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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 문화예술회관과 목포 문학관을 잇는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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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무형문화재 제100호
옥장(玉匠) 장주원 상설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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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장_장주원](http://static.naver.com/ncc/2012/04/04/1204172061300109.jpg)
1937. 10. 5. ~ | 보유자 인정: 1996년 2월 1일
군자의 덕(德)은 옥(玉)에 비할 수 있으니 부드럽고 따사롭고 광채가 나는 것은 인(仁)이요, 짜임새가 고르면서 굳은 것은 지(智)요, 깨끗하면서 깎이지 않음은 의(義)요, 몸에 드리워 떨어질듯함은 예(禮)요, 두들기면 그 소리가 맑고 은은하게 뻗어 슬쩍 감추는 것은 낙(樂)이다.
- [예기(禮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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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의 덕을 갖춘 옥(玉)
옥은 동양 문화권을 대표하는 보석이며, 사회 신분을 나타내는 장신구로도 이용되었다. 희고 부드러운 옥의 성질은 끈기와 온유, 은은함 등을 의미하였으므로 예로부터 특히 사랑받았다. 서양에서 다이아몬드를 가장 값진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과 달리 동양에서는 옥을 가장 값진 것으로 생각해 왔는데, 이러한 다이아몬드와 옥에 대한 생각은 곧 서양과 동양의 미의식의 차이를 보여주기도 한다. 즉 다이아몬드는 광택을 외부로 내뿜는 적극적인 아름다움이 있는 반면, 옥은 빛을 내부로 향하여 머금고 있다. 반사가 아니라 흡수인 것이다. 이것은 곧 동양의 미덕이 겸손으로써 겸손한 겸양의 미덕을 최고로 생각해 왔던 것과 연관지어 생각할 수 있다.
옥은 색채가 아름답고 성질이 융유성(絨維性)으로 되어서 극히 강인하다. 그래서 강인성을 이용하여 옛날부터 중국 등지에서는 돌도끼, 돌메, 돌화살 등의 무기로 사용하였고 또 아름다운 녹색의 돌은 옛 사람의 눈을 즐겁게 하여 여러 가지의 장신용으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그 밖에도 색깔로 조정(朝廷)의 계위(階位)의 상·하를 정하기도 하고 의식용이라든지 여러 가지에 있어서 비취를 널리 사용하였으며, 또 옥을 자비, 겸손, 용기, 정의 지혜의 주요한 미덕으로 관련시켰다. 실제 옥은 경옥(硬玉)과 연옥(軟玉)으로 나누어진다. 경옥은 경도(硬度)가 6.5~7도, 연옥은 6~6.5도까지를 말한다. 옥색은 백색, 녹색, 암벽색, 암녹색, 황색, 적갈색, 흑색 등이 있다. 특히 우리 민족이 좋아하는 백색과 비취색은 바로 녹색의 투명한 것을 말한다. 비취는 에메랄드와 같이 옥중에서 녹색 부분의 돌을 흔히 말하며 값이 비싸다.
이러한 옥과 비취 등으로 여러 가지 기물이나 장신구를 제작하는 장인을 옥장(玉匠)이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석기시대부터 옥이 사용되어져 왔으며 특히 삼국시대에는 옥이 매우 애용되었는데 이는 각종 고분에서 출토된 주옥류(珠玉類:구슬형 옥)를 통하여 알 수 있다. 이 시기의 옥의 형태는 주로 곡옥(曲玉), 관옥(管玉), 구옥(球玉)의 형태를 지니고 있는데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조각된 옥제 장식품의 형태로 발전되었다.
조선시대에도 [경국대전]에 따르면 경공장(京工匠)내에 상의원(尙衣院)에 속해 있는 장인의 수가 10명이 배속되어 있었고 전국적으로는 적지 않은 옥장이 종사하고 있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이렇듯 옥은 오랜 역사를 통해 왕실 및 귀족들의 장식품으로 애용되어 왔다. 부드러운 옥의 성질은 바로 끈기와 온유, 은은함, 인내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한국인의 정서와 잘 맞닿아 애용되어 온 것으로 평가된다.
