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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민족의 혼魂 홍범도洪範圖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여천(汝千) 홍범도(洪範圖) 장군

 

 

홍범도 장군 진혼사

 

 

무장투쟁의 독보적 존재 여천汝千 홍범도洪範圖,1868~1943) 장군은 역사교과서에서

청산리대첩의 영웅 정도로만 소개뿐 일반에는 여전히 생소한 독립운동가이다.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치고 그의 이름 석 자를 모르는 사람이 드물겠지만,

그의 활동과 인생에 대해 어느 정도라도 알고 있는 사람 또한 흔치 않을 것이다.

'존재는 낯익지만 실체는 낯선 인물' 중의 하나이다.

 

우리 역사에서 '장군' 은 양가적兩價的인 인식을 갖게 한다.

이순신 · 강감찬 · 을지문덕 등 호국의 장군상과, 박정희 · 정일권 · 백선엽 등 만군 · 일군 출신의

반민족 장군상, 그리고 전두환 · 노태우 · 정호용 등 반민주 정치군인 장군상 때문이다.

 

홍범도는 일본군이 스스로 '하늘을 나는 장군(飛將軍)' 이라 부를 정도로 신출귀몰한 유격 전술로

일본군을 격파하여 명성을 날렸다. 당시 평안도 지방에서는 '축지법을 구사하는 홍범도 장군'

이라는 '전설' 이 나돌 만큼 민중의 영웅으로 추앙되었다. 홍범도는 일제의 총포화약류 단속법을

거부하면서 최초의 산포수 의병부대를 조직해 활동했다.

그사이 일제의 야만적인 고문으로 부인을 잃고, 장남은 전사했다.

 

조선 독립은 무장투쟁으로만 쟁취 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독립군의 모체인 포수단을 창설하는 등

독립운동 전 과정을 통해 무장투쟁으로 일관한 독립운동가가 홍범도 장군이다.

그에게 척살의 대상은 왜적뿐만이 아니었다. 민족을 배반한 일진회 회원과 친일파도

가차 없이 처단하여 민족의 의기를 살리고자 했다.

 

1907년경부터 홍범도가 이끄는 의병부대가 일본군을 연속해 섬멸하면서 평안도 지역 주민들은

이를 크게 찬양하여 다음과 같은 노래를 지어 불렀다. 이 노래는 평안도 뿐만 아니라

함경도 지방에까지 민요로 널리 알려졌다.

 

 

홍대장 가는 길에는 일월이 명랑한데

왜적 군대 가는 길에는 눈과 비가 내린다.

에헹야 에헹야 에헹야

왜적 군대 막 쓰러진다

 

오연발 탄환에는 군불이 들고

화승대 구심에는 내굴이 돈다

에헹야 에헹야 에헹야

왜적 군대 막 쓰러진다

 

홍범도 대장님은 동산리에서

왜적 순사 열한 놈 몰살시켰소

에헹야 에헹야 에헹야

왜적 군대 막 쓰러진다

 

왜적 놈이 게다짝을 물에 버리고

동래부산 넘어가는 날은 언제나 될까

에헹야 에헹야 에헹야

왜적 군대 막 쓰러진다

 

 

"후손이 출세하면 조상의 키를 키운다." 는 속언이 전한다. 속언이 지닌 비논리성에도 불구하고 이 말엔

현실성이 담겨 있다. 친일파나 독재자 후손들이 출세하여 선대의 죄상을 숨기는 대신 화려한 기념관을 짓고,

어용 지식인들을 동원하여 전기를 펴내거나 장학제를 실시하는 일이 잦다. 친일, 친독재의 대가로 자식들을

교육하고, 그 자손들이 출세하여 수많은 추종 세력을 거느리면서 조상의 선양사업을 하는 것이다.

 

반대의 경우는 너무 초라하다. 의병 · 독립운동을 하거나 통일 ·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희생되면,

당연히 후손이 영락零落하고 그들의 존재는 역사책에 이름 석 자나, 그마저도 아니면

무명전사로 사라지고 만다. 소수의 예외가 있긴 하나 대부분이 이 경우에 속한다.

 

보수적 학자들이 발행해 온 《한국사 시민강좌》는 제47호의 특집(2010년 발행)으로

'대표적 독립운동가 12인' 을 선정하고, 이들의 행적을 정리했다.

여기에 등재된 인물은 이동휘 · 이승만 · 김구 · 안창호 · 김규식 · 박용만 · 조만식 · 여운형 · 조소앙 · 이청천

· 김두봉 · 김원봉이다. 하필 12인으로 한정한 것도 의문이거니와 "허다한 조선 의병운동자들 가운데 갑오혁명

으로부터 빨치산운동까지 계속적 지도적 역할을 담당한 유일한 의병대장" 이자 일본군이 '하늘을 나는

홍범도' 라 부를 정도였던 공포의 명장 홍범도와, 삼한갑족의 6형제가 전 재산을 털어 3천5백 명의

독립군을 양성한 우당 이회영 등이 빠진 데는 얼른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일개 무크의 독립운동가 선정을 두고 탓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홍범도와 같은 무장투쟁의 영웅을 제외하는 역사 인식에는 문제가 남는다. 

《한국사 시민강좌》와는 달리 진보적 역사계간지인 《역사비평》은 1993년 봄호(계간 20호)에서

'통일조국의 사표 : 남북이 모두 높이 평가하는 인물' 을 기획하면서 정약용 · 전봉준 · 홍범도 · 신채호를 꼽았다.

'정약용-봉건사회 해체기의 개혁사상과, 전봉준-반제 반봉건 투쟁의 민중지도자, 홍범도-초기 항일 무장투쟁의 명장,

신채호-투쟁 속에 살다간 민족주의자' 라는 타이틀을 각각 달았다.

