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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차 문화 소고 (1)

 

내가 맨 처음 차와 매화를 접한 건 어릴 적 사하촌에 살 때였다.

 

 

 

스님네들이 우화루에서 무술 수련을 하고 있었기에 구경 삼아 늘상 큰 절을 들락거렸던 것.

꼬마 녀석이 기특하고 귀여우셨던지 재미난 얘기도 들려 주시곤 했는데,

그 와중에 가끔씩 당신들이 마시던 별 맛도 없고 쓰디 쓴 차를 한 잔씩 얻어 마셨던 기억이다.

 

봄이면 동네 여인네들을 동원하여 약사암 너덜겅 오름길의 차를 따서 덖고, 

시루에 김을 올려 찧고 말리는 것도 봐 왔으니 제법 이른 시기에 차 맛과 차 문화를 접(?)한 셈.

 

내 어머니도 가정 상비약 차원에서 차를 따와 떡차를 만들어 처마 밑에 걸어 두고,

여차하면 가마솥 뚜껑을 뒤집어 차를 굽고 우려내어 마시게 했었으니까.

 

 

 결코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간 살아 오면서 소위 다인(茶人)을 자처하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 보았다.

 

척추를 작대기 처럼 세우고 한 잔의 차에 삼라만상이 담겼노라 눈알에 힘을 주는 자에서 부터,

다경(茶經) 몇 줄 읽고 나서 당 나라 육우를 다신(茶神)으로 추앙한다며 입에 거품을 무는 자.

 중원과 섬나라를 겨우 몇 번 들락거리고서  자신의 다력(茶歷)이 도(道)의 지경이라 떠드는 자.

자신의 평생은 물론, 몇 대를 마시고도 남을 양의 이런 저런 차의 산 더미 속에 허우적 대는 자.

가격 높음을 애써 강조하며 유치하기 짝이 없는 다기와 다구등을 늘어 놓고 팽주를 자처하는 자.

 

짐짓, 화려한 언변과 몸짓을 동원 격조 높은 다인을 자처하고 있지만, 

눈 너머 실제론, 상대의 주머니 사정을 가늠 하느라 몹시 바쁘고 피곤한 시선에 이르기 까지.

 

작금 우리 곁에 펼쳐지는 이런저런 찻자리를 보면 절로 한숨 부터 나오고 만다.

중원은 물론, 섬나라 센노 리큐까지 끌어들여 분탕질을 해 대는 꼴이란 가히 역겹기 조차 한 실정.

 

문제는, 차 문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는 보통의 초학(初學)과 다인(茶人)들이

 이처럼 숨줄을 죄는 형태의 가식적인 작태에 점차 동화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모름지기 조금만 신경 쓰고 바라 보면 주위에 널린 게 야생차밭이다.

직접 내 손으로 채다하여 덖어 낸 한 잔의 차야말로 최고의 맛이자 최상의 격을 지닌 명차일 터.

곁에 있으면 마시고 차가 없으면 다소 헛헛한 것이 이내 차 생활이자 차 문화론.

한 마디로 그저 끽다(喫茶)의 차원에 불과 하다는 말씀.

 

그간 손에 잡히는 대로 이런저런 다서를 읽고 차를 마셔 왔지만,

차에 대한 인문학적인 접근 자체에는 게을렀던 것도 사실. 읽어 봤자 돌아서면 잊어 버리는

이내 한계를 극복하자는 차원에서 이번엔 아예 자판을 두드려 가며

머리와 가슴 양쪽 모두에 입력 시켜보기로 작정.

 

 

그 첫 대상으로 선택한 책은 한양대 정민 교수 著 『새로 쓰는 조선의 차 문화』.

 그 동안 시나브로 읽어 오는 과정에서 이내 갈증이 다소나마 해갈 되었기에 선택 한 것이다.

 

한 가지 걸리는 점은, 차 문화 공부를 한답시고

 저자의 노고가 깃든 저작물에 함부로 난도질을 해댄 건 아닌지 저으기 걱정스럽다.

 

 

오로지 눈 한 번 질끈 감아주시는 쎈쑤를 기대하면서...

 

 

 

 

 

'애일당' 소장 다관
한 잔의 차에 이내 마음이 담겼으니...


 

 

 

 

 

 

一椀茶出一片心 한 잔의 차에 한 조각 마음이 나오니   

一片心在一椀茶    한 조각 마음이 차 한잔에 담겼네.
當用一椀茶一嘗
   응당 이 차 한 잔 마셔 보게나 
一嘗應生無量樂   
한 번 맛보면 근심 걱정 모두 사라진다네.

 

-함허 득통 -

 

 

 

 

 

 

 

 

 

 이재( 황윤석(黃胤錫)생가.

(전라북도 고창군 성내면 조동리)

 

흔히들 우리 차에 관한 최초의 저술을 초의선사(1786~1866)의 『동다송(東茶頌)』으로 알고 있는 이 들이 많다.

그러나 이덕리(李德履, 1728~?)의 『동다기(東茶記)』는 그보다 50여 년을 앞선 1785년을 전후로 씌여졌으며

2018년 현재까지 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1755년 이운해(李運海. 1710~?)가 지은

『부풍향차보(扶風香茶譜)』라는 책이야 말로  명실공히 우리나라 최초의 다서(多書)라고 한다.

『부풍향차보』는 실학자요 박물학자로 재야인 들에게 잘 알려진 황윤석(黃胤錫, 1729~1791)의 

『이재난고(齋亂藁)』 1757년 6월 26일 자 일기 끝 부분에 실려 있으며 분량은 두 쪽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디 별도의 책자가 있었을 터이지만 불행하게도 원본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는데.

 

 

 

 

 

『이재난고』표지. 제2책의 표제에 '부풍차보(扶風茶譜)'라고 쓴 목차가 보인다.

『이재난고』에 수록된 『부풍향차보』는 서문과 「차본(茶本)」· 「차명茶名)」· 「제법(製法)」· 「차구(茶具)」네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끝에는 이 일기를 쓴 지 19년 뒤에 황윤석이 적은 저자 이운해에 관한 추기(追記)가 있다.
아래는 저자의 인적 사항에 관한 황윤석의 추기 내용이다.
필선(弼善) 이운해는 부안현감으로 있었다. ----  내가 또한 쓸모가 있가고 여겨 기록해둔 것이 벌써 20년인데,여태도 보자기에 싸여 있다. ---
이운해의 자는 필선이었으며 한천(寒泉)이란 호를 가진 학자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위 추기는 1776년에 썼다.『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이운해는 1710년생이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용(子用)으로, 아버지는 이현상(李鉉相)이다.1740년(영조16)에 증광시 병과로 급제했다. 뒤에 이름을 심해(心海)로 개명했다.그의 벼슬이력을 보면, 1747년 경상도사, 1752년 장령(掌令)과 지평(持平)을 거쳤다. 1753년 정언(正言)에 올랐고,1754년 10월 3일 부안현감으로 부임한다. 2년 뒤인 1756년 10월 9일 다시 장령으로 서울로 올라갔다.그 외 박치문의 상소 등의 기록으로 볼 때, 당시 상당한 명망이 있었던 인물임을 짐작할 수 있다.하지만 그의 문집은 물론 그가 지은 『부풍향차보』와 『상확보』의 원본 모두 전하지 않는다.

 

 

 

 

『부풍향차보』원문

 

먼저 서문을 보자.부풍(扶風, 부안의 옛 이름)은 무장(茂長)과 3사지(舍地) 떨어져 있다. 들으니 무장의 선운사(禪雲寺)에는 이름난 차가 있다는데, 관민(官民)이 채취하여 마실 줄을 몰라 보통 풀처럼 천하게 여겨 부목 (부목)으로나 쓰니 몹시 애석 하였다. 그래서 관아의 하인을 보내 이를 채취해 오게 했다.때마침 새말 종숙께서도 오셔서 함께 참여하였다. 바야흐로 새 차를 만드는데, 제각기 주된 효능이 있어,7종의 상차(商茶)를 만들었다. 또  지명을 인하여  부풍보(扶豊譜)라 하였다. 10월부터 11월과 12월에 잇달아 채취하는데 일찍 채취한 것이 좋다.

 

찻잎 채취 시기를 이른 봄이 아닌 겨울로 잡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다음은 차에 대해 기술한 「차본(茶本)」이다.

