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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동학 천도의 세계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

 

 

 

 

취암천을 거슬러 오르는 산책길.

 

 

 

 

 

 

 

 

 

 

 

   

 

 

 

 

 

 

 

  부풀어 오른 강변 산수유

 

 

 

 

 

 

 

 

때마침 굉음을 내며 달리는 고속열차

 

 

 

 

 

 

 

 

 

 

 

 

 

 

 

사과나무 수형의 옹골찬 기세도 예사롭지 않게 다가오고...

 

 

 

 

 

 

 

 

 

 

 

앙증스런 봄까치꽂의 자태

 

 

 

 

 

 

 

 

 

 

 

 

 

 

 

 

 

 

 

 

 

 

 

 

 

 

 

 

 

 

 

 

 

 

 

 

 

 

 

 

 

 

 

 

 

 

 

 

 

확연루 안뜰에 심어진 백매에도 물이 오르는 낌새가 완연하고...

 

 

 

 

 

 

 

청절의 의미....!

 

 

 

 

 

 

 

 

 

 

 

 

 맛배지붕의 단아함과 겸손함에 이르기까지!  내가 꼽는 필암서원 최고의 건축물.

 

 

 

 

 

 

백송

 

 

 

 

 

 

 

 

 

 

 

 

흐르는 여울물 소리에 귀를 씻고...

 

 

 

 

 

 

 

 

 

 

 

다음 주 수요일 부터 3박 4일에 걸쳐 열리게 될 남원 만행산 귀정사에서의

 『동학영성지도자수련회』를 앞두고 서서히 마음을 모아가던 차,

 

 한울님의 마음과 인간의 마음이 근본에서 서로 같다는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

 이른 바  '내 마음이 곧 네 마음' 이라는 수운의 말씀에 온통 이내 심상이 쏠려 있는 가운데

 

 

 

 

 마침, <모시는사람들>에서 발행한 동서 종교의 만남과 그 미래를 읽게 되었고,

 그 가운데 동학인이자 경희대 교수이신 오문환 님의 논문 한 편을 정독하게 되었는 바.

  

나는 물론이려니와, 금번 수련에  참여하시는 동덕님들에게 참고가 될만한

 내용이라 생각되어 논문 중의 일부를 이 자리에 옮겨 보기로 한다.

 

 

 

 

 

동학은 출발 자체가 영적 체험이었다. 즉 동학은 천주에 대한 형이상학적 · 철학적 논증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1860년 경신 사월초오일 수운의 한울님 체험에서부터 시작된다. 영적 체득은 이론적 사색과 논리적 훈련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종합적 수행 과정의 결과물이다. 동학 · 천도교의 근본적 기초가 다름 아닌 영적 수행인 것이다. 경신년(1860) 45일 영적 체험 이후 시대정신과 시대상황에 대한 수운의 입장은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가?

 

아는 바 천지라도 경외지심 없었으니 아는 것이 무엇이며 천상에 상제님이 옥경대 계시다고 보는 듯이 말을 하니 음양이치 고사하고 허무지설 아닐런가.”

 

수운은 두 가지 시대 담론을 비판하면서 동학의 수행론적 성격을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다. 먼저 천시와 지리를 논하는 성리학자들의 학문 풍토를 비판하였다. , 동양적 전통과 서구적 조류를 둘 다 비판하고 있다. 비판의 요지는 성리학자들이 실제 마음에는 천주에 대한 공경심과 두려움이 없이 공리공담을 일삼고 있다는 비판이다. 이론상의 천지가 아닌 마음에서 살아 움직이는 천주를 성리학은 잊었다는 비판이다. 또한 음양의 조화에 의하여 창조된 우주만물을 떠나서 공연히 허무한 천당의 절대적 상제님만을 찾는 서학도 비판되고 있다. 이는 음양이치로서 현실자연 속에 작동하는 기운으로서의 한울님(氣化之神)을 서학이 모른다는 비판이다. 수운의 주장은 천지와 상제로 불리우는 형이상학적 존재와 사람의 마음 그리고 우주 만물이 따로 떨어져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시천주를 알고, 느끼고, 체행하라는 주장이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가? 수행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수행으로써 초월성, 절대성 그리고 이법성李法性으로 존재하는 천주를 자신의 마음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생생한 마음과 기운으로 느끼라는 것이다. 천주가 마음을 떠나 따로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자연을 떠나서 홀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자기의 마음 중심에 내려온 천주를 깨닫고 자연만물과 몸을 움직이는 우주기운과 소통하는 길을 자신이 찾아냈다는 것이다.

