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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집옥재 서적과 고종 (2)

2부

군사 지식과 전쟁 기사를 담은 책

 

집옥재에 소장되었던 책 중에는 군사학 및 전쟁과 관련한 책들도 적지 않다.

서구 열강이 제국주의 정책을 펼치면서 세계 곳곳에서 식민지 쟁탈전이 벌어지던 당시 고종은 최신 군사 지식을 얻고

외국에서 벌어진 전쟁의 시말을 파악하고자 했다. 비록 이전 시기부터 이어진 '무武'에 대한 경시 풍조, 빈약한 국가

재정, 국내외로 혼란한 정치 상황 등으로 강한 군사력을 갖추는 데는 실패했지만, 고종과 개화파 관료들은 신식

군대인 별기군別技軍을 설치하고, 군제를 개편하는 등 자주적 군사력을 확립하기 위한 일련의 정책을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중국으로부터 들여온 군사학 및 전쟁 관련 서적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강남제조국'으로 되어 있는 책들은 간기刊記가 없어 간행자와 간행연도를 알 수 없으나, 강남기기제조총국에서

간행한 판본을 복각하여 출간한 것으로 추정되므로 우선 참고를 위해 초간본의 간행자와 간행연도를 밝혀 둔다.

 

 

 

이 밖에도 규장각에는

.... 

창포 및 화약관련 서적과 해역 방어 관련 서적이 소장되어 있다.

이들 책에는 "제실도서지장"이라는 장서인만 압인되어 있다.

여기서는 집옥재에 소장되었던 군사학 및 전쟁 관련서 중 보루堡壘를 축조하는 방법을 서술한 《영루도설》,

독일 쿠루프 사 대포를 사용하는 방법을 설명한 《극로백포설》, 청불전쟁 관련 자료를 엮어 놓은 《회도월법전서》,

보불전쟁과 유럽 정세를 중국에 알린《보법전기》 를 소개한다.

 

 

 

영루도설營壘圖說

 

《영루도설》은 보루를 축조하는 방법을 서술한 책으로, 벨기에의 앙리 브리아몽(1821~1903)의 저작 

《야전 축성》(1872년)을 중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멀리 떨어진 벨기에에서 출간된 서적이 중국어로 번역된 것은

양무운동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양무운동은 서양의 문물과 기술을 받아들여 군사적 자강과 경제적 부강을 이루자는

군대화 운동으로, 1861년 부터 1894년 까지 공친왕, 중국번, 이홍장, 좌종당 등이 중심이 되어 진행되었다.

 

.....

 

《영루도설》 역시 강남제조국 번역관에 소속된 독일인 번역자 카를 트라우고트 크레이어가

원서를 구역口譯하고, 이를 이봉포가 필술筆述하여 출판한 것이다.

 

.....

 

서양 열강의 침략에 대비해야 했던 것은 청나라나 조선이나 마찬가지였다.

1866년(고종 3년)에는 프랑스 함대가 천주교도 학살에 항의하여 강화도에 침범한 병인양요가, 1871년에는

미국이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빌미로 무력 침략한 신미양요가 발생했고, 이 책이 출간되기 바로 전 해인 1875년에는

일본 군함이 강화도 앞바다에 불법으로 침투한 운요호 사건이 발생했다. 고종은 수차례 외세의 침략을 겪으면서

서양의 선진 요새 구축 기술을 배우고자 했을 것이다. 집옥재에는 《영루도설》 외에도 

상해에서 출간된 요새 구축 기술 관련 번역서가 소장되어 있었다.

 

규장각에는 《영루도설》이 모두 세 부 있는데, 이들은 모두 같은 판본이다. 

규중 3110만 표지가 닳아 있는 등 독서의 흔적이 남아 있고. 나머지 두 부는 상태가 깨끗하다.

이 판본은 소장처가 드물다. 이러한 휘귀본이 세 부나 소장되어 있다는 것도 흥미롭다.

 

규장각 소장본은 1책 16장으로 되어 있으며, 군수제와 판심제는 모두 "영루도설"이고 표제는 없으며

표제 역시 "영루도설"이다. 표제면은 없고 속표지 두 장이 있으며 세 번째 장부터 곧바로 본문이 시작된다.