 

고차(苦茶), 즉 쓴 차는 일명 작설(雀舌)이라고 한다. 조금 찬 성질이 있지만 독성을 없다.

나무가 작아 치자(梔子)와 비슷하다. 겨울에 잎이 난다. 일찍 따는 것을 '차(茶)'라 하고, 늦게 따는 것은 '명(茗)'이 된다.

차(茶)와 가(檟), 설(蔎)과 명(茗)과 천(荈) 등은 채취 시기의 빠르고 늦음을 가지고 이름 붇인다.

납차(臘茶), 즉 섣달차는 맥과차(麥顆茶)라 한다. 여린 싹을  따서 짓찧어 떡을 만들고 불에 굽는다.

잎이 쇤 것은 천(荈)이라 한다. 뜨겁게 마시는 것이 좋다. 차가우면 가래가 끓는다.

오래 먹으면 기름기를 없애 사람을 마르게 한다.

 

 

 

 

 

 

선암사 칠전선원 다조

 

 

다음은 「차명(茶名)」이다.

 

풍 맞았을 때〔風〕: 감국(甘菊), 창이자(蒼耳子) / 추울 때〔寒〕: 계피(桂皮), 회향(茴香)

더울 때〔暑〕: 백단향(白檀香), 오매(烏梅) / 열날 때〔熱〕: 황련(黃連), 용뇌(龍腦)

감기 들었을 때 : 향유, 곽향. 기침할 때 : 상백피, 귤피. / 체했을 때 : 자단향, 산사육.

 

 

앞서 서문에서 언급한 칠종상차(七種常茶)는 작설차에 일곱까지 약초를 가미하여

각종 증상에 맞춰 마시도록 한 상비차(常備茶)라는  뜻이다. 다음은 「제법(製法)」에 구체적인 설명이다.

 

차 6냥과 위 재료 각 1돈에 물 2잔을 따라 반쯤 달인다.

차와 섞어 불에 쬐어 말린 후 포대에 넣고 건조한 곳에 둔다. 깨끗한 물 2종(鍾)을 차관 안에서 먼저 끓인다.

물이 몇 차례 끓은 뒤 찻그릇에 따른다. 차 1돈을 넣고, 반드시 진하게 우려내어 아주 뜨겁게 마신다.

 

 

 

 

 

 

 

 

 

부풍향차보」에 실린 6종류 차구의 그림

 

「차구(茶具)」항목을 따로 두어 각종 차구의 이름과 생김새와 용량을 따로 표시해 두었다.

 

차로(茶爐)는 차관을 안칠 수 있어야 한다. / 차관(茶罐)은 2부(缶)가 들어간다.

차부(茶缶)는 2종이 들어간다. / 찻종(茶鍾)은 2잔(盞)이 들어간다.

찻잔(茶盞)은 1홉(合)이 들어간다. / 찻반(茶盤)은 차부와 찻종, 찻잔을 놓을 수 있다.

 

 

 

 

 

 

 

 월송세적시예구가(越松世蹟詩禮舊家)

  이재 황윤석의 후손이자 악필(惡筆)의 대가 석전(石田) 황욱(黃旭, 1898~1992)의 서체로

월송(越松)은 이재 황윤석의 호인 ​월송외사(越松外史)를 뜻한다.

 

 

 

부풍향차보』에는 위 내용 보다 훨씬 풍부한 내용이 기재 되어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바,보다 더 완성된 형태의 저술이었을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다. 현재 남아 있는 내용만으로도 저자인 이운해의 차에 대한해박한 이해 수준을 파악할 수 있겠다. 차의 특징과 성질, 증세에 따른 향차 처방, 향차 제조법, 향차 음다법 등을 미루어서 말이다.
그렇다면 순수 차와 향을 가미한 차를 차라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을 터.이에 대해 정다산이 저술한 『아언각비(雅言覺非)』의 내용을 살펴 보자.
우리나라 사람들은 차(茶)란 글자를 환(丸)이나 고약 같은 것을 끓여 마시는 종류로 생각하여, 약물을 한 가지만 넣고 끓이는 것은 모두 차라고 말한다. 생강차 · 귤피차 · 모과차 · 상지차(桑枝茶) · 송절차(松節茶) · 오과차(五果茶) 같은 말이 익숙해서 늘상 이렇게 말하는데 이는 잘못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대용 차는 차라고 말해서는 안된다고 본 것이다.이런 다산의 주장을 뒷받침 하듯 부풍향차보』의 칠종상차는 찻덩이에 약물을 섞어 끓인 향차다.그저 이름만 차인 일반 대용 차와는 확연히 구분된다.

 

 

 

 

 

 

 

「기다」가 수록된 「강심」의 표지

 

『동다기(東茶記)』는 이덕리가 지은 차에 관한 문헌이다.

『동다기』는 초의 선사의 『동다송』의 주석에 한 대목이 인용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다만 실물이 전하지 않아, 그간 엉뚱하게 다산 정약용의 저작으로 잘못 알려져 왔다는 정민 교수의 고증인 즉,

 

강진 백운동 이효천 선생 댁에서 『강심(江心)』이란 표제의 필사본에 수록된 「기다(記茶)」가

바로 초의가 인용한 『동다기』의 원본임을 확인 했다는 설명이다.

 

 

 

 

 

 

 

『기다』의 첫 면

 

이덕리의 저술을 그대로 베낀 것으로 보이는 『강심』에서는 「기다」라고 했는데,

왜 초의는 책 이름을 『동다기』라고 했을까? 법진본의 『다기』또한 제명이 다르고, 내용에도 상당한 누락이 있다는 설명.

이덕리의 이 저술은 여러 사람들에 의해 베껴져서 유통되었고, 베껴 쓰는 과정에서

제목도 필사자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본다고.

 

 

 

 

 

 

『동다송』에 『동다기』가 인용된 면.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소장)

 

 

이 책의 공식 제명은 「기다」또는 『동다기』둘 중의 하나로 해야 옳다는 말씀.

『동다송』에 인둉된 『동다기』란 명칭이 오래 사용되어 왔고 문헌 근거도 있으며,

 

『동다송』이란 명칭과도 세트를 이루고, '동(東)'이란 접두어에서 차 일반론이 아닌 우리 차에 대한 기록이란 의미를

 강조할 수 있으므로, 차후 공식 명칭은 「기다」보다는  『동다기』로 하는 것이 나을 성 싶어

이후 표기는『동다기』 통일한다는 정민 교수의 부언.

 

 

 

 

 

 

 

 

 

「기다」마지막 면에 지은이를 밝힌 기록.

끝에 '백매주인(白梅主人)'이라 한 이시헌의 인장이 찍혀 있다.

 

 

많은 학자들이 이 책의 저자를 다산이라고 했다. 초의는 『동다기』의 저자를 그저 '고인(古人)'으로 적었다.

『동다기』가 다산 정약용의  저작이었다면 초의가 살아 있는 스승을 두고 이렇게 표현했을리가 없다는 말씀.

고인이라 적은 것은 자신과 시간적 거리가 상당하다는 뜻일게고,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은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서였다.

법진본 『다기』에서도 저자를 '전의리'라고만 했지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고. 왜 그랬을까?

반면 『강심에 수록된』「기다」에는  끝 부분에 필사자 이시헌(李時憲, 1806~1860)이 남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강심'의  의미는 분명치 않다. 이 한 책에 적힌 사(辭)와 문 및 시는

 바로 이덕리가 옥주(沃州)에서 귀양 살 때 지은 것이다.

 

이 책의 저자가 이덕리이고, '옥주적중(沃州謫中)'에서 이 책을 저술 했다고 했다. 옥주는 진도(珍島)의 별호다.

이덕리가 죄를 지어 진도에 유배 와 있으면서 지은 것이다. 당시 죄인 신분이었던 그는 이 때문에 자신의 저서에

 이름을 밝히지 않고 본관만 밝혔다. 이것이 필사되어 유통되면서 법진본의 '전의리 저'로 세상에 알려졌다는 것.

이시헌은 이 책의 저자가 이덕리임을 알고 있었기에 필사 후 위의 언급을 남겨두었다.

이덕리의 본간은 전의이고, 자는 수지(綏之)였다. 그는 무인 계통의 명망있는 집안의 후손이었다.

이덕리의 문장은 윤광심(尹光心, 1751~1817)이 당대 뛰어난 문인의 시문을 모아 엮은

 선집인『병세집(幷世集)』에도 실려 있다.

