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 동학 長興 東學
집결지 /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관
회합 일시 : 2017. 7. 15~16
조형물 / 석대들 다시 일어나라
천도교 장흥 교구장 김연홍(84세) 숙덕 어른을 모시고...
기념관 내부에 걸린 그림
장흥동학혁명을 이끈 사람 들.
『영원의 불』 전시관에 모셔진 장흥동학농민혁명 전사자 및 참여자 명단.
장흥 동학을 응원키 위해 경향 각지에서 오신 동덕님들의 전시관 관람.
장흥 교당을 방문한 7인의 心告.
장흥 교당 내부
김연홍 교구장님으로 부터 장흥 교당의 현황 청취
청수봉전과 주문.
함께한 동덕님. 왼편부터
이시복 / 정덕재 / 박정균 / 김동철 / 안 웅 / 박경훈 / 신승한 / 사진 外 茶泉
교당 부속실
장흥 교당에서 당겨 본 장흥의 상징, 억불산과 며느리 바위.
장흥 회진 덕도 소재, 장흥 남부교구장 김동철(85세) 동덕님 댁 방문.
"모시고 반갑습니다."
두 분 어른을 모시고 듣는 '장흥 동학'의 현항과 역사.
현 장흥교구장 김연홍(왼편) 동덕님과 전 교구장 김동철 동덕님 두 분 숙덕 어르신의 문답.
김동철 어른의 주거지인 이곳 덕도는 원래 섬이었으나 지금은 전혀 섬의 모습을 찾을길 없다.
이곳에서 가까운 곳 장산마을엔 장흥동학농민혁명 때 《소년 뱃사공》으로 널리 이름을 떨친 윤성도 선열의 증손자
윤병추(85세) 어른도 살고 계신다. 일전, 박경훈 동덕님과 숙덕 어르신을 방문하여 대담과 함께 여러 사진을 찍었으나,
알 수 없는 이유로 모든 사진을 날리는 바람에 단 한 컷도 싣지 못하게 된 점이 몹시 아쉽고 그저 안타까울 뿐.
장흥 동학의 새로운 시작을 결의하는 자리.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김동철 숙덕 어른께서 청력이 몹시 약한 관계로 소통의 폭이 그리 넓지 못하다는 사실.
하지만 어른의 기억력과 동학에 대한 열정만큼은 가히 노쇄한 기력을 저만치 밀어 내고 있었다.
장흥 동학의 또 다른 상징.
'선인들의 찬연한 혼을 기리는 비'라는 제목하에
소설가 한승원의 미려한 문체가 돋보이는 문장이 오석에 새겨져 있다.
김연홍 교구장님께서 이 탑이 접도 신상리에 세워지게 된 내력과 장흥교구 내로 옮기지 못한 까닭,
탑 전면에 새겨진 문구 등에 대한 아쉬움 등, 저간의 이런 저런 사정에 대한 견해를 피력하고 계셨다.
탑 옆에 자리한 '간략 기념관'이라고나 해야할지...?
수북히 자라난 풀 일부를 제거하고 나서 찍은 컷임을 말하기 민망할 정도.
장흥 동학의 끈을 오늘날까지 이어 오신 김동철 전 교구장님께서
후학들의 이해를 돕는 이런 저런 서적과 자료를 내놓으셨다.
아래는 위 책 가운데 '총부'가 발행한 "교사교리연구" 중
'장흥동학농민혁명'에 관한 부분을 발췌한 내용이다.
※ 위 사료집에는 『오하기문(梧下記聞)』을 비롯한 17편에 달하는 '유생들의 기록'과
『순무선봉진등록(巡撫先鋒陳謄錄)』등 5편에 달하는 '관변 기록' 『동학사(東學史)』를 비롯한
3편의 '농민군 기록과 '동학(천도교) 기록'과 4편의 '일본 기록'등이 실려 있다.
※ 아래 사진은 위 책에 실린 사진을 빌려온 것이다.
박헌양 부사 순절비각.
광서 20년 갑오동란 수성장졸 순절비.
부사 박헌양과 함께 순절한 장졸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송사 기우만(奇宇萬)이 찬한 박헌양의 공적에 관한 글이 새겨져 있다.
장흥부사 이용태 선정비
1854년생, 벼슬에 오른 후 장흥 부사로 있던 중, 고부에서 민란이 일어 조병갑이 쫓겨나자
정부에서는 이용태를 안핵사로 임명하여 민심을 달래려고 했다. 이용태는 고부의 민심을 달래기는 커녕
모든 책임은 동학에게 있다"면서 동학 교도는 물론, 사건과 무관한 사람들까지
수 많은 이들을 도륙한 '친일인명사전'을 대표하는 인물.
