님께서 주창하시는 철학이 요즘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답니다. 이름하여 "토종대학"입니다,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위해 우선 강기욱 선생의 토종대학론을 지상에 소개한 원광대 조용헌 교수의 컬럼을 먼저 소개할까 합니다. ▫ 이 세상에 태어났으니 대학이나 하나 세우고 죽어야겠다는 염원을 평소에 품어왔다. 그 대학 이름은 ‘토종대학’(土宗大學)이다. 토종(土宗)에는 3가지 뜻이 담겨 있다. ▫ 첫째는 ‘토종’(土種)의 의미이다. 수천 년 동안 내려온 한국의 토종문화를 보존하고 가르치는 대학이다. 한국인의 의식주 전반에 걸쳐 토종이 과연 무엇인가를 탐구하고 배우는 대학이다. 세계화가 진행될수록 ‘나는 누구인가?’를 끊임없이 묻지 않을 수 없다. 두 번째는 민초(民草)들이 주체가 되는 대학이다. 토(土)는 밑바닥을 의미한다. 셋째로 종(宗)은 중심과 근본의 의미를 담고 있다. 중심이 되려면 아우르고 포용을 해야 한다. 빈부와 유무식(有無識)에 관계없이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건학 이념이다. 토종대학의 장점은 캠퍼스와 건물이 필요 없다는 점이다. 등록금도 필요 없고, 학력과 나이제한도 없다. ▫ 그렇다면 대학을 어떻게 운영하는가? 토종대학은 점 조직으로 운영한다. 지금 한국의 곳곳에는 골짜기마다 수백 명의 고수(高手)들이 포진해 있다. 이 고수들의 전공 분야는 매우 다양하다. 예를 들면 계룡산에는 전통무술의 고수가 있는가 하면, 경남 김해에는 전통염색의 고수가 있고, 진주에는 전통비방을 연구한 대체요법의 고수가 있다. 또 전남 벌교에는 오행쌀을 30년간 연구한 쌀의 고수가 있고, 전주에는 ‘설장구’의 고수가 있고, 서울 우이동에는 암벽 등반의 고수가 살고 있다. ▫ 현재까지 필자가 파악하고 있는 고수들은 대략 30명 정도 된다. 어찌 우리나라에 고수가 30명만 있겠는가. 적어도 수백 명은 있으리라고 본다. 지금 생각으로는 전국 곳곳에 숨어 있는 고수들을 300명까지 발굴할 예정이다. 300명이면 300과목의 커리큘럼이 성립되는 셈이다. ▫ 토종대학의 학생들은 전국에 흩어져 있는 이들 고수들을 방문하면 된다. 요즘은 주 5일제이다. 한국은 도로 사정이 좋아서 2박 3일이면 전국 어디나 갔다 올 수 있다. 이들 고수들은 대체적으로 시골이나 산 근처에 살면서 별도의 자기 공간을 가지고 있는 수가 많다. 주말이면 이 고수들을 찾아가서 같이 밥도 먹고 차도 마시면서 이야기를 듣는 것이 바로 학습이요 인생 공부이다. 한국에도 이만한 대학 하나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 이상은 조선일보 "조용헌 살롱"에 실린 내용입니다. * |
연 이틀에 걸친 답사 여행을 마치고 들어선 곳은 제가 언젠가 소개한 바 있는 경북 청도 소재" 길상원" 요즘엔 "호골영토산방"이란 독특한 이름의 당호로 불리우기도 합니다. 그 독특한 당호를 작명하고 내력까지 소개한 조용헌 교수의 글을 잠시 소개 하자면... ▫ 명절 때는 모든 고속도로가 심하게 정체되지만 비교적 덜 밀리는 고속도로가 영남과 호남을 잇는 ‘88고속도로’이다. 광주와 대구 사이에는 혼맥(婚脈), 학맥(學脈), 상맥(商脈)이 별로 없어서 왕래할 일이 적었다. 이렇게 삼맥(三脈)이 약할 때는 풍류맥(風流脈)을 가동시켜야 한다. 풍류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이지 않던가! ▫ ▫ 전남 장성에 있는 세심원(洗心院)과, 경북 청도에 있는 ‘호골영토산방(湖骨嶺土山房)’ 사이에는 요즘 영·호남의 풍류가 왔다 갔다 하고 있다. 청도읍 삼신산(三神山) 자락에는 황토와 편백나무로 지은 13평 크기의 자그마한 산방(山房)이 하나 있다. 이 산방 이름을 ‘호골영토(湖骨嶺土)’로 지은 데에는 사연이 있다. ▫ ▫ 산방 주인인 박복규(60)씨는 경상도 토박이이지만 보길도를 비롯한 전라도 섬들의 고즈넉한 풍광과, 톡 쏘는 전라도 음식, 그리고 판소리를 좋아한다. 한 20년 사업 관계로 외국을 돌아다닌 끝에 비로소 조국의 산하(山河)가 좋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중에서도 전라도 지역이 눈에 들어왔다고 한다. ▫ ▫ 그러면서 알게 된 사람이 장성의 축령산 자락에 있는 세심원 주인 변동해(53)씨이다. 세심원은 광주·장성 일대의 풍류객들이 모이는 살롱인데, 이 세심원의 방바닥은 축령산의 편백(扁柏) 나무로 깔아 놓았다는 점이 특징이다. 방에 들어가면 편백 특유의 나무 향이 진하게 풍긴다. 편백의 향은 머리를 상쾌하게 만든다. ▫ ▫ 세심원의 편백 향에 매료된 박복규씨는 장성 축령산의 편백을 청도로 가져다가 통나무와 황토로 이루어진 산방을 짓게 된 것이다. 산방의 골재는 호남에서 가져온 편백나무를 사용하였으니 ‘호골(湖骨)’이요, 황토는 영남의 흙을 썼으므로 ‘영토(嶺土)’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이치에 딱 맞는 이름이 아닌가! 비록 방 한 칸과 거실 한 칸 구조의 작은 산방에 지나지 않지만, 호남과 영남이 모두 함께 녹아 들어 있다. ▫ ▫ 산방의 외형은 20년 수령의 편백 통나무를 교차시킨 귀틀집이다. 8t 트럭 두 대분의 편백이 소요되었다. 통나무 사이에는 황토와 숯가루, 볏짚을 섞어서 다져 넣었다. 그래야 단단해진다. 벽 두께는 45cm. 청도읍 삼신산 자락의 호골영토산방은 ‘자기를 방생(放生)’하고 싶은 청도의 풍류객들이 모이는 살롱이다. 엊그제 그곳에서 하룻밤 자면서 놀다 왔다. * 여기까지가 조선일보 조용헌 살롱에 실린 내용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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