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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에곤 실레 1

EGON SCHIELE / NAKED SOUL


에곤 실레(1890~1918)


오스트리아 빈, 합스부르크 왕가가 몰락하기 직전 화려함과 불안감이 뒤섞인 도시를 무대로 활동했던 화가 에곤 실레는1890년

도나우 강변의 툴른에서 태어났다. 1906년 빈 미술 아카데미 입학했으며, 그곳에서 스승이자 친구와도 같았던 구스타프 클림트

(Gustav Klimt 1862~1918)를 만나 깊은 영향을 받는다. 1908년 클로스터노이부르크에서 열린 전시회에 처음으로 참가했고,

1909년에는 보수적인 분위기의 아카데미를 떠나 새로운 예술가 그룹(Neukunstgruppe)을 결성했다. 이후 표현주의적 성격을 띤

그의 회화 양식은 성숙기에 접어들었는데, 특히 1911년에 클림트의 소개로 만난 모델발리 노이칠과 함께 인상적인 작품을 많이

제작했다. 사춘기 소년과 소녀에 강한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모델로 작품을 제작하던 실레는 1912년 미성년자 유괴와 외설적인

그림을 그렸다는 혐으로 체포되어 24일 동안 감옥 생활을 했다. 1915년 갤러리 아르노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개최한 후, 모델

빌라와의 동거를 끝내고 에디트 하름스와 정식으로 결혼했다. 이후 작품을 꾸준히 제작하여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에술가로서

확고한 지위를 얻게 된다. 1918년 제49회 빈 분리파 전시회에 참가하여 국제적인 명성까지 얻었으나, 몇 달 후 에스파냐 독감에

걸려 아내 에디트가 사망했고 사흘 뒤 실레 역시 독감에 감염되어 스물여덟이라는 짧은 생애를 마감한다. 시대의 불안과 실레

 자신의 내면적인 고독, 욕망, 혼란이 뒤섞인 작품들은 현대를 사는 우리의 삶을 투영하기에 영원한 공감대를 얻고 있다는 평.







<키스>

구스타프 클림트, 1907~1908년 / 180×180cm / 캔버스에 유채 / 빈 오스트리아 미술관.


구스타프 클림트의 예술세계를 접하다 보면 자연스레 <에곤 실레>에 이르게 된다.






<왼쪽 다리를 곧추세운 여인>

1917 / 종이에 구아슈, 수채와 검은 크레용 / 46×30.5cm





 


<두 소녀 >                                                           <에곤 실레와 에디트 실레>

1915 / 종이에 구아슈와 연필 / 52.5× 41.2cm                                           1915년 / 종이에 구아슈와 연필 / 32.8×49.7cm






<붉은 옷을 입은 여인>

1914년 / 종이에 구아슈와 연필 / 46.5×29.7cm






<자화상>

1912년 / 나무에 유채 / 42×34cm






<발레리에 노이칠>

종이에 구아슈, 수채와 연필 / 32.2×48cm






<서 있는 여인>

1913년 종이에 구아슈, 수채와 연필 48.3×29.2cm






<세일러복을 입은 소년>

1914 종이에 구악슈, 수채, 크레용과 연필 47.8×31.32cm






내 속에는 독일인의 피가 흐른다. 그리고 때때로 나는 내 안에 있는 선조의 존재를 느끼곤 한다.

