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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구스타프 클림트 <2>

<피아노 앞의 슈베르트>

1899, 캔버스에 유채, 150×200cm, 1945년 임멘도르프 성의 화재로 소실

 

좌) <누다 베리스타>

1899, 캔버스에 유채, 금, 252×56cm, 오스트리아 국립도서관 극장 박물관

우) <누다 베리스타> (부분)

 

1899년 제4회 빈 분리파 전시회에 출품된 <누다 베리스타>(벌거벗은 진리)에는

분리파 양식이라고 부르는 모든 요소가 한데 모여 있다. 클림트는 마침내 이 작품에서

자연주의적 요소와 추상적 요소, 장식적 요소들을 만족스럽게 결합시켰다.

프리드리히 실러의Friedrich Schiller의 '당신의 행동과 예술로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할 수 없다면

소수를 기쁘게 하라. 모두를 기쁘게 하려는 노력은 나쁘다' 라는 도발적인 인용문은 단지 보수적인

빈의 위선을 거부한다는 클림트의 예술적 의지만을 드러내는 게 아니다.

 

실물 크기의 좁고 긴 그림인 <누다 베리스타>에 표제로 장식된 실러의 시는 작품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이 그림의 핵심은 정면을 향해 선 나체의 여성으로, 꽃으로 장식한 머리와 노골적으로 드러난 음모가

괴이한 매력을 뿜어내는 듯하다. 여인은 받침대 위에 서 있고, 지하에서 나온 뱀이 여인의 발 주위를

둥글게 휘감으며 받침대 위를 맴도는 듯 보이는 푸른 연무 안으로 들어간다.

여인의 다리 바로 옆에는 두 송이의 꽃이 자라나고 있으며 그림 아래 부분의 파란색이었던

배경은 위로 갈수록 하늘색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어두워지는 배경과 합쳐진다.

여인의 어깨 근처에서는 테두리에서부터 황금색 장식 선이 돋아나

'목자의 지팡이'를 닮은 형태로 감겨 있다.

 

 <유디트와트 1>

1901, 캔버스에 유채, 금,  84×42cm, 벨베데레 미술관.

 

성서에 등장하는 여인 유디트는 블레셋 장군 홀로페르네스를 유혹해 죽임으로써

유대 민족을 구했다. 위협적인 여성의 성을 묘사한 클림트의 모든 작품 중에서

아마도 가장 강렬하고 충격적인 작품일 것이다.

 

<두 연인>

<베토벤 프리즈>를 위한 습작

1901~1902, 종이에 검은색 초크, 45×30.8cm, 알베르티나 박물관

 

클림트의 작품에서 매우 이례적으로 등장한 남성 누드의 물결치는

등 근육은 로댕의 조각 <키스>에 표현된 남성의 등을 연상시킨다.

 

좌) <금붕어> 1902, 캔버스에 유채 181×66.5cm, 졸로투른 시립미술관

우) <게르타 펠소바니의 초상> 1902, 캔버스에 유채, 150×45.5cm, 개인 소장

 

세로로 긴 그림 형태는 서양의 전통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으로,

일본 목판화를 거쳐 중국 두루마리 그림에서 그 구성 방식이 유래했다고 볼 수 있다.

 

<야망, 연민 그리고 빛나는 갑옷을 입은 기사>

<베토벤 프리즈> 왼쪽 패널 '행복을 향한 열망' 부분

1902, 석고 바탕에 카세인, 높이 215cm, 제체시온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빈 대학교 천장화가 불타버리는 비극적인 일이 일어나는 바람에

<베토벤 프리즈>는 자연스레 클림트의 가장 중요한 잔존 작품이 됐다. 결코 영구적이지 않은

석고 위에 그려진 이 거대하고 취약한 작품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전쟁으로 인한

손실을 어느 정도 만회해줬다고.