 

수운의 시대담론에 대한 비판이 성리학에만 한정되었던 것은 아니다. 수운은 유학의 태두라 할 수 있는 공자비판을 통하여 동학의 수행적 성격을 뚜렷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공자는 인의예지라는 도덕의 궁극적 경지를 밝혔지만 수운 자신은 사람이 인의예지할 수 있는 수심정기守心正氣의 수행법을 받았다고 말한다. “인의예지仁義禮智는 선성지소교先聖之所敎요 수심정守心正氣는 유아지갱정唯我之更定이라.”1 인의예지가 아무리 고상한 덕목이라도 수심정기가 아니면 이를 수 없는 허공속의 신기루라는 주장이다. 이상은 높지만 수행을 통하지 않으면 허황된 것 이라는 뜻이다. 수운이 말하는 수심守心이란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본래 가지고 있는 천심을 지키는 것이고, 정기正氣란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본래 가지고 있었던 하늘의 오직 한 기운(混元一氣)을 사사롭게 쓰지 않고 오로지 한울님을 위하는 방향으로 바르게 쓴다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누구나 한울님을 모시고 누구나 한울님 기운 속에서 살아가지만 세상을 살면서 하늘마음을 잃어버리고 하늘기운과 단절된 것이 오늘의 현실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래의 마음과 본래의 기운을 회복하기 위한 수행이 중시되는 것이다.

 

해월은 수심정기를 천지와 떨어진 기운을 다시 잇는 것이라고 주해하였다.2  다시 말하자면 사람이 본래의 하늘마음과 하늘기운을 회복하는 것이 수심 정기라는 것이다. 해월은 삶 자체를 한울님을 키우는 수행론적 시각에서 바라보았다. 삶의 모든 국면들에서 한울님을 잊지 않는 것이 참된 삶이라는 것이다. 의암 손병희에 이르게 되면 천주조화는 더 이상 자신을 떠나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본성이며 자신의 본심으로 설명되게 된다. 그리하여 천도교의 핵심은 바로 본래의 천성과 본래의 천심을 보고 · 깨닫는(見性覺心) 수행이 되게 된다.

 

수운은 당시 세태를 예리하게 비판한다. 비판의 요지는 천주를 모시고 천명을 받은 도덕군자의 부재와 전도현상이다. “약간 어찌 수신하면 지벌 보고 사세 보아 출세해서 하는 말이 아무는 지벌도 좋거니와 문필이 유여하니 도덕군자 분명타고 모몰염치 추존하니 우습다 저 사람은 지벌이 무엇이게 군자를 비유하며 문필이 무엇이게 도덕을 의논하노.”3  번듯한 자리 꿰어 차고 앉았다거나, 그럴듯한 대학 간판이나 인맥 적 배경을 가졌다거나, 집안의 배경이 좋다거나, 현학과 미사여구로 잘 포장하는 일들이 도덕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비판이다. , 세속적인 잣대로 도덕군자를 운운하는 것이 가소롭다는 것이다. 이런 일이 어찌 수운 당대에만 국한된 일이겠는가? 천주를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도 없으면서 겉으로만 천리와 천성을 논하는 것과 지벌과 문필을 보고서 도덕군자를 운운하는 것이 조금도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세상을 효박한 세상이라고 하였으며 이러한 사람들을 효박한 세상 사람이라고 하였다. 천주를 모신 신인新人을 모르는 사회이며 도들 이루고 덕을 세운 도덕군자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대접하지도 못하는 야속한 사람들인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도와 덕을 잃어버리고 잊어버린 인간사회라 할 수 있다.

 

동학 · 천도교의 수행은 이러한 인간 세상을 가르치고 치유하기 위한 수행으로 제시된다. 수운은 한울님으로부터 주문呪文으로 세상 사람들을 가르치고 영부靈符로서 세상 사람들을 치유하라는 말씀을 들었다고 하였다. 동학 · 천도교의 본령은 병든 마음과 병든 사회를 가르치고 치유하는 수행이라는 것이다. 수행을 통하여 사람들이 모두 자기 본래의 마음을 회복하는 세상을 후천개벽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동학 · 천도교는 어떻게 인간 세상을 새롭게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하는가? 그 구체적인 수행법이 무엇인가?