 

남북에서 '통일조국의 사표' 로 존경받는 인물 중의 한 사람인 홍범도는 그의 치열한 항일투쟁에도 불구하고남한에서 소홀히 취급받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독립운동 연구가 지역적으로 편중되어 있고, 남한에그를 기릴 만한 후손이 없으며, 불행하게도 홍범도가 1937년 스탈린의 한인강제이주정책으로 연해주에서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으로 밀려가서 1943년 10월 25일 75세를 일기로 그곳에서 서거했기 때문이다.구 소련이 붕괴되는 1980년대 말까지 카자흐스탄은 '철의 장막' 에 가려지고, 홍범도의 소식도 차단되었다.또한 항일 독립전쟁을 전개할 때 그의 활동 영역이 중국의 북간도와 러시아 연해주 지역 위주였고, 이르쿠츠크 등에서 러시아 측과 협력하여 항일전을 벌인 일, 한때 레닌과 만나서 권총을 선물로 받고 볼셰비키에 입당한 일 등을 이유로 하여 단세포적인 역사학자들에게서 '좌파 독립운동가' 로 몰리기도 했다.

 

'홍범도 배제' 에 추가해야 될 이유는 또 있는 것 같다.학자들 사이에 그가 머슴 출신이어서 학문적으로 연구할 대상이

못 된다는 인식이 깔려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또한 '저명한 조선 빨치산 대장' 이라는 칭호 때문에 기피의 대상이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당원이나 동지, 당파 등을 의미하는 프랑스어 'parti' 가 어원인 빨치산partisan은 비정

규전에 종사하는 게릴라와 비슷한 개념이다. 일제강점기 항일 독립운동가들 중에는 중국 동북 지역과 러시아 해삼위

(불라디보스토크) 지역에서 주로 빨치산 투쟁으로 일제와 싸운 이들이 있다. 홍범도는 빨치산 주역이었다.

 

해방후 6.25전쟁을 전후하여 지리산 일대에서 전개된 공산주의 계열의 빨치산 활동으로 '빨치산' 이란 호칭 자체가

터부시되고, 금기어로 착종되었다. '연상 효과' 는 황일전의 빨치산 대장 홍범도 장군에게까지 들씌워졌다.

이같은 연유와 배경으로 항일 무장투쟁에서 첫손가락게 꼽히는 그의 공적이 상당 부분 묻히거나,

다른 독립운동가에게 전공을 빼앗기게 되었다.

 

홍범도는 머슴 출신의 독립운동가였다.

7천 시대의 노비에 가까운 머슴은 백정 · 무당 · 광대 · 악공 · 양수척 · 재인 등과 더불어 7천七賤 계급에 속하는

천민 계층이었다. 물론 동학혁명 당시 폐정개혁한 12개조 중 '노비문서 소각', 갑신정변 때의 14개조 개혁요강 중

'문벌 폐지와 인민 평등', 갑오경장 때의 '문벌과 양반 · 상놈의 계급제 타파' 등으로 적어도 명시적으로는 천민 계급

의 신분제가 크게 흔들렸다. 그러나 '머슴' 은 형태를 바꾸어서 여전히 존속했다. 일정한 급여를 받고 종신제가 아니

며 입출이 보장됨으로써, 기존 노비와는 다소 사치가 있는 것이 머슴이다. '옛 노예제의 최후의 유물' 로서 '금일의

임급노동자는 물론 봉건적 소작농, 반농노와도 범주적으로 엄밀히 구별되지 않으면 안 되는 신분' 이 머슴이다.

 

조선 말기에 "머슴의 숫자는 통계상에 전연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아마 30만을 초과할 것이라고 추정된다."

고 할 만큼 적지 않았다. 조실부모한 홍범도는 9세부터 15세까지 이웃 마을 지주 집에서 꼴머슴살이를 했다.

'꼴머슴' 이란 소를 먹이거나 사료용 꼴을 베어 노는 역할을 하는 소년 머슴을 일컫지만,

각종 농삿일과 가사에 종사하기도 했다.

 

한말 초기 의병(장)에는 지방 유생들이 많았으나, 중기 이후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는 평민 출신이 대부분

이었다. 조선 중기 이래 300여 년을 집권해 오면서 결국 나라를 망친 노론 계열은 독립운동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은 76명 중 당파를 알 수 있는 64명을 보면, 북인 2명, 소론 2명을 

제외한 나머지 56명이 노론 출신이었다. 이들은 일제에 협력하면서 고위직에 올라 재산을 모으며 자식들을

교육하면서 오늘까지 부귀영화를 세습하기에 이르렀다.

 

일제 패망 뒤에는 영어를 무기 삼아 미군정으로부터 적산을 차지하고, 이승만 · 박정희 · 전두환 · 노태우 ·

김영삼 · 이명막 · 박근혜에 이르는 기간 동안 면면한 보수권력의 적자로서 이 땅의 기득 세력의 중심이 되었다.

이명박에 이어 박근혜 전 정부의 각료와 청와대 인사에서 나타나듯이 한국 보수 세력의 타락, 탈세, 병역 기피,

부동산 투기, 논문 표절 등 가지각색의 부패상은 그들의 세계에서는 필수과목이 된 지 오래다. 나아가 어용학자

들이 근현대사를 왜곡하면서 친일파와 군사독재자를 미화하고 독립운동가들을 폄훼하는 것은 헌법정신을 모독

하고 역사 정의와 사회정의에 도전하는 행위다. 식민지근대화론과 개발독재론이 일란성쌍둥이임을 보여 준다.

 

의병전쟁과 독립투쟁에 몸을 던진 사람들은 대부분 왕조나 사회로부터 혜택은 커녕 차별과 수탈을 강요 당했던

계층이었다. 우당 이회영 일가와 석주 이상용 일가처럼 삼한갑족의 기득권층이 없었던 바 아니지만, 이들은 지극

예외적이었을 뿐이다. 유사 이래 기득권 세력의 반국가 · 반민족 행태는 옛날이나 지금이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홍범도 장군은 자신도 머슴이었지만 아버지도 머슴이었다. 국가로부터 혜택은 커녕 태생과 성장 과정에서 온갖

박을 받아 왔다. 그런데도 누대를 두고 특권을 누려 온 자들이 거침없이 조국을 배신할 때

그는 누구의 지시나 부름도 없이 스스로 의병이 되었다.