안할트 공국 베른부르크 시의 초대 시장으로 법률 고문관이던 프리드리히 카를 실레의 증손인 나는

1890년 6월 12일, 도나우 강변의 툴른에서 빈 출신의 아버지와 그루마우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에곤 실레, 「자화상을 위한 스케치」)






<호수에 비친 나무>

1907 판지에 유채 30.5×19.7cm






<산이 있는 마을>                                               <목초지가 있는 마을>

종이에 유채 21.7×28cm                                                                    판지에 유채 19.8×34.4cm






<머리 위로 치마를 올리고 무릎을 꿇은 소녀>

1910 종이에 구아슈, 수채와 연필 41.8×31cm





     


<클로스터노이부르크의 집>           <서 있는 레오폴트 치하체크의 초상>

1908 판지에 유채 19.4×21.9cm                  1907 켄버스에 유채 149.8×49.7cm






<남부 오스트리아의 풍경>

판지에 유채 17.5×22.5cm






<자화상>

1906 종이에 목탄 38×26.7cm






흥미로운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하자면, 1907년에는 실레보다 1년 먼저 태어난 아돌프 히틀러가

 빈 미술 아카데미의 입학 시험에 응시하였다가 떨어진다. 『나의 투쟁』에 의하면, 이 세관원의

아들은 열 두 살이던 어느 날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열여덟 살이 되던 해에 자신만만하게

미술 아카데미의 입학 시험을 치른다.


성공을 확신하고 있던 내게 불합격 통지는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었다.

나는 학장을 찾아가 미술 아카데미 회화과에 불합격된 이유를 설명해 달라고 했다.

그는 내가 그린 그림이 화가로서의 부적합성을 보여 주고 있지만, 건축 분야에 소질이

 있는 것은 분명하므로 회화과가 아닌 건축학과에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아돌프 히틀러, 『나의 투쟁』)





   


아카데미 학생 에곤 쉴레 1906                                            <해바라기 1> 1906 판지에 유채 44×33cm






  


<자화상> 1919                                              빈 분리파 제1회 전시회 포스터> 1898

캔버스에 유채와 금속 페인트 71.5×27.5                                              석판화 62×43cm





    


(왼쪽) 클림트 <의학> 1901 캔버스에 유채 430×300cm

(오른쪽) 클림트 <의학> (구성 스케치) 1897-98 캔버스에 유채 72×55cm


1890년대에 파리를 중심으로 시작되어 유럽 전체로 급속하게 퍼져나간 아르누보 물결에 호응하여, 1892년에는 뮌휀,

1893년에는 베를린에서 '분리파'라는 그룹이 탄생한다. 구체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가 힘든 '분리파'라는 명칭은 기존의

아카데미즘에서 분리와 탈퇴를 의미한다. 이와 같은 동향에 동조하듯 1897년에서 빈에서 삼십대 중반의 클림트가 중심

이 되어 '빈 분리파'를 결성한다. 이 그룹은 반 년 만에 자신들의 작품ㅇ르 자유롭게 전시할 수 있는 상설 전시관을 마련

할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단체이 모호한 성격이 문제가 되어 창시자인 클림트는 1905년 여기서 탈퇴,

1906년에 동료들과 함께 '오스트리아 화가 연맹'을 결성하고 정열적으로 전시 활동을 시작한다.


클림트에 대해서는 이밖에도 약간의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그것은 그가 제작한 빈 대학 강당의 천장화와 <베토벤 벽화> 때문에 생겨난 두 차례의 스캔들에 관한 것이다.

 클림트가 그린 대학 강당의 천장화는 <철학> <의학> <법학>으로 나뉘어 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문제가 된 것은

1901년 분리파 전시관에서 공개된 <의학>이었다. 비난의 초점은 화면 왼편 상단에 그려진 여성 누드와 오른쪽 상단의

임신한 여성이었다. 표현주의 미술 연구자인 세르주 사바르스키는 당시 공격의 표적이 되었던 것은

클림트의 회화 양식이 아니었다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공격 대상은 소재에 대한 클림트의 성실성이었다. 그때까지 사람들은 신체의 특정 부분이 '조신하게' 숨겨져 있거나

뭔가의 그늘에 교묘히 가려져 있는 은밀한 누드화에 익숙해 있었다. 그런데 클림트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매우 적나라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아름다운 나부를 그려낸 것이다. 나아가 그는 나이가 들거나 뚱뚱한 나부, 벌거벗은 노인들, 심지어는

