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나무와 숲은 이내 꿈과 성장의 자양분이자 힐링과 사색의 원천이었다.
수목은 결단코 유리 진열장 속 박제된 유물이 아닌
지금 살아 숨쉬는 현재진행형 문화재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네 질곡의 역사가 송두리째 내재된 확연한 징표이자,
더 나아가 후손들에게까지 전해져야 할 명징(證據)한 자연의 경전이라는 생각이다.
박상진 著 『우리 문화재 나무 답사기』를 읽게 되었다.
전국을 통틀어 250여 곳에 이르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나무와 숲이 있다는데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나무와 숲 중, 몇 개체를 제외하곤 거의 대부분 이미 진즉에 발걸음을 했던 터.
허나 궁금증 해소 차원의 일반적 염량을 지닌 답사객에 불과했던 처지였던지라,
모름지기 임학자이신 저자의 시선과 말씀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음은 당연지사.
아래 내용 대부분은 책에 나오는 사진을 스캔한 것이고,
그 중 일부는 이내 창고 속 사진자료를 인용한 것이다.
헌법재판소 백송
천연기념물 제8호. 1962. 12. 03 지정
서울특별시 행정구역 안에는 11그루의 천연기념물이 있는데, 이 백송은 한양에 조선왕조가 터를 잡을 즈음
누군가가 멀리 중국에서 가져다 심은 것으로, 백송 특유의 느린 성장과 함께 터는 어느덧 영조 시절 재상 조상경이 살았다.
그는 7번에 걸쳐 판서를 지내며 조선 후기 풍양조씨家의 세도정치에 주춧돌을 놓은 인물. 이후 백여 년 동안 조씨 일가와 더불어
영광의 세월을 함께한 백송으로 순조 19년(1819)에 이르러서는 조만영의 12살 어린 딸이 세자빈에 간택되어 가까운 창덕궁으로
들어가 훗날 고종의 즉위에 결정적 역할을 한 조대비가 되는데, 이후 조대비의 친정집 일대는 개화사상가들의 대부 박규수 소유가 된다.
백송은 바로 그의 집 사랑채 뜰에 있었다고 한다. 대원군의 안동김씨의 세도를 종식시키는 왕정복고 시도는 이 백송이
지켜보는 사랑채에서 시도된다. 백송의 껍질이 차츰 하얗게 되는 것을 보는 대원군은 거사가 이루어질 것을 확신했다고.
이후 개화의 물결을 타고 이 일대에 경기여고가 들어서고 백송은 기숙사 바로 앞에 있었고, 격변기를 지나
창덕여고가 들어와 있다가 방이동으로 이사간 후, 지금은 '헌재'의 지킴이 역할을 맡고 있는 것.
키 17m, 뿌리목 둘레 3.8m,V자 가지 굵기는 각각 둘레 2.4와 1.9m에 이른다.
이 백송의 희고 고운 껍질의 아름다움은 그 어떤 백송도 따라오지 못한다는데 이는 나무가 그만큼 건강하다는 징표일 터.
나무 나이는 약 700년이 넘는다는데 우리나라 5그루의 백송 천연기념물 중 최고령 백송에 해당 한다고 한다.
원주 성남리 성황림
천연기념룰 제93호). 1962년. 12. 03 지정
우리나라의 대표적 민간신의 대상물 성황당은
보통 커다란 신목(神木)과 당집이 어우러진 형태로 마을 인근에 자리하는데
이 성황림(城隍林)은 '대동여지도'에 신림(神林)으로 기록될 만큼 오래된 이력의 숲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위 서낭과 아래 서낭으로 나뉘어 졌고, 일찍이 학술적 보전 가치를 인정받아 일제때
'조선보물고적명승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가, 1962년 우리 손으로 다시 천연기념물 92, 93호로 이름 바꿈을 했다.
그러나 지정만 해두고 관리는 부실하여 92호 아래 서남은 아예 해제되어 버렸다. 동쪽 우뚝 솟은 아름드리 전나무가 한 그루가
이 서낭숲을 대표하는데 수고 29m, 흉고둘레는 4m에 이르며 3백 살이 넘는 수령으로 주위를 압도하는 위엄이 서려있다.
서낭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매달아둔 북어 한 마리
서쪽으론 두 아름에 이르는 음나무 한 그루가 당집을 감싸고 있다.
