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남 장성군 황룡면 금호리 -
백마장군(白馬將軍), 성재(省齋) 기삼연(奇參衍) 선생 묘역.
1895년 을미사변 이후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과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을 토벌하기를 맹세하고
장성에서 나주로 나아가 많은 의병을 소집해 광산(光山)에서 거의(擧義)하고자 하였다.
이에 정부가 선유사(宣諭使)로 신기선(申箕善)과 이겸제(李謙濟)를 파견해 선유하자, 의병을 해산시켰다.
재거를 밀모하던 중 일진회회원의 밀고로 관찰사 조한국(曺漢國)이 파견한 전주진위대 김한정(金漢鼎)에게 붙잡혀
전주옥에 구금되었다. 다시 서울 평리원옥에 이감되어 한달 남짓 수감된 뒤 원장 이용태(李容泰)의 도움으로 탈출하였다.
군대해산 후 1907년 9월 수련산(隨錄山) 석수승암(石手僧庵)에서 회맹, 호남창의맹소 대장에 추대되었다.
격문을 돌려 적에게 부역하는 자의 처단 및 재산 몰수를 경고하였다. 이 해 9월 23일 고창 문수암(文殊庵)으로 진군 중
접근해 오는 적을 맞아 전투를 벌여 큰 전과를 올렸다. 이 때 고창 이민(吏民)들의 협력으로 군기와 군량을 공급받아
의병들에게 공급하고 영광·부안·정읍 등지에서도 연승하였다.
이어 12월에는 광주의 최상진(崔相鎭) 등 관리의 내응으로 크게 세력을 떨쳤다.
이 때 군량비축을 위해 법성포(法聖浦)의 세곡을 탈취할 계획으로, 12월 7일 의병 100명은
먼저 법성포 순사주재소를 기습해 불태웠다. 그리고 그 곳 창곡(倉穀)을 탈취,
군자에 쓰고 남은 것은 모두 주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 뒤 전세가 달라지자 전투 양상을 바꾸어 소단위로 나누고 유격전으로 돌입하였다.
특히 김준(金準)이 이끄는 의병부대는 무동촌전투(舞童村戰鬪)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그 뒤 날씨가 추워져 의병들이 분산되자, 각지에 흩어진 의병에게 연락, 동짓날을 기해 장성을 공략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서우산중(犀牛山中)에서 잠시 휴병한 뒤 재차 고막원(古幕院)을 공략하려다가 중도에서 철수하였다.
12월 27일 의병부대를 이끌고 설을 쇠기 위해 험준한 담양 추월산성(秋月山城)으로 들어갔다.
밤중에 큰비가 내려 노숙하던 사졸들이 추위에 떨고 있을 때, 수비가 허술한 틈을 타 적의 포위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갑자기 안개가 덮여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낸 끝에 다행히 탈출하였다.
탈출한 뒤 순창 복흥(福興) 산중의 재종제인 기구연(奇九衍)의 집에서 부상을 치료하였다.
장졸들에게 설을 쇤 다음 정월 보름에 다시 모이도록 지시하고, 구수동(九水洞) 촌가에서 은신하던 중
정월 초하룻날 적 수십 명이 돌입해 주인에게 총검을 들이대므로 자진해 붙잡혔다.
비보를 접한 김준이 창평에서 적을 무찌르고 30명의 의병을 이끌고 경양(景陽)에 도착했으나 이미 경찰서에 수감된 뒤였다.
1908년 1월 2일 광주 서천교(西川橋) 밑 백사장에서 총살당하였다.
그 뒤 호남의 의병은 김준·이석용(李錫庸)·김용구(金容球) 등이,
김준이 순국한 다음에는 조경환(曺京煥) 등의 의병에 재편성되어 항일전을 계속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기삼연 선생 후손이자 행주기씨 대종손 기호철 님께서 여러 자료를 내보여 주셨습니다.
호남창의영수 기삼연 선생 순국비
(전남 장성공원 내 위치)
-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 -
1907년 10월 30일 전남 장성의 수련산(隨緣山)석수암(石水庵)에서 의병장 기삼연(奇參衍)의 의병부대를 포함한 4∼5개의
의병부대가 연합하여 결성한 의병연합부대로서, 1908년 1월까지 호남지역 의병봉기에 매우 큰 영향을 주어 1908∼1909년
호남지역이 의병항쟁의 중심무대로 떠오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맹주 기삼연(奇參衍)이 결성을 주도했다.
호남창의회맹소(이하, 회맹소)는 통령(統領) 김용구(金容球)가 주도하고 기삼연(奇參衍)이 참여했던
일심계(一心契)라는 계조직과 장성의 유림이 연합하여 만든 것이었다.
