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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선인들의 유람록 <운악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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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傳  이제현李齊賢, <대렵도大獵途>, 14세기 중엽, 73.6×109.4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고려 말 학자 이제현이 그렸다고 전하는 그림으로 <기마도강도騎馬渡江圖>라고도 한다.

설산에서 말을 타고 가는 인물들의 기상을 묘사하였다고 한다.

 

 

 

 

성대중成大中, 「운악에서 놀며 사냥한 기록雲岳遊獵記」

 

 

임진년(영조 48, 1772) 그믐달 매곡梅谷 이 공(이세항李世杭)과 완계浣溪 서 공(서유상徐有常) · 서유문徐幼文

 · 권공저權公著(호 엽하葉下)를 따라 우악산 서쪽에서 사냥을 하였다. 밤에 산사에서 잤다.

종소리와 목탁소리가 한데 어울려 울려 퍼졌다.

 

다음 날 산길을 따라 북으로 갔다. 매는 네 마리, 말은 다섯 마리이다.

개의 숫자는 매와 같고 사냥꾼은 그 배였다.

사냥꾼이 무료해지자 서유문이 문득 매를 팔뚝에 얹고 달려갔다. 산이 높고 골짜기가 깊었으며, 북풍이

제법 사나웠다. 개는 마음이 교만하지만, 매는 그 기운이 오롯하여, 사람의 마음을 따라 나아가고 물러났다.

꿩이 앞에서 날아오르자, 매를 잡아서 깍지에서 곧바로 내어주자, 눈 깜작할 사이에 하늘 높이 날아가더니

멈추고 돌러보다가 방향을 꺾어 아래로 내려와 빙빙 돌다가는, 높은 데에서 모여 비스듬히 노려보다가

가볍게 꿩을 잡아채어 움켜 잡더니만, 날개를 접고 발들을 오므리고서는 어깨에 걸친 깍지 위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몸을 움츠리고 사방을 돌아보고서, 몸을 쭉 편 후 쉬었다.

이에 매의 기술이 모두 다 발휘되고 모든 사람들이 기뻐하며 통쾌하다 하였다.

 

천천히 걸어가며 먼 곳을 바라보고 산을 한 바퀴 돌았다. 가시덤불을 헤치고 쉬다가 마을에 이르러 멈추었다.

산골의 풍속이 순박하고 나물과 밥이 맛있었다. 배롱으로 덮은 등불이 켜고 나뭇등걸을 지펴 불을 피웠으며,

생선을 굽고 술을 데워서는, 실컷 마시고 질탕하게 놀았다. 두 밤을 자고 돌아왔다.

 

광현廣峴을 지나 화산花山으로 향하는데, 석양이 고갯마루에 걸리고, 인가의 밥 짓는 연기가 드문드문하다.

말 모는 하인들이 마을을 바라보며 노래를 부르면서 말을 몰아, 말발굽이 질풍과도 같이 빨랐다.

그렇지만 나이 든 사람의 흥이 그치지 않아, 그대로 이씨의 부락에 이르러

매화를 완상하고 완전히 취한 후 길을 나섰다.

 

 

 

 

운악산雲岳山

 

 

가평군 현리로부터 약 6킬로미터 지점에 있다. 주봉 망경대를 중심으로 솟구친 암봉들이 구름을 뚫을 듯하다.

해서 운악산이라고 하고, 산의 남동쪽 중턱에 고창 현등사縣燈寺가 있기 때문에 현등산이라고도 한다.

광주산맥이 한북정맥에 속하고, 북쪽으로 청계산 · 강씨봉 · 국망봉 등과 이어져 있다. 북동쪽에 화악산 등이

있고, 동쪽으로 매봉 · 명지산, 서쪽으로는 관모봉이 보인다. 서쪽 계곡의 무지개폭포는 곧 홍폭은

궁예가 피신하여 상처를 씻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현등사 보광전 (일제 때 찍은 사진이다)

 

 

함허당 득통탑 및 석등

 

 

 

 

성대중成大中(1732~1809년)이 종유한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그리 이름이 나 있는 인물들이 아니다.

그중 서유상은 이천군수와 통판의 벼슬을 지냈다. 하지만 이천군수로 있을 때 포흠逋欠(관아의 물건을 사사로이 써서

생긴 빛)의 일로 파직당하였다. 운악산에 수렵을 갔을 때는 파직 당한 후이다. 곧 1772년(영조 48, 임진) 8월 16일(무인)

의 기록을 보면, 우의정이 이사관李思觀이 외읍外邑의 체등례遞等禮를 금하라고 청하자 사간 정언욱鄭彦郁이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고 한다.