앞으로는 굵은 복자기나무 10여 그루가 자라고 있어 가을날 예쁜 단풍이라도 들라치면 마치 시녀를 거느린 대왕의 형상이다.
그 외 느릅나무, 갈참나무, 졸참나무, 들메나무, 피나무, 층층나무가 경쟁하듯 자라고 아래 쪽으로는 쪽동백, 버드나무, 야광나무,
산뽕나무, 박쥐나무, 산초나무, 보리수나무, 광대싸리 등의 중간 공간을 이룬다. 아울러 복분자딸기, 찔레, 노박덩굴,
으름덩굴 등의넝쿨과 수많은 초본식물들이 숲의 건강을 돕고 있는 형국이다. 대체로 나무 종류만 90여 종에 이른다.
평창 옛 운교역 밤나무
천연기념물 제498호, 2008. 12. 11 지정
밤나무는 오랫동안 우리네 생활문화와 함께해왔지만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것은 이 운교역 밤나무 뿐.
벌레의 피해로 재래종 밤나무 고목이 거의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근경 둘레가 6.4m, 굵기는 지름 2m.
1.5m 높이에서 둘로 갈라져 있고, 갈라진 줄기도 지름이 1m가 넘는다. 수고는 14m에 이를 정도로
우리가 흔히 만나는 재배 밤나무와는 달리 엄청난 굵기의 고목으로 주위를 압도하는 품위와 당당함이 돋보인다.
이 밤나무 주위는 관동대로의 길목에 있던 운교역의 마방(馬房) 터로 알려져 있다.
운교역(雲橋驛)은 『세종실록지리지』에 등장하니 기록만으로도 600년이 넘었다. 고종 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으니
수 많은 옛 관리들의 애환을 바라본 역사 현장의 징표나무로 추산하자면 600여 살에 이르는 밤나무인 것이다.
겨울날에는 굵고 웅장한 나신(裸身)이 한층 돋보인다.
밤나무가 이렇게 마방의 한편에서 수백 년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두루두루 쓰임새가 많았던 탓.밤은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 칼슘, 비타민 등이 풍부해 지금도 거의 완벽한 식품 중 하나로 평가된다.목재 또한 단단하고 잘 썩지 않으므로 사당의 위패, 제상(祭床) 등에 쓰인다.양향(陽香)이라 불리우는 밤꽃 특유의 향기는 옛 부녀자들을 부끄럽게 해 외출을 삼갔고, 과부는 더더욱 근신할 수 밖에 없었다는 전설따라 삼십센티가....
영월 하송리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76호, 1962. 12. 03 지정
영월엄(嚴)씨의 시조 엄임의(嚴林義)가 심었다고 전한다. 그는 당나라 현종(712-756) 때 파락사(波樂使)로 신라에 왔다가 '안녹산의 난' 으로 고향 땅이 어수선해지자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 정착했다고 한다. 일대의 지세가 배의 모양이어서 돛대 역할을 할 나무로 은행나무를 심게 되었다는 것.
발산은 평지에 멈추고 / 강 위에는 마치 용이 누워있는 것 같구나마을의 가운데는 천년된 은행나무가 자라고 / 예부터 엄씨들이 살고 있네
조선 후기의 문인 봉서 신범(辛汎, 1823~1879)의 시문집 『봉서유고(蓬西遺稿)』에 실린 '월행(越行)'이다.
세조 3년(1457) 청령포에 유배와 있던 단종이 읍내의 관풍헌으로 옮겨질 때, 어린 단종이 이 나무의 은행 몇 알을 가져다자신의 운명을 점 쳤다는 얘기도 전한다. 아무렇게나 팽겨쳐진 단종의 시신을 거둔이는 바로 이 은행나무를 심은 엄임의의 12대 손 엄홍도 였다고 한다.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는 자신의 가지를 잘라내곤 한다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흉고가 자그만치 14.8m나 될 정도로 거대한데 2003년 문화재청 일제 조사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굵은 나무이다. 전설을 그대로 따른다면 나이는 1,300년으로 양평 용문사의 마의태자가 심었다는 은행나무보다
2백년을 앞선다. 일제 때 조사자료에는 수고 38m, 흉고둘레가 14m로 '조선 최대의 은행나무' 로 평가되기도 했다.
현재의 수고는 29m로 바람에 가지가 부러지고 관리를 위해 잘라내버려서 옛날 보다 오히려 키가 작아졌다.