임산부를 꽉 끌어안은 남자들까지 그려냈다. 그러자 클림트를 공격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가리켜 호색적이라느니 춘화라느니

추잡스럽다느니 하며 혹평했다. 그들은 화가가 시대를 앞서 나가고 있다는 단순한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클림트 <베토벤 벽화> '적대적인 힘' 부분

1902 화장 회반죽 바탕에 카세인 물감, 치장벽토, 연필 스케치, 유리, 자개 등과 금박






<클림트와 함께 있는 자화상> 1912 혼합색 잉크 24×19cm


실레가 만난 것은 이와 같은 화가로서의 클림트였다.

실레가 클림트를 찾은 것은 물론 그의 작품에 이끌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시선에는 당연히 클림트의 작품이 감당해 내야 했던 몇몇의 논란도 포착되어 있었을 것이다.

혹은 5년 뒤에 일어날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고 있었기에 클림트에게 끌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클림트는 재능 있는 청년 화가들을 기꺼이 돌봐준 사람이었던 듯, 그를 따르는 젊은이들에게 항상 둘러싸여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클림트와 실레(코코슈카도 포함)가 스승과 제자의 관게는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사바르스키는 "클림트에게는 제자가 한 명도 없었다" 라고 단정한다. 그들 사이에는 일정 거리를 둔 우정 관계가 유지되고

있었으며, 그림을 가르치고 배우는 종적인 관계가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열일곱 살의 실레가 처음으로 클림트에게

자신의 데생을 내밀며 비평과 조언을 구했을 때, 클림트는 "자네는 이미 나보다 잘 알고 있을 텐데"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말 속에는 비상한 재능에 대한 솔직한 인정과 함께 모종의 위화감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을까?

1918년 2월 실레는 자신보다 9개월 먼저 세상을 떠난 클림트의 침대로 달려가 그의 얼굴을 스케치하였다.






<빈 공방 엽서-게르트루데와 멜라니 실레> 1910년





    


(좌) 비웃는 여인-게르트루데 실레> 1910년 종이에 구아슈, 수채와 목탄 45×31.4cm

(우) <격자 무늬 옷을 입은 여인> 1910년 판지에 수채화 목탄 134×52cm





   


(좌) <이중 자화상> 1910년 종이에 연필 55.9×36.2cm

(우) <자화상> 1910년 종이에 유채와 구아슈 152.5×150cm






<게르티 실레의 초상>

1909년 캔버스에 유채와 금속 페인트 140.5×140cm




 


<꽃밭>

1910년 종이에 구아슈, 금속 페인트와 검정 크레용 44.2×30.7cm









클림트 <물뱀 Ⅱ> 1904-07년 캔버스에 유채 80×145cm


<물의 요정 Ⅱ> 1908년

종이에 구아슈, 금속 페인트, 잉크와 색연필 20.7×50.6cm


실레가 클림트의 영향을 강하게 보여 주는 작품을 처음으로 그린 것은 1907년의 <물의 요정>에서였다.

사실 이것은 1904년에 클림트가 제작한 유사한 제목의 작품 <물뱀>을 기초로 그린 것이다. 그러나 종에에 구아슈와

금 · 은색 물감으로 그린 이 작품은 명백하게 클림트의 그림에서 모티프를 가져왔음에도 클림트의 <물뱀>과는 현저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실레의 <물의 요정>은 지극히 장식적이긴 하나, 온실 속에서 파릇파릇하게 피어나는 잎사귀들과

같은 클림트 특유의 생동감 넘치는 장식 효과는 찾아볼 수 없다. 흐르는 곡선과 둥그스름한 형태를 통해 표현된

클림트의 누드가 농염한 관응성을 보여 주고 있다면, 실레의 평면적이고 투박한 윤곽으로 그려진 여인들은 한층

예리한 에로티시즘을 전달하고 있다. 나아가 클림트의 여인들이 보여 주는 졸린 듯한, 유혹하는 듯한 미소가

<물의 요정>에서는 일그러진 입술과신경질적인 시선이 나타내는 실레의 독자적인 표현으로 변화했다.

