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맞는 다리우스의 가족>파올로 베르네세, 1565~1570, 유화 236×475cm, 내셔널 갤러리
알렉산드로스는 리더십을 예술의 지경으로 승화시킨 인물로 기억된다.파울로 베로네세의 그림에 그의 관용과 포용에 관한 특질이 잘 나타나 있다. 그런 그의 장점을 잘 살려 적은 수의 그리스 군대로 드넓은 정복 지역을 무리없이 다스릴 수 있었다. 중앙의 여자들은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 3세의 가족이고, 오른편의 남자들은 알렉산드로스와 그의 장군들이다. 다리우스의 가족이 알렉산드로 앞에 조아리고 있는 것은 이들이 지금 포로 신세이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로 대왕 일대기 부조>
아테네가 주도하던 고대 그리스 문화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거치며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비슷한 시기 페르시아와 인도 등지에서 부흥한 오리엔트 문명이 그리스 문화와 융합되어 ‘헬레니즘’이라는
전혀 새로운 문화가 탄생했다. 헬레니즘은 고대 이스라엘의 종교(구약성서)에 기반을 둔 히브리즘
(Hebraism, 헤브라이즘)과 함께 유럽 문화의 두 축 중 하나다.
이 서로 다른 이질적인 두 문명이 결합한 데는 ‘신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공이 컸다.
<알렉산드로스와 포루스>
샤를 르브륑, 유화 470×1264cm, 루브르 박물관.
미술이라는 매체를 통하여 영웅과 신의 이미지로 표현된 알렉산드로스.
그는 사후 헬레니즘 제국의 지도자들과 로마 황제들이 추종하고 본보기로 삼은 인물로 남았다.
<캄파스페를 그리는 아펠레스>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 1726~1727년경, 유화 57.4×84.2cm, 몬트리올 미술관.
캄파스페는 알렉산드로스가 아끼는 여인이었다.
화가 아펠레스를 불러 그녀의 누드를 그리게 했는데 그만 왕의 여인에게 빠져버린 것.
이를 눈치 챈 알렉산드로는 총애하는 화가에게 그녀를 선물로 보내게 된다는 스토리 전개이다.
<호메로스의 흉상을 어루만지는 아리스토텔레스>렘브란트, 1653년, 유화 143.5×136.5cm,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철학자가 시인에게, 이성의 대가가 감성의 대가에게 존경을 포하는 모습이다.알렉산드로스가 호메로스에게 젖어들 수 있게해준 스승 아리스토텔레스.알렉산드로스는 그 배움을 통해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누구나 경외할 만한 것으로 확립하고 이를 상징화홤으로써 자신의 시대뿐 아니라 후대까지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림 어디에 알렉산드로스가 있을까?아리스토텔레스 상의를 두룬 금 사슬 중간 메달에 바로 알렉산드로스의 얼굴이 들어있다.렘브란트는 대왕의 위대함을 그렇게 스승의 가슴에 새겨 넣은 것.
<프리마 포르타의 아우구스투스>작자 미상, 14~37년경, 대리석, 높이 203.2cm, 바티칸 박물관.
아우구스투스를 알린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기원전 20년 원로원의 제안으로 본디 청동 원작이었던 것을 대리석으로 재 제작했다. 오른쪽 다리에 돌고래를 탄 큐피트가 붙어 있는데 이는 조각을 보다 견고하게 하기 위한 기능적 장치이기도 하다. 또한 큐피트는 비너스의 아들이고, 돌고래는 비너스가 바다에서 태어났으니 이 둘을 통해 자연스레 비너스를 떠올리게 될 터이다. 이는 아우그스투스가 비너스 신의 혈통을 잇는 율리우스 집안의 양자라는 사실을 곧바로 상기하게 해서 그의 신적인 존재 위상을 가늠케 한다.
<아우구스투스의 게니우스>작자 미상, 기원전 12~10년경, 브론즈, 아테네 국립 고고학 박물관.
고대 로마에서는 수호천사처럼 개인을 지키는 영적 존재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이를 게니우스라 불렀다. 또한 게니우스는 사람이 태어날 때 함께 생기고 죽으면 같이 사라진다고 믿었다.아우구스투스의 게니우는는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신으로 숭배되었다. 이는 통치술의 일환이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무덤을 찾은 아우그스투스>세바스티앙 부르동, 1650~1660년대, 유화 44.5×56.5cm,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슈 박물관.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한 아우구스투스는 알렉산드리아로 진군했다.그곳에서 숙적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희망을 잃고 자살하며 몰락하는 과정을 지켜보게 된다.이제 내전은 끝났고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권력과 위세가 그에게 주어진 것이다.
이 무렵 알렉산드리아에 있던 대왕의 무덤을 방문. 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열렬한 숭배자였다.방부 처리된 대왕의 주검에 몸을 구부려 키스하던 순간 대왕의 코가 부러지고 말았다.그는 그렇게 대왕의 코를 납작하게 만든 존재가 되고 말았다.
<아우구스투스에게 문예를 바치는 마이케나스>조반니 바티스타, 1769년 유화, 69.5×89cm,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슈 박물관.
이태리 철학자이자 미술비평가인 프란치스코 알가로티가 하인리히 폰 브뢸 백작을 위해 주문한 작품이다.폰 브뢸 백작은 폴란드 왕이자 작센의 선제후인 아우구스트 3세의 최측근으로 마이케나스처럼 문화예술을 적극 후원한 인물이다.
<아우그스투스 시절의 회화 컬렉션>앨머 테디마, 1867년 유화, 개인 소장.
미술 애호가들이 같은 공간에 모여 진지하게 감상을 하는 모습이다.로마의 미술 시장이 발달하게 된 데는, 정복을 통해 그리스 미술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한 것이다.그리스 걸작품들을 보며 탄복한 로마인들은 작품의 소유를 원했고, 공급의 한계 상 모사품을 공급하게 된다.오리지널인가 아닌가를 오늘 날 처럼 따지지 않던 로마인들은 질만 높으면 만족스러워 했다.개인의 저택을 벽화나 모자이크로 꾸미기를 좋아했기에 미술시장이 크게 발달할 수 밖에 없었던 것.
<태양왕 루이 14세>이아생트 리고, 1701년, 유화 277×194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영광의 정점에 선 루이 14세로 그의 나이 63세 때의 모습이다.권력자를 그릴 때 유럽 화가들은 전통적으로 '위세 초상'의 관행을 따랐다.거만한 자세와 도도한 시선, 화려한 의상 위압적인 공간 표현 등을 말 하는 것.
베르사유 궁전을 짓는 등 온갖 화려방창한 생활을 했던 그의 열정과 욕망은 수 많은 미술품을 낳았고,국가의 적극적인 후원과 비호 아래 프랑스 미술이 유럽 미술의 주류로 떠오는데 기여했다.영면을 앞두고 다섯 살짜리 후계자에게 남긴 루이 14세의 유언이다.
"아가야, 너는 위대한 왕이 될 것이다. 건축에 빠졌던 나의 취향을 닮지 마라.전쟁을 좋아하는 것도 닮지 마라. 반대로 이웃 나라와 화친하도록 노력해라. 신의 은혜에 보답해라.신에 대한 의무를 저버리지 말거라. 백성으로 하여금 신을 경배케 해라.늘 좋은 충고를 따르도록 해라. 백성의 짐을 덜어주려고 노력해라.애통하게도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구나."