 

 

 

지기至氣

 

 

새로운 세계의 열림에 대한 기술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단군신화처럼 하늘이 내려오는 것으로 설명하는 유형과 박혁거세 신화처럼 알에서 깨어나는 것으로 묘사하는 유형이다. 전자를 천강天降설화라 하고 후자를 난생卵生설화라 한다. 천강신화가 궁극적 실재를 외부에서 찾는 문화에서 나왔다고 한다면 난생신화는 궁극적 실재를 내부에서 찾는 문화에서 나왔다고 말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북방계통의 천강신화와 함께 남방계통의 난생신화가 둘 다 나타난다.

 

강령降靈이라는 개념 자체에서 알 수 있듯이 동학은 천강신화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강령은 출발이며 주문의 마지막에 나타나는 만사지萬事知는 오히려 난생신화적 원형에 가깝다. 안다는 것을 마음의 지평이 열리면서 안다는 의미가 강하기 때문이다. 동학 · 천도교에서 강조되는 신인간은 난생신화적 탄생에 가깝다. , 이전의 자아의 껍질을 깨고 새로 태어나는 주체가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동학의 주문에는 새로운 세계와의 만남 또는 새로운 세계의 열림을 표현하는 두 가지 원형이 통합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주문 수행의 첫 단계는 지기至氣에 통함이다. 주문에서는 지기가 지금 나에게 이르기를 바란다고 되어 있으나 천도교에서는 이를 강령降靈이라 한다. 강령이란 말 그대로 천령이 내게 내린다는 뜻이다. 내린다는 표현으로 보아 지금까지 내 안에서는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완전히 새로운 영성이 열리는 것을 강령으로 표현하였다고 할 수 있다. 강령을 샤머니즘적 영향으로 평가하는 학자도 있지만 실상은 자신이 지금까지는 체험하지 못한 전혀 새로운 기운이 이 몸과 마음에서 새로이 나타남을 의미한다. 동학의 강령은 샤머니즘의 신내림과 유사한 점이 있으나 이를 이유로 동학을 샤머니즘이라 부르기는 어렵다.

 

동학의 강령은 샤머니즘의 신내림과 어떻게 다른가? 먼저 샤머니즘에서는 영이 주인이고 사람은 객이지만 동학에서는 영과 사람이 평등하다. 샤머니즘의 경우에는 신은 주체이고 인간은 객체적 위상을 가진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영의 노예가 된다. 종교의 창시자들이 신을 처음 만날 때 스스로 신의 노예를 자처하는 경우를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동학의 경우에는 신의 노예적 성격 대신 신과 동등한 존재 확인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수운이 경신 사월초오일에 한울님으로부터 들은 내 마음이 네 마음(吾心卽汝心)‘이라는 말씀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신의 노예적인 샤머니즘 성격은 이른바 고등종교라고 하는 현대종교의 밑바탕에 짙게 깔려 있다. 동학의 강령은 신의 노예로서의 인간의 발견이 아니라 신인神人이 되는 입문이라 하겠다.

 

동학 · 천도교가 샤머니즘과 다른 또 하나는 샤머니즘의 영이 개체 영인데 반해 동학의 영은 하나의 성령性靈이다. 샤머니즘에서는 죽은 조상신들, 역사의 영웅신들, 자연신들, 초월신들처럼 매우 다양한 만신萬神들이 존재하지만 동학의 경우에는 오직 하나의 성령만이 존재할 뿐이다. 동학에는 만신만 없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선신善神이니 악신惡神이니 하는 이원적 신들도 존채치 못한다. 천당과 지옥, 극락과 아수라를 지배하는 신들도 설 자리가 없다. 이러한 이원론적 신관은 만신을 선악善惡으로 축약할 뿐 여전히 하나의 성령관은 아니다. 동학 · 천도교에서의 영은 하나의 성령이기 때문에 강령된다는 것은 만신이나 이원신과 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성령과 접하는 것이다.