영화당.
관군의 후손들에 의해 1898년 장녕성의 동쪽에 설단하였다가
1928년 현재의 자리인 장흥읍 예양리 남산공원 기슭으로 이전하였다.
동학농민혁명이 섬멸된 후 조선의 정부는 장흥도호부 부사 박헌양에게 참의의 벼슬을 증하고
박헌양과 함께 죽은 수성장졸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그 뜻을 기리기 위해 영회당을 헌액하고
당시로는 규모가 큰 순절비를 건립하였다.
장흥 성내
※ 아래는 지난 2002년 <장흥타임스>에 실린 내용으로,
현재의 장흥 동학 상황과는 다소 거리가 있으나 장흥 동학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기사 내용 중 일부를 발췌하여 이 자리에 옮겨 본다.
동학농민혁명 과정에서 장흥지방의 농민봉기와 농민군의 역할은 독특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장흥의 동학농민군은 전봉준 장군의 1·2차 기포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다른 지방에 비해 농민군의 규모나 집강소 설치시기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이는 그 동안 장흥의 백성들이 장흥도호부, 벽사역 등의 탐관오리와 토호들의 억압과 수탈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했기 때문에 더욱 동학농민혁명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것이다. 이러한 원한은 동학농민혁명의 불길이 마무리되어 가는 시점인 갑오년 12월에까지도 치열한 최후 항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장흥의 동학농민혁명은 혁명 자체가 좌절되어 가는 과정에서 실패가 불을 보듯 환히 드러났지만 장흥 동학농민군은 죽을지언정 결단코 더럽게 살지 않겠다는 갑오년의 역사적 대의를 지키고자, 저! 유명한 석대들에서 경군, 일본군, 지역토호의 민보군으로 구성된 연합군과 최후항쟁을 격렬하게 수행하다가 거의 다 목숨을 잃었고, 전투가 끝난 후에는 현재의 원도리 장흥교도소 일대의 벽사역, 현재의 장흥서초등학교의 장대, 강진 병영 등에서 관군에 의한 피비린내 나는 학살을 당했다.
장흥 동학농민군의 꿈이 좌절되고 근대사회를 열고자 했던 농민군들의 의지는 실패하고 말았어도 장흥 동학농민군이 남긴 반봉건 반침략의 항쟁정신은 갑오년 이후 의병항쟁으로, 또는 일제 강점기 강렬한 민족독립운동으로 계승되었다. 뿐만 아니라 장흥 농민군의 고귀한 투쟁의지는 오늘의 장흥인들에게 면면히 계승되어 장흥농민군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어 의향장흥의 밑거름이 되었다.
사실 동학농민군의 후손들이 선조가 농민군에 가담했다는 말을 입밖에 낼 수 있기 시작한 것은 십년도 체 안된다. 몇 년전 까지만 해도 장흥군에서 동학농민혁명에 주도적으로 가담한 한 씨족의 족보에는 동학농민혁명에 가담하여 처형된 사람들의 사망연대가 대부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기 2년 전이나 2년 후로 기록되어 있었다. 지금은 혁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조선말기부터 3공시절까지는 동학난으로 부르는 때라 후손들에게는 선조가 농민군에 가담했다는 사실이 연좌제와 같은 무서운 형벌이 아닐 수 없었다. 아마 후손들이 사망 연대를 조작했던 것은 원한 맺힌 죽임을 당한 선조에게 사악한 비도라는 누명을 씌우지 않기 위해 당시로서는 최선의 자구책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장흥군에서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인식을 대표하는 것으로 영회당의 비문을 들 수 있다. 이 영회당 비문에는 "갑오년에 사악한 비도(匪徒)들이 당을 체결하니", "저들이 궁한 도적이 되어 그 악독함을 부림으로써", "아! 정의를 해치는 사악은 진실로 천지간에 용납될 수 없는 바", "슬프다 저 사악한 무리들은 다만 만번을 죽이어 그칠 일이 아니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마치 5,18광주민중항쟁에 참여한 시민군들을 "폭도"로 규정한 「육군전투상보」처럼 도탄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의연히 일어선 농민군을 그냥 도둑도 아닌 사악한 도둑이라고 했다. 농민군들이 집강소를 설치하여 폐정개혁을 하고, 일제로부터 나라를 구하는 일이 정의를 해치는 사악으로 규정한 영회당의 비문이 오늘날 천지간에 용납될 수 있는 말인가! 더구나 농민군을 만번을 죽이어 그칠 일이 아니다라고 까지 비문에 새겨 후세에 무슨 교훈을 남기겠다는 말인가?
