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평송씨 세장비'와 '신도비문'
'신도비문'은 서인 소장파의 영수 윤증이 썼다고.
지지당 송흠선생의 친필詩 醉贈健上人 취중건상인
한 평생 필연코 술 취해 있을 것인가
봄날 대낮에 사립문 닫치고 옥산이 무너지네
어느 곳 명승이 나를 뵙기 원하는가
잠시 눈을 뜨고 서로 바라 볼뿐
시산에는 최사문만 있을 뿐
이 밖에는 아는 자가 없었다
지지당이 취하여 쓰다
아래는 대청 위로 걸린 홍언필, 전안국, 성세창, 김인후, 임억령 등의 제영이다.
아래는 지지당의 <관수정 원운>이다
물가에 세운 정자 여름에 역시 서늘해져
늙은 몸 날마다 난간에 의지하네
골짜기 어구에 두 시냇물 흐르나니
어찌 용문의 파절탄만 좋다 하랴
고요한 그림자 물속에 비치니 참으로 즐거웁고
아름다운 정자 비에 씻으니 경치 더욱 아름답다
천자만태로 눈 앞이 어지러우니
맑은 물 취하여 내 마음 씻어보리
왼쪽부터 이도의 등불, 관수정기, 지지당 가훈
吏道의 등불(淸白吏知止堂 宋欽)
지지당 가훈
지지당 묘소 오르는 길
지지당 송흠의 묘
오른편 묘갈명도 윤증이 쓴 것으로,
마지막 부분의 명 4줄은 중국의 고사를 인용하고 있다.
노래자는 갓난아이처럼 울었고
양백기는 밤중에도 아는 자가 있다고 했으며
소부는 동문으로 물러 나갔고
노공은 낙양의 모임을 만들었으니
‘노래자’는 초나라 사람으로 70세의 나이에도 색동옷을 입고 부모를 즐겁게 하였다는 고사의 주인공.
송흠 선생이 99세의 노모를 모시기 위해 76세에 전라감사 벼슬을 사직하고
101세로 별세할 때까지 봉양한것을 비유한 것.
‘양백기’는 후한 때의 청백리 양진인데 그가 창읍에 갔을때 왕밀이란 사람이 한밤중에 금을 바치며
“밤이라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하자 양진이 “하늘이 알고 귀신이 알고 내가 알고
자네가 알거늘, 어찌 알자가 없다고 하는가”라고 했다고 한다.
송흠 선생을 양백기에 비유한 것은 선생이 중종때의 대표적인청백리였으며 여러관료들의 존경을 받았고
중종 임금으로부터 여러번의 표창을 받은 삼마태수이기 때문.
세 번째 줄의 ‘소부’는 중국 한나라 소광이다.
선제때 황태자의 태부로 있었는데 5년이 지나자 관직과 명성이 높아졌다고 한다.
이때 떠나지 않으면 후회할 일이 생길 것이라며 장안의 동쪽 성문으로 나갔다고 한다.
이것은 송흠선생이 1541년 우참찬의 벼슬을 사직하고
시골로 내려간 것을 한나라 소부에 비유한 것.
네 번째 줄의 ‘노공’은 송나라 때 문언박의 봉호라고 한다.
사마광등과 함께 낙양기영회라는 노인의 모임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송흠 선생이 1543년에 왕명으로
숭정대부에 올라 판중추부사가 되어 당시 전라감사 규암 송인수가 특명으로 기영정이라는 정자를 지어
10여개 고을의 수령을 모아 놓고 잔치를 베푼 것을 말한다.
송흠의 묘 앞으로 두 기의 묘가 더 있다.
맨 끝에 보이는 묘에는 상석만 놓여있을 뿐 비석 등 아무런 표식이 없는데,
주변 애기론 '평양할머니'의 묘라고. 아마도 후실의 묘인 듯.
맨 왼편의 묘가 지지당이고 그 앞으로는 공조참의 송공의 묘이다.
관수정이 있는 천방마을 위로 석탑 1기가 자리한 '천방사지'가 있다.
기영정 오르는 길
'기영정' 앞을 흐르는 용암천
만발한 복사꽃
복사꽃 아래 자리한 다육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