루이 14세의 등 뒤로 뻗은 영광의 그림자는 길고도 짙었다. 백성이 부담한 세금이 그의 치세 동안 무려 두 배나 늘었고, 1699년에는 국가 재정 부채 부담률이 자그만치 76%에 이르렀다. 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이 끝날 즈음에는 부채가 무려 20억 리브르에 달했는데, 이는 훗날 프랑스 민중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고 평가받는 미국 독립전쟁의 참전 부채 10억 리브르의 배나 되는 수치인 것이다.
<루이 14세>이아생트 리고, 1701, 유화 238×149cm, 프라도 미술관.
<제우스로 그려진 루이 14세의 초상>랴를 푀르송, 유화 166×143cm, 베르사유 궁전.
15세의 어린 군주가 신들의 왕 제우스로 묘사되었다.정치적 혼란이 끝나고 새로운 도약을 꿈꾸던 시기, 소년 왕은 그 번영을 주도할 희망으로 형상화 되었다.오른손에 들고 있는 것은 제우스의 무기인 번개다. 그 왼편으로 뛰어난 대장장이인 키클롭스들이 갖가지무기를 만들고 있다. 옥좌 아래 그의 상징 독수리가 보이는데, 역시 번개를 발로 쥐고 있다.
<메르쿠리우스의 전차>장 바티스트 드 상페뉴, 1673년경, 천장화, 베르사유 궁전.
수탉이 끄는 전차를 타고 하늘을 가로지르는 모습을 표현한 그림으로 수탉 위에는 새벽별을 머리에 단 푸토가 나팔을 불고 있다(푸토는 큐피트나 아기천사가 같은 서양회화에 나오는 포동포동한 아기를 말한다).
루이 치하의 예술가들, 특히 관변기구인 아카데미 회원들은 '호황'을 누린다.절대군주로서 왕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을 가장 큰 사명으로 삼아 왕의 찬양에 에너지를 쏟는 것이다.자유분방한 예술가들이 작위와 공직, 연금, 공적 주문, 칭호, 상 등이 아카데미를 통해 주어졌기 때문에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루이의 초상화가 700점이 넘을 정도로 그려졌다는 사실은그의 절대 군주 위상을 높이는데 한 몫 단단히 했을 게 분명하다.
<마스트리호트 앞 야영지에 도착한 루이 14세>아담 프린스 판 데르 뮐렌, 17세기 후반 유화 230××33.2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절대군주정은 성격사 호전적일 수 밖에 없다. 절대 군주의 영광은 예술과 예법 등의 상징적 수단을 통해서도드러나지만, 전쟁에서의 승리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루이 14세는 전쟁이야말로 자신을 가장 잘 과시할 수 있는위대한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전쟁은 신민의 불만과 귀족의 음모를 억누를 수 있는 좋은 수단이기도 했다.이 그림은 네덜란드와의 전쟁(1672~1678)을 소재로 한 것이다. 1673년 6월 30일, 마스트리호트 앞의 야영지에도착한 루이 14세가 고개를 살짝 들어 먼 곳을 바라본다. 그는 지금 백마를 타고 있다.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쟈크 루이 다비드, 1800~1801) 유화 271×232cm, 국립 말메종 박물관.
나폴레옹(1769~1821)의 생애를 보면 그의 투쟁과 성취의 발자취에 새삼 놀라게 된다.
단순한 직관이 아닌 '전략적 직관'에 뛰어났던 그는 숱한 난관을 극복해 나간다.
수 많은 그의 초상화 버전 중 가장 널리 알려진 다비드의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이다.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폴 틀라로슈, 1850년, 유화 289×222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다비드 보다 반세기쯤 뒤에 태어난 폴 틀라로슈의 매우 사실적 표현 작품이다.나폴레옹이 노새를 타고 있다. 힘겨운 모습의 노새도 그렇고, 추위에 지친 데다 옷조차 누추하다.얼굴엔 피곤이 역력하지만 그 의지만큼은 결연한 모습으로 영웅이라기 보다는 인간적인 면모에초점을 맞춰 그린 나폴레옹 초상화라 해야겠다.
위대한 인물이란 행운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으로 대부분 전략적인 사고를 통해 확실하게 목표를관철시키는 방법을 직관적으로 찾아내는 천재들이다. 전략적 직관에 능한 사람인 것이다.전략적 직관이란 두뇌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던 지식이나 경험이 순간적으로 조합되어 확실한 문제 해결책으로 거듭나게 하는 능력이다. 바로 이 능력이 출중했던 나폴레옹은 툴롱전투 이후3년 만에 대위에서 장군에 오른다.
<아르콜레에서의 보나파르트>
앙투안 장 그로, 1797년, 유화 134~104cm,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슈 박물관.
다비드의 제자 앙투안 장그로의 작품으로 나폴레옹이 용맹성이나 힘이 아니라 두뇌로 승승장구한
인물임을 선명히 묘사한 작품이다. 용사의 이미지 보다는 직적이며 감성적인 예술가 이미지인 것이다.
장발에 섬세한 이목구비, 창백한 낮빛은 마치 시인이나 피아니스트를 떠올리게 한다.
전략적 지휘관 나폴레옹은 대중의 심리도 잘 다뤘고 그만큼 홍보의 중요성도 잘 이해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권력을 좋아한다. 하지만 예술가로서 좋아한다.
음악가가 바이올린을 좋아하듯이 말이다."
"내 안에는 각기 다른 두 인간이 있다. 머리를 가진 인간과 가슴을 가진 인간!"
다독가인 나폴레옹은 고대의 왕과 지도자들에 대한 신화와 전설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살폈다.
신화와 전설에는 지도자에 대한 사람들의 통념과 인식이 배어있다.
그는 권력을 장악하자마자 파리의 가장 뛰어난 미술가들을 고용해 그가 원하는 전설을 창조하고
이를 영원히 변치않는 이미지로 형상화하도록 했다.
<자파의 페스트 병원을 방문한 나폴레옹>앙투안 장 그로, 1804년, 유화 523×715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이집트 원정시 나폴레옹의 부대는 페스트로 인해 큰 곤경을 겪는다.이 그림의 인상적인 부분은 나폴레옹을 마치 예수처럼 표현한 대목이다.병세를 걱정하며 환자의 몸에 손을 대는 모습은 마치 예수가 나환자의 몸에 손을 대 기적을 일으키는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나폴레옹이 황제로 등극하지 직전에 이 그림이 공개되었다는 사실를 보면미술사적 평가를 제외하더라로 이 그림이 세심한 전략적 사고의 산물임을 알 수 있겠다.
<이반 뇌제와 그의 아들 이반>
L.레핀, 캔버스 유화, 199×254, 1885.
의식을 잃아가는 아들을 붙잡고 황망해 하는 이반 뇌제의 모습.
러시아 리얼리즘의 대가 레핀은 역사의 비극적 순간을 너무도 리얼하게 그려 놓았다.
이반 4세는 러시아를 중세적 변방국가에서 떠오르는 제국으로 탈바꿈 시켰고, 카잔의 타타르인들을 정벌하고
시베리아를 개척하는 등 러시아의 영토와 위세를 확장한 대제였다. 그의 치세 동안 러시아의 영토는 10억 에이커가
늘어났다. 그럼에도 피로 점철된 그의 삶은 그를 가장 잔인하고 혐오스러운 군주로 기억하게 만들고 있다.
