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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축제·전시·공연

정읍 서화展

 

 

 

 

<산광수색山光水色> 창암 이삼만, 시대미상.

이른 바 '독사체'라 지칭되기도 한다는  창암의 유수체.

 

<書道 글씨 공부를 하는 길> 창암 이삼만, 1844년 이후(추정)

 

<與元奎書여원규서> 창암 이삼만, 1846년.

 

<臨池觀月임지관월> 창암 이삼만, 1949년

윤원(允遠), 창암(蒼巖), 강암(强巖), 강재(强齋, 剛齋)

 

본관은 완산(完山). 자는 윤원(允遠), 호는 창암(蒼巖).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정읍 출생.

만년에는 전주에 살면서 작품활동을 하였다. 어린 시절에 당대의 명필이었던 이광사(李匡師)의

글씨를 배웠는데,  글씨에 열중하여 포(布)를 누여가면서 연습하였다고 한다.

부유한 가정에 태어났으나 글씨에만 몰두하여 가산을 탕진하였고, 병중에도 하루 천자씩 쓰면서

“벼루 세개를 먹으로 갈아 구멍을 내고야 말겠다.”고 맹세하였다는 창암.

글씨 배우기를 청하면 점 하나 획 하나를 한달씩 가르쳤다고 한다.

그의 글씨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우연히 전주에 온 부산상인의 장부를 쓰게 되었는데

그 상인이 귀향하여 감상가에게 보이게 된 것을 계기로 필명이 높아졌다고.

 

하동 칠불암(七佛庵)의 편액과 전주판(全州板) 칠서(七書)도 그의 필적이라고 한다.

또, 전주 제남정(濟南亭)의 액(額)을 썼는데 갑오경장 때 제남정은 소실되었으나

액은 내정(內庭)에 날아 떨어졌다는 일화도 있다.

오세창(吳世昌)은 “창암은 호남(湖南)에서 명필로 이름났으나 법이 모자랐다.

그러나 워낙 많이 썼으므로 필세는 건유(健愈)하다.”고 평하였다.

특히, 초서를 잘 썼으며 그의 서체를 창암체라 하였다.

전라도 도처의 사찰에 그가 쓴 편액을 볼 수 있다.

 

 

<8폭 병풍> 동초 김석곤, 시대미상

 

김석곤(金晳坤, 1874~1948)】 일제강점기 유학자. 자는 천안(薦按), 호는 동초(東樵) 또는 눌어(訥語).

본관은 김해이고, 전북 태인(泰仁) 출생. 부친은 김연추(金演秋).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인으로, 

수당(秀堂) 김교윤(金敎潤)과 교유. 명승지를 두루 유람하며 바위에 글씨를 새기기를 즐겨, 

내장산 서래봉 불충암(佛充庵)의 뒤쪽 바위에는 ‘내장 풍악(內藏楓嶽)’, 정읍의 두승산 정상에는

‘수두목승(水斗木升)’이라고 새겼다. 또 칠보산(七寶山)에는 ‘도불원인(道不遠人)’,

 상두산(象頭山)에는 ‘산명수류(山明水流)’,백운대(白雲臺)에는 ‘유수불부(流水不腐)’라고 새겼다.

 

이 외에도 내가 아는 여러 명승지 바위에 새긴 각자만 해도 여럿이다.

 

 

 

<낙지론> 몽련 김진민, 1933년

 

<수묵으로 그린 매화> 난곡, 송민고

 

<수묵으로 그린 난초> 난곡 송민교, 조선시대

 

<동물 그림 8폭 병풍> 석지 채용신

 

<꽃과 나무 · 새 · 동물의 그림> 석지 채용신, 1918년

 

<북한산의 가을 풍경> 토림 김종현, 1940년대 초반.

 

산 / 석정 남궁훈, 1971년

 

<소나무 아래 호랑이> 소제 이상길, 1933년

 

악학궤범 外

 

 

 

내장 추색

 

 

 

 

서래봉과 내장저수지 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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