 

 

서유상은 일찍이 이천군수를 지냈는데, 본부에 포흠의 숫자가 많자, 요행히 세말歲末의 문서 마감을 면하고자

말미를 청하여 떠나 포천에 가 머물면서 겸관兼官의 차출을 도모하며 지연시켜 해를 넘겼으니, 그 설계說計

함이 참으로 옳지 못합니다. 도신道臣이 그릇되게 사사로운 친분을 따라서 전에 없던 겸관으로 차출하였으니

칙려함이 없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해당 도신을 파직하소서.

 

 

이에 영조는 "아뢴 대로 하라" 고 윤허하였다.

운악산은 한수 이북 산들의 조종祖宗이 되는 산으로 해발 936미터이다. <산경표山經表>에는 

"포천에서 동쪽으로 30리, 가평경계에서 서쪽으로 60리에 운악산이 있는데, 일명 현등산이라고 부른다.

이 산에서 산줄기가 넷으로 나뉜다" 라고 하였다. 운악산을 곧 현등산이라고 본 것이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는 운악산의 동쪽에 현등산을 따로 그렸다.

 

운악산에는 궁예弓裔(?~918) 부흥의 비원이 서려 있다. 일명 화성花城이라고도 하는 운악산성이

ㅗㅍ천군 화현면 화현리 운악산 산허리와 정상부에 있는데, 이 석축산성에 궁예가 한때 웅거하였다고 한다.

이 지방 출신의 대표적 지식인으로서 자유인의 삶을 살았던 양사언楊士彦(1517~1584)은 운악산을 두고 말하기를

"하늘이 높은 산을 반들어 진震 방향을 진압하니, 아름다운 이름이 소금강이라 전하네. 화봉은 아스라하게 하늘에

참예하여 푸른빛이 쌓여 우주에 접하였다" 라고 하였다.

 

성대중의 부친은 찰방 효기孝基이다. 선조가 조선 건국 이후 포천의 왕방산에 은거하였고, 그 때문에 그의 가계는

대대로 포천에 거주하였다. 5대조 성준구成俊耉는 광해군 초에 이이첨의 모함으로 귀양을 갔으나 인조반정 후

해배되어 청송부사 · 재령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성대중은 22세 때인 1753년(영조 27) 소과에 급제하고,

1756년에는 규장각에 서얼 지식인을 위한 검서관으로서 13년간 규장각 내 · 외직에 근무하였다.

이후 교서관 부정자를 시작으로, 여러 내직과 외직을 역임하였다.

 

정조는 1777년에 서얼허통절목을 공표하고, 1779년에는 규장각에 서얼 지식인을 위한 검사관 직을 설치하였다.

이대 성대중은 박제가 · 이덕무 등과 함께 검서관으로서 근무하였으나 정조 사후 검서관 출신 문인들은 벼슬살이

가 순탄하지 않았다. 성대중도 1807년 포천으로 낙향하여 1809년 2월 17일 향년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그는 「매곡 어른, 완계 서공, 엽하(군공저權公著) 및 서유문을  따라 수렵을 구경하고 세 밤을 묵은 후에

돌아 왔다. 옆하의 시에 화운하다」 라는 시를 남겼다.

 

 

백 리 겨울 산에 바람 소리 스산한데

날린 매는 그날 저녁 한쪽 눈만 밝았으리.

사냥개 따라 나란히 치달릴 때 갖옷도 든든하고

농가에서 세 밤 묵으며 먹고 마신 일 모두 맑았다네.

모년에 어찌 어진 선비의 훈계를 잊어서 그랬으랴

늘그막에 소년의 씩씩한 행동을 시험해 본 것뿐.

화산 장원에서 잠깐 취함도 여흥이었으니

강물 위 다리 머리에서 달 뜨는 것 보았다네.

 

 

북송의 정호程顥는 젊어서 사냥을 좋아했는데 언젠가 남이 사냥하는 것을 보고

다시 사냥하고픈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는 옛날 습관을 완전히 없애지 못하는 스스로를 반성하였다.

성대중은 그 가르침을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후한 때 원술袁述이 젊어서 여러 공자들과 함께 매를 날리고

개를 달리게 하면서 사냥하였던 기상을 문득 닮고 싶어 했던 것이다.

 

 

 

 

인용: 심경호 著  <산문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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