<이반 뇌제>
빅토르 바스네초프, 1897년, 유화 247×132cm, 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계단을 내려가다 멈춰 선, 뭔가 비밀스러운 음모를 엿듯는 것처럼 심상치 않은 분위기이다.
바스네초프는 러시아 민담 등 옛이야기를 낭만주의적인 터치로 표현해 인기를 얻은 화가이다.
스펙터클한 구성과 노련한 인물의 묘사가 일품이다.
<바실리사 멜렌티예바를 경모하는 이반 뇌제>그리고리 ㅅㅔ도프, 1875년, 유화 137×172cm,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 러시아 미술관.
아내가 잠결에 다른 남자 이름을 불러 차르를 노하게 했다는 일화보다는젊은 아내의 아름다을 바라보는 차르의 넋 나간 모습에 초점이 맞춰진 듯 보인다.왜소하고 기력이 쇠한 모습에서 잔인하고 호령하던 기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제룸 호시에게 보물을 보여주는 이반 뇌제>
알렉산더 디토프첸코, 1875년, 유화 153×236cm,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 러시아 미술관.
호시라는 영국인에게 자신의 애장품을 보여주며 차분히 설명하는 이반 4세와 경청하는 차르.
영국인 탐험가 였던 호시는 이반 4세와 엘리자베스 1세 사이를 오가면서 열심히 특사 노릇을 한 인물이다.
<수도원장 코르닐리에게 수도사가 되게 해달라고 청하는 이반 뇌제>
클라브디 레베데프, 19세기 말, 유화.
이반 뇌제는 말년에 이르러 깊은 죄의식에 사로잡히게 되어 수도사와 같은 삶을 원했다.
이반이 팔을 붙잡고 매달린 사람은 프스코프의 페초르스키에 있는 수도원 원장이다.
이반 되제는 1584년 3월 28일 운명한다. 여러 사인설이이 전한다.
이반 사후 막강 권력이 사라짐과 동시에 러시아는 로마노프 왕조가 성립되기까지
깊은 혼란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총병 처형의 아침>
바실리 수리코프, 1881년, 유화 223×383.5cm, 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러시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로 꼽히는 표트르 대제의 별명도 '처형관 차르'였다.
표트로 사후 75년 동안 무려 열 차례의 권력 변동이 발생해 아버지와 아들, 남편과 부인 사이에 죽고 죽이는
혈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피의 니콜라이'라는 별명을 얻은 마지막 차르 니콜라이 2세가 가족과 함께
혁명세력에게 무참히 살해된 것도 변화하는 시대와 담 쌓고 전체주의를 고집한 데 따른 것이었다.
<18차 당 대회의 스탈린>
알렉산드르 게라시모프, 1939년, 유화 121×96cm, 프레티야코프 미술관.
자신의 혁명동지를 비롯해 800만 명을 숙청하고, 집단농장화 등 강압적인 농업정책으로
1000만 명 이상을 굶어 죽게 만든 폭군이다. 또 강제 이주 정책을 실시해 1000만 명이 넘는 인민이
질병과 굶주림으로 세상을 떠나게 마든 독재자다. 그림이 보여주는 이미지와 인간 스탈린 사이에 놓인
이 간격은 옛 소련이 지닌 모순의 크기를 잘 보여주는 징표라고 할 수 있다.
<지도자, 교사, 친구>
그리고리 셰갈, 1936~1937년, 유화 120×90cm,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 러시아 미술관.
레닌 때부터 시작된 지도자 주제화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으로 공산혁명이 일어난 국가에서
과거 왕조시대에서나 볼 법한 지도자 그림이 다량으로 그려졌다는 사실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관 속의 스탈린>
미하일 압둘라예프, 1953년 유화 25×35cm,
한국전쟁 중이던 1953년3월 5일 스탈린은 74세를 일기로 사망한다. 사인은 뇌졸증.
후르쇼츠프는 회고록에서 스탈린의 최후와 관련된 흥미로운 목격담을 전한다.
스탈린이 쓰러졌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내무장관 베리아가 스탈린에 대한 험담과 조롱을 마구 내뱉었다고 한다.
그러다 스탈린이 아직 의식이 있다느 표지가 보이자 갑자기 무릎을 꿇더니 그의 손에 키스를 하더란다.
그 뒤 스탈린이 다시 의식을 잃었음을 확인하자 베리아는 벌떡 일어나 침을 밷었다고 한다.
그림 속, 재빠르게 흩어지는 필치가 곧 다가올 그의 격하운동을 예고하는 듯.
<소비에트의 권력 장악>
블라디미르 세로프, 1947년 그림, 1962년 재제작, 유화 270×210cm, 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스탈린과는 달리 레닌을 주제로한 그림은 소비에트 정권이 무너지기 전까지 계속 그려진다.
1917년 10월 25일(러시아 구력), 혁명을 성공시킨 네닌이 두마 회의실에서 기업의 국유화, 토지의 농민 귀속,
적군의 창설 등을 선포하는 장면을 형상화 한 그림이다.
<카이사르 앞의 클레오파트라>
장 레옹 제롬, 1866년, 유화 183×129.5cm, 개인 소장.
클레오파트라의 찬란한 역사는 이제 신화와 전설, 현실과 사실을 구분키 어려워졌다.
실존했던 한 인간이기에 앞서 그에게 빠지지 않을 수 없는 야망과 매력의 영원한 상징이 된 것이다.
관능과 미모의 현현체로 클레오파트라를 그린 그림은 매우 많다. 주제의 측면에서 보면 카이사르와 만날 때,
또 안토니우스와 만날 때 그 요부성이 특별히 더 강조되어 그려지곤 했다.
그림에서 클레오파트라는 비너스 여신인 양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한다.
그녀의 미모와 관능에 대한 전설에 부합하려는 듯 화가는 클레오파트라를 세미누드 상태로 그렸다.
경비마저 속인 하인이 가져온 진상품, 심부름꾼이 어깨에 메고 온 진상품이 여왕일거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한 듯.
놀란 카이사르가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려하고 주변의 측근들도 웅성대는 모습이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앨머 테디마, 1866년, 유화 183×129.5cm, 개인 소장.
두 연인의 첫 만남을 매우 드라마틱하게 묘사한 걸작이다.
티디마는 세익스피어의 희곡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내용에 기초해 그렸다.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가 시드노스 강에서 뱃놀이를 즐기는데 착안해 자신의 배를 안토니우스의
배 가까이에 이르게 했다고 한다. 그녀는 배를 황금과 보석으로 화려하게 치장했으며 아름다운 향기로 충만하게 해싿.
그러고는 갑판 옥좌에 비너스로 분장해 앉아 있고. 넋이 나간 안토니우스가 벌떡 일어나 클레오를 바라보는 모습이다.
<클레오파트라>
귀스타브 모로, 1887년경, 수채화, 40×25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마치 마법세계의 여왕처럼 그려졌다. 모로는 역사속에 등장하는 요부를 주제로 한 그림을 여러 점 그렸다.
머리에는 티아라를 썼고, 여왕의 홀을 옥좌에 기대어 놓은 대신 손에는 꽃을 쥐고 있다. 몽환적 배경 저 멀리에
스핑크스와 피라미드가 보인다. 오른손 아래 쪽에서 뱀이 다가오고 있는 것은 그녀의 운명을 상징하는 이미지.