이러한 표현은 비단 영회당 비문뿐 아니다. "영회당서시"에는 "동비(東匪)들이 창궐", "슬프다 동비(東匪)가 처음 일어날 때는 비록 장리(贓吏)들의 스스로 취한 원인이 없다할 수 없겠으나 기(旗)를 세우고 명칭을 들어 관리를 도살하고 조정의 명을 거역하며 성을 공격하고 재물을 약탈함에 이르러서는 진실로 비적(匪賊)의 무리가 틀림없는 것이니 이들을 소탕하지 않으면 화가 장차 만연될 것이다." 영회당우풍성요구문(永懷堂宇風聲要求文) 및 관찰사회시문(觀察使回示文)에는 "지난 갑오년 동비(東匪)의 소요가 있던 초기 비류(匪類)들 이 세상을 현혹함을 분히 여겨 의리를 들여", 임금에게 문서로 작성한 내용을 아뢰는 일성록 연설격주( 說 奏)에는 "장흥의 영회당은 사람과 짐승의 분별이 없었던 날에 세웠습니다." 영회당 이건 상량문에는 "올빼미와 사나운 짐승의 흉독한 마음을 부렸고, 산돼지와 뱀의 탐욕한 꾀를 도모하였다."라고 장흥 동학농민군을 규정했다.
또한 영회당 이건기에는 대한제국의 멸망원인을 농민군이 앞장서서 주창하였다고 했다. "우리 대한제국의 옥사(屋社)는 갑오 동비(東匪)가 전모(前茅)가 되어 수창(首倡)한 것이다."라고 했다. 영회당에서 수성군에 대한 제를 올리면서 장흥 동학농민혁명 전투과정에서 희생된 장흥농민군에 대한 "동도(東徒)의 귀신에세 고유(告諭)한 글"에는 "운운 삼가 떡과 밥과 나물과 과실을 갖추어 맹서하고 너희들 거친 모래 젖은 언덕에 널리 버러져 있는 백골의 동도 귀신에게 고한다. 당초 선량한 백성으로서 마침내 요망한 자의 유인한 바 되어 무리를 모아 약탈을 자행하다가 끝내는 성지를 함락하고 인명을 살상하는데 이르러 가득한 죄를 지었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너희들의 본성이랴. 육기가 화평하지 아니하고 사시(四時)가 순서를 잃어 창자가 바뀌고 진정을 잃으므로써 시기에 편승하여 함께 떠드는 것이 어리석은 백성들이니 괴이한 일이라 할 것도 없다. 내 이제 너희들의 정실(情實)을 알아 음식을 주니 모두들 원한을 풀고 풍결한 제물을 배불리 먹어 각자 의지하고 사람에게 얽히어 해하지 말라, 천지신명도 또한 너희들을 용납하여 꾸짖지 않을 것이다. 너희들 어찌 감동함이 없으랴."했다.
동학농민혁명이 혁명이 아닌 동학난인 시절의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역사인식이었다 하더라도 너무나 잘못된 역사인식이며, 한치 앞의 앞날도 내다보지 못한 부끄러운 기록이다. 사악하기로 말하면 동학농민군이 아니라 부패한 탐관오리와 토착기득권 세력인 토호였다. 이를 두고 도둑이 매를 든다고 하는 것이다. 또한 어찌 대한제국이 멸망한 탓이 동학농민군에 있다는 말인가? 대한제국이 멸망하게 된 원인은 무능한 봉건왕조와 타락한 사대주의 봉건관료들이 나라를 일본에 팔아먹었기 때문이지 동학농민군이 앞장서서 주창하여 멸망한 것이 아니다.
또한 혹자는 박헌양 부사와 수성장졸들이 농민군의 반격에 도망가지 않고 끝까지 장흥도호부를 사수하다 순절한 것을 조선 왕조시대를 지탱한 충절로 여겨 미화하고 있다. 영회당 중건기에 "장흥의 순절한 장병들은 비록 한 겨울 눈 속에 푸르름을 잃지 않은 외로운 소나무라 하여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라고 했다 또한 장흥유생 백영직은 그의 문집 육유집(六有集)의 박후의적(朴候義蹟)에서 박헌양 부사를 "절개를 굽히지 않고 선비로서 의롭게 죽었다. 선비란 마땅히 정의가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면 방어할 수단을 다 동원해야 하는 도리를 아니할 수 없는 것은 곧 그것이 선비에게 주어진 천명이기 때문이다."라고 찬양했다.