 

이 중 「제고이헌납중해시(祭告李獻納中海詩)」9수가 수록되었다. 1755년 이덕리 48세 때 쓴 글인데.

헌납 벼슬을 지낸 이중해(李重海)와 평소 절친한 사이였음이 확인된다. 그런데 이중해가 누군고 하니, 

바로 『부풍향차보』의 저자 이운해의 친동생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덕리는 이운해의 『부풍향차보』를 동생 이중해를 통해 진작에 보았을 것이고

 이를 계기로 차에 대한 일정한 안목을 갖제 되었을 터.

말하자면 최초의 다서라 할『부풍향차보』와『동다기』사이에 일말의 연결점이 시사되는 것이다. 

 

『병세집』은 당대 최고의 문장이었던 박지원과 이덕무 등의 글 가운데 문집에 수록되지 않은 작품이

실려 있을 만큼 현장성이 강한 엔솔로지다. 이 책의 시권과 문권 모두에 이덕리의 이름이 올라 있는 것을 보면,

 이덕리는 당대 문명이 꽤 높았던 문인이었음이 분명하다. 막상 전의이씨 대동보에는 이덕리의 이름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이는 그가 진도에 장기간 유배되었다가 세상을 뜬 일과 관련이 있다. 또 그가 일관되게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고,

족보에 이름마저 지워진 것을 보면, 그의 죄는 역모죄나 이에 준하는 것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강심』에 수록된 「실솔부(蟋蟀賻)」란 작품에는 이덕리 자신의 신상과 관련된 한 가지 단서가 더 있다.

 

나는 병신년(1776년, 영조 52) 4월 은혜를 입어 옥주로 유배 왔다.

성 밖 통정리(桶井里)에 있는 윤가(尹家에서 살았다. (중략) 3년 만에 통정리 서쪽 이가(李家)로 옮겼다.

 

여러 정황 상 사도세자 복권과 관련해서 일어난 상소 사건에 연루되어 진도로 유배온 듯하다.

진도에 유배 온 지 10년 정도 지난 1785년을 전후해서 『동다기』를 저술하고,

66세 때인 1793년에는 국방에 관한 중요한 제안을 담은 『상두지』라는 책을 잇달아 발표했다.

하지만 역모죄에 연루된 신분이었기에 익명으로 이들 저술을 세상에 공개했다.

그간 저자 문제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았던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동다기』는 서설 5단락과 본문 15 항목, '다조(茶條)' 7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 분량이라야 모두 14쪽에 불과하다. 더욱이 이시헌이 이덕리의 원고 『강심』을 필사할 당시 운본은 서문도 없고

체재도 갖추어지지 않은 난고(亂藁)상태였던 듯하다. 필사자 이시헌은 다산이 아꼈던 강진 시절의 막내 제자였다.

본문 15항목의 끝 부분에는 이덕리의 다음과 같은 메모가 적혀 있다.

 

앞의 십여 조목은 모두 차에 관한 일을 떠오르는 대로 적은 것이다.

하지만 국가에 보탬이 되고 민생을 넉넉하게 하는 큰 이로움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이제 바야흐로 본론으로 들어가려 한다.

 

전체 내용 중 탈락, 누락 등으로 법진본은 백운동본의 절반가량만 남아 있는 셈이라고 한다.

특별히 여기서 앞부분의 글을 '다설'이라 한 것이 주목되는데, 혹 다른 필사에서는 앞쪽 글을

'다설'이라 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덕리는 무슨 의도로 『동다기』를 저술했을까?

다섯 단락의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첫 단락은 도입 서설로,

 "황량한 들판의 구석진 땅에 절로 피고 지는 평범한 초목에서 얻어 이것으로 국가를 돕고

민생을 넉넉하게 할 수만 있다면, 어찌 그 일이 재물의 이익과 관련되어 있다 하여 말하지 않은 수가 있겠는가?"

라고 하여,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차가 국부 창출의 자원이 될 수 있음을 말했다.

 

둘째 단락에서는 중국 차의 역사를 간략히 서술하고, 역대 중국 왕조가 차를 미끼로 북방 민족을 제어한 일을 적었다.

셋째 단락은 차에 무지한 조선의 실정과, 발상 전환을 통한 차 무역 제안을 담았다.

 

전체적 내용의 핵심은 차의 국가 전매와 국제 무역을 통한 국부 창출을 과감하게 주장하고 있음을 본다.

기호품인 차가 국제 교역 시장에서 갖는 상품 가치를 꿰뚫어 보고 국가적 차원에서 차를 관리하고 전매해서

그 이익으로 국방을 강화시킬 것을 주장하면서 그 실행 방법과 단계까지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 방법 또한 대단히 현실적이고 실현 가능한 방식이었던 것이다.

 

 

 

 

 


 

 

  선운사 만세루에서 바라본 대웅보전.

이운해는 『부풍향차보』에서, "무장의 선운사에는 이름난 차가 있는데, 관민이 채취하여 마실 줄을 몰라 보통 풀처럼 천하게 여겨 부목으로나 쓰니 몹시 애석하다."고 적었다.
이덕리는 『동다기』에서"우리나라는 차가 울타리 가나 섬돌 옆에서 나는데도 마치 아무짝에 쓸데없는 토탄처럼 본다."고 하고,또 "우리나라 풍습이 비록 작설을 사용하여 약에 넣기는 해도, 대부분 차와 작설이 본래 같은 물건인 줄은 모른다.때문에 예전부터 차를 채취하거나 차를 마시는 자가 없었다."고 증언했다.그는 또 "우리나라 사람에게 차는 또한 그다지 긴요한 물건이 아니어서, 있고 없고를 따질 것이 못 됨이 분명하다."고 까지 말했다.
이를 이어 초의는 1837년에 지은 『동다송』에서 지리산 화개동 칠불선원 승려들이 다 쇤 잎을 따서 볕에 말린 차를 나물국 삶듯 솥에서 끓여 내오는 무지함을 개탄한다.
여러 정황상 18세기에서 19세기 초반에 이르는 기간에 조선의 차 문화는 명맥이 거의 끊어진 상태였다는  뜻이다.이덕리는 『동다기』의 본문 제11조에서 당시 조선인의 차에 대한 무지를 이렇게 적었다.
동복(同福) 은 작은 고을이다. 지난번에 들으니 한 수령이 여덟 말의 작설을 따서 이것으로 고약을 달이게 했다고 한다.대저 여덟 말의 작설을 차가 되기를 기다려 땄다면 차 수천 근을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또 여덟 말을 따는 수고로움이라면 족히 수천 근을 쪄서 말리는 일을 하기에 충분하다. 그 많고 적음과 어렵고 쉬움의 차이가 아득하다. 그런데도 이를 활용하여 나라에 이롭게 하지 않으니 어찌 애석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정작 이덕리 자신은 차에 대해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본문 제7조에 관련 언급이 있다.
계해년(1743, 영조 19) 봄에 내가 상고당(尙古堂)에 들렀다가, 요양(遼陽)의 사인(士人) 임(任) 아무개가 부쳐 온 차를 마셨다.잎이 작고 창(愴)이 없었으니, 생각컨대 손초(孫樵)가 말한 우렛소리를 들으면 딴 것인가 싶었다.당시는 한창 봄날이어서 뜨락에 꽃이 아직 시들지 않았었다. 주인은 자리를 펴고 소나무 아래서 손님을 접대하였다.곁에 차 화로를 놓아두었다. 화로와 차관은 모두 해묵은 골동품 그릇이었다. 각자 한 잔씩을 다 마셨다.

 

 

 

 

 

헌재 심사정의 「와룡암소집도」와룡암은 상고당의 다른 이름이다.

(간송미술관 소장)

 

이덕리는 「동다기」여러 곳에서 1760년 전라도 해안에 표류했던 중국 선박에서 나온 차 이야기를 적고 있다.

정작 자신이 진도로 귀양 온 것은 1776년이었다. 이덕리가 차를 처음 마셨다는 상고당은 조선 후기의 유명한

골동품 수장가였던 김광수(金光遂, 1699~1770)의 당호다. 그는 차에도 조예가 깊어서, 초정 박제가(朴齊家)는

"차 끓임은 오직 다만 김성중(金城仲)을 허락하니, 송풍성(松風聲)과 회우성(檜雨聲)을 알아듣기 때문일세."