 

간도와 극동 러시아의 춥고 험준한 산악지대를 넘나들면서 빨치산 대장으로서 일본군을 토벌하고, 독립군 부대를

조직하여 국치 이래 최초로 국내진입작전을 펴서 일제를 공포에 몰아넣었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대첩은 그의

주도로 성공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 '3대 대첩' 중의 2대 대첩이 홍범도가 아니면 쉽지 않았을 전투였다.

일제가 가장 겁냇던 의병장, 국권 상실기 3대 대첩 중의 봉오동 · 청산리 대첩의 영웅, 부하들과 주민들이 가장

아끼고 따르던 대한의용군 사령관, 비록 대한제국 무관학교를 거친 정통 무관 출신이 아닌 산포수 출신의 의병장

이지만, 누구보다 우수한 지략과 민첩한 전술로 일제와 싸웠던 빨치산 대장은 일제강점 기간의 두 배가 되는

세월동안 이역만리 카자흐스탄에서 메아리조차 없는 망향가 속에 묻혀 있었다.

 

 

이상은 김상웅 著 《홍범도 평전》 중 '서문' 을 간추린 것이다.

 

 

 

 

홍범도는 금강산 신계사에서 비승비속 생활을 하던 중 인근 사찰에서 이옥구 여사를 만났다.

 

비승비속非僧非俗의 처지에서 2년여의 신계사 생활은 홍범도의 정신과 사상 형성에 적잖은 영향을 주었던 듯.

은둔과 수도를 통하여 이순신이나 서산대사, 사명당 같은 인물들의 훌륭한 행적과 임란 당시의 대일항전에

관하여 일상적으로 전해 들으면서 반일 감정이 누적되었고 시대의 통찰력과 실천력을

기르게 되었으리라는 게 중론.

 

 

 

 

 

산포수 의병장 홍범도

 

 

홍범도가 의병을 시작할 즈음에 전국 동시다발적으로 의병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나고 있었다.

한국 의병사 또는 한국 독립운동사에는 '산포수山砲手 의병義兵부대' 라는 조직이 여럿 있었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 당시 사회의 최하류 계층에 속했던 기생들이 애국부인회를 만들어 의연금을 출연했듯이,

비슷한 시기에 최하층의 산포수들도 자발적으로 산포수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일제와 싸웠다.

일제는 1907년 7월 헤이그 밀사 파견을 트집 잡아 고종을 강제로 폐위시키고 한일신협약을 맺게 한 데 이어서

1908년 9월에는 '총포화약류 단속법' 을 공포했다. 한  해 전부터 전국 각지에서 항일 의병이 거세게 봉기하자

이를 막기 위한 조처의 일환이었다. 일제의 이 조처는 우리 의병투쟁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고,

홍범도가 본격적인 산포수 의병부대를 조직하는 계기가 되었다.

 

 

창의가

대한광무 갑오년에 왜적이 침범하여

옛 법을 모두 고쳐 개화하기 시작하여

관제도 모두 고쳐 의복도 모두 고쳐

이리저리 몇 년 만에 인심은 산란하고

이 會 저 회 무슨 회가 그렇게도 많은지

청년회도 일어나고 동양회도 일어나고

자강회도 일어나고 황국회도 일어나고

교육회도 일어나고 설교회도 일어나고

일진회도 일어났네

보국안민 버려 두고 난국 난민 웬 말이냐

세상이 이러하니 팔도 의병 났네

무슨 일 먼저 할까 난신적자 목을 잘라

왜적 퇴송 연후에 보국안민하여 보세

대소인민 물론하고 동심동력 일어나면

의병 두 자 높은 이름 천하에 내놔 보라

조야가 일심하면 무엇일들 못 할손가!

돌아오라 돌아오라 창의소로 들어오라

만일 만일 오지 않고 왜적에 종사하여

불행히도 죽게 되면 황천에 돌아가서

무슨 면목 가지고서 선왕 선조 뵈올소냐

집에 있는 사람들아! 화포화승 제조하여

의병을 후원하면 쉽사리 성공하리

부탁이요 반심反心 없이 이 진陳 저 진 접대하라

 

 

 

아래는 홍범도가 참가한 초기 의병전의 실황 연보이다.

 

1904년 9월 8일(음력) : 러일전쟁 시기, 함흥 등지에서 항일전 참가.

1905~1907년 : 북청 안산사 포계의 사냥꾼 협동조합 가입. 이후 포게 지도자로 추대.

1907년 11월 15일 : 북평 안평사 엄방동에서 산포수 70여 명으로 의병부대 조직, 항일투쟁.

11월 22일 : 후치령에서 일본군 공격, 일본군 2명, 순사 1명 사살, 화승총 73자루 회수,

같은 날 우편마차 호위병 2명 등 사살.

11월 25일 : 후치령에서 일군 70녀 명과 전투, 30여 명과 전투, 30여 명 사살, 의병도 5명 전사.

12월 15일 : 북청 장향리에서 일본군 습격, 2명 살상. 무기 등 노획.

12월 29일 : 삼수성 점령, 무기 다량 노획, 일제 주구 삼수부사 등 처형, 삼수주재소 소각.

12월 31일 : 일본군 삼수성 공격을 격퇴, 의병 14명 사상.

1908년 1월 10일 : 함남 정평 의병과 합세하여 갑산읍 공격, 일본군 수비대와 경찰관주재소 공격,

다소 일인 처단, 우체국청사 소각.

1월 12일 : 갑산군 상남사에서 악질 일진회원 등 48명 처단.

1월 23일 : 일진회원 출신 촌장 등 일진회원 다수 응징.

2월 12일 : 혜산진경찰서 습격, 순사 등 처단.

1월 21일 : 갑산군 읍사 세동에서 일본군경 합동 토벌대와 교전, 패퇴시키고

일본군 다수 살상, 소총 3정 노획.

3월 20일 : 부인과 두 아들이 일제의 사주를 받은 제3순사대에 의해 홍범도의 귀순 공작 인질로 피체.

5월 2일 : 함경남도와 평안북도 사이의 구름물령에서 일군 32명 사살, 소총 등 30정 노획.

5월 4일 : 갑산 도하리에서 '귀순'을 권유하러 온 일제의 주구 김원홍 등 처단.