하지만 우리는 장흥부사 박헌양이 과연 절개와 충절을 지킨 선비었던가는 재조명해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장녕성을 끝까지 지킨 것만 가지고 충절이라 하기에는 곤란하다. 설령 충절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잘못된 충절이었다. 동학농민군과 화해하기 위해 임금의 명을 받고 전라감사로 새로 부임한 김학진 감사와 전봉준 장군사이에 전주화약 체결에 의해 합법적으로 설치된 집강소의 폐정개혁에 대해 장흥부사는 장흥에 부임하면서부터 탄압하였다.
동학농민군이 집강소를 세워 탐관오리를 축출하는 일이야말로 충성이며, 경복궁을 강제로 점거한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동학농민군의 삼례의 2차기포야 말로 충성 중의 충성이다. 이러한 동학농민군을 탄압했던 일이 어찌하여 충성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는 분명히 불충이다. 충과 불충으로 시비를 가리기 전에 선과 악이란 개념으로 시비를 가리더라도 농민군은 악인 관군에 대항한 선이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전라감사 김학진, 진주병사 민준호 등은 오히려 도탄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 동학농민군을 적극 후원하였다. 이들의 행위가 바로 충성이다. 장흥의 동학 대접주 이방언 장군은 또한 장흥에서 내 세울 수 있는 대표적인 유생이지만 도탄에 빠진 나라와 곤경에 빠진 민중들을 구하기 위해 동학군의 지휘자가 되었다. 이러한 사람들의 의로운 행동이 바로 충성과 선이 아닐 수 없다.
박헌양부사가 다른 지역의 수령처럼 성을 비우고 도망을 가지 않았던 것은 절개를 굽히지 않고 선비로서 의롭게 죽으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영회당 순절비문에도 "성을 지키는 계책이 있어 비록 적도는 많고 아군은 적었지만 적들이 다섯달 동안을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라고 했듯이 천혜요새인 장녕성을 더욱 철저히 수리하고, 인근 강진의 전라도 병영과 장흥 원도리의 벽사역의 역졸 800명과, 민보군의 병력 등과 벽사 찰방 김일원의 나주 감영과 장흥군향토지에 실린 글처럼 그의 아들이 전주감영으로 구원병을 요청하려 갔다면 부사는 농민군의 공격을 충분히 방어할 수 있다는 믿는 구석이 있어 도망을 가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장흥 동학농민혁명 과정에서 다른 지역에 비해 관군의 인명피해가 많았던 것도 사실은 장흥의 관군이 자초한 일이다. 1894년 1월 조병갑의 만석보 수세수탈로 인해 일어난 전봉준 장군의 고부민란을 사후 수습하려 안핵사로 파견된 장흥부사 이용태와 벽사역의 역졸 800명이 고부에서 벌인 가혹한 탄압과 해악, 그로 인해 3월 전면적인 동학농민의 기포로 이어지는 과정에 장흥의 관군은 동학농민혁명에 불을 지핀 원인을 제공하였다. 이용태부사 파면 후 박제순부사에 이어 7월 부임한 박헌양부사는 부임하자마자 농민군을 탄압하였고, 농민군이 일군을 몰아내기 위해 삼례에서 2차기포 할 때부터는 더욱 노골적으로 탄압을 하였기에 2차기포 당시 장흥에서 이방언 장군이하 5,000여명이 기포를 하였지만 서울로 진격하는 공주 우금치전투에는 참가하지 못했다. 오히려 장흥의 위급 상황이 전봉준 장군의 대본영에 전달되어 금구 대접주 김방서가 지원부대 3,000명을 이끌고 10월 초순경 논산을 출발하여 11월 초순경에 장평면의 흑석장터(현 봉림리)까지 진출하였다. 11월말 장흥농민군, 김방서부대, 장흥인근의 농민군이 1만명이상 장흥읍 인근에 집결하고 있을 때까지도 농민군을 체포 처형하는데 주력하였다. 그 만큼 동학농민군에게 장흥 관군들은 원한의 대상이 되었고 인명피해의 원인을 제공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살펴보면 장흥부사 및 장흥의 관군의 행동은 절대 나라에 선과 악의 개념을 떠나 충성을 한 것이 아니라 불충을 하였는데도 충절로 미화시킨 것은 잘못된 역사인식이다.