 

<에밀리 플뢰게의 초상>

1902, 캔버스에 유채, 178×80cm, 빈 시립박물관

 

에밀리외 그녀의 자매들(그 중 한 명은 클림트의 동생 에른스트와 결혼했다)은

빈에서 카사 피콜로라는 양장점을 운영했다. 초상화에 나타난 에밀리의 헐렁하면서도

유선형으로 흐르는 드레서는 4년 전에 그린 소냐 닙스의 꽉 조이는 드레스와는 매우 다르며

1908년 빈에서 열린 전람회 쿤스트샤우를 방문한 세련된 당대 여성들의 사진에서도 볼 수 있는

스타일이다. 은빛 기하학적 무늬는 클림트의 '비잔틴 스타일' 또는 '황금 스타일'이 시작됐음을

알린다. 이 시대는 5년 후 아델레의 첫 번째 초상화를 완성함으로써 절정에 달하게 된다.

 

<너도 밤나무 숲 1>

1902년경, 캔버스에 유채, 100×100cm, 노이에 마이스터 갤러리

 

캔버스의 위 아래로 잘린 나무 줄기를 화면에 전면 구성했는데, 이러한 구도는

일본 목판화를 차용한 모네의 <포플러> 연작에서 가져온 듯하다.

 

좌) <희망 1> 1903, 캔버스에 유채, 189.2×67cm, 캐나다 국립미술관

우) <물뱀> 1904~1907, 양피지에 수채, 금 동 혼합 기법, 50×20cm, 벨베테레 미술관

 

<희망 1>이라는 제목에도 불구하고 이 그림의 의미는 결코 낙관적이지 않다.뭉크의 판화 <마돈나>처럼,

이 작품 역시 잉태와 탄생이 그림 위쪽에 그려진 사악한 머리들로 대변되는 부패와 죽음과 얽혀 있다는 걸 보여 준다.

 

<물뱀 1>에서 해부학적으로 불가능할 만큼 극단적으로 비틀려 있는 여성의 목은<키스>, <처녀>, 미완성작 <신부> 등

클림트의 여러 그림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다.황홀경에 빤진 듯한 표정 역시 마찬가지다.

 

<물뱀 II>

1904~1907, 캔버스에 유채, 80×145cm, 개인 소장

 

1900년대 초 많은 관람객들이 이 그림과 위 <희망 1>에서 가장 크게 충격받은 부분은

클림트가 대놓고 묘사해놓은 황금색 음모였다. 19세기에 여성의 음모는 언급할 수도,

표현할 수도 없는 엄청난 주제였으며 이전의 서양 미술사에서 묘사된 사례가 거의 없었다.

암튼 클림트 덕분에 1900년 이후 빈의 예술 애호가들에게 여성의 음모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여성의 세 시기>

1905, 캔버스에 유채, 178×198cm, 로마 국립현대미술관

 

<여성의 세 시기>의 가장 큰 특징은 클림트가 노년의 여성을 부드럽게,

그리고 고통스러울 만큼 솔직하게 표현했다는 점일 것이다.

 

<마르가레트 스톤보로 비트겐슈타인의 초상>

1905, 캔버스에 유채, 179.8×90.5cm, 노이에 피나코테크

 

그림 속 인물은 부유하고 교양 있는 유대인 가문의 여성으로,

클림트에게 후원자 대부분을 연결해준 인물이다.

 

<기사>

<스토ㅗ클레 프리즈>를 위한 도안

1905~1912, 종이에 혼합 매체, 197×91cm, 오스트리아 응용미술관

 

<해바라기가 있는 정원>

1906년경, 캔버스에 유채, 110×110cm, 벨베데레 미술관

 

<프리차 리들러의 초상>

1906, 캔버스에 유채, 153×133cm, 벨베데레 미술관

 

이 그림에는 스페인 바로크 회화, 비잔틴 모자이크, 일본 목판화, 일부 기하학적

장식과 고대 그리스 미술에서 가져온 요소들이 매우 성공적으로 융합돼 있다.

클림트의 창의적이면서도 뛰어난 절충주의를 보여주는 훌륭한 예시다.