 

......

 

 

 

 

 

극로백포설克虜伯礮說

 

당대 최고의 대포를 소개하다

 

《극로백포설》은 독일의 크루프 사에서 제조한 대표 사용 안내서를 번역한 것이다.

쿠루프 사는 독일이 철강과 무기 제조사로 19세기 중엽부터 202세기 초엽까지

독일 최고의 무기 제조사로 군림했다.

1999년에는 독일의 철강 생산 기업 티센과 합병하여 현재 유럽 최대 철강회사 티센크루프가 되었다.

 

......

 

제2차 아편전쟁 후 서양 무기의 위력을 알게 된 청 정부는 처음에는 영국의 암스트롱포 등을 위주로

주로 영국과 프랑스에서 신식 무기를 구입했으나 점차 독일 크루프 사의 무기가

청의 군사 근대화에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

 

1911년 중화민국 성립 이후에도 중국은 크루프 사의 주요 수출국이었다.

중국내전이 빈번하게 일고 일본에 대항해야 했던 제1차 국공내전 시기를 거쳐 1941년 독일과 국교가

단절된 때까지 크루프 사의 무기와 기기설비들은 끊임없이 중국으로 수입되었다.

1870년대 크루프 사는 무기 제조사로서 입지를 굳혀 가고 있었고, 주요 고객인 청 정부와의 관계에 신경을 썼다.

그들은 비록 대포의 제조 기술에 대해서는 비밀에 부쳤지만 대포 사용 기술을 알려주는 데는 적극적이었다.

1870년에는 청 정부에 크루프 사의 무기와 관련한 서적을 여러 종 증정했고, 강남기기제조총국 번역관에서

이들 서적을 번역해 출간함으로써 청군의 크루프 사의 무기에 대한 이해를 높이게 된다.

 

........

 

조선에서도 군사력 증강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1870년대부터 대한제국 시기까지 후장식 대포, 야포 등

다양한 크루프포를 구입했다. 적어도 실제 무기도 없이 허황하게 무기 관련 서적만 구비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나 《극로백포설》 등 크루프포 관련 서적들이 단지 서가를 장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 군사 훈련에

얼마나 활용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규장각에 한 종의 서적이 여러 부 소장되어 있는 것을

볼 때 이들 서적을 여러 부처에 배부해 관련자들이 열람할 수 있도록 조처했던 것으로 보인다.

 

.......

 

 

 

 

 

 

전사戰史

 

회도월법전서繪圖越法戰書

 

《회도월법전서》는 19세기 말 베트남의 종주권을 놓고 청나라와 프랑스 간에 벌어졌던 청불전쟁 관련 기록을

엮은 책이다. 제목에서 "회도"는 '삽도'라는 뜻이다. 전통시기 중국에서 책을 출판할 때 삽도를 수록한 경우,

삽도가 들어 있음을 광고하기 이해 제목에 종종 '회도', '유상有象', '증상增象', '전상全象', '합상合象', '출상出象'

등의 표현을 덧붙였다. '상象' 대신 '상相'을 쓰기도 한다. 소설이나 희곡 서적의 경우에는 비단 위에 수놓은 것처

럼 섬세한 그림이라는 뜻을로 '수상繍像'이라는 말을 많이 썼다.

 

......

 

당시 급변하는 세계정세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고종이 《회도월법전서》를 사들인 이유는 분명해 보인다.

고종은 당시 '만국공법'이라 불렸던 국제법과 주변국들과 서양 열강 간의 조약 체결 과저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이 책에 수록된 청불전쟁의 기록을 살펴보면서 청나라와 프랑스 간에 맺어진 조약의 득실을 되짚어 보고

조선에 끼칠 영향을 점쳐 보고자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청불전쟁이 종결되기 전인 1884년 4월에

간행되었기 때문에 정작 전투에 대한 기록과 전쟁의 결말은 수록되어 있지 않다.

말하자면 이 책은  전쟁의 서막까지만 기록한 셈이다.

 

..........