라고 노래한 바 있다. 그의 집 와룡암(臥龍庵)에서 열린 찻자리를 겸한 아집(雅集)을 그린 위 그림이 남아있다.

그림의 내용은 당시 서울의 경화세족 사이에 유행한 중국풍의 한 모방으로 차나 찻그릇 모두 중국제였다.

 

『동다기』10조에는 좋은 차의 산지와 채다(採茶) 등에 대하여 적고 있다.

또한 차의 별칭에 관한 항목도 여럿 있다.

 

본문 2조다.

차에는 일창일기(一愴日旗)의 호칭이 있다. 창(愴)은 가지를 말하고, 기(旗)는 잎을 가리킨다.

만약 첫 잎 외에 따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형주(荊州) 옥천사(玉泉寺)에서 나는 차는 크기가 손바닥만 해서

희귀한 물건이 되었다. 무릇 초목의 갓 나온 첫 잎은 보통의 한 잎보다는 크다.

점차 크게 된다 해도 어찌 첫 잎이 문득 손바닥만 하게 자랄 수야 있겠는가?

또 중국 배에서 파는 차를 보니, 줄기에 몇 치쯤 되는 긴 잎이 너댓 개씩이나 잇달아 매달린 것이 있었다.

대개 일창이라는 것은 갓  싹튼 첫 가지이고, 일기란 그 첫 가지에 달린 잎이다.

이후 가지 위에 또 가지가 돋으면 그제서는 쓰지 못한다.

 

일창일기에 대한 교조적 해석에 얽매여 차의 실상을 잃게 되는 폐단을 경계한 내용으로 음미할 가치가 있다.

다시 본문 제3조에서는 고구사(苦口師)와 만감후(晩甘候)란 차의 별칭에 대해 말한다.

 

차에는 고구사니 만감후니 하는 이름이 있다. 또 천하의 단것에 차만 한 것이 없는지라

이를 일러 감초(甘草), 즉 단풀이라고도 한다. 차가 쓴 것은 사람들이 저마다 능히 말한다. 차를 달다고 하는 것은

내 생각에 이를 즐기는 자의 주장이다.근래 채취하던 중에 여러 종류의 잎을 두루 맛보았다.

유독 찻잎만은 혀로 핥으면 마치 묽은 꿀물에 혀를 잠깐 적신 듯하였다.

그제야 옛사람들이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뜻이 억지가 아님을 믿게 되었다. 차는 겨울에도 푸르다. 10월 사이에는

수분이 많아져서 장차 이것으로 추위를 막는다. 그래서 잎 표면의 단맛이 더욱 강해진다.

내 생각에 이때 찻잎을 따서 달여 연고차로 만들면, 우전이든 우후든 상관없을 듯한데 어떨지 모르겠다. 달여 연고차로

만드는 것은 실로 우리나라 사람이 억탁으로 생각해서 무리하게 한 것인데, 맛이 써서 단지 약용으로나 쓸 수 있다. 

* 일본의 향차고(香茶膏)는 마땅히 따로 논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만든 것이 가장 형편없다.

 

 

 

 

 

 

 

이른 봄 노란 꽃을 피운 생강나무. 글 속의 황매가 바로 이 나무다.

 

 

차서(茶書)에 또 편갑(片甲)이란 것이 있는데 이른 봄에 딴 황차다.

차 파는 배가 오자 온 나라 사람들이 황차라고 일컬었다. 하지만 창처럼 뾰족한 가지가 이미 자라,

결코 이른 봄에 딴 것이 아니었다. 당시 표류해온 사람들이 과연 그 이름을 이같이 전했는지는 모르겠다.

흑산도에서 온 사람이 있었다. 그는 정유년(1777, 정조 1) 겨울에 바다로 표류해온 사람이 아차(兒茶)나무를

가리켜 황차라고 했다고 말했다. 아차는 서울 지방에서 이른바 황매(黃梅)라고 하는 것이다.

황매는 꽃이 노란데, 진달래 보다 먼저 핀다. 잎은 삼각형으로 산(山)자 모양처럼 세 줄기의 잎이 달렸다.

모두 생강 맛이 난다. 산골 사람들이 산에 들어가면 쌈을 싸서 배불리 먹는다.

각 고을에서는 그 여린 가지를 따서 손님을 접대한다. 그 가지를 꺾어 취함은 두 줌쯤 되는 것을 주재료로 한다.

차에 섞어 달여 며칠 묵은 감기나 상한(傷寒)및 이름 모를 질병도 땀이 나면서 반드시 신통한 효과가 있다. 

어찌 또한 일종의 별다른 차이겠는가?

 

강원도에서는 생강나무를 동백나무로 부른다. 김유정의 소설 「동백꽃」이 바로 이 꽃이다.

황차는 약간 발효시킨 반발효차다. 일반적으로 편갑이라고 하면 이른봄에 갓 나온 노란 싹을 따서 만든 차를 말한다.

잎이 마치 갑옷의 비늘처럼 서로 포개져 있는 모양을 가리켜 하는 말이다.

『속다경(續茶經)』에 "편갑이란 것은 이른 봄 노란 싹을 잎이 비늘처럼 서로 감싸는 것이다.

선익(蟬翼)이란 것은 잎이 보드랍고 얇기가 매미 날개와 같다. 모두 산차(散茶) 중에 최상급의 것이다." 라고 언급이 있다.

하지만 이덕리는 중국 표류선에서 파는 차를 직접 보니 찻잎이 쇠어 이른 봄에 딴 것이 아니라고 했다.

이덕리는 『속다경』에 나오는 편갑의 개념과 중국 사람들이 말하는 황차의 개념이 서로 혼동되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 이 단락을 쓴 것이다. 또 다른 중국 표류민은 아차 나무를 보고 황차라고 말했다는 전문까지 함께 적어

황차의 개념을 두고 상당한 혼선이 빚어졌음을 보였다. 하지만 아차와 황차는 엄연히 다른 것이므로

 이 둘을 혼동할 것은 없다고 결론 지었다. 다만 황차에 대한 이덕리의 이해는 다소 부족한 점이 있는 듯하다.

 

 

 

 

 

 

송나라 유송년의 그림으로 전하는 「찬차도(瓚茶圖」(부분)

당시에 차를 마시는 일은 이렇듯 많은 도구와 비용이 드는 일이었다.

 

 

『동다기』의 떡차론과 차 효용론

 

『동다기』에서도 떡차 형태로 만들어진 향차를 언급하고 있다. 본문 제4조다.

 

古人云, 墨色須黑, 茶色須白. 色之白者, 皆謂餠茶之入香藥造成者. 月兎龍鳳團之屬是也. 宋之諸賢所賦, 皆餠茶,

而玉川七椀, 則乃葉茶. 葉茶之功效已大. 餠茶不過以味香爲勝. 且前丁後蔡以此招譏. 則不必求其法而造成者也.

 

옛사람은 "먹빛은 검어야 하고,차 빛깔은 희어야 한다."고 했다.

색이 흰 것은 모두 떡차에 향약을 넣고 만든 것을 말한다. 월토(月兎)니 용봉단(龍鳳團)이니 하는 따위가 이것이다.

송나라 때 제현이 노래한 것은 모두 떡차다. 하지만 옥천자(玉川子) 노동(盧仝)의 「칠완다가(七梡茶歌)」에 나오는 차는 엽차다.

엽차의 효능은 이미 대단했다. 떡차는 맛과 향이 어 나은 데 지나지 않았다. 그럴진데 굳이 그 방법을 찾아서 만들 필요가 없다.

 

차 빚깔이 모름지기 희어야 한다는 것은 송나라 때 채양이 『다록(茶錄)』에 한 말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차의 빛깔은 흰색을 귀하게 친다. 하지만 떡차는 흔히 그 표면이 기름진 것을 귀하게 친다.

그래서 청황(靑黃)과 자흑(紫黑)의 구별이 있다. 차를 잘 알아보는 사람은 관상쟁이가 사람의 낮빛을 살피는 것처럼

가만히 내면을 살펴, 육리(肉理), 즉 살결이 윤기 나는 것을 상품으로 친다.

이미 가루를 낸 뒤에 황백(黃白)색을 띤 것은 물에 넣으면 어둡고 무거운데, 청백(靑白)색을 띤 것은 물에 넣으면 선명하다.