 

<의학>

1900~1907, 캔버스에 유채, 430×300cm, 임멘도르프 성의 화재로 소실

 

이 그림에는 1848년 빈 대학교의 새로운 건물 설립 계획에서부터 시작된 유난히 긴

역사가 얽혀 있다. 클림트가 이 그림을 통하여 무엇을 표현하고자 했는지는 설명하기

어렵다. 그림이 제시하고 있는 비전은 혼란스럽고 거의 끔찍할 정도로 암울하다.

늙고 주름진 인물들의 두개골과 무작위로 흩어져 있는 사람들은 인체의 치유보다는

오희려 부패와 고통을 말하고 있다. 그림 아래 뱀을 팔에 두르고 있는 여인은

의학을 상징하는 건강의 여신 히게이아다. 

 

<희게이아> (<의학>의 부분)

 

화려한 의상의 모습은 오히려 병자를 제물로 바치려 하는 여사제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히게이아는 수 많은 인체로 구성된 기둥이 등장하는 <의학>에서

뚜렷하게 알아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녀는 황금색 패턴으로장식된 붉은색 옷을 입고 있다.

뱀 한 마리가 그녀의 오른쪽 팔뚝을 감고 왼손에들고 있는 그릇 속으로 머리를 밀어넣고 있다.

'히게이아의 그릇'이라 불리는 뱀과 그릇의 이미지는 약국의 상징으로 쓰이고 있다.

 

<희망 II>

1907~1908, 캔버스에 유채, 금, 백금, 110.5cm, 뉴욕 현대미술관

 

클림트는 <희망 1>을 그린 지 4년 후 <희망 II>을 통해 임신이라는 주제를 다시 다뤘다.

1903년의 첫 번째 작품보다 훨씬 덜 도발적이다. 음울한 분위기도 많이 사라졌다.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 1>

1907, 캔버스에 유채, 금, 은, 140×140cm, 뉴욕 노이에 갤러리

 

클림트의 색다른 점은 자연주의적인 요소와 넓은 면적의 추상적인 기하학 장식을 통합시켰다는데 있다.

이러한 특징이 상당 부분 이 작품에 상징적이고 에로틱하게 표현돼 있는데, 아델레의 몸통 부분에

여성의 질을 연상시키는 '눈' 모티프가 반복되고 있는 것이 그 예다.

 

<키스>

1907~1908, 캔버스에 유채, 금, 은, 180cm, 벨베데레 미술관

 

클림트의 가장 유명한 그림이 된 <키스>는 로댕과 뭉크가 같은 주제로 제작한 유명한 작품들의 계보를 잇는다.

클림트의 <키스는> 뭉크가 그려낸 녹아내리는 듯한 인간 몸뚱이보다 덜 비관적이고 덜 여성 혐오적이며,

로댕이 영웅적으로 빚어낸 대리석 누드 연인보다 허세스럽지 않다.

그러나 이중 클림트의 그림은 상징적이고 에로틱한 장식을 사용한, 가장 노골적으로 성적인 작품이다.

대중의 열광적인 반응에 힘입어 오스트리아 정부는 이 작품을 전시회에서 바로 매입한 바 있다.

 

커플은 격렬한 키스에 빠져 있다.

그들은 갈색 배경이 뒤에 펼쳐져 있는 절벽 끝에서 황금빛 후광에 둘러싸여 있다.

여자는 무릎을 꿇고 있고, 그녀의 맨발은 안전한 발판을 찾지 못한 채

심연으로 빠져드는 것을 경고하기라도 하는 듯 절벽 가장자리에 매달려 있다.

그녀의 다리는 담쟁이덩굴 같은 식물의 잎줄기에 얽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두 인물은 모두 꽃으로 뒤덮인 초원 위에 무릎을 꿇고 있다. 이 꽃의 패턴은

여자의 드레스와 그녀의 뒤에 있는 후광 부분에서도 반복된다.