<사형수들에게 독약을 시험하는 클레오파트라>알렉상드르 카바넬, 1887년, 유화 165×290cm, 개인 소장.
아름다운 시녀와 표범은 각각 관능과 권력을 상징한다. 클레오파트라의 시선이 향한곳에 한 남자가 죽어가고 있다. 죄인들을 상대로 독약을 테스트하는 그림이다.효과가 빠른 독약은 심한 고통과 추한 몰골이지만, 서서히 효과를 보이는 독약은 신체가 거의 변형되지 않는다는사실을 알아낸 것이다. 이집트 전통인 미라를 만드는 것은 파라오게게 중요한 관심사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클레오 파트라 연회>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 1742~1743년경, 유화 50.5×69cm, 파리 코나크 제 박물관.
한 손에 쥔 고가의 진주를 다른 손에 쥔 잔에 넣으려 하는 클레오파트라,
그 광경을 보며 마주 앉은 안토니우스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고 있다.
미모와 관능만으로 따지면 클레오파트라보다 우월한 여인들이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 주변에는 많았다.
영웅들이 사랑한 게 단순한 미모나 관능이 아니었음을 알게하는 대목이다. 그녀는 마케도니아어 뿐 아니라
그리스어, 민간 이집트어, 라틴어에도 능통했고, 아랍인, 히브리인, 메데스인과 그들의 언어로 직접 대화를
나눴다는 기록에서 이를 또렷이 확인 할 수 있다. 독약의 종류와 효과도 깊이 공부했고
미용법과 화장술에 대한 글을 썼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클레오파트라와 농부>
페르디낭 들라크루아, 1838년, 유화 98.4×122.7cm, 오클랜드 미술관
농부가 바구니에 담긴 뱀을 들춰 보이자 클레오파트라가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
흰 살결에 아름다운 용모를 지닌 클레오파트라와 구릿빛 피부에 억세게 생긴 농부의 용모가 대조적이다.
미녀와 야수의 대조법을 연상시키는데 이런 분위기가 클레오파트라의 존재를 더운 신화적인 것으로 다가오게 한다.
알려져 있든 클레오파트라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로마에서 있을 옥타비아누스의 개선 행진에
적장으로 비참하게 끌려갈 처지를 생각하니 도저히 이를 용납할 수 없었다. 이에 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30년 8월 12일 자살을 결행했다. 독약을 이용했는지 독사에게 물려 죽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전설은 그녀가 독사에게 물려 죽었다고 전한다.
<클레오파트라의 죽음>
장 앙드레 릭상, 1874년, 유화 200×290cm, 콜루즈 오귀스탱 미술관.
한 시대를 풍미한 여왕의 마지막 모습을 기린 걸작이다.
육체는 갔지만 클레오파트라의 영광은 영원하리라고 예언하는 듯하다.
39세의 나이에 비해 한층 젊어 보이는 육체가 빛을 발하듯 누워 있다.
통곡하던 시녀 하나는 혼절해 있고, 다른 시녀는 여왕의 권위를 잡아 주려는 듯 왕관을 바로잡아준다.
동생들과 치열한 권력투쟁을 벌이고, 카이사르, 안토니우스와의 사랑을 통해 권력의 유지와 확대를 노렸던
클레오파트라. 그러나 그런 그녀도 자신의 모든 것을 '투자'한 안토니우스가 옥타비누스와의 내전에서 패함으로써
결국 빠져나오기 어려운 궁지에 몰리게 된다. 이처럼 악화된 상황에서도 그녀가 최선을 다한 것은 자식들만이라도
살아남아 이집트를 계속 통치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수고도 헛되이 그녀는 마지막 파라오가 되어버렸다.
시녀의 예언대로 클레오는 영원히 시들지 않는 존재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퐁파두르 부인>
모리스 캥탱 드 라투르, 1755년 종이에 파스텔, 178×131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악보를 읽다가 고개를 돌려 어딘가를 바라본다.
화려한 의상과 값비싼 가구, 멋진 실내 장식이 아니더라도 그 우아한 자태가 단박에 느껴진다.
루이 15세의 정부로, 아름답고 풍부한 교양에다 국정에도 막강한 영향을 끼쳤다.
책과 악보, 악기, 그림들은 그녀의 지적인 후광이다. 왕비였던 마리 레슈친스카의 측근조차도
"퐁파두르 부인은 내가 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 중 한 사람"이라고 할 만큼 뛰어난 미모였지만
그보다 그녀의 사려 깊은 마음씨와 예술적 교양, 남다른 지성이 왕의 발걸음이 잦아지도록 했다고 한다.
미술사에서 퐁파두르 부인의 초상은 하나의 장르를 형성했다고 할 정도로 빈번히 그려졌다.
대부분 그녀 자신이 위탁했던 사실로 미루어 자신의 매력을 드러내는데 집착했던 모양.
화가들로 하여금 자신의 모습을 나이보다 젊게 그리도록 하는 등 예술적 아우라를 최대한 발산했다.
라투르의 그림은 퐁파두르 부인이 서른네 살 때 그려진 것이다.
<퐁파두르 부인>프랑수아 부셰, 1756년 유화 212×164cm, 뮌헨 알테 피나코테크.
부세는 모두 12점이 넘는 퐁파두르 부인상을 그렸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 으뜸가는 작품이다.여러 소품은 그녀의 남다른 지성을 강하게 시사하는 대목이고, 화려한 의상과 배경의 다마스크 천 커튼 역시 그녀의 아름다움을 배가 시킨다. 퐁파두르 부인은 귀족 출신이 아닌 평민 출신이었지만,후견인의 도움으로 연기, 노래, 무용, 틀라비코드, 회화, 판화 등 다양한 예술 분야에 걸쳐 최상의 교육을 받았다.
<엎드린 소녀>
프랑수아 부세, 1752년경, 유화 59×73cm, 뮌헨 알테 피나코테크.
미모와 관능으로 퐁파두르 부인의 자리르 가로채려고 한 대표적인 여인의 한 사람이
카사노바가 '발굴'해 유명한 미녀 마리 루이즈 오머피다. 부세는 아직 왕의 정부가 되기 전 오머피의
앳된 모습을 그린 것이다. 열세 살짜리답지 않게 발달한 관능미와 순수미가 대조를 이룬다.
루이 15세가 오머피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도 그림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출>
프랑수아 부셰, 1753년 유화 318×261cm, 런던 윌리스 컬렉션.
셰
<일몰>
프랑수아 부세, 1752년 유화 318×261cm, 런던 윌리스 컬렉션.
위 두 그림은 퐁파두르 부인의 요청으로 부셰가 그린 것으로 화가 자신이 매우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했다고.
태양의 신 아폴로가 바다의 여신 테티스와 바다의 요정들을 떠나는 장면과 돌아와 그들의 환영을 받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이 그림에서 아폴로는 루이 15세를 상징하고, 테티스 여신은 퐁파두르 부인을 상징한다.
<운명의 여신에게 퐁파두르 부인의 목숨을 연장해달라고 호소하는 예술들>
카를 방로, 1764년, 유화 포클랜드 미술관.
퐁파두르 부인은 1764년 43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사인은 폐결핵이었다.
부인의 별세로 왕만큼이나 큰 상실감을 맛본 사람들은 프랑스 예술가들이었다.