울진 실직국왕 굴참나무
천연기념룰 제96호, 1962. 12. 03 지정
예로부터 굴참나무의 가장 중요한 쓰임새는 지붕을 덮는 데 있었다. 두께가 3~4cm에 이르는 두터운 코르크가 발달했기 때문.
굴참나무는 자연이 준 방수물질이자 뛰어난 보온성까지 지녔으니 지붕 이는 데는 이를 따라 갈 재료가 없다. 그래서 굴피집은
굴피나무가 아니라 굴참나무 껍질을 벗겨서 만든다. 또한 굴참나무는 흉년이 들면 풍년 때 보다 더 많은 도토리를 매달아,
가난한 백성들의 규휼 식품을 제공해 주는 고마운 나무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굴참나무 중 가장 크고 오래된 수령이라고.
온통 충전물질로 채워진 몸통과 울퉁불퉁한 자태는 마지막 기력의 쇠잔함으로 다가온다.
약 3m 높에에서 바다를 향해 거의 수평으로 길게 뻗은 가지도 자꾸만 아래로 처지는 느낌을 받는다.
이런 저런 수 많은 전설을 내재한 이 굴참나무 이야기는 물경 2천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사기』에 신라 파사왕 23년(102) 실직국(悉直國) 왕이 항복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신라가 아직 완전한 나라의 모습을 갖추기 이전으로 실직국은 삼척에 있던 나라였던 것.
나무가 자리한 얕은 야산의 바로 앞에는 왕피천(王避川)이 흐른다.
이곳에서 불영계곡쪽으로 3km 거리에 천연기념물 409호 처진소나무가 있으며,
북으로 10여km 떨어진 죽변읍에는 158호 향나무, 조금 떨어진 화성리에는 312호 향나무가 자라고 있다.
예천 금당실 솔숲
천연기념물 제469호, 2006. 03. 28 지정
금당실 솔숲은 낙동강 지류인 복천, 용문사 계곡, 청룡사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개천이 만나 삼각주를 형성하는 지점.
살기 좋은 지점이 아니라 홍수가 나면 물난리를 피할 수 없는 지점인 것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항목이 바로 비보 개념.
헌데 이런 목적의 숲이라면 다른 곳에서는 주로 느티나무, 왕버들, 팽나무 등의 활엽수를 심었는데 이 곳은 소나무 일색이다.
까닭인 즉, 용문사 계곡을 타고 내려오는 겨울 북서풍 칼바람이 문제였던 것. 하여 튼튼한 바람막이 용도로 솔숲이 조성된 것.
잘 가꾼 솔숲이 어느 순간 쑥대밭으로 변하고 만다. 이에 충격을 받은 마을 사람들이 이른바 '사산송계(四山松契)'를 맺고
숲 가꾸기에 온 정성을 쏟아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숲의 길이는 약 800m에 ,
크고 작은 소나무 약 580여 그루가 긴 띠를 이루고 있다.
안동 진성이씨 종택 뚝향나무
천연기념룰 제314호
별당으로 지어진 종택의 '경류정(慶流亭)' 바로 앞에 넓은 우산을 펼친 형상의 뚝향나무의 자태.
이 나무는 조선 초 영변 판관으로 있던 이정(李楨)이 세종 15년(1433) 오랑캐 퇴치에 공을 세우고 귀향하는길에 가지고 온
3그루 향나무 중 하나라고. 한 그루는 퇴계의 고향인 안동시 도산면 온혜동에 심고, 외손인 선산의 박씨에게 또 한 그루를 주었으며,
나머지 한 그루를 이곳에 심었다고 전한다. 보통의 흔한 향나무와는 달리 휘귀 수종인 뚝향나무를 어디서 구했으며, 종자가 아니라
나무를 가져 왔다니 얼마나 큰 나무를 옮겨왔는지도 궁금한데 세월이 지나면서 다른 곳에 심은 두 그루는 없어지고 이곳만 남은 것.
줄기가 땅에서부터 꽈배기 형상으로 꼬여 올라가다가 1.3m 높이에서 기괴한 모양으로 받침대에 의지해 얼기설기
가지를 뻗고 있다. 나무의 키는 불과 3.2m, 가슴높이 둘레는 2.3m, 가지 펼침은 동서 14.7m, 남북 12.2m 정도이다.