이와 대조적으로 남자의 옷은 회색, 흰색, 검은색으로 채색된

기하학적 패턴으로 덮여 있다.

 

 

 

여자는 남자를 꼭 껴안고 오른손으로 그의 목을 애무하고 있지만 손가락은 거의 경련을

일으킨 것처럼 긴장한 상태다. 그녀의 왼손이 그의 손을 잡아 뺨에 대고 있다. 그녀는

미묘하게 약간의 압력을 가하고 있다. 남자가 좀 더 나아가서 그녀에게 입 맞추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일까? 남자의 왼손이 그녀의 머리를 자기 머리 쪽으로 끌어당기고 있다.

 

그들은 더 이상 가까워질 수 없을 만큼 꽉 껴안고 있다.

여자의 눈과 입술은 닫혀 있고, 그녀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있는것 같지만 동시에

그의 부드럽고 다정한 애무에 전적으로 집중하고 있다. 머리는 그로부터 약간 떨어지려는 듯

기울어져 있다. 단순한 소극성일까? 아니면 의식적인 방어 자세일까?

 

담쟁이 또는 월계관으로 보이는 장식을 두른 남자의 머리는 승자의 왕관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강한 위상을 보여주며 지배하려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이 남자는

<베토벤 프리즈>에 등장했던 기사를 암시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다나에>

 1907~1908, 캔버스에 유채, 77×83cm, 개인소장.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아르고스의 왕 아크리시오스의 딸이었다.

클림트는 단지 자신이 좋아하는 주제인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탐구하기 위해 신화를 활용한다.

에로틱하게 표현된 황금빛 장식으로 가득한 비에 의해 임신하게 된 다나에가 캔버스의 형태 안에 갇혀

웅크리고 잠자는 듯한 모습은 가까이 다가갈수록 관음증적인 은밀함을 느끼게 해준다.

 

<아터 호숫가의 캄마성 1>

1908년경, 캔버스에 유채, 110×110cm, 프라하 국립미술관

 

전통적인 가로가 긴 형태가 아닌, 정사각형 형태의 캔버스에 그린 것이다.

클림트는 자연의 모습을 충실하게 기록하기보다는 추상적 패턴을 만들고

종합 하는 데 관심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모자와 깃털 목도리를 한 여인>

1909, 캔버스에 유채, 69×55cm, 개인 소장

 

< 유디트 II>

1909, 캔버스에 유채, 178×46cm, 카 페사로 현대미술관

 

< 유디트 II>는 <살로메>라는 제목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는데 이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물결치는 듯한 그녀의 자세는 댄서의 움직임을 암시하고 화려한 무늬의 천은 살로메의

일곱 개의 베일로 보일 수 있다.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클림트의 작품과 자신의

걸작 오페라 <살로메>를 비교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실제로 살로메와

유디트 이야기는 세기말을 많은 예술가에게 같은 의미로 가다 왔다.

 

<죽음과 삶>

1910~1915, 캔버스에 유채, 180.8×200cm, 레오폴트 미술관

 

<검은 깃털 모자>

1910, 캔버스에 유채, 63×79cm, 로마 국립현대미술관

 

1909~1910년경부터 클림트는 자신의 이른바 '황금 스타일'에서 벗어나

더 이상 금과 은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의 붓질은 더 느슨해지고 과감해졌으며

그의 작품은 지난 40여 년간 프랑스 회화에서 일어난 놀라운 발전에 대해 점점

더 민감한 반응을 보여줬다. 이 작품은 포스터처럼 대담한 디자인이 특징이다.

그림의 윗부분을 가득 채우고도 캔버스의 오른쪽에서 잘려나간

커다란 모자가 눈에 띈다.

 

<십자가상이 있는 농장 정원>

1911~1912, 캔버스에 유채, 110×110cm, 1945년 임멘도르프 성의 화재로 소실

 

한때 매우 경건한 가문의 소유였을 이 야생의 정원을 클림트는 어디서 발견한 것일까?