그녀의 후원과 격려가 늘 큰 힘이었는데 예상보다 빠른 그녀의 퇴장이 아쉬울 수 밖에 없었던 것.
위 그림은 그들의 절절했던 심경이 담겨 있다. 운명의 여신이 가위로 부인의 명줄을 끊으려 하자
아폴로와 주위의 조각, 히화, 건축,음악이 간절한 자세로 그러지 말 것을 호소하는 내용이다.
<클리블랜드 공작부인 바버라 팔머>
피터 레리, 1666년경, 유화, 런던 국립 초상화 미술관.
바버라 팔머(1640~1709)는 영국 왕 찰스 2세의 정부였다. 찰스 2세는 많은 정부를 두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바버라 팔머는 가장 악명 높은 코티잔이었다. 그림이 보여주듯 그녀는 키가 컸고, 피부가 희었으며
관능적인 몸매를 지녔다. 로저 팔머라는 남자와 결혼했는데, 그녀가 왕의 정부가 되고 나서도 둘의 혼인 관계는
유지되었다. 그 덕에 남편 팔머는 왕으로부터 케슬메인 백작의 작위를 하사받았다.
그녀는 낭비가 심했고, 재물에 욕심이 많았으며, 질투가 대단했다고 한다.
<사랑의 전개>중 만남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루이 15세의 마지막 정부인 뒤 바리 부인의 의뢰에 따라 프라고나르가 그린 연작의 하나다.
뒤 바리 부인이 왕으로부터 하사받은 땅에 건물을 세운 뒤 카드놀이방의 장식물로 요청한 작품이다.
과거 유럽에선ㄴ 퐁파두르 부인처럼 왕이나 귀족, 권력자의 정부가 된 사람을 '코티잔'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일반적인 정부와 달랐고, 창부들과도 구별된 존재들이었다. 이들은 높은 지위의 후원자들과
관계를 맺을 뿐 아니라, 그 관계가 사회적으로 공인된 이들이었다. 따라서 코티잔이 후원자에게 제공하는
서비스는 단순히 성적인 것에 구한되지 않았다. 좋은 교육을 받고 교양을 갖춰 후원자의 정서적, 문화적
욕구까지 충족시킬 수 있어야 했다.
이처럼 유럽에서 코티잔 문화가 발달한 것은 정략결혼 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권력자들이나 귀족의 경우 가문과 혈통, 재산을 잇기 위해 정략적으로 결혼하는
경우가 많다보니 정서적이고 육체적인 만족을 이렇듯 혼외의 파트너게게서 찾게 된 것이다.
이것이 궁중문화와 귀족문화에 녹아들어 공식화되어 나타난 것이 바로 코티잔이었다.
<창부와의 성행위를 그린 고대 그리스의 도기 그림>
고대 그리스의 윤락문화에 대해서도 오늘날 꽤 많이 알려져 있는 편이다.
그리스 창부들에 대한 중요한 지식은 디 도기 그림으로부터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포세이돈 축제의 프리네>
헨리크 지미라즈키, 1889년, 유화 390×763cm, 상트페테르부르그 국립 러시아 미술관.
그리스 창부중 제일 높은 위치에 있는 헤타이라는 단순히 몸을 파는 존재가 아니라
남성들과 수준높은 대화를 할 만큼의 교양도 겸비한 고급 창부였다. 외국인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일반 그리스 여성들과 달리 비교적 충실한 교육을 받았다.
재색을 겸비한 헤타이라 가운데서는 유명인도 많이 나왔다.
사랑의 신 에로스로 꾸며지는 아이의 분장이 끝나면 프리네는 그림 왼쪽 계단을 따라
물로 걸어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물에서 탄생했다는 아프로디테의 신화를 재현할 것이다.
이는 자신이 아프로디테와 다름없다는 선언이다. 신화의 나라에 대한 환상이
당대 최고 창부를 통해 매우 인상적으로 재현된 그림이 아닐 수 없다.
<로마 폼페이 유곽의 벽화>
폼페이의 발굴은 이 고대 로마의 도시에 모두 34개의 윤락업소가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해주었다.
인구가 모두 1만 2000명쯤이었을 것으로 추산되니 인구에 비해 꽤 많은 윤락업소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성행위 그림들 가운데 일종의 브래지어 같은 것을 입고 있는 창부의 모습도있는데,
거기에 라틴어로 '살살 하세요'라는 글자를 써놓았다는 것이다.
<물랭가 : 건강검진>
알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 1894년, 유화,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
로트레크는 유흥업소 종사자들을 소재로 삼았을 뿐 아니라 그들의 문화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거기에 전 존재를 던졌다. 그의 친구 모리스 주아양에 따르면 "그는 반라의 여자들
엉덩이에 손을 얹고 자동 피아노 반주에 맞춰 춤을 추어달라고 요구"하는가 하면
"그들의 자태를 바라보며 황홀경에 빠져들곤 했다"고 한다.
<거리의 여인들>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로히너, 1915년, 유화 126×90cm, 폰 데어 호이트 미술관.
나체이 남녀가 자연에서 자유롭게 어울리는 나체주의 그림으로 유명한 독일 화가 키르히너는
창부들을 그릴 때는 오히려 옷 입은 모습을 즐겨 그렸다. 일반 시민들이 보기에는 이들은 당연히
퇴폐와 타락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키르히너에게는 그들이 순수와 정직의 상징이었다.
<거울 앞의 창부>
조르주 루오, 1906년 종이에 수채, 70×60cm, 파리 국립 근대 미술관.
조르주 루오는 '20세기 유일한 종교화가'로 불린 만큼 종교적인 색채가 짙은 그림을 많이 그렸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에 대한 그의 관심은 이런 종교적인 태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 핵심적인 주제가 창부와 어릿광대였다.
이런 이들을 그림으로써 루오는 인간의 진실한 내면을 보고자 했다.
<오달리스크>
마리아노 포르투니 이 마르살, 1861년, 유화 56.9×81cm, 바르셀로나 근대 미술관.
매우 관능적인 그림이다. 아리따운 오달리스크가 누워 있고, 비록 남자 악사가 앞에 있지만
하나도 거릴낄 게 없다. 몸을 뒤틀어 이른바'S라인'을 부각시키는 한편, 골반에 손을 얹어
은근히 유혹하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화가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대상이 바로 이 요부적 관능이다.
<그랑 오달리스크>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1814년, 유화 91×162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앵그르의 오달리스크 역시 노예라기보다는 귀부인 혹은 고급 창부처럼 보인다.
그녀가 허드렛일이나 고달픈 노동과 아무 관계가 없다는 사실은 매끄러운 그녀의 발이 잘 증명한다.
얼굴과 몸 역시 흠이나 티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런 이미지는 사실과 다르다. 오달리스크는 오스만 제국 술탄의 여자 노예다.
술탄의 노예라고 하나, 하는 일은 술탄이 아니라 술탄의 처첩들 시중을 드는 일이었다. 그 점을 생각하면
이같이 화려하고 나른한 관능의 표현은 그다지 현실성이 없어 보인다. 당대 유럽의 남성들이 오리엔트의
여성에 대해 막연히 가지고 있던 기대와 로망을 이런 주제의 그림으로 표현한 것으로 봐야 한다.
<하렘의 빛>
프레더릭 ㄹㅣ이턴 경, 1880년경, 유화, 162.4×83.8cm, 개인 소장.