 

오직 하나의 성령이라면 왜 세계적으로 다양한 신들을 신앙하는 것인가? 그것은 아직까지 하나의 성령이 밝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의 성령에게는 다양한 이름이 있을 뿐 다양한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존재이지만 시간과 장소에 따라서 언어가 달랐기 때문에 이름이 다를 뿐이다. 하나의 성령을 인정치 아니하는 다양한 개체신들을 신봉하는 경향이 전 세계인들의 마음에 뿌리깊게 박혀 있다. 그러나 다양한 신들의 이름은 문화적 · 역사적 · 언어적 차이에서 오는 것이지 이름을 넘어선 궁극적 실재는 오직 하나이다. 그러므로 종교간 반목과 갈등은 아직 하나의 성령이 뚜렷하게 드러나지 못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들이다. 이는 해월이 비판한 한나라 때부터 전해온 무고巫蠱의 여풍에 불과한 것이다.

 

하나의 성령 또는 유일신을 말하면 흔히 기독교의 유일신론을 떠올린다. 그러나 동학의 유일신론은 기독교의 유일신론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많은 신들 가운데 자신이 최고이므로 자신만 섬기라는 의미에서 유일신관은 동학 · 천도교에서는 찾을 수 없다. 오히려 동학 · 천도교의 유일신론은 비록 다양하게 불리지만 모든 신들은 오직 하나의 신일뿐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수운은 경신 사월초오일에 한울님으로부터 귀신이라는 것도 나니라(鬼神者吾也)‘ 라는 말을 들었다고 하였다. 그것은 사람 숫자만큼이나 많은 귀신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귀신들의 실상을 알고 보몀 모두 하나의 한울님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동학 · 천도교에서는 만신중의 우두머리 신으로서 유일신이 아니라 만신의 실상을 알고 보면 본래 오직 하나의 유일신이라는 뜻이다. 만신의 본래 실상만 한울님일 뿐만 아니라 만인의 본래실상도 한울님이며, 만물의 본래실상도 한울님일 따름이다. 단지 사람들이 마음을 만물과 만인과 만신에 빼앗겨 그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만물도 존재하고, 만인도 존재하고, 만신이 존재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렇지만 눈을 뜨는 첫 출발이 강령이다.

 

이 지점에서 한 가지 분명하게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는 문제가 바로 이 성령이 어느 곳에 존재하느냐의 문제이다. 왜냐하면 이 문제에 혼동을 일으키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유일신은 어디에 계시는가? 유일신은 아니 계신 곳이 없다. 만신에도, 만인에도, 만물에도 유일신이 계신다. 유일신에게는 장애물이 없기 때문에 우주에 꽉 차 있다. 우주에 꽉 차 있어 아니 계신 곳이 없지만 유일신을

보고 느끼는 사람들이 매우 적을 뿐이다. 유일신은 만신, 만인, 만물을 창조해 놓으시고 그 안에 사시고 계신다고 동학 · 천도교에서는 표현되고 있다. 4

 

 

수운은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侍天主)‘ 하였고, 해월은 심령心靈이 곧 천령天靈이라고 하였으며 더 나아가 사물마다 한울님이며 일마다 한울님이라고(物物天事事天)‘ 라고 하였다. 이러한 바탕에서 의암은 인내천人乃天이라 하여 지금 · 여기를 떠난 또 다른 하늘을 설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무체법경에는 천지에 대한 논의는 찾을 수 없고 오직 성심性心이 중심적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하늘과 땅이 따로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본성과 본심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라 하겠다.

 

그렇지만 주문수행이 첫 단계인 강령에서 사람들은 심령이 곧 천령이라는 자각自覺보다 천령의 강림降臨을 경험하게 된다. ’적 존재가 너무 낮설어 자신이라고 느끼기 어렵기 때문이다. 신적 존재가 영원히 자신과 함께 하고 있었다기보다는 비로소 생기기 시작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강령이라는 표현이 사용된 것이다. 강령이 될 때에는 춥고 떨렸다고(心寒身戰)‘ 수운은 기록하고 있으나 강령을 체험한 분들의 설명에 의하면 강령현상은 매우 다양하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조용하게 강령을 받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온 동네가 들썩거릴 정도로 요란하게 받는 사람들도 있다. 심하게 되면 실성한 사람처럼 보이는 경우도 적지 않다. 수운 자신도 강령체험을 할 때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부인과 아이들이 놀라서 온 집안이 온통 야단법석이었음을 수운은 용담유사의 여러 곳에서 그려내고 있다.5