특별히 향이 강해 제사 향으로 애용됐으며, 주변으론 벌레가 꼬이지 않는다고 한다. 나무의 수령은 580~600년 정도.
이 나무에 대한 이력과 성장 과정을 기록한 <노송운첩(老松韻帖)>의 서문에는 '참새가 감히 보금자리를 틀지 못하고
청개구리도 구멍에 들지 못한다. 눈 덮힌 기이한 봉우리는 달밤에는 맑고 희어서 마치 두루미가 의연하게
머물러 있는 것 같다.' 고 했다. 또한 '이 나무를 심은 이후 진성이씨 가문은 더욱 흥해
퇴계를 배출했고 나뭇가지처럼 자손이 번창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라고 적고 있다.
울릉도 통구미 향나무
천연기념물 제48호
정조 18년(1794) 강원도 관찰사 심진현은 월송만호 한창국을 시켜 울릉도를 조사한 내용을 조정에 보고한다.
'4월 21일 배 4척과 80명의 병사를 싣고 출발해 도중에 폭풍우를 만나 한 척을 잃어버리고, 23일경 황토구미진(지금의 태하리)에
상륙했습니다. 산에 올라 살펴보니, 오른편은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쳐 있으며, 그 위에는 통구미진(지금의 통구미)에 도착하니,
계곡의 모양새가 마치 나무통과 같았습니다. 그 앞에 바위가 하나 있는데 바다 속에 있는 바위 (지금의 거북바위)는 섬과의 거리가
50보(步)쯤 되고, 높이가 수십 길이나 되며, 주위는 사면이 모두 절벽이었습니다.
계곡 어귀에는 암석이 층층이 쌓여 있는데, 근근히 기어 올라가 보니 산은 높고 골은 깊은데다 수목은 하늘에 맞닿아 있고 잡초는
무성해 길을 헤치고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주위가 온통 절벽이며, 자라는 나무로는 향나무, 잣나무, 황벽나무, 솔송나무, 뽕나무,
개암나무, 잡초로는 미나리, 아국, 쑥, 모시풀, 닥나무가 주종을 이루고 그 밖에는 이상한 나무들과 풀은 이름을 몰라서
다 기록하기 어려웠습니다. 향나무 두 토막을 올려 보냅니다.' 라고 했다.
불과 1백여 년 전 구한말까지만 해도 울릉도는 이름 그대로 정말 '숲이 울창한 섬이었다. 울릉도 숲의 벌채권을 두고 러시아와 일본이
다투다가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인들이 울릉도의 나무를 송두리째 베어가 버렸다. 실제로 울릉도의 숲에는 향나무, 느티나무, 솔송나무
섬잣나무 등 좋은 나무가 수 없이 많았지만 가장 쓸만한 나무는 역시 향나무였다. 자단 혹은 향목으로 불리던 이 나무는 제사의식에서 향을
피우는 재료를 기본으로 고급가구와 불상, 조각재까지 다양하게 쓰일만큼 귀한 나무였다. 남벌의 톱날을 피해 살아 남은 향나무 대부분은
천 길 낭떠러지 절벽에 붙어 사는 향나무들 뿐. 하지만 뿌리를 뻗기도 어렵고 억센 바닷바람 때문에 곧게 자랄 리 없다보니 비비 꼬이는 등
기괴한 모양을 하고 작달막한 향나무들만 겨우 살아 남게 된 것이다. 현재 울릉도 통쿠미와 태하리 앞산 대풍감 절벽의 향나무 몇 그루만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옛 영광을 이어갈 뿐이다. 울릉도 향나무는 지형적으로 보아 다른 곳의 향나무와는 완전히 떨어져 있다고 한다.
결국 집단 안에서만 유전적인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겠다. 당연히 향나무의 기본종을 연구하는 자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크다.
창원 신방리 음나무천연기념룰 제164호
통상 엄나무라 부르지만 공식적인 명칭은 음나무다. 엄나무란 가시가 날카롭게 달려 엄(嚴)나무로 불리웠다고 한다.음나무는 가시가 돋은 험상궂음 때문인지 귀신을 물리치는 벽사(辟邪)나무 역할로 잘 알려져 있다. 귀신의 도포자락이 가시에 걸리는 성가심도 한 몫 거든 듯, 아무튼 이런저런 이유로 귀신이 싫어하는 나무에는 음나무를 비롯, 무환자나무, 복사나무 등이 있다.반대로 귀신이 좋아하는 나무로는 느티나무(귀목나무) 등의 정자목과 버드나무 종류가 있다.