동학농민혁명이 100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 양측이 갈등을 빚고 있는 데는 깊은 골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역사를 똑바로 조명해 보면 갑오 동학농민혁명 당시 어느쪽이 가해자였고, 피해자였는지는 삼척동자도 다 알 수 있는 사안이다.
농민군에 의해 관군 96인이 희생되었다고는 하나 당시 시대상황에서 농민군은 절대 가해자가 아니다. 농민군은 갑오년 당시 관군으로부터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억압과 탄압을 받았고, 또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설령 관군 96인이 피해를 입은 장녕성전투 과정에서는 관군이 피해자라 한다하더라도 농민군이 석대혈전 패전 이후 관군으로부터 받은 무지한 탄압과정은 글로 다 표현할 수 없다. 석대혈전의 수많은 희생자는 둘째치고라도 석대혈전 이후 관군은 농민군을 색출하여 벽사, 장대, 병영 등으로 잡아가 거의 심문도 없이 관군들에 의해 잔인한 사형을 당했다. 또 숨어 있는 농민군을 찾아내기 위해 자식을 모두 죽이겠다는 협박에 못 이겨 자식이라도 살려 보려고 부인이 농민군 남편을 신고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기도 했다. 갑오 농민혁명 당시 장흥읍 화산리는 덕수 장씨 영공파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 그러나 덕수 장씨는 동학농민혁명에 적극 가담하였다고 해서 장흥동학농민혁명 섬멸이후 많은 공출과 세금, 부역이 심해서 일부는 해당리로 이주하였지만 대부분 타지로 이주할 정도로 탄압이 극에 달했다.
농민군 후손은 이렇게 100년이 넘도록 혁명에 가담한 자랑스런 혁명군의 후손이 아니라 난에 가담한 사악한 비도의 후손으로 영회당측으로부터 억눌림을 받고 살아왔다. 관군의 후손들은 1898년부터 국가에서 헌액한 영회당을 건립하여 한 때에는 장흥군의 기관장이 참여한 가운데서 매년 3월 15(음)에 합동으로 추모제를 올리고 있지만, 농민군 후손들은 조상의 제사를 내놓고 모시지 못했다. 음력 12월부터 정월까지 한 때 장흥읍 시장 어각전은 농민군의 제사 지낼 제수를 장만하기 위해 인산인해였다고 한다. 여기서도 농민군 후손이 관군의 후손을 만나면은 무참한 탄압을 받았다고 한다. 용서와 화해는 천주교의 고백성사처럼 당연히 용서와 화해를 청하는 자가 있어야 한다.
**************************************************************
수운 선생께서 창도하신 '동학 천도'의 참 의미를 실천키 위해 노력 하는 사람들이 적지않은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동학 천도를 이끄는 사람들에게서 불과 얼마 전까지
우리민족 최대의 집단이었던 동학의 영광을 기대한다는 것은...?
이 나라 남녘 바닷가 끄트머리 정남진 바로 옆에 자리한 접도.
장흥 동학의 정점이랄 수 있는 김동철 어르신과의 대담을 끝내고 돌아서는 자리.
방문객의 송별을 위해 따라 나오시던 숙덕 어른께서 하신 말씀이 내내 귓전을 맴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동학은 해야만 돼, 암! 해야하고 말고,..."
장흥 동학의 활활발발함을 기원하는 경향 각지 동덕님들의 기운찬 행보.
마치 절해 고도에 떠 있는 작은 섬처럼, 중앙에서 소외되고 시일(侍日)마저 치르지 못하는
장흥 동학의 현실.
선대 동학인들의 명맥을 잇고자 몸부림 쳐 오신 숙덕 어르신들을 뵙고
이 시대, 왜 동학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한울님의 간결한 메시지를 얻을 수 있었음은
가히 '천사문답(天師問答)'에 버금가는 세를 얻을 수 있었노라 외치고 자평해도 별 무리가 없으리라.
*
*
*
'장흥 동학'의 영광을 기원하고 염원하는
長城人 茶泉 心告.
'영성 > 동학 천도의 세계' 카테고리의 다른 글
東行 제1회 동학수련 1편 (0) | 2017.08.01 |
---|---|
동학실천시민행동 흥사단 회의 (0) | 2017.07.20 |
呪文 하라우, 거저 한울님 밖에 없어 (0) | 2017.06.24 |
한울연대 정기 공부 모임 (0) | 2017.06.17 |
보은, 동학실천시민행동 신만민공동회 (1편) (0) | 2017.06.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