 

실제 주문수행을 하면서 관찰해 본 결과 강령현상은 사람에 따라서 천차만별이었다. 강령현상을 정형화하기가 매우 곤란하였다. 다양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개인마다 막히고, 구부러지고, 일그러진 양상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저마다 억눌러 쌓아놓았던 기운이 다양하므로 그 풀어지는 양상도 다양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기운은 하나의 기운이지만 묶이고 풀리는 양상은 시공간과 사람에 따라서 다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호감을 주지 않더라도 다양한 강령현상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수운은 강령주문이라고 하여 특별히 지기금지원위대강地氣今至願爲大降을 따로 만들었으나 현재 천도교에서는 강령주문과 본주문 13자 즉,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를 붙여서 총 21자를 계속 반복하여 왼다. 외는 방법은 개인의 리듬에 따라서 자유로이 외게 한다. 모든 생각을 오직 한울님께 집중하는 수행이므로 빨리 외게 되면 잡념이 들어올 여지도 줄어들게 된다. 그러나 정신집중을 잘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속도에 구애되지 않는다.

 

강령이 되어 한울님을 자기 안에 모시게 되면 우주만유를 창조한 한울님의 기운이 가슴 속에서 약동함을 느끼게 된다. 약동하는 한울님 기운을 그림으로 그려낸 것이 영부靈符이다. 영부는 이 마음속에 들어온 한울님의 기운이다. 강령이 되어 한울님의 기운이 이 마음에 자리잡게 되면 마음을 내어 자유롭게 한울님의 기운을 구사할 수 있게 된다. 영부를 자유롭게 구사하게 되는 것이다. 마음으로 한울님 기운을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되면 형상으로 그려내어 일체의 질병을 치유할 수 있게 된다. 수운 자신은 영부를 받아서 수백 장을 먹어 보니 가는 몸이 굵어지고, 어렸을 때부터 있던 병들이 말끔히 나았으며, 검던 피부가 희게 되는 등 여러 가지 병들을 고쳤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렇지만 낫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는데 마음으로 영부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쉽게 나았다고 하였다. , 일체의 물질적 약에 의하여 병을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영부심으로 병을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음으로 모든 기운을 통제할 수 있다는 뜻이다.

 

강령이 되어 영부심이 열려야 비로소 한울님이 모셔져 있음을 알게 되고 한울님의 기운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 곧 우주 본체, 근본 실상이 자명해진다. 우주의 근본 실상은 모심과 정함으로 표현되었다. 강령이 되면 우주의 근본 실상인 모심과 정함을 온전하게 드러나게 된다.

 

 

 

● 모심과 정함

 

 