 

《회도월법전서》의 간행자는 본격적인 청불전쟁이 발발하기 전인 1883년 1월부터 1884년 3월까지

베트남-흑기군 연합군과 프랑스군 간의 전투와 관련해 발표된 공식 문건들과 군사 소식을 전한 신문 기사

등을 모아서 이 책을 출판했다. 당시 청나라의 일반 백성들은 베트남의 상황을 보면서 시시각각으로 바뀌는

새로운 소식을 얻고 싶어 했을 것이고, 《회도월법전서》는 그러한 수요를 공략한 것이다.

다만 편집자는 논평을 달거나 앞으로의 전황을 예측하지는 않았다.

 

이 책에는 지교전투의 모습을 담은 삽도가 수록되어 있다.

지교전투는 프랑스가 베트남을 정복하려고 시도하는 중에 첫 번째로 일어난 주요한 전투였고, 본격적인

청불전쟁의 계기가 되었다. 이 삽화는 비록 화가가 전투 상황을 직접 보고 그린 것이 아니라 상상에 의지해

그린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럼에도 지교전투를 기록한 전쟁 기록화로서 나름의 가치가 있다.

 

 

 

 

 

 

보법전기普法戰記

 

보불전쟁과 유럽 정세를 알린 책

 

《보법전기》는 만청 시기의 정치평론가이자 언론이었던 왕도王韜가 보불전쟁과 관련한 자료를 엮고 논평을 더해

편찬한 것이다. 보불전쟁(프로이센 - 프랑스 전쟁)은 프로이센 왕국과 프랑스 제2국 간에 1870년 7월부터 1871년

5월까지 벌어진 전쟁으로, 이후 유럽과 세계의 정세를 바꾼 중대한 사건이다. 전쟁은 프로이센군의 승리로 끝났으며,

프로이센은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독일 제구의 성립을 선포하고 독일 황제의 즉위식을 올렸다.

 

청과 영국 · 프랑스 연합군 간에 벌어진 제2차 아편전쟁 이후 청의 정치인들과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유럽 정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 정치적 사건으로 1862년부터 홍콩에 은둔 중이던 왕도는 1867년부터

1870년까지 영국 등지를 방문하면서 유럽에 대한 견문을 넓혔고, 1870년 3월 홍콩으로 돌아왔다. 이때부터 서양을

소개하는 저술과 번역 활동을 시작한 그는 보불전쟁 소식을 접한 후 전쟁의 경과와 유럽의 정세를 중국에 알리기

위해 관련 보도 자료를 널리 수집해 《보법전기》를 출간했다.

 

이 책은 중국인이 편찬한 최초의 유럽전쟁사로서 사료적 가치가 높다.

보불전쟁의 배경과 원인, 경과, 전후 처리를 상세히 소개했을 뿐 아니라, 프로이센과 프랑스 수뇌부 인물의 사적,

유럽의 정치 제도, 외교 상황, 최신의 군사 무기와 전술에 대해 서술했고, 곳곳에서 유럽의 풍토와 사정을 엿볼 수 있는

내용을 담았다. 이 책의 내용들은 당시 중국인들로서는 쉽게 얻을 수 없는 것이었고, 이후 중국의 지식인들이 유럽에

대한 지식을 쌓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이 책은 출간되기도 전에 초본의 형태로 널리 읽혔으며, 양무파 관료들과

유신파 인사들로부터 극찬을 받았다. 청말 정치사상가 양계초는 1896년 《서학서목표西學書目表》를 편찬하면서

목록에 《보법전기》를 포함시키고 이 책을 서학 학습에 있어 필독서라고 평했다. 책에 수록된 글 중에서도 전쟁승패의

원인을 분석한 왕도의 논평이 주목을 요한다. 그는 독일이 승전할 수 있었던 요인은 첫째로 인재 등용, 둘째로 전쟁 대비,

셋째로 우수한 신식 무기 사용에 있으며, 넷째로 프로이센 의회군주제(즉, 입헌군주제)가

프랑스의 전제군주제보다 우월하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보법전기》의 초간본은 14권으로, 1873년 9월 홍콩의 중화인무총국에서 출간되었다.