그래서 건안(建安) 사람들이 다투어 시험하여 청백을 황백도다 낫게 여겼다. 그러니까 차의 빛깔이 희다는 것은

 향약을 넣고 만든 떡차를  차 맷돌에 갈아서 가루로 낸 뒤에 흰빛을 띠는 것을가르키는 말이다.

여기에도 청백과 황백의 구분이 있고, 청백을 더 높이 쳤다.

 이덕리는 월토와 용봉단 등 송대의 전설적 떡차들이 모두 향약을 넣고 만든 떡차였다고 했다.

 

정리하자면, 송나라  때 마신 차는 모두 떡차였다.

 이때의 떡차는 용뇌향과 같은 향약을 넣고 만든 향차였다.

하지만 오늘날은 굳이 송나라 때 떡차 만들던 방법을 따라 비싼 비용을 들여가며 향약을 넣은 떡차를 만들 필요가 없다.

 

 

 

 

금은으로 도금한 당나라 때의 화려한 차 맷돌

 

 

차 맛은 황정견(黃庭堅)의 「영차사(咏茶詞)」에서 다 말했다고 할 만 하다.

떡차는 향약(香藥)을 가지고 합성한 뒤에 맷돌로 가루를 내어 끓는 물에 넣는다. 특별한 맛이어서 엽차에 견줄 바가 아닌 성 싶다.

 하지만 옥천자가 “두 겨드랑이에서 스물스물 맑은 바람이 나온다”고 한 것이 또한 어찌 일찍이 향약을 써서 맛을 보탠 것이겠는가?

 당나라 사람들 또한 생강과 소금을 사용한 자가 있어 소동파가 비웃은 일이 있다. 예전 한 귀가집의 잔치 자리에 차에 꿀을 타서 내오자,

 온 좌중이 찬송했지만 마실 수가 없었다. 참으로 이른바 촌티가 끈적끈적하다는 것이니,

오중태수를 지냈던 육자우(陸子羽)의 사당을 헐어 없앨만 하다.

 


다시 이어지는 본문 제 5조다. 떡차를 마시는 방법에 대해 설명했다.

본문에서 말한 시는 송나라 때 시인 황정견의 「품령(品令)․영차(詠茶)」를 가리킨다. 전문을 소개하면 이렇다.



風舞團團餠 / 바람 춤추듯 동글동글한 떡차를
恨分破       / 나눠 쪼개
敎孤另       / 따로 떨어지게 함 안타깝다.
金渠體淨    / 쇠맷돌을 깨끗이 씻어
隻輪慢碾    / 외바퀴로 천천히 빻자
玉塵光瑩    / 옥가루 빛나더니
湯響松風    / 끓는 소리 솔 바람이 일더니만
早減二分酒病 / 술병을 이분(二分)쯤 감하여 주네.
味濃香永    / 맛은 진하고 향은 오래 가니
醉鄕路       / 취향(醉鄕)의 길에서
成佳境       / 가경(佳境)을 이뤘구나.
恰如燈下故人 / 흡사 마치 등불 앞에 옛 벗이
萬里歸來對影  / 만리 길을 돌아와 마주 섰는데
口不能言        / 아무 말 못해도
心下快活自省  / 마음은 통쾌하여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만 같네.

 


이덕리는 향약을 넣은 떡차가 당대에 마시던 엽차보다 맛과 향은 훨씬 뛰어나지만, 사실 차는 향약을 써서 맛을 보태지

않은 것이더 낫다고 생각한 듯 하다. 당송대에는 소금이나 생강을 차에 넣어 함께 끓이는 방식도 유행했다.

차의 성질이 냉하여 오래 먹으면 몸의 양기를 빼앗아 가므로 황산곡도 이런 방식으로 차를 마셨다.

관련 내용이 『농정전서(農政全書)』에 보인다.


인용된 소동파의 이야기는 『속다경』 권 하에 자세하다. 당나라 설능(薛能)의 「차시(茶詩)」에

“소금을 적당히 탈 것을 늘 조심하고, 생강을 알맞게 넣기를 더욱 뽐내네. (鹽損添嘗戒, 薑宜著更誇).”고 한 것이 있고,

소동파는 「기다(寄茶)」에서 “늙은 아내 어린 아들 아낄 줄도 모르고, 반토막 생강 소금 벌써 넣고 끓이네.

(老妻稚子不知愛, 一半已入薑鹽煎)”라고 했다.

 

생강과 소금을 넣고 차를 끓이는 일이 보편적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소동파는 이것이 바른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듯하다.

우리나라에서도 차에 생강이나 인삼을 넣고 함께 다려 마신 경우가 적지 않았다. 서거정(徐居正)도 「야음(夜吟)」시에서

“병든 뒤 마른 창자 우레 소리 같으니, 생강 인삼 손수 잘라 차를 끓여 마시네. (枯腸病後如雷吼, 手切薑蔘點小茶)”라 한 것이 있다.


이어 이덕리는 예전 우리나라 귀족이 잔치를 열어 손님에게 차를 대접하면서 찻물에 꿀을 타서 내온 일화를 소개했다.

 

좌중이 입으로는 참으로 훌륭하다고 칭찬했지만 차마 입을 대고 마실 수가 없었다.

이런 것은 모두 차에 대해 너무 무지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이런 식으로 무식하게 차를 마실 바에는

차라리 『다경』을 쓴 육우의 사당을 헐어 버리고, 차를 마시지 않는 것이 더 낫겠다고 말했다.

 

본문 제6조의 내용이다.

 

차의 효능을 두고 어떤 이는 우리 차가 중국 남쪽 지방의 차만 못하다고 의심한다.

내가 보건데 빛깔과 향, 기운과 맛이 조금도 차이가 없다.

『다서』에 이르기를. “육안차(陸安茶)는 맛이 좋고, 몽산차(蒙山茶)는 약용으로 좋다.”고 했다.

우리나라 차는 대개 이 두 가지를 겸하였다.

이찬황(李贊皇)과 육자우(陸子羽)가 있더라도 그들은 반드시 내 말이 옳다고 여길 것이다.

 

 

 

 

 

 

 

 

지운영의 「청계자명(淸溪煮茗」간송미술관

 

 

 

이제 이덕리가 『동다기』에서 밝히고 있는 차의 약효와 효능에 관한 언급들을 정리해 본다.

본문 제 7조의 뒷 부분이다. 앞쪽의 내용은 상고당 김광수의 집에 가서 처음 차를 마셨던 일을 적은 것으로 앞에서 이미 소개했다.

그때 마침 늙은 하인이 감기를 앓는 자가 있었다. 주인이 몇 잔을 마실 것을 명하며 말했다.

“이것으로 감기를 치료할 수가 있다.” 벌써 40여년 전의 일이다. 그 뒤 배로 차가 들어오자, 사람들은 또 설사를 치료하는

약제로 여겼다. 지금 내가 딴 것으로는 겨울철 여름철 감기에 두루 시험해 보았을 뿐 아니라, 식체(食滯)나 주육독(酒肉毒),

흉복통(胸腹痛)에 모두 효험이 있었다. 설사병 걸린 자가 소변이 껄끄러워 지리려 하는 것에 효과가 있으니

차가 수도(水道)를 조화롭게 해주기 때문이다. 학질 걸린 자가 두통도 없이 잠시 후 병이 뚝 떨어지니,

차가 머리와 눈을 맑게 해주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염병을 앓는 자도 이제 막 하루 이틀 앓은 경우라면

뜨겁게 몇 잔만 마시면 병이 마침내 멈춘다. 염병을 앓은 날짜가 오래되었는데도 땀을 내지 못한 자는

마시면 그 즉시 땀이 난다. 이는 고금의 사람이 논하지 않았던 바인데, 내가 몸소 시험해 본 것이다.

 

이덕리가 적고 있는 차의 효능은 이렇다. 첫째, 감기에 신통한 효험이 있다. 몇 잔만 마시면 웬만한 감기는 뚝 떨어진다.

둘째, 설사병에 효과가 있다. 셋째, 식체나 주육독, 흉복통에 두루 효과가 있다. 차가 체하고 막힌 것을 뚫어주기 때문이다.

 넷째, 학질도 금세 낫게 해준다. 차는 머리와 눈을 맑게 하는 약효가 있다. 다섯째, 염병도 걸린 지 얼마 안된 경우는

 즉시 낫고, 오래 되었는데 땀을 내지 못했을 때는 뜨거운 차를 마시면 바로 땀이 난다.


