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궁중 및 관아의 풍속
서총대친림연회도(瑞蔥臺親臨宴會圖)
1564(행사), 지본채색, 146.2×134.4cm, 액자, 경상북도 풍기 소수서원
서총대(瑞蔥臺)는 연산군 때 창덕궁 후원에 돌로 쌓아 만든 석대를 말한다. 이 자리는 그보다 앞서 성종 때 한 줄기에 아홉 개의 가지가 달린 특이한 백합과의 파(蔥)가 돋아나 '서총(瑞蔥)'이라 불리던 곳이다. 이그림은 후대인 1560(명종 15)년 왕이 서총대에서
신하들에게 베푼 연회의 장면을 그린 것이다. 이 때 행사의 전말은 그림 아래에 적혀 있는 홍섬(洪暹, 1504-1585)의 서문을 통해
자세히 알 수 있다. 이에 의하면 당시 조야(朝野)가 조용하고 평화로운 때였으므로 9월 19일 왕이 서총대에 장막을 설치하게 하고
3정승을 포함한 문무관원을 거느리고 야회 연회를 베풀었다. 이 때 가을이라 국화가 가득 피고 단풍이 아름다웠으며, 날씨도
화창하였다. 군신간에 술과 음악을 즐기며, 어필(御筆)로 시제를 내어 시를 지어 올리게 하였다. 또 무신(武臣)들은 짝을 지어
활을 쏘게 하는 등 무예를 겨루게 하였다. 자리가 무르익자 임금은 3품(三品) 이상은 월대(月臺) 위에 올라오게 하여 헌수(獻壽)
하게 하고, 친히 어찬(魚饌)을 내려주기도 하였다. 이날 임금도 마음이 흡족하여 내탕고(內帑庫)에서 호랑이와 표범 가죽과 어촉
(御燭), 그리고 태복시(太僕寺)에서 말을 가지고 오게 하여 시를 잘 지은 문신들과 활을 잘 쏜 무신들에게 상으로 지급하였다.
이날 밤늦게 행사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는 길거리에 수많은 구경꾼이 모여 근래 드문 이이라고 말하였다. 이튿날 신하들은 입
궐하여 명종에게 감사를 드리고, 서로 상의하되 이 성대한 행사를 그림으로 그려 길이 후세에 전하고자 하였다.
그림은 예조(禮曹)에서 맡았는데 행사 참가자 73명게게 모두 나누어 줄 분량 때문인지 4년 후인 1564년에야 완성되었다.
홍섬의 서문은 그림이 완성된 후에 쓴 것이다.
<서총대친림연회도>는 맨 위에 제목, 그 아래에 행사 장면, 그리고 다음에 서문과 참석자 좌목(座目)의 순으로 당시 계회도의 일반적인 형식을
따르고 있다. 그런데 현재 전하는 이때의 서총대 행사 기록화는 국립박물관에 소장된 <서총대친림사연도(瑞蔥臺親臨賜宴圖)>가 원본이고, 소수
서원에 보관된 이 작품과, 다음에 볼 고려대학교 소장본은 후대의 모사본이다. 국립박물관 소장 원본은 훨씬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으나, 현재
화면 상태가 매우 불량하여 잘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이다. 그래서 이 작품과 고려대학교 소장 화첩본을 통해 오히려 행사 장면을 잘 볼 수 있다.
행사장면은 서총대 위에 큰 장막을 치고 연회를 벌이는데, 월대(月臺) 위에 마련된 임금의 자리는 장막으로 인하여 일부만 보인다. 그리고 그 좌
우에는 국화가 활짝 핀 화분을 늘어 놓았는데, 모사본인 이 작품과 고려대본에는 화분 표현이 없이 땅바닥에 심은 것처럼 간략화 되어 있다. 월대
아래에는 문무관원들이 중앙의 화백자가 놓인 탁자 좌우로 늘어앉았고, 아래쪽에는 악대가 음악을 연주하고 있다. 왼쪽 아래에는 음식을 준비하는 둥근 천막이 보이고, 장막 기둥 좌우로는 상으로 나누어줄 호랑이 가죽과 말이 보인다. 또 화면 위쪽 좌우에는 행사도의 딱딱한 구성을 완화시키는 역할을 하는 괴석(塊石)과 소나무가 배치되어 있다. 이 작품은 아마도 참가자 중 후손의 한 사람에 의해 후대에 모사되었을 것이나 정확한
시기는 단정하기 어렵다. 다음 좌목에 기록된 참석자를 살펴보면 영의정 상진(尙震, 1493-1564), 좌의정 이준경(李浚慶, 1499-1572), 우의정 심통원(沈通源, 1499-?), 영돈녕부사 심강(沈鋼, 1514-1567), 서문을 쓴 좌찬성 홍섬 이하 총 73명의 관직, 성명, 자, 본관 등이 기록되어 있다.
그림의 하단에 노란에 노란 저고리에 붉은 치마를 입은 여기(女妓) 17명이 한 줄로 앉아 있고, 그 뒤로 악인(樂人) 14명이 대금 · 피리
혹은 퉁소 같은 종적 · 비파 등을 연주하는 모습이 다양하게 표현되어 있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 악기의 모양이 특이하다.