그것은 19세기 말의 쾌락주의적이고 자기 탐닉적인 경향과는 사뭇 다른, 불안에 쫓기는 듯한 표현이다.






 


(좌) 클림트 <다나에> 1907년 캔버스에 유채 77×83cm

(우) <다나에> 1909년 종이에 유채 금속 페인트 80×125.4cm


실레와 클림트 사이의 관계를 보여 주는 또 하나의 예이다. 실레는 클림트의 <다나에>(1907)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같은 제목의 그림을 그리는데, 이 작품에서 빗줄기가 되어 감금당한 다나에를 방문하는 제우스를 묘사한 부분의 장식적인

효과는 분명히 클림트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인물의 자세는 전혀 달라서, 클림트의 다나에가 위를 향해 누워 몸을

둥글게 말고 있다면 실레의 <다나에>는 엎드린 자세를 취하고 있다. 만일 실레가 단순히 클림트의 영향권 아래 머문

 아류 화가였다면 이러한 상호 관계는 결코 생겨날 수 없었을 것이다.






(좌) 클림트 <누워 있는 두 명의 나부> 1916년 종이에 연필

(우) <누워 있는 두 명의 나부> 1917년 종이에 검정 크레용 29.8×45.8cm


클림트와 비교를 통해 실레의 특성을 조금 더 추적해 보기 위해서는 드로잉을 예로 드는 게 좋겠다.

대부분 여성 누드인 클림트이 인물 드로잉은 부드러운, 졸음을 불러오는 듯한 선으로 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모델은 한결같이 풍만한 육체를 지녔다. 반면 실레가 그린 드로잉에 등장하는 나부들에게서는 잠에 취한 분위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클림트의 드로잉에서 들려오는 것이 멜로디라면 실레의 드로잉에서 전달돼 오는 것은 리듬에 가까운 그 무엇이다.






<안톤 페슈카의 초상>

1909년 캔버스에 금, 동 도금과 흑연 110×100cm








실레가 신들린 듯이 연필로, 수채화로, 구아슈로 많은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하는 시기와 클림트의 영향에서

 벗어난 시기가 일치한다 할레산드라 코미니는 실레 연보 중 1910년 항목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클림트의 영향을 반영하는 아르누보 양식에서 탈피하여 급진적인 표현주의자로서의 독자적인 스타일을 정립하기에 이른다.

그것은 오스카르 코코슈카나 막스(모프) 오펜하이머의 표현주의와 매우 유사하다. 그는 비정상적인 성 심리에 근거한 작품 대신

거울을 앞에 두고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시리즈는 최종적으로 이중 자화상에 도달한다. 그의 생활은 고독했으며

아르투르 회슬러의 초상화를 포함한 몇 점의 중요한 초상화로 얼마간의 돈을 벌었음에도 경제적으로 매우 궁핍했다.





    


(좌) <자화상>

1910년 종이에 구아슈, 수채와 목탄 44.8×31cm

(우) <얼굴을 찡그린 남자-자화상.

1910년 종이에 구아슈, 수채와 목판 44×27.8cm





  


(좌) <자화상>                                                  (우) 자신의 작업실에 있는 실레

                     1911년 부분 종이에 구아슈, 수채와 연필 51.4×35cm




   


(좌) <성 세바스탄으로서의 자화상> 1914년 포스터 부분. 판지에 구아슈, 검정 크레용과 잉크 67×50cm

(우) <인물 구성-삼중 자화상> 1911년 종이에 구와슈, 수채와 연필 55×37cm






<자신을 보는 자 Ⅱ (죽음과 인간)> 1911년 캔버스에 유채 80.3×80cm





 


(좌) <이중 자화상> 1915년 종이에 구아슈, 수채와 연필 32.5×49.4cm

(우) <에로스> 1911년 종이에 구아슈, 수채와 검정 크레용 55.9×45.7cm






<벌거벗은 자화상>

1910년 종이에 구아슈, 수채화 검정 크레용 44.9×31.3cm






<자위하는 자화상>

1911년 종이에 구아슈, 수채와 연필 48×32.1cm







실레의 마음속에 성에 대한 관심이 언제부터 싹트기 시작했을까.