특별히 주목되는 것은 이 글에서 이덕리가 자신이 직접 찻잎을 따서 차를 만들었다고 적고 있는 사실이다.

그는 이런저런 다서(茶書)를 읽어 이론으로만 안 것이 아니라, 직접 차를 만들어 각종 증상에 실험을 해보았다.

처음 그가 차를 접한 것은 앞서 보았듯 16세 때 상고당 김광수의 집에서였다.

 이후 그는 표류선에서 흘러나온 차를 마시게 되면서 차에 대해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된 듯 하다.

 이후 그는 진도에 귀양 와서 예전에 마셨던 차가 자신의 주변에 자생하는 식물과 같은 것임을 알았고,

이후 다서를 구해 연구하면서 직접 차를 만들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이 과정에서 이 글에서 말하고 있는 차무역에 관한 구상을 구체화 할 수 있었다.

 

다시 본문 제 9조의 내용을 읽어 본다.

차는 능히 사람의 잠을 적게 한다. 혹 밤새도록 눈을 붙일 수 없게 한다.

책 읽는 사람이나 부지런히 길쌈하는 사람이 차를 마시면 한 가지 도움이 될 만하다.

참선하는 자 또한 이것이 적어서는 안 된다.

 

차의 각성 효과에 대해 말했다. 차를 마시면 잠이 잘 오지 않는다.

밤잠을 안 자고 일을 해야 하는 글 읽는 선비와 길쌈하는 아낙, 그리고 수행하는 승려들은 차를 많이 마시는 것이 좋다.
차의 별명 중에 ‘불야후(不夜侯)’가 있다. 호교(胡嶠)의 「음다(飮茶)」시에 “함초롬 젖은 싹은 옛 성이 여감씨(余甘氏)요,

잠 깨우니 마땅히 불야후로 봉하리라. 沾芽舊姓余甘氏, 破睡當封不夜侯”라 하였다.

여감씨라 한 것은 차를 마신 후 잇뿌리에 남는 단 맛을 지칭한 내용이고,

불야후란 차가 밤에 잠이 오지 않게 하는 것을 두고 붙인 이름이다.

 

차는 능히 잠을 적게 하여, 혹 밤새도록 눈을 붙이지 못하게 한다. 새벽부터 밤까지 공무에 있거나,

혼정신성(昏定晨省) 하며 어버이를 봉양하는 사람에게는 모두 필요한 것이다.

닭이 울면 물레에 앉는 여자나, 한묵(翰墨)의 장막 아래서 학업에 힘 쏟는 선비도 모두 이것이 적어서는 안 된다.

 만약 성대히 돌아보지 않고 쉬지 않고 밤을 새우는 군자라면 즉시 받들어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한편 냉차의 해독에 대한 언급을 남긴 한 항목이 있다. 본문 제 8조에 실린 내용이다.

내가 지난 번 막걸리 몇 잔을 마신 뒤에 곁에 냉차가 있는 것을 보고 반잔을 벌컥 마시고 잠이 들었더니,

바로 목에 가래가 끓어 올랐다. 가래를 뱉은 지 십 여 일이 지나서야 겨우 나았다.

그래서 더욱 찬 차가 도리어 가래를 끓게 할 수 있다는 주장을 믿게 되었다.

듣자니 표류인이 왔을 때, 병 속에서 따라내어 손님에게 권했다고 하니, 어찌 찬 것이 아니겠는가?

또 들으니 중국 역관 서종망(徐宗望)이 애저 구이를 먹을 때 한 손으로 작은 차호(茶壺)를 붙들고서,

먹으면서 또 마셨다고 하니, 이것은 반드시 냉차였을 것이다.

 내 생각에 뜨거운 음식을 먹은 뒤에는 찬 차가 또한 큰 문제가 되지 않는 모양이다.

 

이상 『동다기』의 본문 중에서 향차와 떡차에 관한 내용, 그리고 떡차를 마시는 방법에 관해 기술한 부분,

이어 차의 효용과 해독에 관한 언급 등을 차례로 살폈다. 이덕리는 자신이 직접 차를 만들어 보아

차의 여러 가지 효용을 체험한 바탕 위에서, 맛과 향 뿐 아니라 효능이 뛰어난 우리 차의 우수성을 자신 있게 주장하였다.

그는 이러한 바탕 위에서 우리 차를 상품화 하여 중국에 수출함으로써

막대한 국부를 창출하는 자원으로 삼을 것을 주장한 차무역론을 개진했다.

 

 

 

 

 

 

「다조」는 『동다기』중 차 무역론을 펼친 내용이다.

 

 

이덕리가 『동다기』에서 가장 역점을 두었던 것은 차 무역에 관한 주장이다.

당시 상황에서 우리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과감하면서도 획기적인 주장을 담고 있다.

 

이덕리의 다른 저술에 『상두지(桑土志)』가 있다. 상두(桑土)는 『시경』 「빈풍(豳風)」의 「치효(鴟鴞)」에서

“장마비가 오기 전에 저 뽕나무 뿌리를 가져다가 둥지를 얽었거늘. 迨天之未陰雨, 徹彼桑土, 綢繆牖戶”이라 한 데서 나온다.

 상두(桑土)는 뽕나무 뿌리다. 새는 비가 오기 전에 미리 뽕나무 뿌리를 물어다가 둥지의 새는 곳을 막는다.

래서 환난을 미연에 방지하는 유비무환의 의미로 쓴다. 이덕리의 『상두지』는 변경에 둔전을 설치하고,

성의 제도를 정비하며, 외적의 침입을 예방하는 각종 대비책을 세세하게 제시한 국방 관련 저술이다.


차는 천하가 똑같이 즐기는 것이다. 우리나라만 유독 잘 몰라 비록 죄다 취하여도 이익을 독점한다는 혐의가 없다.

국가로부터 채취를 시작하기에 꼭 알맞다. 영남과 호남에는 곳곳에 차가 있다. 만약 한 말의 쌀을 한 근의 차로 대납하고,

10근의 차로 군포를 대납하게 허락한다면, 수십만 근을 힘들이지 않고 모을 수가 있다. 배로 서북관의 개시(開市)에 운반해서

월차(越茶)의 인쇄해 붙인 가격에 따라 한 냥의 차에서 2전 은을 받으면, 10만근의 차로 2만전의 은을 얻을 수 있고,

돈으로는 60만 전이 된다. 이 돈이면 한 두 해가 못되어 45개 둔전(屯田)을 설치할 수 있다.

 따로 「다설(茶說)」이 있는데, 아래에 첨부해 보인다.


위 글에서 이덕리는 쌀을 차로 대납케 하고, 군포 또한 차로 대납케 한다면 수십만 근의 차를 쉽게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차는 배로 서북 개시(開市)로 운송해서, 표류선에서 팔던 차 값을 기준해서 차 한 냥에 2전의 은을 받는다면, 10만근의 차로

 2만전의 은을 얻을 수가 있다. 이는 돈으로 환산해서 60만전에 해당하는 거금이었다.

이를 재원으로 해서 둔전을 설치한다면 한 두 해만에 45개의 둔전을 설치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 구체적 시행 세칙을 따로 「다설(茶說)」을 지어 제시한다고 했는데, 이 「다설」이 바로 『동다기』다.


『동다기』의 서설 첫 단락은 이 책의 저술 목적을 천명한 글이다.

베와 비단, 콩과 조는 땅에서 나는 것으로, 절로 일정한 수량이 있다. 관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반드시 백성에게 달려 있다.

적게 거두면 나라에서 쓸 것이 부족하고, 많이 거두면 백성의 삶이 고달파진다. 금은과 주옥은 산택(山澤)에서 나는 것이니,

태초에 지닌 것에서 줄어들 뿐 늘어나는 법은 없다. 진한(秦漢) 시절에 상으로 하사하던 것을 보면, 황금을 백 근 또는

천 근 씩 내렸다. 송나라나 명나라 시절에 이르러서는 황금 아닌 백금을 냥(兩) 단위로 헤아렸다. 고금의 빈부 차이를

여기에서 볼 수가 있다. 지금 만약 베나 비단, 콩과 조처럼 백성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면서 금은이나 주옥처럼

 나라를 부유하게 하는 것이 있다고 치자. 황량한 들판의 구석진 땅에 절로 피고 지는 평범한 초목에서 얻어 이것으로

국가를 돕고 민생을 넉넉하게 할 수만 있다면 어찌 그 일이 재물의 이익과 관련되어 있다 하여 말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차는 남쪽 지방의 좋은 나무다. 가을에 꽃이 피고, 겨울에 싹이 튼다.