보불전쟁이 끝나고 약 2년이 지난 시점으로 당시로서는 비교적 빠른 시간에 먼 유럽에서 벌어진 소식을 중국에 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 실린 자료는 영국과 홍콩에서 발행한 신문 기사와 전보 등이며, 이들 자료를 장종량 등이

번역한 것을 왕도가 정리하고 시간 순으로 엮은 것이다. 초간본이 출간된 다음 해인 1874년

관련 자료를  증보하여 여섯 권을 더한 20권본이 출간되었다.

 

.........

 

《보법전기》는 조선에도 전해졌다. 규장각 소장본은 1886년 간행된

20권본으로, "집옥재集玉齋" 장서인이 압인되어 있다.

비록 전쟁이 벌어진 지 상당핝 시간이 지난 후이지만 이 책에 수록된 유럽의 외교 상황 및

정치 체제와 관련한 내용은 고종이 멀리 떨어진 유럽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보법전기》는 조선의 지식인들에게도 알려져 있었다.

1882년(고종 19년) 지석영이 올린 상소에서 백성들이 오늘날의 시세를 알 수 있도록 《보법전기》,

《만국공법》, 《조선책략》, 《박물신편》, 《격물입문》, 《격치휘편》 등에 수록된 내용을 널리 알려야 한다고

주장하며 방책을 제시했고, 고종은 이에 대해 옳다고 여겨 '소의 내용을 시행토록 하겠다'고 답했다.

《보법전기》는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세계의 동향을 파악하고 최신 지식을 얻기 위해 읽어야 할 필독서로 여겨진 것이다.

이후 대한제국 시기 지식인들이 보불전쟁 승전국인 독일을 본받아야 할 군사강국으로 인식하는 데도

《보법전기》가 일정한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보법전기》의 권수에는 두 편의 서문과 「범례」에 뒤이어 6면에 걸쳐 세 장의 지도가 수록되어 있다.

지도를 수록한 부분이 시작되기 전에는 한 면에 걸쳐 큰 글씨로 세 지도의 제목을 제시했다. 여기에서는

지도의 이름을 각각 "구주보법총도", "법국전경도", "법경외포대도"라 했는데, 지도 상의 제목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지도 수록 부분의 판심 하단에는 "왕도감정王韜勘定"이라 했다. 천남둔수는 왕도의 호號다.

 

.......

 

 

 

 

 

3부

상해의 풍경과 삶을 담은 책

 

 

청말 상해에서는 유명 화가의 작품을 모아 출간한 다양한 화보가 유행했다.

특히 장웅張熊, 임웅任熊, 임훈任薰, 임백년任伯年, 전혜안錢蕙安 등 유명 해상화파(海上畵派:줄여서 '해파')라고도

한다.) 화가들은 대중적으로 인기가 높았다. 해파 화가들은 서양화 기법을 도입하는 등 참신하고 개성적인 화풍을

형성했고, 전통적으로 문인의 '예藝'의 영역에 있던 회화를 대중화 · 상업화하는 데 기여했다.

이처럼 해파 작품이 대중적 인기를 얻으면서 화보뿐만 아니라 해파 화가가 그린 삽도나 해파 화풍을 모방한

삽도를 수록한 수설 및 희곡 서적도 활발하게 출판되었다. 화려하고 참신한 삽도를 수록한 이들

서적은 고전 문학 출판 시장에 활로를 열어 주었다.

 

1870년대에는 상해에 석판 인쇄라는 새로운 인쇄 기법이 도입되어 삽화의 세밀한 표현이 가능해지면서 출판물의

삽화 수준이 최절정에 달했다. 당시 상해 출판물에 수록된 세밀한 삽화는 석인 기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석인 기술은 독자층의 범위를 넓히는 데에도 기여했다. 석판 인쇄는 이전의 목판 인쇄에 비해 비용이 훨씬 적게

들었고 짧은 시간에 많은 양을 인쇄할 수 있었다. 즉 염가의 책을 대량 출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

 

상해에서 출판된 화보는 개화기 이후 조선 화단에도 큰 영향을 끼쳐

심전 안중식 등 국내 화가의 작품에서 상해 화보를임모한 작품들을 발견할 수 있다.