아니면 그의 풍부한 상상력에 기대어 그린 것일까? 어느 쪽이든 이 그림에는 주의

깊게 감상하는 관람객의 마음을 오랜 시간 사로잡는 매력이 있다.

 

<오스트리아 북부의 농가>

1911, 캔버스에 유채, 110×110cm, 벨베데레 미술관

 

클림트의 아르누보풍 유산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정사각형의 풍경화는

위 <십자가상이 있는 농장 정원>의 배경에 있는 같은 농가를 그린 것으로 보인다.

다만 위치를 바꿔 농가 자체에 초점을 맞췄고, 오래돼 이끼가 낀

두 그루의 사과나무 사이에 건물을 길게 배치하는 구도를 선택했다. 

두 나무 모두 잎이 두껍고 한동안 수확하지 않은 듯 보이는 과일이 잔뜩 달려 있다.

 

<임종을 맞이한 리아 뭉크>

1912, 캔버스에 유채, 50×50cm, 개인 소장

 

이 그림에는 젊은 여성이 그려져 있는데, 그녀는 미술 수집가이자 사업가, 예술 후원가이기도 한

아우구스트 레더러, 그리고 클림트와 절친했던 그의 아내 세레나 레더러의 가까운 친척이었다.

이 여성은 방탕함과 스캔들 일으키기로 악명 높은 독일 작가 한스 하인츠 에버스와 약혼한 상태

였다. 상당한 지참금을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편지를 통해 리아가 형편없는 낭만주의자이고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고 비난하며 약혼을 파기했다. 예상치 못한 큰 타격으로 리아는 1911년

크리스마스가 지난 직후 리볼버 권총으로 자기 심장을 쏴 자살하고 말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리아의 초상화는 두 점이 더 있다. 1913년에 그린 <리아 뭉크 II>는 의뢰인이 인수하기를 거부

했고 1917~1918년에 그린 <리아 뭉크 III >는 완성되지 못했다. 클림트는 이 그림을 완성하고

몇 년 뒤 <리아 뭉크 II> 를 다시 작업해 <무희>라는 작품으로 탄생시켰다.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 

1912, 캔버스에 유채, 190×120cm, 벨베데레 미술관

 

1912년 아델레는 클림트에게 첫 번째만큼이나 멋진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의뢰했다.

이 그림에는 클림트의 후기 초상화 양식의 모든 특징이 나타나 있다. 그는 더 이상

금과 은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장식을 향한 사랑과 평면적인 공간에 대한 열정은 포기

하지 않았다. 더 느슨하게, 더 전형적으로 툭툭 끊어지는 붓 터치와 더 밝고 생생한

색채 사용은 그가 프랑스 회화를 연구했음을 보여준다. 배경에 등장하는 동양풍의

물들 역시 클림트의 후기 초상화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특징이다.

 

<메다 프리마베시의 초상>

1912, 캔버스에 유채, 149.9×110.5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프리마베시 가문은 부유하고 교양있는 빈의 엘리트 유대인의 전형으로 클림트의 경력 내내,

특히 그가 예술적 보수주의와 결별한 이후에도 그를 후원했다. 오토 프리마베시는 은행가로서

클림트가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빈 공방의 주요 후원자였다. 오토는 클림트의 그림을 여러 점

소장하고 있었고 아우구스트 레더러와 마찬가지로 자기 아내와 딸의 초상화를 의뢰했다.

<메다 프리마베시의 초상>은 클림트의 초상화 가운데 어린 소녀의 모습이 담긴 이례적 작품이다.

 

<오이게니아 프리마베시의 초상>

1913, 캔버스에 유채, 140×84cm, 개인 소장

 

무대에서 '메다'라는 예명을 사용했던 오이게니아 프리마베시는 이탈리아 롬바르디아

이민자의 후손으로 은행가이자 산업계 거물인 오토 프리마베시의 아내였다. 두 사람

모두 예술과 후원에 대한 집착이 강해 훗날, 특히 오토가 빈 공방을 후원했던

10년 동안 사람은 재정적으로 완전히 파탄에 이르게 된다.