이곳에 자라는 4그루의 음나무 고목 모두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키 15.4~9.1m, 남북 11.2~18.1m 정도이며서로 가지가 맞닿아 있다. 자람 터의 경사가 너무 급해 비가 올 때마다 흙이 흘러내려 붉은 황토가 드러난 상태이다.수령은 약 700년 정도 됐다고 하지만 확인할 만한 전설이나 근거가 없다. 다만 나무의 지름으로 추정해본 생물학적 나이는300~400년을 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약 30년 전까지만 해도 모두 7그루가 있었느나 하나둘씩 죽고 지난 1979년까지는5그루가 있었으나 같 해 8월 20일 태풍 칼멘의 피해를 입어 한 그루가 더 죽고 지금은 4그루만 남았다.정월 대보름에 제사를 지내며, 마을의 큰 행사가 있을시 먼저 이 나무에게 알린다고 한다.
하동 송림천연기념물 제445호
섬진강 건너편 광양 다압쪽에서 바라본 모습으로 백사장을 따라 긴 띠처럼 이어진 송림이 눈에 들어 온다.국내 최대의 이 토종 소나무 숲은 조선 영조 21년(1745) 당시 하동 도호부사(都護府使) 전천상(田天祥)이 처음 조성한 것이다.민초들의 목민관 역할을 단단히 한 것이다. 솔숲 가꾸기로 한 때 일천 오백여 그루에 이르렀다는데, 현재는 50~300년 생 소나무 900여 그루가 너비 30m, 길이 2km에 이르는 모습이다. 피서철이면 수 없는 인파가 송림을 점령하곤 했는데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다.
광양 유당공원 이팝나무천연기념물 제235호
한 줄로 늘어선 10여 그루의 나무 행렬 가운데 사진은 이팝나무가 양쪽으로 푸조나무를 거느린 모습이다.수고 18m, 흉고 3.4m, 수세는 동서 13.4m, 남북 14.2m로 훤칠한데 우리나라 이팝나무 들 중 단연 발군의 수세를 자랑한다.
1547년, 광양현감으로 부임한 박세후가 풍수 상 남쪽이 허하다고 판단, 기를 보강하기 위해 연못을 파고 버들을 심어유당지(柳塘池)라 명명한 것이 오늘날 '유당공원'으로 불리우게 된 것. 그는 연못을 판 것에 그치지 않고 주변에 많은 나무를 심었다.왜구의 노략질부터 태풍의 피해 예방등 말하자면 다목적 수림대(樹林帶)를 조성한 것이다. 수종으로는 대부분 푸조나무이고,느티나무, 팽나무, 왕버들이 섞여 있다. 일제 강점기 해안선을 따라 조성돼 있던 숲은 거의 사라지고 말았다.
완도 보길도 황칠나무천연기념물 제479호
보길도 숲은 대낮에도 어두컴컴할 정도이다. 식생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는 뜻.그런데 황칠나무는 고목을 찾을 길이 없다. 차차 설명하겠지만 이 나무의 수령은 겨우 100~150년 정도.키는 15m, 밑동둘레 1.8m로 겨우 한아름 남짓에 불과한 나무이다. 이보다 훨씬 크고 오래 살 수 있는 황칠나무인데현재 남아 있는 나무 중에 그나마 가장 오래된 수령인데는 본디 가슴 아린 곡절이 내제되어 있다는 사실.
황칠나무에 대한 첫 기록은 『삼국사기』'고구려 본기(本紀)' 보장왕 4년(645) 조에 등장한다.'그해 봄, 당 태종은 명장 이세적을 선봉으로 삼아 직접 요동성을 공격해 12일만에 함락시킨다. 이 작전에 백제는 금 옻칠한 갑옷을 바치고 군사를 파견했다. 태종이 이세적과 만날 때 갑옷의 광채가 햇빛에 번쩍였노라' 고 적었다.이 금칠은 바로 황칠을 말한다. 황금 보다 더 격조높은 색깔을 내는 것이 황칠임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 재료가 바로 이 황칠나무에서나온다는 사실. 헌데 황칠나무라고 해서 모두 황칠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드문 개체에서만 겨우 소량의 황칠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
완도 수목원에 자라는 황칠나무
옻나무는 전국 어디서나 자라지만 이 황칠나무는 서남해안 일대에서만 자라는 난대식물이다.