 아마도 유아기에는 유아기 나름의, 소년기에는 그 나이에 걸맞은 성 충동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남자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겪어 나가는 성장 과정이다. 다만 실레가 보통의 소년들과 달랐던 점은

성에 대한 그의 이미지 속에 네 살 어린 여동생 게르트루데(게르티)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엘비라(열 살 때 사망)와 멜라니라는 두 명의 누나가 있었지만, 소년 시절부터 사춘기를

 지내며 특히 여동생 게르티와 친하게 지냈다. 게르티는 실레를 위해 누드 모델이 되어 주기도 했다.


1970년 실레는 게르티와 단둘이서 트리에스테(당시 오스트리아 영토이던 이탈리아 북동부의 도시)로 기차여행을 떠난다.

트리에스테는 바로 그들 부모의 신혼 여행지였다. 어린 남매의 여행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이 대목에서 뭔가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가 느껴지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이 여행 중에 그는 초기의 수작으로 꼽을 수

있는 <트리에서테 항구>를 그렸다. 그런 만틈 일단은 여행의 목적이 그림을 그리기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해도 좋을 듯 싶다.

그러나 왜 어린 여동생을 데리고 갔을까 하는 의문은 계속 남는다).






<트리에스테 항구>

1907년 판지에 유채 25×18cm





   


(좌) <팔짱을 낀 벌거벗은 소녀>-게르트루데 실레

1910년 종이에 수채와 검정 크레용 48.8×28cm

(우) <오른팔을 들고 앉아 있는 벌것벗은 여인>

1910년 종이에 구아슈, 수채와 검정 크레용 45×31.5cm





    


(좌) 앉아 있는 소녀> 1910년 종이에 수채와 연필 45×29.8cm

(중) <두 소년> 1910년 종이에 구아슈, 수채와 연필 44.2×31.2cm

(우) <서 있는 벌거벗은 검은 머리 소녀> 1910년 종이에 수채와 연필 54.3×30.7cm





                     


(좌) <기대어 있는 소녀> 1910년 종이에 연필 55.7×37cm

(우) <서 있는 벗거벗은 검은 머리 소녀> 1911년 종이에 수채, 구아슈와 크레용 53.3×28cm









<아르투르 뢰슬러의 초상>

1910년 캔버스에 유채 99.6×99.8cm





<발레리에 노이칠의 초상>

1912년 나무에 유채 32×40cm


1911년 그는 빈을 떠나 어머니의 출생지인 보헤미아(오늘날의 체코 공화국)으 크루마우에 아틀리에를 마련한다.

그때 그의 옆에는 모델 발레리아 노이칠(발리)이 있었다 실레가 그린 여성상 중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본디 발리는 클림트이 모델이었는데 클림트의 소개로 실레를 만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미묘한 사정이 얽혀 있는 듯 하지만

적어도 실레가 먼저 그녀를 원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프랭크 휘트퍼드에 의하면 클림트는 자신이 모델과 동침하는

버럿이 있었다고 한다. 클림트와 그랬던 것처럼 발리는 자연스럽게 실레와 한 침대를 썼으며 그가 다른 여성과 결혼하기

전까지 4년 동안 동거를 한다. 1911년 그녀는 열일곱 살로 실레보다 네 살 아래였으니 게르티와 동갑인 셈이다.






<발레리에 노이칠>

1913년 종이에 구아슈, 수채와 검정 크레용 48.8× 31.5cm


클림트에게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는 실레를 발리와 만나게 해주는 일에 뭔가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음이 분명하다.