주문 수행의 두 번째 단게는 모심과 정함이다. 수운은 주문에서 우주의 근본 실상을 모심과 정함으로 표현하였다. 지기至氣가 강림하여 열리는 새로운 경지를 모실 시와 정할 정이라 한 것이다. 모심은 모든 존재자들이 자기 안에 천주를 모시고 있음(侍天主)이며 정함은 모든 존재자들은 우주의 창조하고 변화하는 기운과 통합되어 있음(造化定)이다. 강령이 되면서 자기 안의 한울님을 알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울님의 기운 활동과 합일되었음을 자각하게 된다. 그리하여 천주라는 존재의 실상을 되찾게 되고, 조화라는 기운 활동에 통합되게 되는 것이다. 이점은 중요하기 때문에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천주를 모신다고 하면 어떤 살아있는 인격적 절대자를 숭배하면서 섬기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모실 시에는 이런 의미가 없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수운은 이 모실 시자를 이렇게 주해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수운은 모심을 내면적 자각과 외면적 소통을 통한 새로운 주체의 탄생으로 이해하였다. , 모심이란 안으로는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신령이 존재함을(內有神靈) 명확히 느끼고 밖으로는 지금까지 단절되어 있던 우주적 기운과 서로 소통하고 있음을(外氣化) 알아서 이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떨어지지 않는 것이라고(一世之人 各知不移) 수운은 정의하였다. 옮기지 않는다는 것은 새로운 자각과 소통을 하는 존재로 거듭남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뜻을 좀 더 풀어 보면 모신다는 것은 내 안에 또 다른 신령이 깨어나는 것이며 동시에 자기 밖의 모든 존재자들과 소통하는 새로운 기운의 바다가 열리는 현상이다. 이것이 특정한 시간과 특정한 장소에서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늘 그러한 상태로 있데 될 때 우리는 한울님을 모셨다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한울님을 지극 정성으로 모시게 되면 한울님과 사람이 하나가 되게 된다. 이 하나가 되는 것을 조화정이라고 수운은 표현하였다. 한울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사람이 한울님의 마음과 똑 같아진다는 것이며 한울님이 하는 일을 사람도 똑같이 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이것이 조화정의 의미이다. 조화정이 되게 되면 사람은 한울님의 능력과 지혜를 그대로 받아서 쓸 수 있게 된다. 수운의 표현에 의하면 한울님의 덕에 합하고(合其德) 한울님의 마음에 정하게 된다(定其)할 수 있다. 이 단계에서 사람은 한울님 마음과 똑같아지게 되고 한울님처럼 무궁한 덕을 무궁히 베풀 수 있게 된다. 한울님의 덕을 베풀 수 있어야 비로소 도를 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시천주 조화정의 존재 실상을 깨닫기 위해서는 21자 주문을 소리 내어 크게 외우는 현송絃誦13자 주문을 마음으로 외우는 묵송黙誦의 수련을 해야 한다. 현송과 묵송은 목적은 같지만 기능은 다르다. 현송을 기운 공부라고 하고 묵송을 성품 공부라고 한다. 기운 공부는 이 마음으로 우주를 창조 · 변화시키는 우주 기운에 소통하여 통제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현송을 통하여 마음이 우주 만물의 탄생 · 변화시키는 음양의 두 기운에 통하게 되면 사람은 마음으로 음양 기운을 다스릴 수 있게 된다. 음양 기운을 다스릴 수 있게 되면 천주가 하는 일을 사람도 할 수 있게 된다. 그 구체적인 사례가 영부이다.

 

수운은 질병 치유는 영부靈符로서 한다고 하였다. 주문 수행을 통하여 하늘의 기운에 소통하는 사람들은 그 징표로 영부를 받게 되는데 자신의 질병 치유보다는 다른 사람들을 돕고자 하는 거룩한 마음을 쓰는 분들이 주로 영부를 잘 받는 것을 직접 볼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영부는 종이 위에 붓으로 그린 형상이지만 해월은 사람들이 혹 오해를 할까 염려하여 영부란 곧 마음이라고 하였다. 영부를 마음이라 한 것은 일반적인 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음양 기운에 통한 마음을 뜻한다. 마음 기운이 형상화 된 것을 흔히 영부라 하지만 실상 영부는 마음 기운 자체이다. 현송을 통하여 우주 기운에 통하게 되면 질병을 치유할 수 있는 영부만 받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마음의 능력을 얻게 된다. 그 중에 한 가지만 말한다면 자연과의 소통이다. 자연 만물도 음양 두 기운에 통하게 되면 사람은 자연에도 통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그 극치에 이르게 되면 마음이 자연스러워져 자연보다도 더 자연스럽게 바뀌게 될 것이다. 그 경지를 동학에서는 무위이화無爲而化라고 한다. 무위無爲라는 노장老莊의 개념을 빌려와 표현한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노장사상을 공부하여 수운이 우리는 무위이화라라고 한 것은 아니라 하겠다. 마음이 지극한 하나의 기운에 통하고 보니 아니 통하는 곳이 없으며 자연스럽게 되니 작위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뜻에 온전히 따르게 되므로 이 경지를 무위이화라는 개념으로 표현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상가나 철학가들은 개념이 마음의 중심 자리를 차지하겠지만 수행가에게는 개념들은 마음의 경지를 표현하는 도구들에 불과한 것이다. , 말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한 것이다. 달을 보았으면 손가락을 가지고 왈가왈부하지 않는다. 달을 보는 마음을 터득하기 위한 공부가 묵송黙誦이다. 묵송은 달로 상징되는 궁극적 실재를 보는 공부이다. 의암에 이르러 묵송은 견성見性공부라고 흔히 불린다. 견성이란 모든 존재의 가장 깊은 내면에 숨어 있는 성심 본체, 즉 한울님을 보는 공부이다. 견성을 하게 되면 겉모습이 아닌 속모습을 직시하게 된다. 속 모습은 모두가 한울님이다. 성심 본체라고도 표현된다. 의암은 견성은 자천자각自天自覺에 있다고 하였다. 자기 하늘을 자기가 깨닫는 것이 견성인 것이다. 이처럼 내 자신이 곧 천주임을 깨닫는 공부가 묵송이다. 불교식으로 표현하자면 일체의 상을 떠난 공공적적空空寂寂하고 불생불멸不生不滅하고 부증불감不增不減의 본자리가 아무런 의심없이 여실하게 드러나는 경지를 묵송을 통하여 들어가게 된다.