5월 중순 : 아내 이씨 일제 주구의 고문으로 옥중 사망.

5월 28일 : 갑산군 쾌탁리에서 일본 기병대 16명 사살, 말 다섯 필 노획.

6월 2일 : 장진 두꺼비 바윗골에서 일본군 16명 사살, 의병 5명 전사.

6월 6일 : 함흥 초리장의 악질 부호 박 면장 집 기습, 다량의 일화 압수.

6월 10일 : 북청 통쾌장골에서 적 30여 명 사살, 군수품 노획.

6월 12일 : 뇌희재 의병부대와 연합, 함흥 수배대 섬멸적 타격.

6월 중순 : 갑산 강평에서 적 3명 사살, 의병 8명 전사.

6월 말 : 장진 연화산에서 의병회의 소집, 전사자 의병 가족 지원, 의병부대 분산.

7월 초 : 장진 당아치 금광 습격, 일병 6명 처단, 군자금으로 금괴 다수 노획.

7월 6일 : 안중근이 이끄는 의병부대와 함경북도 경흥에서 연합작전 시도했으나 일군의 방해로 무산.

7월 21일 : 북청에서 함흥 수비대와 격전, 적 16명 사살, 소총 등 노획.

9월 20일 : 함흥 북방 천평리에서 함흥 수비대 장교 등 13명 퇴치.

10월 중순 : 당천에서 우포헌병분견소 공격.

11월 2일 : 더 이상 항전이 어렵게 되자 4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중국 통화(通化)로 이동.

 

 

 

 

1912년 하바롭스크에서 45세의 홍범도

 

 

 

홍범도는 40여 명의 의병부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다.

중국 통화를 거쳐 길림에 이른 것은 1908년 11월 10일경이다. 

여기서 열 두 살짜리 둘째 아들 용환과 러시아어 통역 담당 김창옥, 의병참모 권감찰 등

3명을 제외한 나머지 의병들은 뒷날을 기약하면서 국내로 돌려보냈다.

 

수많은 고초와 우여곡절을 겪으며 홍범도는 드디어 대한독립군을 창건하게 된다. 

1919년 3월 중순 대한국민의회 군무부의 근거지였던 연해주 수이푼秋風 다아재골에서 권업회의 자자구 사관학교

학생들과 홍범도의 옛 동지들, 그리고 북간도 훈춘 출신의 황병길 · 이명순 · 최경천 등이 간도에서 데리고온 군인

들을 기초로 400여 명의 대핝국민희회 군무부 부대가 편성되었다. 이 가운데 홍범도 계열의 숫자는 1/4 수준인 백여

명으로 판단된다. 대한독립군은 노령 지역 독립운동 영도기관인 대한국민의회 군무부 병력을 기초로 창건되었다.

 

 

 

 

 

홍범도는 대한독립군을 창건하면서 「유고문喩告文」을 발표했다.

 

대한독립군 유고문

 

 

천도天道가 순환하고 민심이 응합하야, 아我 대한독립을 세계에 선포한 후 상上으로 임시정부가 유有하야

군국대사軍國大事를 주主하며 하下으로 민중이 단결하야 만세를 제창할새

어시호於是乎 아의 공전절후한 독립군이 출동되었도다.

 

희噫라! 강권하에 오직 정의 인도만 주창함도 불가능한 사事요 무권지민無權之民으로 한갓 평화회의와

연명회만 의뢰함도 역亦불가능한 사事안이요. 고로 가산을 방放하며 혹 고금雇金을 득하야 무기를 준비함은

배성일전背城一戰에 성하지맹을 약約코져 함이나 오히려 경동치 못함은 오직 정부(임시정부)로

공명정대히 선전宣戰함을 대待함이라.

 

이제 전설을 들은즉 간도 방면에서 무뢰배가 승시乘時하야 혹 인장을 자의로 조각하여 독립군을 빙자하야

민간에 강제 모연募捐도 하며 혹 군복을 가장하며, 무기를 휴대하고 각 동리에 시위적 작란이 비일비재라 하니

민심이 소요할 것은 물론이오 장차 외모外侮가 불원不遠할지라.

 

당당한 독립군으로 신身을 포연탄우 중에 투投하야써 반만년 역사를 광영케 하며

국토를 회복하야써 자손만대에 행복을 여與함이 아我 독립군의 목적이오 또한

민족을 위하는 본의本義라. 어찌 일지방 소단체에 편의하야 군중풍기를 문란케 하리오.

 

본참모부는 시是를 통탄민휼하야 자慈에 유고하오니 자금自今 이후로 이와 같은 이매망량지도(魑魅魍魎之徒,

도깨비 같은 무리)가 촌간에 출몰하거든 해該 동리로 엄히 징치하되 만약 세력이 부족할 시는

즉시 본부에 보고하야 군율로 처치 하기를 일반 국민들은 근심 심득心得할지어다.

 

 

대한민국 원년元年 12월 일

노령露領 주둔 대한독립군 대장 홍범도

참모  박경철 · 이병채

 

 

 

 

1920년대 초 부하 독립군 병사들과 함께한 홍범도

 

 

 

홍범도 의병부대에서 발전한 대한독립군은 백두산 기슭의 북간도 지방으로 이동하여 근거지를 설치하자마자

1919년 8월부터 모든 독립운동가들의 오랜 소망의 하나였던 독립전쟁을 시작했다. 국내진입작전을 대담하게

감행한 것이다. 대한독립군은 두만강을 건너서 1919년 8월 함경남도 혜산진에 진공해 들어가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해 섬멸했다. 이것이 3.1혁명 이후 독립군 단체들의 독립전쟁 중에서 최초의 국내진입작전이며,

이 중요한 업적을 홍범도가 지휘하는 대한독립군이 수행해낸 것이다.

 

상해 임시정부에서도 대한독립군의 큰 승전에 놀라고 고무되어 1919년 10월 26일 강변 8군 임시지방

교통사무국 참사 오동진과 김응식에게 40일간의 예정으로 출장을 명하여, 홍범도가 지휘하는

대한독립군의 실상과 일본군과의 교전에서의 승리를 확인하였다.