평범하기 그지없는 소재이나, 화가의 농익은 붓을 통해 은근한 에로티시즘의 색채가 더해졌다.
일상의 한 장면을 그린 그림이지이만 저벽변에는 욕망의 판타지가 흐르고 있는 것이다.
유럽의 화다는 이처럼 화장이라는 일상적인 행위로부터도 오리엔트 여성의 비밀스러우면서도
관능적인 판타지를 보았다. 그들이 보기에 하렘의 여인은 언제 어디서나
이처럼 치명적인 에로티시즘의 소유자여야 했던 것이다.
<백인 노예>
장 쥘 앙투안 르콩트 뒤 노위, 1888년, 유화 183×149.5cm, 낭트 미술관.
오리엔트 여성을 주제로 한 유럽 화가들의 그림 가운데는 목욕 장면을 다룬 게 유난히 많다.
관능적인 여성상을 그리려면 누드를그려야 하는데, 목욕 장면이 이를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오스만의 목욕탕은 하맘이라고 불린다. 하맘은 단순한 목욕탕이 아니라
일종의 사교 센터였다. 오스만 여성들의 목욕문화를 직접 지켜볼 수 없었던 유럽의 남성 화가들은
하맘의 여성들을 모두 젊고 예쁜 여성들로만 그렸다. 그들의 붓끝에는 그만큼의 관음증적인 호기심이 배어 있다.
<노예시장>
장 레옹 제롬, 1866년, 유화 84.3×63cm, 매사추세츠 클라크 아트 인스티튜트.
오달리스크와 하렘, 하맘과 함께 가장 많이 그려진 오리엔탈리즘 회화의 여성 주제는 노예시장이다.
그림의 초점은 오로지 여인의 누드와 그녀를 사고파는 남자들의 지배자로서의 권력에 맞춰져 있다.
이런 성적, 가학적 표현이 유럽인들의 판타지를 크게 고양시켰다.
<노예시장>
장 레옹 제롬, 1871년, 유화 75×60cm, 신시내티 미술관.
위의 그림에 비해 노예 여성이 처한 고통에 좀더 관심을 기울인 작품이다.
그림에 등장하는 여인들 대부분이 지쳐 있거나 두려워하는 존재들이다.
맨 왼쪽의 여인만 다소 예외적인 느낌이다. 그림에 의도적으로 관능의 요소를 더함으로써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고자 한 게 아니냐 하는 의심을 살 수 있는 표현이다.
19세기 내내 무수히 그려진 오리엔트 여성 주제의 그림에는 이런 도착된 우월의식과 계몽의식이
면면히 깔려 있다. 시대의 자식인 그림은 이렇게 그 시대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흑사병>
아르놀트 뵈클린, 1898년, 나무에 템페라, 149.5×104.5cm, 바젤 미술관.
검은 옷에 해골 형상의 남자가 날개 달린 괴물을 타고 중세의 거리를 날아다닌다.
그가 지나간 곳에는 사람들이 픽픽 쓰러지거나 혼비백산해 도망치려 한다.
흑사병에 대한 유럽인의 공포와 본능적인 거부감이 잘 표현된 그림이다.
전염병은 유럽 문명의 행로를 여러 차례 바꾸어놓았다.14세기에는 당시 유럽 인구의 3분의1이
제물로 사라지기도 했다. 1348년 평균 수명이 25세였던 영국인들은 1376년 17세로 내려갔다.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죽음이 있는 자화상>
아르놀트 뵈클린, 1872년, 유화 75×61cm, 베를린 국립 고전 박물관.
전염병으로 자녀를 잃은 화가의 우울한 내적 정서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의 귀에 가까이 대고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죽음의 제스처도 섬뜩하지만, 그 소리에 홀린 듯
멍하니 어딘가를 바라보는 그의 표정도 섬뜩하다. 그의 자녀들 뿐만 아니라 그 스스로가 죽음의 희생자라고
말 하는 듯하다. 작곡가 말러는 이 그림에 영감을 받아 '교향곡 4번, G장조'의 스케르초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림 속 죽음의 느낌을 음악에서 그대로 살리기 위해 말러는 솔로이스트로 하여금
바이올린을 부적절하게 튜닝해 연주하도록 했다고 한다.
<죽음의 승리>피터르 브뤼헐, 1560년경, 유화 117×162cm,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해골로 이루어진 죽음의 군대가 인류를 종말의 세계로 매몰차게 몰아세우고 있다. 자비는 찾으려야 찾을 수 없다. 이 무정한 싸움은 무조건 인간의 패배로 끝나게 되어 있다.흑사병과 같은 전염병은 죽음에 대한 극단적인 공포를 가져왔지만, 동시에 죽음이 모두에게 평등하다는 사실도 일깨워 주었다. '죽음의 춤'을 주제로 한 많은 그림이 다양한 계층의 사람을 동원하거나 그들이 춤을 추는 형식으로 그려졌다는 사실 자체가 평등에 대한 이들의 진보된 인식을 보여 주는 것이다.
<성 세바스티아누스>안드레아 만테나, 1457~1458, 유화 68×30cm, 빈 미술사 박물관.
그림 왼쪽 상단의 구름을 가만히 보면 말을 타고 가는 남자의 모습이 나타난다.「요한계시록」6장에 나오는 백마를 탄 이를 묘사한 것이다. 사람을 죽이는 권한을 가진 그는활을 든 존재로 묘사되었는데, 그게 전염병은 신이 쏜 화살에 맞은 것이라는 민간신앙과 상통한다.이 모티브를 넣음으로서 성 세바스티아누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무덤 파는 이의 죽음>
카롤로스 슈비베, 1890년대, 혼합재료, 75×55.5cm, 파리 모르세 박물관.
한 노인이 땅을 파고 있다. 새로운 주검을 주검을 누일 준비를 하는 것이다.
오랜 세월 이 일을 해온 노인은 그저 무심히 오늘도 삽을 들었다.
하지만 오늘은 특별한 날이다. 왜냐하면 이 무덤은 오늘 그가 묻힐 곳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을 알려주려는 듯 죽음의 사자가 무덤가에 내려앉았다. 우아한 자세로 그녀가 말한다.
"노인장 수고했소, 이제 이곳에서 영원한 휴식을 취하시오."
그녀오 오른손에 들린 작은 불빛은 노인의 영혼이다.
죽음에 충성해온 노인이지만 그 역시 죽음을 면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이런 죽음의 자로 삶을 재는 자가 지혜로운 자라고 이 그림은 말한다.
<제인 그레이의 처형>
폴 들라로슈, 1833년, 유화 246×297cm, 런던 내셔널 갤러리.
왕조시대의 군주는 절대권력이다. 그런 까닭에 군주르 제거하려는 세력은 법에 호소하기보다는
주로 암살을 기도한다. 하지만 때론 정변이나 혁명이 성공할 경우 무력화된 왕을 법의 이름으로 처단하곤 했다.
흥미롭게도 서양에서는 이런 주제의 그림이 곧잘 그려졌다. 이 그림은 그 중에서도 군주의 처형 장면을 가장
인상 깊게 전해주는 걸작이다. 제인 그레이는 불과 2주가 못 되는 짧은 기간 동안 영국 왕위에 올랐던 소녀이다.
마치 봄날의 꽃처럼 잠깐 피었다가 사라진 비운의 군주로1554년 2월 12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것이다.