 

의암은 이 경지를 무무無無 무유無有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없는 것도 아니며 있는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비고 고요한 이 경지는 없다고도 할 수 없으며 그렇다고 있는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이 경지를 표현하기 위하여 의암은 천지 미판 전의 소식을 들으라라고 말하였다. 이 말의 의미가 분명치 않아서 질문을 하는 제자가 있었다. 그는 천지가 생기고 난 다음에 생겨난 사람 마음이 어떻게 천지가 생겨나기 이전의 소식을 들을 수 있느냐고 묻게 된다. 당연히 제기될 수 있는 의문이다. 우리의 마음은 천지가 생겨난 다음에 생겨난 것만을 알고 그것을 자신으로 생각하지 본래의 내 마음은 천지가 생겨나기 이전부터 있었으며 천지가 없어진 다음에도 있는 존재라는 사실은 잊고 살아간다. 우리는 몇십 년 전에 어느 장소에서 태어나서 살아오면서 배우고 경험하고 기억하는 총체를 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다. 누가 감히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꿈엔들 이런 생각을 쉽게 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묵송은 천지가 생겨나기 이전의 경지로 우리의 마음을 안내한다. 그리하여 묵송을 통하여 비록 한 순간이라도 천지미판전의 소식을 경험하게 되면 영원토로 이 맛을 잊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시간을 넘어선 그 존재가 바로 자기사신이라는 사실을 철두철미하게 자각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 경지에 들어갔을 때는 현재 나라고 생각하는 마음은 사라져 버린다. 그러므로 그 경지를 이 마음으로는 묘사할 수 없다. 그 경지에서 나온 이후에 비로소 영감靈感으로 그려낼 뿐이다. 그러므로 일찍이 노자가 표현한 것처럼 아는 자는 말하지 않는다고 하겠다. 소금인형이 바다의 깊이를 재기 위하여 바다에 들어갔다가 돌아오지 못한다는 우화적 표현도 있다. 바닷물과 하나가 되어 돌아오지 못하게 되는 것을 불교에서는 니르바나Nirvana’ 라고 하며 인도 베단타 철학에서는 니르빅칼파 사마디 Nirvikalpa Samadhi’ 라고 한다. 시공간의 현상계를 일체 떠나서 본체와 합일되었다는 뜻이다. 마음이 이 경지에서 돌아오지 않으면 열반이지만 돌아오면 살아있는 열반이 된다. 살아 있는 열반이란 모순이다. 동학에서는 이러한 마음을 신선’ , ‘새사람’ , ‘천주를 모신 사람등 다양한 개념으로 표현한다.

 

비고 고요한 경지에 잠겼던 마음은 예전의 마음과 같을 수 없다. 전혀 다른 마음으로 변하게 된다. 이 새로워진 마음을 개벽開闢이라 하고, 붓디(bhud)라 하고, 본래 성품이라 한다. 천주를 모신 새로워진 마음에는 천주의 덕성과 너무 가까워져 거리를 잴 수 없을 정도로 가까워져 간다. 그리고 마침내 천주와 하나가 된다. 모시게 되면 모시는 한울님의 기운 자리에 자리 잡게(定立)되게 된다. 이를 조화정造化定이라 하며 무위이화無爲而化라 한다. 동학 · 천도교는 자기 정체성을 말할 때 흔히 무극대도無極大道무위이화無爲而化라고 말한다. 마음이 비고 고요한 자리에 들었을 때에는 무극대도라 하고 모르는 사이에 무궁하게 활동하는 조화를 표현할 때는 무위이화라 한다. 무극대도가 묵송을 통하여 깨닫게 되는 내면적 고요의 바다를 표현하는 개념이라면 무위이화는 현송을 통하여 얻게 되는 한울님 조화의 무궁성을 표현하는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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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심과 정함의 존재 실상을 이 몸과 마음으로 얻기 위한 현송과 묵송의 수행을 살펴보았다.