 

 

 

봉오동 대첩

 

대부분의 큰 사건들이 그러하듯 '독립전쟁의 제1회전' 으로 불리는 봉오동전투 역시 처음에는 작은 작전에서 비롯되었다. 1920년 6월 4일 새벽 독립군 부대 30여 명이 함경북도 종성 북방 5리 지점의 강양동으로 진입하여 일제 헌병순찰대를

격파하고 두만강을 건너 무사히 귀환했다. 자주 있었던 독립군의 국내진입작전이었다.

일제는 이 패배를 설욕하고자 남양 수비대 소속의 1개 중대와 헌병경찰중대를 동원하여 독립군의 추격에 나섰다. 그러나

이들은 오히려 삼둔자三屯子에서 독립군의 반격을 받아 전멸하기에 이르렀다. 삼둔자전투에서 참패한 일제는 곧

대대적인 보복전에 나섰다. 다음은 상해판 《독립신문》의 보도 내용이다.

 

 

제1연대를 봉오동 상촌 부근에 재在한 연병장에 집합하고 작전명령을 하下여 각 부대의 전투력 및 임무를 정찰할새

제1중대장 이천오는 부하중대를 인솔하고 봉오동 상촌 서북단에, 제2중대장 강상모는 동산에, 제3중대장 강시범은

북산에, 제4중대장 조권식은 서산 남단에, 연대장 홍범도는 2개 중대를 인솔하고 서산 중북단에 점위占位하고, 각기

엄밀한 전비戰備하였다가 적이 내도할 때에 그 전위를 동구洞口에 통과케 한 후에 적의 본대가 아군이 잠복한 포위

중에 입入할 제에 호령에 의하여 사격케 하고 연대 부장교 이원은 본부급 잔여 중대를 영솔하고 서북 산간에 점위하여

병원兵員 증원과 탄약 보충, 식량급식에 임케 하고 특히 제2중대 3소대 제1분대장 이화일로 그 부하 1분대를 일솔하고

고려령 북편 약 1천 200미터 되는 고지와 그 동북편 촌락 전단에 약간 병원을 분分하여 잠복했다가 적이 내도하거늘 전

진을 지체케 하다가 봉오동 방면으로 양패퇴각케 하고 사령관 최진동, 부관 안무는 동북산서간 최고봉 독립수하獨立樹

下에 재하여 지휘케 하다.

 

홍범도가 봉오동 전투를 실제적으로 지휘했음이 드러나는 자료다. 이 작전명령으로 독립운동은 일본군을 대파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20년 6월 7일은 일본군이 우리 독립군에게 참패를 당한 역사적인 날이다. 이날 홍범도와 최진동이

지휘한 독립군 연합부대는 봉오골 저수지에서 북쪽으로 10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서 유격전으로일본군 수백 명을

사살 했다. 이 봉오동전투는 4개월 뒤 청산리대첩으로 이어지는 독립군의 사기 진작에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독립군 승첩」이라는 제목의 1920년 6월 10일자 《독립신문》 기사.

 

 

 

을미의병(1895) 이래, 국치 이후 봉오동전투에서처럼 우리 독립군이 통쾌하게 일본군을 섬멸한 적은 일찍이 없었다.

홍범도는 뒷날 자신의 회고록 《홍범도 일지》에 당시의 활약상을 담담하게 기술한다.

 

봉오골 최진동과 연합하여 1920년 4월 초3일(음력) 일병과 접전하여 일병 310 죽고 저녁 편에 소낙비가 막 쏟아지는데,

운무가 자욱하게 끼어 사람이 보이지 않게 자욱하게 끼었는데, 일본 후원병 100여 명이 외성으로 그 높은 산 뒤에로

영상에 올라서자 봉오골서 싸우던 남은 군사 퇴진하여 오던 길로 못 가고 그 산으로 오르다가 신민단 군사 80명이 동쪽

산에 올랐다가 일병이 저희 있는 곳으로 당진하니까 내려다 총질하니 일병은 갈 곳이 없어 마주 총질을 한즉 (·····)

그때 왔던 일병이 오륙백 명 죽었다.

 

 

봉오동전투 직후 홍범도를 가가이서 지켜보았던 홍상표는 그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홍범도 장군은 50여 세가량의 중키쯤 되는 뚱뚱한 몸집에 철홍색 얼굴이 빛나는 장군이었다.

그는 언제나 계급장도 없는 일개 졸병과 같은 차림을 하고 있었으니 지휘도나 권총을 차지 않았고 장총 두 자루를

휴대하였다. 그는 일상 이렇게 말하였다. "지휘도나 권총을 왜 차는가? 그것으로 왜놈을 잡는가? 제 동료나 죽이는

쓰는 것이지. 이런 장총이라야 왜놈을 죽여." 그는 이렇게 말할 때이면 버릇처럼 장총을 어룸나지는 것이었다.

그의 부관의 말에 의하면 장군의 신품 38식 총은 봉오골전투에서 노획한 전리품인데 장군이 친히 골라서 두 자루를 

가진 것이라고 한다. 그의 사격술은 유명하여 빈 병을 높이 던져 놓고 좌우로 마음대로 명중시켰다.

 

 

 

 

청산리 대첩

 

 

1920년 여름부터 중국 치안 당국은 부쩍 한국 독립군 무장 단체들에 대하여 해산하든지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달라고

강력하게 요구해 왔다. 블응하면 중국군으로 토벌하겠다는 식의 협박 겸 간청이 심했다. 7월부터 9월 초에 걸쳐서 실제

로 독립군 단체 근거리들에 육군을 출동시키기도 했다. 모두 일본 측의 간도 출병을 사전에 막기 위한 방책이었다. 일본

이 직접 중국 국경 안에서 활동하는 한국 독립군을 토벌하겠다고 나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독립군들이 노령에서 신무

기를 계속 사들이고, 무관학교를 세워 대원을 조직적으로 훈련시키며, 국경 진입을 계속함에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도록

큰 위협을 느꼈던 것이다. 결국 독립군 각 단체들은 눈가림으로다 일본군의 자국 내 출병을 막고자 하는 중국 측의 정책

에 응하여 모두 본래의 근거지를 떠나게 되었다. 홍범도 장군은 이미 9월 상순에 부하들을 이끌고 장백산록에 들어갔다.