세부도
서총대시연도(瑞蔥臺侍宴圖)
1564년(행사), 지본채색, 47×31cm, (帖), 고려대학교박물관
화첩으로 된 이 작품은 앞서 살펴본 소수서원 소장 <서총대친림연회도>처럼 국립박물관 소장의 원본을 후대에 모사한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의 경우 축(軸) 형식이 나니라 화첩 형식으로 만들었다. 행사 당시에도 화첩본이 별도로 만들어졌을 가능성도 있으나,
종축 원본을 후대에 화첩이나 횡권으로 모사하여 만드는 것은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남지기로회도(南池耆老會圖)>의 경우에도 보인다.
서총대시연도(瑞蔥臺侍宴圖) 서문
서총대시연도(瑞蔥臺侍宴圖) 서문
서총대시연도(瑞蔥臺侍宴圖) 그림
분홍색 관복을 입은 2명이 춤추고 있다. 그림 아래쪽에는 노란 저고리에 붉은 치마를 입은 여기(女妓) 12명이 한 줄로 앉았고,
그 뒤로 악인 10명이 대금 · 피리 혹은 퉁소 같은 종적, 거문고와 비슷한 타현악기, 비파 등을 연주한다.
세부도
서총대시연도(瑞蔥臺侍宴圖) 좌목(座目)
서총대시연도(瑞蔥臺侍宴圖) 좌목(座目)
서총대시연도(瑞蔥臺侍宴圖) 좌목(座目)
서총대시연도(瑞蔥臺侍宴圖) 좌목(座目)
서총대시연도(瑞蔥臺侍宴圖) 좌목(座目)
알성시은영연도(謁聖試恩榮宴圖)
1580, 견본채색, 118×105cm, 일본 경도(京都), 양명문고(陽明文庫)
은영연(恩榮宴)은 조선시대에 과거 방방(放榜 : 급제자에게 합격증을 나눠줌) 이후 국가에서 급제자에게 베풀어준 축하연이다.
이 은영연도는 1580년 선조(宣祖)가 설행한 알성시(謁聖試 : 임금이 文廟에 참례한 후 실시하는 비정기 시험)의 급제자를 위해 의정부에서
베풀어준 것이다. 이 작품은 상단의 제목 부분은 없어지고, 중단 그림, 하단 좌목이 남아 있다. 건물 내부에는 연회의 주재자이자 시험관이었던
영의정 박순(朴淳, 1523-1589)과 우의정 강사상(姜士尙, 1519-1581) 그리고 호조판서와 병조판서 등이 자리잡았고, 건물 앞 장막 아래 설치된
건물 앞 장막 아래 설치된 덧마루에는 문무과 급제자들이 갑 · 을 · 병과로 나뉘어 의자에 앉아 있다. 전체를 부감법(俯瞰法)과 평행사선투시법을
이용하여 조선 전기 그림 치고는 상당히 현실감이 나게 그려졌다. 하단 좌목에는 6명의 시관(試官)과 56명의 급제자의 신상명세가 쓰여 있다.
세부도 : 음악 · 춤 · 연희
건물 대청 내부에서 여기(女妓) 2명이 춤추고, 계단 위에 다른 여기(女妓)들이 한 줄로 앉아 대기하고 있고, 뒷줄에 악인들이 줄지어 있다.
문 · 무과 급제자 좌석 사이의 복도와 같은 공간에서 광대들이 접시돌리기, 농환(弄丸), 땅재주 등 곡예를 펼친다.
『악학궤범』(1493)에 의하면 은영연의 악인은 악사 1명, 여기 10명, 악공 10명으로 구성되었다.
북새선은도(北塞宣恩圖) 길주과시(吉州科試) (좌측면)
한시각(韓時覺, 1621-?), 1644년, 57.9×674.2cm, 국립중앙박물관(덕4065)
한시각은 자 자유(子裕), 호 설탄(雪灘)으로 본관은 청주이다. 부친 한선국(韓善國)도 화원이며, 장인 이명욱(李明郁)도 화원이었다.
여러 차례 궁중행사 기록화 제작에 참여했으며, 1655(효종6)년 통신사 수행원으로 도일(渡日)하기도 하였다. 이때 일본에서 그린 것으로
생각되는 감필체(減筆體)의 <포대도(布袋圖)> 따위의 도석인물화가 전한다. 그런데 이 작품은 도일 11년 전인 1644년에 그려진 국가행사의
기록화로서 감상용 도석인물화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 작품이 묘사하고 있는 행사는 함경도의 별설문무관(別設文武科) 길주목
도회시(吉州牧都會詩) 장면이다. 거의 4미터에 이르는 긴 두루마리의 처음에는 '북새선은(北塞善恩)' 이라는 전서(篆書) 두제(頭題)를 시작
으로 길주에서 치루어진 시험장면과 함흥에서의 합격자 발표장면 그림이 있으며, 마지막에는 도회시에 관한 자세한 기록이 있다. 여기에는
시관(試官), 참고관(參考官), 차비관(差備官), 도청(都廳) 등 행사 관계자들의 명단과 문무과의 합격자 명단이 들어 있다. 이 작품은 기록화
로서도 중요하지만 17세기 중엽의 실경산수화로서의 의의도 지닌다. 즉 18세기에 겸재에 의해 본격적인 진경산수화가 발달하기 이전에 그려
진 실경산수화의 예로서 중요하다. 비록 부감법으로 건물과 행사 장면 위주로 그림이 그려져 있지만 함흥 만세교(萬歲橋)나
원경의 눈 덮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