 

전직 배우였던 오이게니아는 초상화를 그릴 당시 30대 중반으로 인생의 절정기를

보내고 있었다. 1912년까지만 해도 여전히 부유했던 남편이 아내의 아름다움을

그림으로 남기고 싶어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클림트에게 아내의 초상화를

주문했고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아홉 살 난 딸의 초상화도 의뢰했다. 클림트는

딸 메다의 초상화를 먼저 완성했다.

 

클림트는 거의 실물 크기의 초상화를 직사각형 캔버스에 그렸다.

이 전직 여배우의 무릎쯤에서 끝나는 그림의 배경은 황금빛 노란색으로 가득 메워져 있다.

이 초상화는 클림트를 나중에 유명하게 만든 상징 가득한 스타일의 초상화 가운데 첫 작품이다.

이는 그가 고전적인 아카데미 초상화와 결별했음을 의미한다. 클림트는 대상 인물의

심리를 드러내고 강조하는 데에 장식적이고 상징적인 요소들을 사용 했다.

 

<가르다 호숫가의 말체시네>

1913, 캔버스에 유채, 110×110cm, 임멘도르프 성의 화재로 소실

 

<처녀>

1913, 캔버스에 유채, 190×200cm, 나로드니 미술관

 

대담한 색채와 자유로운 물감 사용을 보여주는 클림트 후기 스타일 작품이다.

여기에서 빈 대학교 천장화에서부터 이어져온 모티프 또한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서로 엉킨 채 부유하는 인체의 무리인데, 이 작품에서는 모두 젊은

여성의 인체로 구성돼 있다. 명확한 상징 요소가 보이지 않아 그림의 주제를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중앙의 인물이 아마도 작품 제목이 가리키는 처녀겠지만

그녀의 몰입한 표정과 옆으로 뻗은 팔은 처녀의 순결보다는 성적 욕망을 암시한다.

 

<엘리자베트 바흐오펜 에히트의 초상>

1914, 캔버스에 유채, 180×128cm, 개인 소장

 

엘리자베트 바흐오펜 에히트 남작 부인은 클림트의 가장 중요한 후원자였던 산업가 아우구스트

레더러의 딸이었다. 아우그스트는 클림트가 빈 대학교 천장화를 다시 매입하기 위해 대학교로

부터 받은 선금을 갚는 데 필요했던 거금을 아낌없이 빌려줬다.

그 후 아우구스트는 클림트로부터 <철학>을 사들였다.

배경의 인물들은 동양풍의 도자기 장식에서 차용한 것이다.

 

<아터 호숫가 운터라흐의 집들>

1916, 캔버스에 유채, 110×110cm, 벨베데레 미술관

 

클림트는 생애 후반 뒤늦게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54점의 풍경화를

남겼는데, 그중 하나가 <아터 호숫가의 운터라흐의 집들>이다. 오스트리아 북부 휴양지

잘캄머구트에 있는 이 목가적인 작은 마을은 빈의 중상류층에게 인기 있는 여름 휴양지였다.

클림트는 아마도 흐리고 어두운 날에 이 그림을 그린 것 같다.

태양도 없고 그림자가 지는곳도 없는 다소 우울한 풍경이다.

혹, 화가의 내적 감정이 반영된 건 아닐까?

 

<프리데리케 마리아 베어의 초상>

1916, 캔버스에 유채, 168×130cm, 텔아비브 미술관

 

젊고, 즐길 줄 알며, 교양도 넘쳤던 프리데리케 마리아 베어는 클림트와 실레 두 화가 모두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의뢰할 만큼 부와 고급 취향을 겸비한 여성이었다. 그녀 덕분에 우리는 빈의

두 위대한 화가를 비교해볼 수 있는 귀중한 기회를 얻었다. 젊은 실레가 그린 초상화는 1914년에

그려졌고, 클림트가 그린 초상화는 그로부터 2년 후에 완성됐다. 프리데리케의 통통하고 차분한

매력을 표현 한다는 건 흥미롭고 특색있는 그림을 그려온 두 예술가에게 도전적이 과제였다.