주요 참가자는 대장(또는 맹주) 기삼연, 통령 김용구 외에 참모 김엽중(金燁中)·김봉수(金鳳樹), 종사(從事) 김익중(金翼中)·서석구(徐錫球), 선봉장 김준(金準), 중군장 이철형(李哲衡), 후군장 이남규(李南奎), 운량장(運糧將) 김태수(金泰洙), 총독(總督) 백효인(白孝仁), 감기(監器) 이영화(李英華), 좌익장 김창복(金昌馥), 우익장 허경화(許景和), 포대장(砲隊將) 김기순(金基淳), 포사장(砲射將) 박도경(朴道京), 호군장(犒軍將) 유병순(柳炳珣) 등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장성·영광·고창 등 호남 중서부에서 거주하였고, 상당수가 이 지역의 저명한 유림지도자인 노사(蘆沙)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이었다. 특히 기삼연은 기정진의 재종질이면서 그 보다 5살 많은 의병장 기우만(奇宇萬)의 삼종숙이었다. 이들은 유교 특유의 춘추의리(春秋義理)에 투철하였고 배외의식(排外意識)이 강한 양반 유림이었다.
회맹소의 활동이 나날이 기세를 떨치자 이 지역에서는 조세를 거둘 수도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일본측은 1908년 1월 25일부터 11개 부대를 편성하여 3월 초까지 회맹소에 대한 대규모 진압작전을 펼쳤다. 이 기간에 회맹소는 200여 명의 희생자를 내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특히, 추위를 피하고 최대의 명절인 설을 보내기 위해 담양 추월산(秋月山)의 금성산성(金城山城)에서 지내려던 회맹소의 계획이 일본측에 발각되어,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내고 의병장 기삼연도 부상을 입는 등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기삼연은 회맹소를 통령 김용구에게 맡기고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 전라북도 순창에 은신하였으나 1908년 2월 2일 체포되었고, 일본군은 기삼연을 광주로 압송한 뒤 정식절차도 거치지 않은 채 2월 3일 처형하였다. 이로써 기삼연이 주도하던 호남창의회맹소는 막을 내렸다.
그러나 회맹소의 활동은 통령 김용구를 비롯해 김준·이철형·김기순·박도경·이영화·김공삼(金公三)·김율(金聿) 등에 의하여 지속되었다. 이 밖에도 회맹소의 과감한 반일투쟁에 고무되어 의병을 일으키려는 세력이 크게 증가했다.
회맹소는 1907년 10월 말부터 1908년 1월 말까지 반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때 회맹소는 대외 선전과 반일(反日) 무장투쟁을
병행하였다. 미곡 유출 방지, 외래품 판매 금지, 납세 거부, 자위단(自衛團)에 참여하지 말 것을 권유하였다.
또한, 『대한매일신보』에도 편지를 보내 창의 사실을 널리 알려 줄 것을 부탁하기도 하였다.
이 글에서는 『대한매일신보』의 사원들을 ‘인의(仁義)로 성벽을 삼고, 필묵(筆墨)을 무기로 삼으니 시골 군사 10만 명보다
나을 것’이라고 격려하였고, 격문(檄文)을 반드시 게재함으로써 항일의식이 널리 고취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호소하였다.
격문에서는, 이집트나 오키나와(沖繩)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죽을 때까지 투쟁해야 한다고 하면서, 신분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일제히 궐기하자고 하였다. 또한 일본인에 대해 현상금을 걸고 주민, 심지어 순검이나 일진회원이라 하더라도
일본인의 머리를 베어오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상을 주겠다고 고시하였다. 이 밖에도 회맹소의 봉기에 관한
「포고만국문(布告萬國文)」,「전령(傳令)」,「광고문(廣告文)」,「축문(祝文)」 등이 남아 있다.
본격적인 무장투쟁은 1907년 10월 30일 무장분파소(茂長分派所) 습격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어 고창읍성을 점령하여
장기적인 항전을 모색하기도 하였으며, 12월에는 영광의 법성포(法聖浦)를 공격하여 쌓아 둔 세곡(稅穀)을 빼앗아 일부는
빈민에게 나누어 주고 일부는 군량미로 비축하였다. 장성읍과 영광읍을 점거하여 분파소·우편취급소·군아·세무서 등을
파괴하고, 일본인과 일진회원을 살해하였다. 1908년에 들어서도 담양·함평·고막원(古幕院) 등에 있는 일본 관련 기구를
습격하였으며, 전라도의 중서부 지방인 장성·영광·담양·고창·함평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당시 회맹소의 병력은 약 400∼500명 규모를 유지하였다.
일제측은 1906년∼1909년 호남지역에서 활약한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최익현·고광순(高光洵)·기삼연·김준·김율(金聿)·전해산·심남일·안규홍(安圭洪) 등을 지목했다.
이들 가운데 기삼연, 김준, 김율, 전해산, 심남일 등은 모두 호남창의회맹소에 참여한 의병장들이었다.
따라서 호남창의회맹소는 호남지역 의병봉기에 매우 큰 영향을 주면서 1908∼1909년 이 지역이
의병항쟁의 중심무대로 떠오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세력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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