휘트퍼트 에 의하면 발리는 실레이 에로틱한 환상에 숨을 불어넣었고, 그의 그림은 비로소 활짝 피어나게 되었다.

나아가 그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많은 뛰어난 작품들 중에서 유독 발리의 유혹하는 듯한, 뭔가를 고대하는 듯한 인형 같은 눈매와 감각적으로 내민 입술은

순진해 보이면서도 되바라진 것 같다. 발리의 맨살은 선명한 붉은색의 블라우스와 레이스 달린 속옷, 색깔 있는 스타킹과

양말 때문에 더 두드러져 보인다. 발리를 그린 그림들은 실에의 작품 중에서 육체적인 열정이 가장 탁월하게 표현된 작품이다.

비슷한 주제를 다루었던 이전의 드로잉의 여성은 관람자가 몰래 훔쳐보는 대상이었다.

그러나 발리를 그린 작품들은 직접적인 관계에 대해 말한다.




<무릎을 들어올린 붉은 옷의 발리>

1913년 종이에 구아슈, 수채와 연필 31.8×48cm






<자화상>

1911년 종이에 구아슈, 수채와 연필 48.2×31.7cm






<노이렝바흐의 화가의 방>

1911년 나무에 유채 40×31.7cm





  


(좌) <해바라기> 1911년 종이에 수채와 연필 43.5×29.3cm

(우)  <작은 도시 Ⅲ> 1913년 캔버스에 유채 88.3×87.6cm





   


(좌) <앉아 있는 소녀> 1911년 종이에 수채와 연필

(우) <기대어 있는 세미 누드> 1911년 종이에 구아슈, 수채와 연필47.9×31.4cm





   


(좌) <푸른색 앞치마를 두른 소녀> 1912년 종이에 수채와 연필

(우) <두 소녀> 1911년 종이에 구아슈, 수채와 연필 48.3×30.5


1912년 4월 13일, 실레는 집으로 찾아온 두 명의 경관에게 다수의 그림을 앞수당한 뒤 연행되어 구류 처분을 받는다.

24일 동안 노이렝바흐 교도소에 갇힌 그의 혐의는 '풍기문란'과 '미성년자 유괴'였지만, 구금된 뒤에도 상당 기간 동안

자신이 왜 감금되었는지에 대해 아무런 설명을 듣지 못한다. 따라서 그는 사태를 판단해 볼 여지도 없었을 것이다.

구류된 지 3일째에 해당하는 4월 16일부터 실레는 옥중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한순간 그 말은 내 마음속에 비수처럼 꽂혔다. 나에 대한 의혹은 재판소의 그것과 같은 것일지도 몰랐다.

분명 내가 체포된 것은 지금쯤 가족이나 할머니에게로 돌아가 있을 그 엉뚱한 소녀를 유괴했다는 의혹과 연관이 있는 거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안도감과 함께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그 사건과 관련해서는 내 신상에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음을,

'유괴'란 오해에 지나지 않았다는 게 분명히 밝혀질 것임을 나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유괴'는 전적으로 사실

무근이므로. 그 이상한 소녀와의 사이에서 벌어진 일은 바로 다음과 같이 시작되었다.....





   


(좌) <숱 장식이 있는 모포 위의 두 소녀> 1911년 종이에 구아슈, 수채 잉크와 연필 56×36.69cm

(우) <검은 스타킹을 신고 누워 있는 여인> 1911년 종이에 수채와 연필 29.2×43.5cm





     


(좌) <두 인물> 1912년 종이에 구아슈와 연필 48.3×30.5cm

(우) <팔꿈치를 들어 올린 소녀> 1911년 종이에 수채와 연필 47.9×29.8cm


● 인용서적: 구로이 센지 著 | 김은주 易 『에곤 실레, 벌거벗은 영혼』





A Summer's Story - Bradley 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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