고종 역시 청말 상해에서 출판된 화보를 출간과 거의 동시에 구매하여 소장할 만큼 좋아했다.

 

......

 

고종이 수집한 서적 중에는 상해 화보, 소설 및 희곡 서적, 유학 관련 책 등 개화나 서학과는 관련이 적은

서적들도 상당수를 차지한다. 이들 서적은 이전 시대부터 내려온 전통 사상의 뿌리와

중국 문학 및 회화에 대한 고종의 취향을 잘 보여준다.

 

 

 

신강승경도申江勝景圖

 

그림으로 보는 상해의 랜드마크

 

《신강승경도》는 중국에서 석인본으로 출간된 최초의 풍경도책風景圖冊이다. 제목의 "신강"은 상해의

황포강의 다른 이름으로, 상해를 가리키는 말로도 쓰였다.19세기 말엽의 상해는 동아시아에서 근대적 도시의 삶을

향유할 수 있는 최전선의 공간이었다. 1842년 난징조약의 체결에 따른 개항과 조차지 설정은 상해 지역에 정치적으로

비교적 자유로운 환경과 통상 무역을 통한 경제적 부를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태평천국운동으로 전통 시기 문화의

중심지였던 강절江浙 지역(강소성과 절강성 일대)이 파괴되고, 문화적 소양을 갖춘 저술가와 출판업자를 비롯해

수많은 난민들이 상해로 유입되었다. 이후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점차 인구 밀도가 높아지고,

산업과문화의 방면에서 조계지의 서양인들과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상해에는 독특한 도시 문화가 형성되었다.

 

 

 

 

이 책의 그림을 그린 오우여(五友如, ?~1894)는 청말의 유명한 풍속화가다.

그의 이름은 가유嘉猷이고, 자가 우여다. '유猷'라는 이름도 썼다. 강소 원화(元和, 지금의 오현吳縣) 사람으로,

어렸을 때 빈곤했으나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 독학으로 전두鋑杜, 개기, 임웅 등의 화법을 배웠다.

그는 <점석재화보> 출간 초기 주요 화가 가운데 하나였고, 이후 독립하여 1890년 <비영각화보>를 창간했다.

그의 그림은 대체로 시정의 풍속과 시사時事를 소재로 했으며, 여성의 그림은 동시대 확사인 사복의 영향을 받아

마르고 유약하게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건축물이나 거리의 묘사는 서양화의 일점투시도법의 영향을 받았다.

흑백이 분명한 그의 선묘법은 특히 석인 출판에 적합했다.

 

..........

 

 

 

 

증각홍루몽도영增刻紅樓蒙圖詠

 

그림과 시로 《홍루몽 감상하기》

 

《증각홍루몽도영》은 청대 조설근(曺雪芹, 1715?~1763?)의 소설 《홍루몽》에 등장하는 인물을 담은 120폭의 그림과

인물에 대해 읊은 시를 엮은 회화집이다. 대가 왕지(王墀, 1820~1890)가 그린 삽화는 세밀하면서도 정제된 배경 묘사

와 함께 작품 속 성격에 부합하는 인물 표현이 압권이다. 독창적이면서도 아취가 있는 화면 구성과 자연스러운 선의

운용이 볼 만하다. 시는 당시 문인들이 《홍루몽》의 인물에 대해 묘사한 것들로, 그들이 인물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각 시의 서법은 시의 뜻과 특징에  따라 전서, 예서, 행서, 초서 등 적절하게 골라 썼고 글씨가

아름다워 심미적 가치가 높다. 책을 펼치면 오른쪽 면에 그림이, 왼쪽 면에 시가 있으며, 한 폭의 그림에 한 편의 시가

대응된다. 이 책은 출간 당시 큰 인기를 얻었고, 미학적 완성도가 높아 《홍루몽》 삽화의 경전經典으로 평가된다.

지금도 많은 《홍루몽》 전문가들이 애호하며, 학술적 가치도 높다.

 

왕지는 청대 저명한 화가로 상해 화풍인 해파海派의 선구자다.