그는 당시 앞으로 1~2개월 내에 일군이 출병하리라고 말했다고 한다. 청산리와 어랑촌 부근으로 이동한 독립군은 대한

독립군(약 300명), 국민회군(약 250명), 대한신민단(약 200명), 의군부(약157명), 의민단(약 100명), 한민회단(약 200명)

등 약 1천 200명에 이르렀다. 5개 부대 대표들은 10월 13일 이도구 복합마당에서 대표자회의를 열고, 홍범도를 사령관

으로 하여 하나의 독립군 연합부대를 편성하며, 군사행동을 통일하여 일본군의 공격에 대응하기로 의결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청산리대첩은 백운평전투를 시작으로 완루구전투 → 천수평전투 → 어랑촌전투 → 맹개골전투

만기구전투 → 쉬구전투 → 천보산전투 → 고동하골자기전투 등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6일 동안 10차례에 걸쳐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 전투들은 모두 홍범도의 연합 독립군과 김좌진이 인솔하는 북로군정서군이단독 혹은

연합작전으로 수행했던 것이다. 꼬박 6일 동안 밤낮으로 추위와 기아 속에서 전개되었는데, 봉오동전투 때와는

달리 날씨는 맑은 편이었으나, 이 지역 10월 하순은 서리가 내리고 눈이 쌓이는 등 대단히 추운 계절이었다.

완루구전투에서 대승한 홍범도는 자서전에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그날 밤으로 말거우 조분고려(고려인 마을) 둘러싸고 날 밝기를 기대하는 중에 나의 심정에 (어쩐지) 솔난하야(꺼림직

하여) 밤중에 군사를 취군하여 말리거우 제일 높은 산에 올라가 밤을 새는 중에 날이 금시 밝자 대표 소리 한 방 나더니

사방으로 미야(기관총) 소리가 천지진동하면서 (일본군의) 사격 소리가 그치지 않고 단번에 말리거우 민간촌에 달려

드니 인적이 고요하고 아무것도 없으니 물론 어떤 웅덩이든지 몰수이(하나도) 없데서(없어서) 나갈 밤수(방법)를 얻는

중에 나의 군인 520명이 사방으로 둘러싸고 벼락 치득 막 사격하니까 종천강(끝내) 종지출(나가지) 못할 것을 그려

놓았다. 밤이 삼경되도록 진(포위망)을 풀지 못하고 답(꼬박) 새우다나니 (일본군을) 다 잡았다. 총 240병(자루)과 탄환

500발 받아가지고 조선 놈 사복하고 빠져나가는 놈 여섯 놈 붙들어.....

 

 

임시정부 군무부는 북로군정서의 보고인 「대한군정서 보고」에 근거하여

청산리대첩의 구체적 전과를 다음과 같이 확인했다.

 

1. 적의 사상자

사자死者 연대장 1인, 대대장 2인, 기타 장교 이하 1천254인(적의 자상격살자 500여 인), 상자傷者 장교 이하 200여 인.

2. 아군의 사상과 피로被虜

사망 1인, 상이 5인, 포로 2인

3. 아군의 전리품

기관총 4정, 소총 53병, 기병총 31병, 탄약 5천 발, 군도 5병, 나팔 3척, 마안馬鞍 31차, 군용 지도 4부, 완시계 4개,

기타 피복, 모자, 모포, 휴대천막, 군대 수첩 등속 약간.

 

 

당시 항일 연합군은 추위와 기아를 독립군가로 달래면서 일제와 싸웠다.

 

 

독립군가

 

나아가세 독립군아 어서 나아가세

기다리던 독립전쟁 돌아왔네

이때를 기다리고 10년 동안에

갈았던 날랜 칼을 시험할 날이

나아가세 대한민국 독립군사야

자유 독립 광복함이 오늘이로다

정의의 태극 깃발 날리는 곳에

적의 군사 낙엽같이 쓰러지리라

 

보느냐 반만년 피로 지킨 땅

오랑케 말발굽에 밟히는 모양

듣느냐 2천만 단조檀祖의 혈손

원수의 칼 아래서 우짖는 소리

양만춘 · 을지문덕의 피를 받았고

이순신 · 임경업의 후손 아니냐

나라 위해 목숨을 터럭과 같이

싸우던 네 조상의 후손 아니냐

 

탄환이 빗발같이 퍼붓더라도

창과 칼이 네 앞길을 가로막아도

대한의 용장 독립 군사야

나아가고 나아가고 다시 나아가라

최후의 네 핏방울 떨어지는 날

네 그리던 조상 나라 다시 살리라

네 그리던 자유꽃이 다시 피리라

(4, 5, 6절 생략)

 

 

 

 

이범석의 청산리 대첩 주역 왜곡 

 

 

지난날 청산리 대첩의 실상은 크게 왜곡되어 왔다. 특히 해방 후 이승만 정권에서 국무총리 등을 지내고,

청산리대첩 당시에는 북로군정서 장교였던 이범석이 회고록 《우등불》에서 자신의 업적은 과장하고, 홍범도 부대는

도망치다가 떼죽음을 당한 것처럼 기술하면서, 왜곡된 내용이 마치 정사처럼 인식되었다.

 

청산리전투 전날 각 독립군 부대들이 연합작전을 펴려고 작전회의를 영어 각기 작전 지역을 나눠 맡았는데

홍범도 부대 등은 막강한 일본군 위세에 전의를 상실해서 밤사이에 말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이탈하여

궤주하다가 일본군 포위망에 걸려 아무 저항도 못 한 채 떼죽음을 당하고 집단적으로 무기를 빼앗겼다.

일본군이 노획했다는 사진 속의 무기들은 북로군정서가 아니라 홍범도 부대가 빼앗길 것이다.