옥은 인간이 지닐 수 있는 최상의 품성에 비견되었고 그만큼 생활과 밀접히 관련되면서 때로는 영험이 깃든 약효가 있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전통적인 옥제작 방법과 공구 등이 문헌에 의해 전해 내려오고 있지 못하나 옥제작 공정은 대략 6단계로 나누어진다. 채석-디자인-절단-성형-세부조각(구멍뚫기·홈파기)-광택의 과정을 거쳐 옥작품이 완성되는데 각 공정에 따라 절단공구인 쇠톱, 구멍을 뚫는 활비비, 연마공구인 갈이틀, 물레 등 여러 공구들이 사용된다.
옥작품을 만드는데는 고가의 원석을 다루기 때문에 채석 및 밑그림 그리기 등의 초기단계에서부터 정확한 예측이 필수적이며 섬세한 형태와 정교한 조각과정을 위해서 기술자로서의 기능 뿐 아니라 고도의 예술성을 필요로 하는 것이 특징이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00호 옥장 기능보유자인 장주원 선생은 일찍이 전통 옥공예품, 장신구류를 수리·보수하는 기술을 습득했고 그 기술을 기초로 새롭게 자신의 작품 세계를 구축하였다. 특히 투각기법에 능해서 향로, 주전자 등을 섬세하게 조각하고 특히 연속된 고리를 깎는 기능이 유명하다.
장신구 수준의 옥공예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옥장 장주원 선생
옥장 장주원(張周元) 선생의 집안은 금은세공일을 하는 부친과 숙부의 영향으로 어렸을 적부터 자연스럽게 가업의 기능에 접할 수 있었다. 부친인 장중현 선생은 일찍부터 목포에 있는 금은방인 칠성당이라는 곳에서 금은세공기술을 배우다가 고급기술을 연마하기 위해 오사카에 있는 금속공예 전문점에서 6년간 보석류의 세공기술을 배웠다. 1936년 일시 귀국하여 결혼하여 1937년 장주원 선생이 출생하게 된다. 부친은 이후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생활하다가 1943년에 귀국하여 목포시 무안동에 있었던 삼성당에서 기능공 생활을 하였다. 이후 1946년 목포시 남교동에 금하당이라는 금은방을 차려 독립하여면서 금속세공일에 전념하였다고 한다. 또한 장주원 선생의 숙부인 장보현 선생도 부친 밑에서 금속세공을 익힌 후 독립하여 금은세공을 가업화하였다.
이렇듯 금은세공가로 구성된 집안의 환경속에서 자란 장주원 선생은 자연스럽게 가업의 기능에 접할 수 있었다. 장주원 선생은 초등학교때는 고적대와 미술부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중학교시절부터 고등학교때까지 관현악 연주를 하였다. 주목되는 점은 모교인 문태고등학교의 모표(帽標)가 장주원 선생이 중학교 2학년때 디자인한 것이 당선되어 사용되었을 정도로 그림에도 소질이 있었다고 한다. 학창시절 음악과 미술, 공작에 재미와 재능을 보여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곧바로 부친의 사업장에 종사하였다.
부친의 사업에 종사하던 중 부모의 권유로 19세의 나이에 결혼을 하게 된다. 결혼 후 무작정 목포를 떠나 상경을 하였는데 목조각 제작소에서 작업을 하다가 초상화교습소 등을 전전하다가 우연히 악기를 다루는 친구를 만나 악단 단원으로 입단하여 섹소폰을 연주하기도 하였다. 22세 되던 해인 1959년에는 종로4가에 있는 광창당이라는 금은세공장에 들어가 부친으로부터 배운 금은세공기술을 바탕으로 새로운 기술을 배우게 되었다. 눈썰미와 손재주가 비상했던 선생은 종로 귀금속상가에서도 이름을 날렸다.