 

그려는 치명적인 매력의 소유자도 아니었고 신경증적인 성향도 없었다.

실레는 이 건강하고 젊은 여성 모데ㅓㄹ에게 자신의 신경성 거식증적인 요소를 투영했다.

실레는 그녀가 몸을 뻗고 바닥에 눕게 한 후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그렸는데, 이는 그녀가

텅 비어 있는 공간에 둘러싸인 채 자신의 운명에 맞서 허우적거리는 듯이 보이는 효과를

가져왔다. 당시 프리데리케의 사진을 참고해보면, 클림트의 초상화가 그녀의 성격과 외모를

더 충실하게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클림트는 그녀의 약간 우둔해 보이기까지 하는 차분함을 

그림의 배경에 동양의 도자기에서 차용한 전사들을 배치함으로써 해결했다.

 

평면적이고 압축괸 공간의 특징 때문에 전쟁하는 인물들이 든 칼과 창은 마치

무심한 젊은 여성의 몸으로 돌린하는 듯이 보인다. 어쩌면 클림트의 초상화가 보여주는

'정복당하는 공포'는 실레의 초상화가 보여준 미니멀한 배경과 그 의미가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닭이 있는 정원>

1916, 캔버스에 유채, 110×110cm, 임멘도르프 성의 화재로 소실

 

높이 솟은 네 개의 꽃 기둥은 마치 골방으로 이어지는 밝은 흙길을 위해 조용히 서 있는

의장대처럼 보인다. 길에는 두 마리의 암탉이 서 있는데, 첫 번째 암탉은 길에 들어오려는

사람을 막으려는 듯 길을 가로질러 서 있고, 두 번째 암탉은 골방의 수호자처럼 길 위에

정면으로 서 있다. 두 암탉의 배열 방식은 하나는 측면을 향해, 다른 하나는 정면을 향해

놓여 있는 정원의 가구 배치를 반영하고 있다.

 

숫자 2와 4의 사용, 즉 암탉 두 마리, 가구 두 점, 네 개의 기둥을 배치한 것은

단순한 우연일지 아니면 비밀스럽고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지 의문이다.

 

<아터 호숫가 운터라흐의 교회>

1916, 캔버스에 유채, 110×110cm, 개인 소장

 

클림트는 불멸의 풍경화를 남김으로써 작은 마을 운터라흐에 시각적 기념비를 세워쏙, 마을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마을 광장에 클림트 동상을 세웠다. 또한 호수 주변에 망원경이 있는

24개의 작은 플랫폼을 설치해, 오늘날의 미술 애호가들이 클림트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서 있었던 바로 그 위치에서 운터라흐를 바라볼 수 있도록 했다.

 

<여자 친구들> (부분)

1916~1917, 캔버스에 유채, 99×99cm, 1945년 임멘도르프 성의 화재로 소실

 

이 아름다운 후기 작품은 소실되기 전에 다행히 컬러 사진으로 보존되었다.

동양적인 모티프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프리데리케와 엘리자베트 남작 부인의

초상화와 공통점이 많다. <물뱀 1,2>나 <금붕어>같은 여러 작품과 마찬가지로

이 그림에도 레즈비언에 대한 암시 이상의 것이 담겨 있다.

 

<아담과 이브> (미완성작)

1916~1918, 캔버스에 유채, 173×60cm, 벨베데레 미술관

 

클림트가 제1차 세계대전 후에도 살아 있었다면 어떤 화풍으로 나아갔을지 짐작케 해주는

아주 좋은 작품이다. 크고 단순한 볼륨감을 보여주는 여성 누드는 조각 작품의 특징을 보여준다.