음력 6월쯤 나무줄기를 칼로 그느면 아주 작은 양의 우윳빛 수액이 나온다. 이것이 공기와 접촉 산화되어 황색으로 변한다.각종 기물은 물론 철제 갑옷, 심지어 플라스틱 등 거의 모든 소재를 가리지 않는 접착성에다 매혹의 황금색상으로 인해황칠은 귀족들의 귀중품을 장식하는 귀중한 도료였던 것이다. 본디 백제의 특산품으로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졌던 모양으로송나라 손목이 쓴 『계림지(鷄林志)』에는 '고려 황칠은 섬에서 나고 본래 백제에서 산출되며, 신라칠이라고도 부른다.'고 했다.
『고려사』를 보면 원나라에서 황칠을 보내달라는 요구가 여러 번 있었다. 원종 12년(1271) 왕은 '우리나라가 저축했던 황칠은 강화도에서 육지로 나올 때 모두 잃어버렸으며, 그 산지는 남해 바다의 섬들이다.우선 가지고 있는 열 항아리를 먼저 보낸다.'고 했다. 이어서 충렬왕 2년(1276)과 8년(1282)에는 직접 사신을 파견해 황칠을 가져갔다.이 욍도 황칠에 관한 기록은 수 없이 나온다. 백제와 통일신라, 고려에 걸쳐 면면히 이어오던 우리의 황칠은 조선 후기로 들어오면서관리들의 수탈이 심해졌고 이에 백성들이 황칠나무 심기를 꺼려해 아예 맥이 끊기고 말았다.
다산 정약용의 황칠(黃漆) 시에는 '공납으로 해마다 공장(工匠)에게 옮기는데 / 아전들 농간을 막을 길 없어 / 지방민들은그 나무를 몰래 와서 찍었다네.' 라고 했다. 또 정조 18년(1794) 호남 위유사 서용보가 올린 글 중에도 '완도의 황칠은 근년 산출은점점 전보다 못한데도 추가로 징수가 해마다 더 늘어나고, 아전들이 농간을 부리고 뇌물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라고 해, 역시 완도가황칠의 주산지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불과 200여 년 전까지도 완도 일대에 널리 자라던 황칠나무는 이처럼 관리들의 수탈을 피해 모두잘려 나가 버리고, 보길도의 이 한 구루만이 남아 옛 영광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다행이라면, 최근 뜻있는 이들의 전통 황칠 관련 연구가 활발하여 재현에 성공하고 있다는 점이 매우 고무적이다.
내가 접해 본 황칠을 논하자면,그 어떤 칠에 앞서는 지구상 어디에도 없는 지상 최고의 매혹적인 도료라 자신있게 말 할 수 있겠다.
제주 납읍 난대림천연기념룰 제375호
늘푸른 잎나무로 뒤덮힌 제주도는 난대림의 보고이다. 그 중 납읍초등학교 운동장과 맞닿아 있는 '금산공원'이 바로 난대림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것.자그마한 언덕배기 숲에 약 15m 전후의 후박나무, 구실잣밤나무, 생달나무, 종가시나무, 곰솔 등이 하늘을 가리고 있다.드문드문 행나무와 푸조나무 등 갈잎나무도 양념처럼 섞여 있고, 큰 나무 아래는 동백, 광나무, 사스레피나무, 식나무 등 작은 나무들이용케 햇빛을 얻어 살아가고 있다. 밑바닥에는 자금우와 산호수가 융단처럼 깔려있다. 특히 산호수가 대량으로 자라고 있다.큰 나무의 지름은 20~30cm 전후의 그리 굵지 않은 줄기지만 대부분 후추등이라는 난데 덩굴나무가 더부살이로 붙어 있다.그 외 마삭줄을 비롯 송악등이 타고 올라가나 콩짜개난을 비롯해 이끼 종류가 붙어 있어서 나무껍질을 그대로 들어내놓은 나무는거의 없다. 그만큼 공중 습도가 유지돼 나무가 자라기에 좋은 환경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소위 '곶자왈'이라 부르는 이곳은 바닥이 온통 자갈밭이라 농경지로 개간할 수 없어서 나무세상이 된 것이다.
