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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범 종단과 함께

이세종 / 이현필

화순 '도암제'와 그 너머로 우뚝한 '개천산' 풍경.

한국 최초의 '기독교 영성가'로 일컬어지는 이세종 선생의 발자취를 찾아가는 길이다.

 

 

‘도암의 성자’라고 불리는 이세종은 조선조 말에 태어나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1920년경 성경을 처음 읽은 후 진리임을 깨닫고 성경대로 실천하면서

금욕, 금육, 절제된 삶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돌보며 살다가

신사참배를 피해 1939년 화학산에 은거, 산막에서 살다 1942년에 죽었다.

 

이세종(李世鐘)[1879~1942]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청소년기를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면서 어깨너머 동냥글로 한글을 깨우쳐 읽고 쓰는 것을 배웠다.

그는 새경[머슴살이로 받는 몫]으로 겨우 식구들을 먹여 살리며, 논마지기를 장만해서

형을 장가들게 해주었다. 머슴살이를 하면서 자신의 집과 땅을 마련 했을 때 그는 이미

40이 넘은 노총각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가난한 집안의 어린 처녀 하나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장가든 후에도 그 부지런함과 성실함에는 변함이 없어 남부럽지 않은

살림을 이루었는데 수 십 마지기의 논밭을 스스로 장만하였다.

어느 해 도암면에 심한 가뭄과 흉년이 들어서 굶주리는 사람들이

많이 생기자 자신의 곡간을 열어 면민들의 구황에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그간 자기에게 빚진 이들을 모아 그들이 보는 앞에서 문서를 불태우고 탕감해 주었다.

그의 덕행에 너무 감동한 채무자들과 주민들이 감사의 뜻으로 자진하여 송덕비를 세웠다.

그러나 너무나 겸손한 사람이라 굳이 사양하고 그 송덕비를 땅속에 묻어버렸다.

천성이 부지런하고 성실한 사람이지만 자식을 갖지 못함에 대한 시름에서 헤어날 수가 없던

어느 날 한 친지의 집에서 우연히 성경을 보게 되었다. 그는 성경을 빌려다가 집에서 틈나는

데로 읽기 시작하였다. 그를 존경하여 참지혜를 배우고자 한 사람 두 사람씩 모여들었다.

 

그 가운데 믿음과 끈기가 뛰어난 이현필이 이세종의 뜻을 이어

우리나라 토착 수도원인 동광원을 창설했다.

1942년 죽기 전에 자신의 모든 재산을 남에게 나누어 주었다.

- 네이버 백과에서 발췌 정리 -

 

 

  선생 가옥

 

 

 

 

 

 

 

 

 

 

 

 

 

한국전쟁 때 고아와 폐병 환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다

자신도 폐병에 걸려 세상을 떠난 ‘맨발의 성자’ 이현필(1913~64)과

‘나환우들의 아버지’ 오방 최흥종(1880~1966) 등 성자적 삶을 산

이들이 이세종을 따랐으며, 그리스도적 토착 사상가인

다석 유영모(1890~1981) 등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그는 목사도 신학교의 학자도 아니었지만, 치열한 삶의 실천 현장에서

성경을 통해 깨달은 기독교의 진리를 구경(최고의 깨달음)적 영성의 경지로

밀어붙인 가히 성인의 경지에 다다른 인물로 평가한다는 게 기독교 영성가들의 평.

그의 활동 반경은 화순 일대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그의 실천적 유산만큼은

세월이 갈수록 더 깊어지고 더 넓게 확산되고 있다고.

 

 

차정식 한일장신대 신학과 교수는 특히 이세종의 생태영성에 주목한다.

 “고사리를 꺾을 때 거기서 나오는 액체를 생명의 피로 여기고, 길을 가다가 혹여 자기

발에 개미 같은 미물이라도 밟혀 죽을까 싶어 심히 조심하여 살필 정도로 뭇 생명체에

대한 예민한 생태적 감수성을 지녔고, 자신의 많은 재산을 가난한 자들과 공익기관에

분배하여 무소유의 삶을 지향하면서, 산속에 움막을 짓고 음식도 도토리 같은 열매

말라 죽은 식물성을 위주로 생명 연장의 최소치만을 취하며 자족했다"

 

- 조현의 휴심정 중에서 발췌 정리 -

 

 

이세종 선생 개천산(開天山) 기도터

 

이곳은 이세종이 일제 강점기에 창조주의 도(道)를 깨닫고

신앙에 몰입하며 성경을 읽고 기도를 드리던 곳이다.

그는 혼인하고 몇 해가 지나도 자식이 없자 무당의 권면으로 이곳에 산당을 짓고

지극정성을 바치던 어느 날, 우연히 얻은 성서를 읽다가 문득 창조주의 섭리를 알아차리고

모든 제사 도구들을 걷어 치우고 예수의 삶을 본받으려 애쓰며 영성의 삶을 살았다.

그가 이곳 개천산에서 지낸다는 소문을 들은 광주, 화순, 나주, 영암지역의

예수 신앙인들이 그의 가르침을 받고자 찾아오게 되었다.

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기도했던 곳은 소실되어 터만 남았지만,

오늘에 이르기까지 참 신앙의 길을 찾는 구도자들의 발걸음은 여전하다고.

 

 

 

 

 

동광리 마을회관 뒷편으로

개천산(우측)과 천태산(왼편)의 봉우리가 우뚝하다.

양쪽 산 안부 너머에는 비자나무 숲이 울창한 개천사(開天寺)가 자리하고 있다.

 

과거, 몇 번인가 개천산과 천태산에 올라, 이세종이 마지막으로

머물다 소천한 화학산까지 이어가 본 기억이다.

그의 묘소도 화학산에 있다고 들었다.

 

이세종의 제자 이현필 선생의 생가도 찾아보았다.

 

 

 

 

 

이세종의 제자 이현필(1913~1964)은 맨발의 성자로 불리우는 인물.

 다석 유명모 선생은 이현필이 이끄는 제자공동체 동광원에서

이십여 년간 성경을 가르치기도 했다.

 

이세종은 비록 머슴 출신의  시골 촌부였지만,

호남 개신교회 지도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평가된다.

특히 나환자의 아버지요, 광주 3⦁1운동을 이끌었던 광주 최초의 목사

최흥종은 물론, 당대의 지성 유영모 선생에게까지 영향을 주었다.

 

 

이현필 선생의 생가에서 바라본 천태산(왼편)과 개천산(오른편)으로 이어지는 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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