피카소와 앙리 마티스로부터 출발해서 페르낭 레제와 아리스티드 마욜에 이르기까지,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의 여러 예술가들이 그러했듯이 클미트도 고전주의의 현대적 형태를

탐구하며 더 평온하고 더 기념비적인 스타일로 돌아가는 것에 관심을 보였을지도 모른다.

 

<아담과 이브>라는 제목은 남녀 간의 사랑을 묘사한 이 작품의 원초적이고 보편적인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선택됐다. 어떤 면으로 보나 이 그림이 성경의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그려진 게 아님은 분명하다. 행복하게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는 통통한 금발의 이브는 아델레의

세기말적 분위기보다 프리데리케의 침착함을 더 닮았다. 이러한 점은 여성에 대한

클림트의 태도가 변화하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무희>

1916~1918, 캔버스에 유채, 180×90cm, 개인 소장

 

위에서 언급했듯이 클림트는 의뢰인이 인수하기를 거절한 <리아 뭉크 II>를 

자기 개인의 그림으로 변환시켰다. 클림트가 사망할 때 즈음 다시 그려진

이 작품 또한 그의 새로운 방향을 암시한다. 그림 하반부에 나타나는, 인물의

좌우 배경이 서로 다르고 뒤틀려 있는 부분은 클림트가 더 오래 살았다면

입체주의의 한 단면을 포착했을지도 모른다는 유일한 증거일 것이다.

 

<신부> (미완성작)

1917~1918, 캔버스에 유채, 165×191cm, 벨베데레 미술관

 

1918년 1월, 제1차 세계대전의 비통한 마지막 한 해가 시작됐을 때 쉰다섯 살의 클림트는

뇌출혈로 쓰러졌다. 그리고 몇 주 후 병원에서 폐렴으로 사망했다. 사망 당시 클림트는 많은

그림들을 동시에 그리고 있었다. 이 미완의 캔버스들은 특별히 그의 작업 방식을 잘 보여준다.

옛 거장들과 달리 클림트는 밑칠 없이 하얀 캔버스 위에 바로 작업했다. 그는 또한 섹션별로

작업했는데, 얼굴을 그리는 중이었다면 배경 부분을 지작하기 전에 어느 정도 완성하는 식이었다.

 

<신부>는 클림트가 화려한 의상 밑에 여성 인물의 누드를 구상하고 음모까지 포함해

해부학적 디테일을 완벽하게 살려뒀음을 보여준다. 이는 이 작품을 준비하며

습작으로 그렸던 드로잉들에도 나타나 있다.

 

<아기>

1917~1918, 캔버스에 유채, 110.9×110.4, 워싱턴 갤러리

 

클림트가 생애 거의 마지막에 그린 이 그림은 그가 보통 즐겨 사용하던 모티프에서 벗어난, 요람에

있는 아기를 그린 작품이다. 클림트의 작품 중에서 매우 색다른 모티프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섹슈얼리티라는 큰 스펙트럼 안에서 본다면 간접적으로나마 여전히 공통의 주제를

다룬다고 볼 수 있다.

 

아기가 담요로 아주 두툼하게 싸여 있다는 사실은 어머니의 깊은 애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아기의 작은 머리는 요람의 배개 위에 놓여 있다.(보이지는 않지만)

요람의 다른 끝에 있는 사람에게 눈길을 주며 뭔가 기대하는 듯이 바라보고

있는 걸 보면, 아기는 그 자리에 있는 게 행복한 듯하다.

 

<죽음의 행렬>

1903, 캔버스에 유채, 48×63cm, 임멘도르프 성의 화재로 소실

 

<기다림>(부분)

<스토클레 프리즈>를 위한 도안

1905~1909, 오스트리아 응용미술관

 

<생명의 나무> (부분)

<스토클레 프리즈>를 위한 도안

1905~1909, 오스트리아 응용미술관

 

 

참조: 《구스타프 클림트》 제인 로고이스카 · 패트릭 베이드 著 / 오승희 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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