 

이범석의 자서전은 홍범도에 대해 사실 왜곡과 함께 대단히 부정적으로 기록한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이범석이 홍범도를 깎아내린 데는 몇 가지 배경이 있는 것 같다. 우선 자신이 속한 군대의 김좌진을 돋보이게

함으로써 지신의 전공을 빛내고, 해방 후 이승만 정부의 초대 국무총리와 국방장관 등을 역임하면서 겪게되는,

6.25전쟁으로 인한 반공정신의 작용이 아닌가 한다. 러시아의 공민권을 취득하고, 소련공산당에 입당하는 등

홍범도의 행적에 대한 반감이 작용되었을 수 있는 것이다.

 

홍범도는 한동안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철저하게 외면 기피되었다.

이승만 · 박정희 시기에 특히 심했다. 이범석의 저서와 그의 각종 '증언' 의 영향력 때문인 것 같다.

예컨대 한국돌립사편찬위원회가 1965년의 초판에 이어 1983년 개정판을 낸 《한국독립사》(대한홍보사 발행)의

'청산리대첩' 편에는 아예 홍범도의 이름 석 자도 나오지 않는다. 이 책은 이승만 · 윤보선 · 박정희 · 이범석 · 조경환

· 함태영 · 김병로 등의 휘호가 실리고, 이범석 · 이인 · 이갑석 · 이병도 · 신석호 · 이선근 · 유광열 · 장이욱 · 고재욱

· 홍종인  등의 감수, 송지영 · 박관수 · 권상로 · 이병도 등의 추천사가 감긴, 당시에는 꽤 '권위' 있는 저술이었다.

 

1980년대까지 청산리대첩의 주역은 김좌진과 이범석이고, 홍범도는 존재하지도 않았음을 보여 주는 사례다.

이범석이 사실을 왜곡해 쓴 저서와 증언을 별다른 검증 없이 그대로 기술한 때문이다.

 

청산리전쟁의 '3주역' 이라 할 홍범도 · 김좌진 · 이범석은 독립운동 과정에서 각기 다른 행보를 걷다가

청산리에서 연합군 지휘자의 위치에서 일제와 싸워 대첩을 이루었다.

 

홍범도는 당시 52세로 직계 부하 300여 명을 이끌었고, 대한국민회의와 연합한 5개 무력 부대의 사령관이었다.

충남 홍성 출신의 김좌진은 31로 1920년 2월 6개월 코스의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를 설립하여 사령관 겸 소장이

되었고, 10월의 청산리전투에서 북로군정서 부대를 지휘했다. 서울 출생의 이범석은 20세로서 중국 운남육군

강무학교를 졸업한 후 신흥무관학교 교관을 거쳐 김좌진의 요청으로 북로군정서 교관으로 부임하고,

북로군정서 부대의 근거지 이동 때 연성대 단장이 되어 청산리전투에 참전하였다.

 

 

연변대 교수 박창욱은 '청산리전투의 주역'에 관해 연구한 논문에서 김좌진과 홍범도의 역할을

상세히 추적비교한다. 현장을 여러차례 답사하고 일본 측 장보자료 등을 참고한 기록이다.

 

문제는 청산리전투인데 기실 김좌진 부대는 이 전투에서 21일 백운평전투, 22일 새벽의 천수평 습격전과

그날 내내 계속된 전투 이외에는 동부전선에서 서일이 인솔하는 잔류 부대가 서대파 부근과 리치구 노무주구

전투를 진행하였을 뿐이다. 그런데 홍범도 연합부대는 완루구전투, 대굼창전투, 천보산전투, 맹개골전투(국민회의

안무 부대)와 고동하 등 허다한 전투를 주도하였다. 적에게 타격을 준 것도 홍범도 부대가 준 타격이 더 컸으며,

적들도 홍범도 부대를 중시하였기에 37여단장인 아즈마 소장이 직접 지휘하는 보병 주력과 이이쓰가 부대와

기병 27연대의 주력인 2개 중대도 홍범도 부대를 대상으로 동원되었다.

 

그런데 지난날 이 전투에서 북로군정서군의 교성대를 직접 인솔하여 전투에 참가한 이범석 씨는, 대한민국의

국무총리를 담당한 국가수뇌의 신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좌진의 공로를 과대평가하고 홍범도와

그 연합부대의 공로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도리어 홍범도 부대는

청산리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다고까지 역사를 왜곡했다.

 

재중학자 김춘선은 청산리대첩의 진정한 주인공은 무명 전사와 북간도 지역 한인 사회라고 주장한다.

청산리대첩은 홍범도 · 김좌진 · 이범석 등 지휘부의 전략과 무명 독립군들의 애국심 그리고 이 지역 한인

사회의 죽음을 무릅쓴 지원이 있었기에 전승을 거둘 수 있었다.

 

나라를 일제에 빼앗긴 한민족은 국권회복을 위해 가능한 모든 방략을 동원했다.

의병전쟁론, 의열투쟁론, 무장전쟁론, 외교론, 실력양성론, 계급투쟁론 등의 방략에 나름대로 명분과 시대적 배경,

국민의 소명이 따랐다. 이와같은 국권회복 방략은 단독적으로 또는 복합적으로 추진되기도 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의열투쟁과 무장투쟁, 외교론을 모두 동원했다.

 

일제강점기 봉오동 · 청산리 대첩 등 무력전쟁이 없었다면 우리 독립운동사는 몹시 빈약했을 것이고, 대외적

으로 한민족의 패기와 의기는 그만큼 취약하게 보였을 것이다. 봉오동 · 청산리 대첩을 통해 독립군은 식민지 시대의

굴종을 어느 정도나마 씻게 되었고 한민족의 상무정신을 이으면서, 향후 어떤 외적의 침략에도 맞설 수 있는

국민적 자존과 결기를 보여 주었다. 홍범도는 바로 그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학살 · 약탈 · 소각의 '삼광전략'

 

 

봉오동 · 청산리 대첩을 주도한 홍범도는 부하들을 이끌고 북상길에 올랐다.

홍범도의 부대뿐만 아니라 북로군정서, 국민회군, 군무도독부군 등 연합군 모두가 함께하는 북상이었다.

사령관 회의에서 논의한 결정이었다.

연합군이 간도를 떠난 후 일제의 잔혹한 보복전이 전개 되었다.

경신참변, 경신대학살, 간도대학살 등으로 불리는 일본군의 재만 조선인 학살은 기록에 따라

3천500여 명에서 5천여 명에 이르는 대참변이었다.