그렇게 자부심이 대단했던 선생에게 도전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 바로 옥이었다. 귀금속을 다루는 손재주가 남다르다는 소문을 듣고 깨진 옥향로를 수리해 달라는 의뢰가 들어왔으나 처음으로 막막함을 느꼈다. 이를 계기로 앞으로 옥공예에 승부를 걸어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1964년 27세 되던 해에 종로2가에 있는 보석 전문공예사인 보공사로 옮겨 옥공예를 주로 다루었으며 새로운 기술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1965년도에 귀향하여 죽교2동 19번지에 옥공예공방을 설립하여 행상을 상대로 상업상품인 옥공예품을 생산하여 공급하였다.
1973년 옥공예공방을 보옥공예사로 사명을 개명하고 규모를 늘린 사업장을 설립하였으나 이후 경영에 실패하여 41세 나이로 상경하여 동대문구에 조그만 공방을 차리고 옥공제품 수선을 중심으로 일을 하면서 창의적인 기술개발을 하는데 주력하였다. 1980년 다시 목포로 귀향하여 목포시 죽교동에 있는 자택에 공방을 차렸다. 이때부터 대작(大作)과 창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하였으며 각종 공예경진대회에 출품하여 입선하기 시작하였다. 스승도 교과서도 없었던 옥공예를 연마하며 셀 수도 없이 대만에 드나들었다. 중국과 수교하기 전이라 다양한 옥공예품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아침이면 빵과 우유를 사들고 박물관으로 들어가 하루 종일 시간을 보냈다. 이렇게 며칠씩 시간을 보내다 아이디어를 얻으면 그 자리에서 스케치를 하고 바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탔다. 1984년에는 선생에 대한 소문을 듣고 <동아일보>측에서 옥공예 초대전을 제의하여 전시회를 갖기도 했다. 이후 옥공예에 대한 홍보교육을 위해 목포시 대성동에 새로운 작업장과 전시장시설을 신축하여 옥공예에 전념하기에 이른다. 특히 1991년에는 목포시 산정동 소재 자택에 조형전시관을 건립하여 수십 년 동안 제작한 작품을 전시하였다.
1996년 그간의 옥공예에 대한 기능을 인정받아 중요무형문화재 제100호 옥장 기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 주로 춘천옥으로 작품활동을 해온 선생은 미얀마 등 옥 생산지면 세계 어디든 쫓아다닌다. 마음에 드는 원석을 구하면 머리맡에 두고 그 안에 들어있는 생명을 찾아내기까지 몇 년이고 구생했다는 선생은 이제 원석을 보면 무엇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바로 들만큼 경지에 이르렀다. 50여년을 옥과 함께 살아온 선생은 옥공예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당시에 혼자의 힘으로 종주국이라는 중국에서조차 만들지 못하는 기교가 돋보이는 작품들을 잇따라 내놓아 외국에서 그 가치를 더 인정받고 있다. 장신구 수준의 옥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선생은 장차 옥의 종주국으로 우리나라가 우뚝 설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2005년 고향인 목포에 옥공예전시관을 개관하고 옥공예의 아름다움과 멋을 널리 알려 나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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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치헌/한국문화재보호재단
사진 서헌강(문화재전문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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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주원 상설전' 그를 알게 된 것은
오래 전 전남도에서 주최한 무슨 공예전이었던 기억.
후로 '뿌리깊은 나무' 인지 '마당' 인지에 실렸던 그에 관한 글은
너무나 충격적인 것이어서 지금까지도 기억이 생생.
침식조차 잊고 앉은 자리에 대소변을 보아가며 작업에 몰두하다
급기야 가족과 친구에 의해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명맥이 끊긴 옥공예를 오늘에 되살려 낸 이 시대의 국보급 장인 장주원 선생.
작품의 가격이 궁금한 일행의 질문에 전시장 근무자의 돌아온 답.
"여기에 전시된 작품은 최하 1억부터 라는 말씀 만 드리겠습니다."
내게는 아무 소용 없는 질문이요 답.
오로지 이내 두 눈에 장주원의 예술 세계만 그저 열심히 담아 올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