그는 강음(江陰: 현재의 강소성 강음시) 사람으로, 자는 국농菊濃이고, 호는 운계芸階다. 《증각홍루몽도영》은 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이 밖에 1883년 점석재서국에서 출간한 인물 화보 《육수당화전》도 그의 작품이다.

그의 인물 화법은 국내 화단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후요재지이도설後聊齋誌圖說

 

기이한 일들의 기록

 

《후요재지이도설》은 청대 왕도(王韜, 1828~1885)의 문언文言 단편소설집이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책의 체재와 제재는 청대 포송령(浦松齡, 1640~1715)의 문언 단편소설집

《요재지이聊齋志異》를 모방한 것이다. 여기에 수록된 소설들은 본래 <신보申報>의 부간副刊인 <점석재화보>에

삽화와 함께 3년 동안 연재되었던 것들로, 연재가 끝난 후 1875년에 새로운 삽화를 곁들여 《송은만록》이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작품이 인기를 얻자 여러 출판사에;서 '후요재지이도설', '회도후요재지이'

등의 제목으로 중간重刊했다.

 

이 책에는 120편의 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귀신, 여우, 신선이 등장하는 비현실적인 괴담도 있지만,

남녀 간의 애정 고사나 실존 인물의 일생 등 인생 유전流轉을 소재로 한 이야기도 다수 수록되었다

특히 기녀를 소재로 한 글이 적지 않다.

 

........

 

제4책의 표지

 

 

규장각 소장 《후요재지이도설》은 1887년 상해의 대동서국에서 출간한 것이다.

 

 

 

 

 

 

 

해상중외청루춘영도설海上中外靑樓春影圖說

 

상해 기녀들의 사연과 일상

 

《해상중외청루춘영도설》(이하 '도설')은 상해 기녀들의 모습을 담은 삽화와 짤막한 전기를 수록한 책이다.

제목의 "해상海上"이란 상해의 옛 명칭이고, "중외中外"란 중국과 외국이라는 뜻이며, "청루靑樓"는 기루妓樓이고.

"춘영春影"은 봄의 경치를 뜻한다. 즉, 상해에 있는 중국과 외국의 기녀들의 봄날 모습을 담은 책이라는 뜻이다.

봄은 종종 여인의 미모를 은유하기도 했으므로 "춘영"은 여인의 모습이라는 뜻도 함께 지닌 중의적 표현이다.

 

당시 상해에서 《도설》과같은 책이 출간될 수 있었던 것은 상해의 유곽이 전례 없는 호황기를 맞으면서 독특한

청루 문화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당시 상해에서는 청루 문화를 소재로 한 협사소설狹邪小說이 크게 유행했다.

 

........

 

 

 

《도설》의 저자는 청말의 저널리스트 작가 추도(鄒弢, 1850~1931)다.

추도는 청말 상해의 새로운 청루 문학의 탄생을 알린 왕도의 계승자로서 이후 상해 청루 문학의 발달을 이끈 인물이다.

《도설》에는 저자가 밝혀져 있지 않고, 서발瑞跋이 없다. 《도설》의 저자를 추도로 추정하는 근거는 세 가지다.

첫째, <신보>의 주필이었던 황식권이 쓴 「봉제추군한비신저」 《유호필기》라는 글을 통해 《도설》의 저자가 추도임을

알 수 있다. 제목의 "한비翰飛"는 추도의 자子다. 황식권은 이 글의 말미에 "추도는 일찍이 《춘강화사春江花史》를

저술했는데, 어떤 사람의 일을 사실과 다르게 쓰고 또 어떤 사람의 이름을 가탁하여 서문을 썼기 때문에 문자옥文字獄

을 일으키는 데 이르렀고, 나중에 판목을 부수고 나서야 해결되었다. 작년에는 또 《중외청루춘영도설》로 어떤 기녀의

미움을 받아 (그녀가) 일보日報에 고발하는 글을 써 마음껏 모욕한 일이 있었으니, 나는 (그가) 지금 이 책을 저술함에

있어서 분명 신중하고 또 신중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라고 했다. 이 글은 1888년에 쓴 것이니 "작년"은 《도설》이

간행된 해인 1887년이 된다 이 글에 근거하면 《도설》의 저자가 추도임이 거의 확실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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