역사책에서 흔히 '경신참변庚申慘變' 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같은 해 만주 훈춘에서 있었던 '훈춘참변' 과

함께 우리 한민족이 만주 지방에서 일제에게 당한 가장 대규모적이고 비극적인 참변이었다.

 

 

 

흔히 홍범도는 무인 출신으로 이념이나 사상 면에서 깊이가 덜한 것으로 인식되기 일쑤다.

하지만 그는 대종교와 단군 계열인 단학회등에 깊숙히 참여하여 활동했다.

"일제하 항일 독립운동의 정신적 배경에서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이 단군이다. 주목되는 것은

홍범도의 이념적 배경 역시 단군이라는 의미와 적잖게 연관된다는 점이다.

 

 

 

러시아령 이만에서 무장해제 당하다

 

 

1921년 홍범도는 무장 독립전쟁에 투신한 지 14년 차로53세가 되었다.

이해 1월 하순, 그는 700여 명의 부대원을 이끌고 흑룡강을 건너 러시라령 이만(아무르주)으로 들어갔다.

대규모의 군대를 편성해 다시 일본군을 격퇴하기 위해서는 소비에트 정부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1920년 늦여름 소비에트 노농정부와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정권위원 사이에 비밀 군사협정이 체결되었다.

 

홍범도가 러시아령 이만으로 부대를 옮긴 것은 이와 같은 비밀 협정의 배경이 크게 작용했다.

이만에는 홍범도 부대 외에 김좌진 부대의 일부, 최진종의 총군부 부대, 안무의 대한국민회 부대를 비롯하여

연해주와 북간도의 각급 무장 부대 그리고 소비에트 영내에서 결성된 각종 한인 부대들이 합류했다.

전체 무장부대의 성원은 약 4천500명을 헤아리는 규모였다.

 

 

1921년 6월 28일 노령 자유시에서 3마일 떨어진 수라셰프카에 주둔한 한인 부대인 사할린의용대를 러시아

적군 제29연대와 한인보병자유대대가 무장해제시키는 과정에서 양측간에 충돌이 벌어졌다. 많은 사상자를 내게 된

이 사건은 외견상으로는 무장해제 과정이지만 배경은 이르쿠츠크파(노령파) 고려공산당과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주도권을 둘러싼 파쟁이 불러일으킨, 한국 무장 독립운동사상 최대의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세칭 '자유시 참변' 은 한국 혁명운동사상에 너무나 불행한 참변이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것은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러시아 적군에게 당한 일대 참변이었으나, 더 근본적으로는

이른바 이르쿠츠크파 대 상해파 사이의 대립 투쟁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배경은 너무나 복잡하다.

레닌 정부, 코민테른, 극동공화국 정부 및 볼셰비키 현지 당들이 한인의 역량을 총체적으로 이용하기 위하여

한인 독립운동 세력의 민족파, 준공산파 내지 공산파와 모두 적당한 관련을 맺어 오다가 일정한 단계에 이르러

그 모순이 폭발되고 만 것이다. 자유시 참변은 바로 그 대표적인 현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부인 이인복 여사, 손녀 예카테리나와 함께한 홍범도 장군

 

 

홍범도는 산포수 의병에서 항일 의병으로 출발할 때부터 막강한 일군과 싸우기 위해서

독립군 부대의 연합을 추진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다른 부대장을 연합부대의 책임자로 추대하고,

기꺼이 그 밑에 들어가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데 자유시 참변은 연합, 연대는 커녕 동지 간의

피투성이 싸움으로 마무리되었다. 실로 감내하기 여려운 아픔이었을 것이다.

 

1931년 9월 18일 일본군의 도발로 만주사변이 발발하고, 1932년 3월 1일에는 '만주국' 이 수립되자

소련은 일본의 팽창에 대해 극도의 우려를 갖게 되었다. 이래저래 러시아령의 한인들은 어려움이 가중되교ㅗ,

따라서 홍범도의 꿈은 멀어져 갔다. 그의 나이 어느덧 69세에 이른 것이다.

 

 

 

 

스탈린의 폭거로 카자흐트탄에 강제 이주

 

 

홍범도의 노년은 불우했다. 그나마 조국과 가까운 근동에서 동포들과 살아가던 노후마저도 허용되지 못하고

머나먼 땅 중앙아시라로 추방당하게 된 것이다. 세계 근대사에서 초유의 '민족 강제 집단 이주' 는 스탈린에 의해

자행되었다. 극동 지역의 한인이 그 첫 대상이었다. 러시아가 일제와 싸우고, 내전 당시에는 다수의 한인이 적군파

에 협력하여 볼셰비키 정군이 수립되었는데도 스탈린 정권은 한인을 적대시하면서 중앙아시아로 쫓아냈다.

 

1943년 제2차 세계대전은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이해 2월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에서 항복하고, 9월에 추축국의 일원이던 이탈리아가 연합국에  항복했다.

 일제의 패망이 눈앞에 보이는 시점이었다. 하지만 가혹했던 운명의 여신은 홍범도에게 일제 패망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먼저 그의 삶을 거둬 갔다. 무릇 대부분의 혁명가는 결실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싸우는 과정에서 혁명가의 역할은 끝나는가 보다.

 

 

1943년 10월 25일 홍범도는 75세의 나이로 크질오르다 산체프나야 거리 제2번지에 있는

자기 집에서 아내와 손녀, 동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았다.

장렬한 생애였다. 파란만장한 삶이었다.

 

 

 

 

 

 

 

 

 

 

 

 

 

 

 

 

 

인용 : 김상웅 著 《홍범도 평전》

 

 

 

 

 

 우리민족의 찬연한 빛이자 거룩한 혼이신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고국에 안착하게 되었다.

성남 공항에서의 유해 봉환식 장면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할 길 없었다.

꼭 장군의 무덤에 한 잔 술을 올리면서 못난 후손들의 죄스러움을 고백하리라.

다시 한 번 당신의 평전을 정신없이 읽어내리며,  느낌 가는대로 두서 없이 이 자리에 옮겨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