처형 직전 암송한 시편 51편에는 그녀의 심정을 반영하는 글귀가 나온다.
"하느님, 내 재물은 찢어진 마음뿐, 찢어지고 터진 마음을 당신께서 얃보지 아니하시니..."
<찰스 1세의 관 곁에 서 있는 그롬웰 >
폴 들라로슈, 1849년, 유화 226×291cm,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슈 박물관.
그림에는 오로지 두 사람만이 등장한다. 찰스 1세와 그롬웰이다. 주검이 된 찰스 1세는 관 속에 누워 있다.
크롬월은 관 뚜껑을 열고 한때 세상을 호령했던 군주의 얼굴을 내려다본다.
흔히 청교도혁명이라 불리는 영국혁명이 지도자 크롬웰은 청교도의 금욕적이고 엄격한 이미지와
호국경에 올라 펼친 독재 때문에 곧잘 극단적인 인물로 오해되곤 하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그는 왕당파가 공격하듯 악인도 아니었으며 위선자도 아니었다.
탁월한 조직가와 정치가의 면모를 보여주었으며, 대화와 타협을 중시했다.
아무튼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화가의 상상을 덧붙여 표현한 그림이라 하겠다.
<카인과 아벨>
로비스 코린트, 1917년, 유화 150×114cm, 뒤셀도르프 미술관.
1차 세계대전 중에 그려진 이 그림은 당시 유럽의 자화상이라 할 만하다.
피묻은 손으로 돌을 든 카인과 무참히 뭉개진 아벨, 그리고 그 위로 쏟아지듯 날아오는 까마귀떼,
신의 저주를 두려워하기에 앞서 형제를 향한 자신의 저주에 더 몰입해 있는 인간,
1차 세계대전에서 그 뜨거운 불길을 목도한 화가는 격렬한 사선의 붓질로 화면을 뒤덮어버렸다.
코린트 특유의 두꺼운 붓질이 이 같은 격렬함을 더욱 부채질 한다.
찐득찐득한 물감 위로 미끄러지는 터치는 당시 심연 속으로 무수히 빨려들어간 유럽의 영혼들을 상기시킨다.
<젊은 미망인>
리하르트 차글러, 1925년, 유화 102×61cm, 개인 소장.
그림 속의 여인은 전쟁으로 남편을 잃었다.
애도의 정서 속에서도 과감히 옷을 벗어버렸다. 거울 안의 여인은 거울 밖의 몸보다 더 붉게 타오른다.
여성을 능동적 욕망의 주체로 표현한 것은 이전의 그림들에서는 창부에게나 한정되어 있었지만
이 그림에서는 보통 여성, 그것도 미망인을 이렇듯 욕망의 주체로 표현하기에 이른 것이다.
유럽의 가치관 변화를 읽을 수 있는 그림이다.
<그림자로 병든 이를 치료하는 성 베드로>
마사초, 1427~1428년, 프레스코 232×162cm, 로마 산타마리아 델 카르미네.
앞을 보고 성큼성큼 걷는 베도로의 뒤를 다른 한 사도가 따르고 있다.
붉은 천을 걸친 모습이 사도 요한처럼 보인다. 환자와 보호자 앞을 지나면서 베드로의 그림자가
그들을 비추고 지나갈 것이다. 그러면 그들의 병이 낫고 걷게 하는 능력을 뜻하는 것이다.
초대 교회가 생각한 카리스마다. 그러나 이런 관념은 급속히 약화되고
경전과 규약, 전례, 조직, 리더십 등을 더 중요한 공동체 활동의 중심으로 삼게 된다.
<히틀러의 초상>
하인리히 크니르, 1937년, 유화 127×76cm, 런던 제국 전쟁박물관.
카리스마의 이미지는 화폭으로도 옮겨진다. 카리스마는 당연해 민주주의와 긴장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개인의 지배력은 선동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포플리즘에 능한 경우가 많다
그 대표적 인물 히틀러의 초상이다.
<레트로액티브>
로버트 라우센버그, 1964년, 유화 213×152cm, 코네티컷 워즈워스 아테네움 미술관.
개인적인 매력의 소유자 케네디의 카리스마를 그린 그림이다.
그림 내용 속 여러 정황으로 볼때,
케네디는 마치 신의 위치를 점한 듯 불의를 행한자를 추방하는 존재로 부각된다.
케네디는 텔레비전의 영향력인 개인적 매력 부각에 성공한 인물이다.
<바니타스 정물>
안 트렉, 1648년, 유화 90.5×78.4cm, 런던 내셔널 갤러리.
금욕주의를 대표하는 17세기 걸작이다.
드로잉, 악보, 담뱃대, 조가비와 갈대, 피리, 비올, 투구, 칠기상자 등과 함께 해골이 등장한다.
그림이 주제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담뱃대는 인생이 연기와 같이 사라짐을, 조가비와 갈대도 찰나를 의미하며 드로잉과 악기, 희곡 등의
예술은 모두 우리 인생에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해골은 인간의 운명에 대한 비극을 웅변한다.
이처럼 그림의 사물 하나 하나 모두에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어머니의 손길>
피터르 더 호흐, 1673년, 유화 74×63cm, 모스크바 푸시킨 박물관.
자녀 양육의 중요성을 말하는 그림이다. 그림의 배경은 부유한 시민의 내실이다.
화면 외편 몸단장을 하는 젊은 여인이 외출의 주인공이고 아이의 차림새를 챙기는 여인이 그녀의 하녀같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다. 아이를 매만지는 여인이 이 집안의 안주인이다. 하녀는 지금 자기 차림새를
꾸미기에 여념이 없는 중이다. 이 무렵 네덜란드 여성들이 어떤 윤리 의식을 가졌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부유하고 하인 하녀가 많다 하더라도 네덜란드 안주인들은 자녀를 스스로 보살피고 교육했던 것.
네덜란드 시인 야코프 카츠는 말한다.
"자식을 낳은 여성은 단지 반만 어머니일 뿐이며, 자식을 양육한 여성만이 완전한 어머니다."
<산이 있는 풍경>
야코프 판 라위스달, 1656~1660, 유화, 모스크바 푸시킨 미술관.
짙푸른 소나무와 죽어가는 나무나 말라비틀어진 나무를 함께 그렸다.
자연의 역동성과 함께 죽음의 불가피성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데,
이는 삶의 유한성과 근면과 성실의 가치를 고양시키기 위한 의미로 볼 수 있다.
<디오게네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1882년, 유화, 시드니 뉴사우스웨일스 미술관.
대낮이 어둡다고 등불까지 켜고 옹기 안에 들어 앉은 디오게네스를 그렸다.
<소크라테스의 죽음>
고대 그리스의 철인을 묘사한 서양화 가운데 가장 유명한 그림일 것이다.
침상에 앉아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다른 손으로 독배를 잡으려는 소크라테스.
주위에는 슬픔과 좌절에 빠진 제자들과 노예가 보인다. 침상 끝에 묵묵히 앉은 노인은 플라톤이다.
서양 철학의 위대한 뿌리인 그를 너무 젊게 그릴 수 없어 중후한 이미지로 표현했다.