싹이 여린 것은 참새 혀 같다 하여 작설(雀舌)이라 하고, 새의 부리와 비슷한지라 조취(鳥嘴)라고도 한다.

 나온 지 오래되어 쇤 잎은 명설(茗蔎) 또는 가천(檟荈)이라고 한다. 신농씨(神農氏) 때 세상에 알려져, 주관(周官)에

그 이름이 올라있다. 후대로 내려와 위진(魏晉) 시대부터 성행하였다. 당나라를 거쳐 송나라에 이르자 사람들의 솜씨가

점차 교묘해져서, 천하의 맛 가운데 이 보다 나은 것이 없게 되었다. 또한 천하에서 차를 마시지 않는 나라가 없게 되었다.

북쪽 오랑캐는 차가 생산되는 고장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 하지만 북쪽 오랑캐만큼 차를 즐기는 사람도 없다.

그들은 늘상 고기만 먹고 살기 때문에 배열(背熱), 즉 등에서 열이 나는 것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로 말미암아 송나라가 요하(遼夏)를 견제하고, 명나라가 삼관(三關)을 누를 때도 모두 차를 써서 미끼로 삼았다.


차의 생태와 이칭(異稱), 역대 중국의 차의 역사를 간략하게 설명한 내용이다.

이어 북방 오랑캐가 차를 즐기게 된 까닭과 그것을 이용해서 역대 중국에서 차를 북방 오랑캐를

견제하는 수단으로 활용해온 사실을 지적했다.


차는 남방에서 나는 식물인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차를 가장 즐기는 것은 차 산지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북방 오랑캐들이다.

그들은 늘 고기만 먹기 때문에 차를 꾸준히 마시지 않으면 등에서 열이 나는 배열병(背熱病)을 앓다가 시름시름 죽는다.

차를 계속 마시면 배열병은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그들에게 차는 생존을 위한 필수품이다. 그들은 차를 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중국에게 순순히 복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송나라가 요하의 금나라를 견제하고, 명나라 때 후금(後金)의 삼관(三關)을

억제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차를 미끼로 삼았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차마고도로 차를 운반하는 모습.

 


이제 7개 항목으로 구성된 『동다기』의 「다조(茶條)」 내용을 축조 분석하여 이덕리가 제안한

차 무역 방법을 구체적으로 알아보겠다. 먼저 준비 절차에 관한 내용이다.

주사(籌司)에서는 전기(前期)에 호남과 영남의 여러 고을에 공문을 보내, 차가 있는 지 없는 지를 보고하게 한다.

차가 있는 고을은 수령으로 하여금 가난한 자 가운데 집 없는 자와, 집이 있더라도 식구가 10명을 채우지

못하는 자 및 군역을 중첩해서 바치는 자를 조사해서 대령하게 한다.


주무 관청은 주사(籌司), 즉 비변사(備邊司)다. 조선시대 일반 행정 전반을 관장하던 중앙 관청이다.

 비변사는 먼저 호남과 영남 각 고을마다 차 생산 유무를 보고케 한다.

 이후 차 생산지의 수령에게 가난해서 집 없는 사람이나, 집이 있어도 식구 수가 10인 이하인 사람, 또는 한 집에서

군역을 여럿 바치는 사람 등을 가려서 장차 있을 차 부역에 예비케 한다.


다음은 차 채취에 따른 인력 동원 계획과 작업 진행 과정, 그리고 이들에 대한 금전 보상문제에 관한 내용이다.

주사(籌司)에서는 전기에 낭청첩(郎廳帖) 1백 여 장을 내서 서울의 약국에 있는 사람 중에 일 처리를 잘 하는 사람을

가려 뽑는다. 곡우가 지나기를 기다려 마부와 말, 초료(草料) 등을 지급하여 차가 나는 고을로 나누어 보내,

차가 나는 곳을 꼼꼼히 살피게 한다. 절후를 살펴 차를 딸 때는 본 읍에서 미리 조사하여 기록해둔 가난한 백성을

인솔하여 산으로 들어가 찻잎을 채취해 모은다. 찻잎을 찌고 덖는 방법을 가르쳐 주되 힘써 기계를 가지런히

정돈하도록 한다. -덖는 그릇은 구리로 만든 체가 가장 좋다. 그 나머지는 마땅히 발[簾]을 쓴다.

 

여러 절에서는 밥 소쿠리로 덖는 것을 돕는데, 밥을 담아 기름기를 제거한 뒤에 부뚜막에 넣으면, 부뚜막 하나에서

하루 열 근을 덖을 수가 있다. 찻잎은 아주 좋은 것만 가려내어 알맞게 찌고 덖되 근량을 넘치게 하면 안 된다.

한 근의 차를 통틀어 계산하여 돈 50문으로 쳐서 보상해준다. 첫 해에는 5천 냥으로 한정해서 1만근의 차를 취한다.

일본 종이를 사와서 포장하여 도회지로 나누어 보낸다. 관용 배로 서북 개시(開市)로 보내는데, 또한 낭청 가운데

한 사람이 압해관(押解官)이 되어 창고에 봉납하고, 인하여 수고를 보상하는 은전을 베푼다.

비변사는 낭청첩을 발부해서 경성의 각급 약국에서 차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을 차출한다. 국가는 이들에게

말과 마부, 그리고 말에게 먹일 사료 값을 지급해서, 앞서 조사해 둔 차가 생산되는 고을로 파견한다.

이들은 해당 지역에 가서, 해당 고을에서 미리 차출해 둔 가난한 백성들을 이끌고 산에 들어가 찻잎을 채취한다.

 찻잎 채취뿐 아니라 차를 쪄서 덖는 과정도 직접 관리 감독한다.


찻잎을 쪄서 덖으려면 필요한 도구를 갖추어야 한다. 가장 좋은 것은 구리로 만든 체다.

이것을 구하기 힘들 경우 발[簾]이나 밥 담는 대그릇을 대용해도 괜찮다. 만일 대나무에 기름기가 남아 있으면

차 맛을 변하게 하므로 사용하기 전에 반드시 대나무의 기름기를 제거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한집에서

하루에 열 근씩 덖을 수가 있다. 찻잎은 상품(上品)만 골라서 알맞게 쪄서 덖는다.

욕심을 내서 적정 분량 이상 작업을 하면 품질이 떨어지므로 이를 금지시킨다.


이렇게 해서 차가 만들어지면 품질 검사를 거쳐 한 근에 50문씩 쳐서 구입한다.

첫 해에는 5천 냥을 풀어 1만근의 차를 구입한다. 구입한 차는 고급스런 일본 종이에 포장해서 상품 가치를 높인 후

 큰 도시로 나눠 보낸다. 그러면 각 지역에서 보내온 차를 수합해서 이를 나랏 배로 서북 개시(開市)로 보낸다.

 비변사에서는 이 일을 전담할 낭청 1인을 두어 생산된 차를 창고에 넣고,

차등에 따라 수고를 위로하는 상여금을 준다.

예전에 배에서 팔던 차를 보니, 겉면에 찍어서 써 붙인 가격은 은 2전이었고, 첩으로 포장한 차는 1냥이었다.

하물며 압록강 서쪽 지역은 연경과의 거리가 수 천리나 된다. 두만강 북쪽의 경우 심양과의 거리가 또 수 천리다.

그럴진대 한 첩에 2전씩 받는다면 가격이 너무 저렴해서 우습게 보일까 염려될 정도다. 다만 한 첩에 2전씩 쳐서

 가격을 받는다 해도, 1만근의 차 값은 은으로는 3만 2천 냥에 해당하고, 돈으로는 9만 6천 냥이나 된다.

해마다 더 많이 채취해서 1백만 근을 딴다면 수익금 50만 냥으로 국가의 경비로 써서

조금이나마 백성의 힘을 덜어줄 것이니, 어찌 큰 이익이 아니겠는가?

이제 차의 적정 판매가격과 차 판매로 예상되는 수익 규모를 따져 보기로 한다. 차 1첩에 2전씩 쳤을 때,

1만근의 차가 은 3만 2천냥이라고 했다. 은 3만 2천냥이 돈으로 치면 9만 6천냥이 된다고 했으니, 당시 은과 화폐의 환산 가치는

 1: 3이었다. 이때 1냥은 동전 100전이다. 당시 중국 표류선에서 팔던 차는 은 2전의 가격표가 붙었다.