제주 안덕계곡 상록수림천연기념물 제 377호
한라산 남쪽 해안 구릉지는 우리나라 난대 상록수림의 보고다. 육지에서는 볼 수 없는 수많은 기화요초(琪花瑤草)가 자라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제주는 구멍이 숭숭 뚫린 현무암 일색인지라비 올때만 물이 흐르고 날이 개면 물이 빠져 대부분 건천이 된다. 하지만 안덕계곡만은 항상 물이 흐르는 개천을 가지고 있다.300여 종류의 식물이 자라는데 구실잣밤나무, 참식나무, 후박나무, 붉가시나무, 남오미자, 보리장나무, 후피향나무 등 육지 사람에게는 모두 아리송한 이름의 나무들이다. 특히 각종 고사리류와 희귀식물인 담팔수, 상사화 등이 자생하고 있다. 그 외에도 푸조나무를 위시해 팽나무, 예덕나무 등의 갈잎나무와 송악, 백량금, 자금우 등의 늘푸른 나무들이 자란다.
안덕계곡은 용암이 밀고 내려가면서 계곡이 형성된 것으로 양쪽은 모두 깎아지른 절벽이고 바닥은 편평한 바위가 널려있다.재미있는 것은 양쪽 절벽의 암석 종류가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동쪽은 지질이 단단하고 판상절리가 잘 발달한 조면암 계통이고,서쪽은 주상절리가 잘 발달한 장석반정(張石斑晶)이 많은 현무암이다. 절벽에는 여러 형상을 한 바위들이 얼굴을 내밀고 틈틈히간신히 몸을 붙인 나무들이 계곡쪽으로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다. 나무와 시냇물과 절벽이 어우러진 곳으로 아늑한 맛이 일품이다.
추사가 귀양왔던 대정읍은 여기서 서쪽을 약 십여리 남짓. 1840년에서 1849년까지 햇수로 만 9년 위리안치 당했다는 김추사.그래도 세상 어디에고 틈새는 존재하는 법, 아마도 제주 목사가 눈감아 준 듯, 구전으로는 이곳에 그가 자주 왔었던 모양이다.
제주 천지연 난대림천연기념룰 제379호
제주에는 애월읍 납읍리, 천제연 및 천지연 등 천연기념물로 지정 보호하는 난대림(暖帶林) 3곳이 있다.천지연은 천제연 및 정방폭포와 함께 제주를 대표하는 3대 폭포 중 하나다. 침강융기와 용암에 의해 단충을 이룬 U자형 계곡으로높이 22m, 물이 많을 때는 너비 12m에 이르며 웅덩이 깊이도 물경 20m에 달한다고. 당연히 공중습도가 높다보니 각종 늘푸른 나무와약 400여 종의 각종 양지식물등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구실잣밤나무를 비롯, 담팔수, 동백, 까마귀쪽나무, 후박나무, 참식나무,새덕이 등이 숲의 상층부를 이루고, 그 밑으론 사스레피나무, 후추등, 보리장나무, 송악, 마삭줄 등 작은 관목과 덩굴나무가 있으며,제비꼬리고사리 등 많은 양치식물고 솔잎란 등의 초본이 바닥에 깔려 있다. 가시딸기, 솔잎란 등 제주도에만 분포하는 희귀식물도여럿 있다. 한 마디로 천지연 일대는 식물학적으로 볼 때 매우 중요하고 소중한 자원인 것이다.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 중 '천연사후(天淵射帿)'
1702년경에 제주목의 화공 김남길이 그린 폭포의 모습이다.폭포의 중간쯤에 줄을 매어 좌우로 움직이는 인형을 매달아 과녁으로 사용했다고 한다.이 그림에는 오늘날 울창한 숲과는 달리 나무가 띄엄띄엄 그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지금은 거의 보기 어려운 소나무가 주를 이룬다.폭포 중간에 좌우로 사람이 올라가 줄을 매달고 있으니, 아마도 지금의 식물 분포 상태와는 많이 달랐을 터이다.천지연 물속엔 천연기념물 제27호 무태장어가 서식하고 있으며, 서쪽 호안은 담팔수나무가 자랄 수 있는 최북단 한계지라 해서 천연기념물 163호로 지정되어 있다.
인용서적 : 박상진 著 『우리 문화재 나무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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