<호메로스와 그의 안내자>
윌리앙 아돌프 부그르, 1874년, 유화 208.9×142.9cm, 밀워키 미술관
『일리아드』와『오딧세이』의 저자 호메로스는 유럽 최초의 시인이자 최대의 시인으로 일컫는다.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그토록 끊임없이 서로 경쟁하고 분열하고 증오하면서도 끝내 '우리는 하나'라는
인식을 소유할 수 있었던 게 바로 호메로스의 경전 덕이었다.
호메로스가 그의 눈이 되어준 소년이 손을 잡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다.
조롱을 퍼붓는 젊은이들과 한 마리의 개가 사납게 짖어댄다. 소년의 손에는 이른바 짱돌이 들려있다.
모두들 감정의 동요를 보이는 와중에도 호메로스만이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고 있다.
역사의 심장을 궤뚫는 해안을 그려낸 화가의 능력을 높이 사고 싶다.
<사포와 알카이우스>
앨머 테디마, 1881년, 유화 66×122cm, 볼티모어 월터스 아트 갤러리
지중해의 푸른 물결과 소나무이 시원함을 배경으로 당대 최고의 시인 사포와 알카이우스가 시를 교환하고 있다.
사포의 주위엔 아리땁고 순수해 보이는 소녀들이 앉아 있는데, 이는 사포의 레즈비언 설을 뒷받침 한다.
이렇듯 서양 화가들은 오랜 세월 그리스의 지성과 예술혼을 반복적으로 형상화 하면서 자신들의 예술이
그 위대한 가치를 얼마나 충실히 드러내고 있는지 늘 성찰했다. 그들은 고대의 지성과 예술혼이 보여준
최고의 경지에 이르고 싶어했다. 떠올리고 떠올려도 여전히 그리운 추억과 향수처럼
그리스의 정신과 예술혼은 그렇게 서양 예술의 깊고도 방대한 뿌리가 되어주었다.
그리스 천재 조각가 <페이디아스와 파르테논 프리즈>
앨머 테디마, 1868년, 유화 72×110.5cm, 버밍엄 미술관.
프리즈 조각은 건물을 둘러 표현된 장식부조를 말한다.
로마의 지성<세데카의 죽음>
자크 루이 다비드, 1773년, 유화 123×160cm, 파리 포티 팔레 미술관
네로 황제에 의해 자결을 명받은 세네카의 죽음을 드라마틱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단테의 배>
페르디낭 들라크루아, 1822년, 유화 189×246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베르길리우스는 로마의 시성이자 전 유럽의 시성으로 칭송받는 시인이다.
로마의 건국 서사시 「아이네스」와 「농경시」를 풍부한 교양과 완벽한 기교로 써냈다.
단테는 『신곡』에서 그를 자신을 위한 지옥의 안내자로 등장시켰다.
이 그림은 바로 그 영감을 시각화한 것이다.
<부루투스에게 아들들의 주검을 날라 오는 형리들>
자크 루이 다비드, 1789년, 유화 323×422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로마의 역사를 빌려 공동체의 선과 애국심에 호소한 다비드의 또 다른 걸작으로
혁명의 이상인 자유와 평등, 그리고 공화정의 가치에 대해 더욱 분명한 입장을 드러낸 그림이다.
<헥토르의 죽음을 슬퍼하는 안드로마케>
자크 루이 다비드, 1783년, 유화 172×123cm, 에콜 데 보자르
영웅 헥토르는 트로이 전쟁에서 영웅 아킬레우스의 맞수 노릇을 했다.
그의 투구와 칼은 바닥에 내려져 있고, 머리에는 월계관이 씌워져 있다. 남편을 잃은 안도로마케의
측음함이 안쓰럽다. 그러나 잔인한 운명 앞에서 존엄을 잃지않는 부분에 다비드는 초점을 맞추고 있다.
당대 관객들이 왜 다비드의 역사화를 '삶에 대한 철학 강의'라 불렀는지 이해할 수 있다.
<민투르나이의 마리우스>
장 제르맹 드루에, 1786년, 유화 271×365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다비드의 스타일과 주제의식을 이은 제자중의 한 사람이 장 제르맹 드루에다.
고대 로마의 장군이자 정치가인 마리우스는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였다.
자기를 죽이려는 암살자와 맞짱을 뜨는 내용이다.
네이처리즘
벌거벗고 태어난 인류, 벗는 자유를 외치다
<모리트부르크의 목욕하는 사람들>
에른스트 ㄹㅜ트비히 키로히너, 1909년, 유화 151×199cm, 런던 테이트 갤러리
누드 미술에 대한 긍정은 벌거벗음 자체에 대한 긍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벌거벗음에 대한 서양 문명의 긍정적인 인식이 잘 표출된 것이 네이처리즘이다. 누디즘이라고도 불리는
이 나체주의 흐름은 20세기 들어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 곳곳에 누드 비치 등 나체촌을 만들어 놓았다.
가뜩이나 누드를 중요한 주제로 다뤄오던 서양미술은 이 흐름과 만나 한층 적극적으로 누드를 표현한다.
<세 누드>
카롤 슈미트로돌루프, 1913년 유화 98×106cm,
표현주의 화가들이 네이처리즘 주제를 즐겨 그린 시기는 1909~1911년 무렵이다.
요양원과 헬스 리조트가 많은 드레스덴 북쪽의 모리트부르크 호수에서 벗은 채 놀며 그림을 그렸다.
이 시설들은 자연치료와 누드 요법 같은 대안치료를 중시했던 영향도 컸다.
<무제>
에릭 피슬, 1987년, 유화 152.4×114.3cm, 개인 소장
전형적인 네이처리스트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자연이나 건강, 평화주의 등의 가치르 추구하느라 벗은 게 아니라, 그저 벌거 벗고 싶어 벗은 이들로
넘쳐나는 세상이다. 다소 피곤해 보인ㄴ 표정이나 제스처에 아무런 수치감도 배어 있지 않다.
이런 피로감과 나른함이 피슬의 그림을 이루는 핵심적인 특징이다.
<샤가 지나간 날>
에릭 피슬, 1982년, 유화 91.4×121.9cm, 개인 소장
그러나 이 그림은 예기치 못한 자극이 표현되어 있다.
선텐 중 여인이 뭔가를 발견한 듯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본다. 그곳엔 반바지의 남자가 조깅을 하고 있다.
그 남자는 이란 국왕이었던 팔레비다. 갑자기 돌출한 그 망명객으로 인해 나른하던 누드 비치에 갑자기
작은 파문이 인다. 하지만 그도 잠시, 여인은 금세 익숙한 나른함으로 돌아갈 것이다.
조깅하는 팔레비는 작은 자극일 뿐, 일상의 피로는 여전할 것이기 때문이다.
<트리스피릿> 연작 - 매력의 법칙
잭 게쉬트, 2007년, 사진.
숲 속의 나무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주위에 다양한 평태로 어우러진 모습이다.
벌거벗은 사람들이 나무에 올라가기도 하고 나뭇가지에 누워 쉬기도 한다. 나무가 상징하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 회복을 염원하는 작품이다. 참가자들은 지원자들로 금전적인 대가 없이
자신의 모습이 찍힌 사진 한 장씩을 기념으로 받는다.
작가의 관심사느 공공장소에서 벌거벗는 것을 금하는 법과 도덕률에 도전해
이를 사회적으로 재고하게 하는 것이다. 태고적 추위에 떨며 옷을 꿈꾸었던 인간이
이제 이처럼 다시 옷을 벗기를 꿈꾸고 있다.
참고서적 : 이주현 저 『역사의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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