그런데 한 첩에 은 1냥씩 받았다.

 

만약 중국의 남쪽 상선이 수 천리 떨어진 연경이나 심양까지 차를 운반해서 판다면 유통 마진을 포함해 실질 판매 가격은

 이보다 훨씬 비싸지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니 우리가 만든 차의 가격을 중국 상선 판매가의 5분의 1 수준인 한 첩에

2전씩 붙인다면 북방 사람들이 오히려 품질을 의심할 정도로 지나치게 싼 가격이 될 것이다.


한 첩에 2전만 받는다 쳐도 1만근의 차를 팔면 은으로 3만 2천 냥, 화폐로는 9만 6천 냥의 수입이 생긴다.

 1만근의 차를 채취해서 공납한 빈민들에게 국가가 준 돈이 5천냥이고, 그밖에 포장과 운송 경비, 관리 인원 및

창고 비용 등의 물류비와 인건비를 포함하더라도 적어도 화폐로 5만냥 이상의 순 이익이 발생한다.

 

 만약 점차 규모를 확대해서 1년에 1백만 근의 차를 생산한다면, 순수익금은 50만 냥으로 늘어날 것이다.

그나마 이는 중국에서 파는 찻값의 5분의 1 가격으로 판매가를 책정했을 때 이야기이고 보면, 순수익금은

시장 규모의 확대에 따라 1백만 냥이나 2백만 냥까지 치솟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당시 국내에서 차의 수요는 거의 없는 상태여서, 가난한 백성들은 아직 농사가 시작되지 않았을 때

 야생 찻잎을 따서 생계에 보탬이 되어 좋고, 국가는 이를 북방에 팔아서 엄청난 수익을 올릴 수 있으며,

북방 사람들은 중국 남방에서 올라온 찻값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에 차를 안정적으로 공급 받을 수 있게 되니

 모두에게 윈윈의 게임이 되는 것이다.

 

 

 

 

 

 

 

이재관의 「高士閑日圖」개인 소장

 


이제 차무역으로 인해 혹시 야기될 수 있는 문제와 차시의 구체적 운영방법,

그리고 수익금의 활용방안에 대한 논의를 살펴보자.

의논하는 자들은 저들 중국이 만약 우리나라에 차가 있는 것을 알게 되면 반드시 공물로 차를 바칠 것을 요구할 것이라고

하면서 후대에 두고두고 폐단을 열게 될 것을 염려한다. 하지만 이는 고을 관리가 날마다 잡아오라고 닦달하는 것이 두려워

어리석은 백성이 고기가 있는 연못을 메워 미나리를 심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제 만약 수백 근의 차를 실어다 주어

천하로 하여금 우리나라에도 차가 있다는 것을 환히 알게 한다면, 연나라 남쪽과 조나라 북쪽의 장사꾼들이

온통 수레를 삐걱대고 말을 달려 책문을 넘어 동쪽으로 몰려들 것이다.

 

앞서 1만근의 차로 한정했던 것은 진실로 먼 지역인지라 이목이 잘 닿지 않고 한 모퉁이의 재화가 미처

모이지 않을까 걱정되고, 물건이 정체될 염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만약 장사를 해서 재고가 쌓이지 않게 한다면,

 비록 1백만 근이라도 쉽게 처리할 수가 있을 것이다. 숭양(崇陽) 땅의 종자를 또한 장차 뽑지 않고서도

 나라에 보탬이 될 것이니, 이는 실로 쉬 얻을 수 없는 기회인 셈이다.

어찌 이것으로 한정을 삼을 수 있겠는가?

 


다음은 차시(茶市)의 운영 방법에 관한 언급이다.

기왕 차시(茶市)을 연다면 모름지기 따로 감시어사(監市御史)와 경역관(京譯官), 압해관(押解官) 등을 따로 뽑아야 한다.

수행인에 이르러서는 모두 일 맡는 자에게 차등을 정하되, 이전처럼 해서는 안 된다.다만 용만(龍灣) 사람이 시장에 오는 것만

허락한다. 대개 난하(灤河)의 풍속이 포악하고 개 같아서 저들에게 실정이 알려지면 믿을 수 없는 점이 있기 때문이다.

또 차시가 파한 뒤에는 상급(賞給)을 더욱 낫게 주어서마치 자기 일을 보듯 하게 한 뒤라야 바야흐로 오래 행하여도 폐단이 없다.

향기로운 먹이 아래 반드시 죽는 고기가 있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서북 개시에 차시를 개장하면 국가에서는 이곳에 시장을 감독하는 감시어사를 파견하고, 만인(灣人)과의 원활한 거래를 위한

경역관과 창고 관리 등 제반 업무를 처리하는 압해관을 보낸다. 이들을 보좌할 인력도 맡은 역할에 따라 임금에 차별을 두어

결정하되, 이들이 자기 일처럼 열심히 할 수 있도록 성과에 따른 보상 방안도 마련하는 것이 좋다.

 시장에는 만인, 즉 의주 상인들만 출입을 허용하여, 국가가 북방 오랑캐와 직접 상대하지 않는다.

이쪽의 실정이 저쪽으로 알려지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다.

이렇게 한다면 책임을 맡은 사람들은 더 많은 이익을 내기 위해 더욱 열심히 할 테고,

차츰 시스템이 안정되면 큰 문제없이 시장을 운영할 수 있을 것이다.

검소하던 우리나라가 갑자기 세금 외에 수백만 냥이 생기게 된다면 무슨 일이든 못하겠는가?

다만 재용(財用)이 넉넉해지면 여기저기서 빼앗아가서 막힘이 많아지게 마련이다. 만약 상하가 마음을 합쳐서

본전과 잡비, 종이 값과 뱃삯 등과 수고한 사람에게 주는 상여금 외에는 한 푼도 다른데 가져다 쓸 수 없게 하여,

 비록 쓰는 바가 서로 관련은 없다 해도 단지 서변(西邊)에 성읍(城邑)을 수축하게 한다.

 

연못과 길가 양편의 5리 안에 사는 백성들의 토지세 절반을 감면해 주어, 그들로 하여금 성관(城館)을 쌓고 도랑을 파는데

 힘을 쏟게 하여, 천리의 길을 누에 치는 방처럼 잇다르게 하고, 길가의 봇도랑을 촘촘한 그물 같게 만든다.

금년에 못다 한 것은 내년에 이어 시행한다.

 

또 서변의 재주 있고 힘 있는 인재를 모집하여 이를 선발해서 성에 주둔케 하여 날마다 활쏘기를 익히게 하고,

둔성(屯城) 하나마다 수백 명을 두어 대포를 쏘게 한다. 잘 적중시키는 자는 특별히 상금을 내리고, 처자와 함께 생활할 수 있게 한다.

 이렇게 한다면 이는 평상시에도 수만 명의 막강한 군대를 보유하는 셈이 되니,

어찌 난폭한 외적을 막고 이웃 나라에 위엄을 보이기에 충분하지 않겠는가?


차무역으로 벌어들인 수익금은 어떻게 쓸 것인가? 이덕리가 가장 역점을 둔 부분이다.

그는 국가에 생각지 않은 재원이 마련되면 지체 없이 중국과 맞닿은 서쪽 변경에 성읍(城邑)을 고쳐 짓고, 건물을 세우고

도랑을 파서 변경에서 서울까지 그물망처럼 도로망과 수로망을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는 변경 군사들을 지원해서 군사훈련을 시키고, 우수한 병사들은 아예 가족까지 이주해서 함께 살 수 있도록 지원해

준다면 비상 체재가 아닌 상시 가동체재를 갖춘 수만의 막강한 군대를 보유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니,

국가의 위엄을 바로 세울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덕리는 그의 이러한 구상을 『상두지(桑土志)』라는 별도의 저술에서 세세히 입안하여 구체적 방안으로 제출하였다.

워낙 비용이 많이 드는 일인데, 차무역은 이런 제반 비용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묘책일 뿐 아니라,

국가 경쟁력 강화에도 관건이 되는 국가 기획 프로젝트로 파악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이 실효성 높은 주장은 아무에게도 주목받지 못한 채 묻히고 말았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참고서적 : 정민 著 『새로 쓰는 조선의 차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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