주문 수행을 통하여 어떻게 한울님이 모셔져 있음을 깨닫고 한울님의 조화 기운데 통해져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일까?

현송을 하면 주문의 파동이 몸과 마음에 진동하게 된다. 마음이 주문하여 동조되는 것이다. 하늘기운은 통하지 아니하는 곳이 없기 때문에 현송과 묵송을 통하여 몸과 마음의 막히고 비틀어진 기운 통로를 깨끗하게 청소하면 본래의 고요와 역동성을 이 몸과 마음으로 체득하게 된다. 사람과 하늘 사이에 머리카락 하나도 용납하지 못할 정도로 밀접하게 되면 마음은 하늘을 잊을 수 없으며 하늘 기운을 자유자재로 움직힐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질병도 나을 수 있고, 세상 사람들이 이른바 초능력이라고 하는 현상도 나타난다. 이전까지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고, 생각할 수 없었던 것들을 다 듣고, 보고 생각하게 된다.

 

마음이 하늘 기운에 통한 뒤에 변화하는 과정에 대하여 의암은 무체법경의 삼심관三心觀에서 자세하게 밝히고 있다. 허광심虛光心, 여여심如如心, 자유심自由心이 그것이다. 허광심이란 온갖 가지 상으로부터 해방된 마음으로 다양한 겉모습을 뚫고 들어가 본래 청정의 본래면목을 직시하게 되는 경지이다. 온갖가지 이름과 형상에 구애되지 아니하고 하나의 근본 바탕을 투철하게 관조하는 경지이다. 이렇게 되면 오직 세상은 평등하고 평등하다는 진리를 알게 된다. 여여심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남녀일여男女一如, 생사일여生死一如, 천지일여天地一如, 천인일여天人一如인 것이다. 모든 장애물이 사라지고 마음은 하늘과 땅이 생겨나기 이전으로 돌아가게 된다. 일체의 상들이 옷을 벗고 본래 면목을 드러내게 된다.

 

그렇게 되면 마음은 진리를 구하지도 않으며, 자유를 구하지도 않으며, 해탈을 구하지도 않으며, 깨달음을 구하지도 않으며, 천국을 구하지도 않으며, 개벽을 구하지도 않는다. 자유할 뿐이다. 구할 것도 없으며, 찾을 것도 없으며, 깨달을 것도 없으며, 주장할 것도 없다. 움직이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창조하고 변화시키고 환원시킨다. 구하지 않지만 갖추지 아니한 것이 없으며, 주장하지 아니하지만 옳지 아니한 것이 없으며, 베풀지 아니하지만 우주 삼라만상을 낳고 기르지 아니함이 없다. 자유심 앞에서는 태양도 부끄러워 구름으로 얼굴을 가리게 된다. 자유심은 배우지 아니하였지만 모르는 것이 없다. 왜냐하면 자유심은 천지가 생기기 이전부터 본래 있었으며 천지가 없어진 뒤에도 있을 본래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이 마음은 하늘은 어떻게 땅이 되었으며, 사람은 어ᄄᅠᇂ게 사람이 되었으며, 땅은 어떻게 땅이 되었는지를 본래부터 자명하게 알고 있다. 이 마음은 모든 이치의 인과를 헤아리며, 모든 사물의 인과를 헤아리며, 모든 화복의 인과를 헤아리고 있다.

 

의암은 하늘과 땅과 사람이 생겨난 근본 원인을 삼성과三性科에서 논하고 있다. 그러므로 세 가지 성품이 자명하게 되면 우주간에 모르는 것이 없게 된다. 만사를 알게 되므로 일체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하늘 · 땅으로부터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사람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진 마음을 자유심이라 한다. 의암은 이 마음을 위위심僞僞心이라고도 하였다. 이 마음으로부터 하늘도 생겨나고 땅도 생겨나고 사람도 생겨나고 도도 생겨났다고 한다. 이 마음을 공부하는 것을 동학 · 천도교에서는 심학이라 한다. 이 마음이 비고 고요하면 성품이라 하고, 이 마음이 활동하고 움지이게 되면 기운이라 한다. 묵송으로 성품을 공부하고 현송으로 기운을 공부하는 것도 결국 이 마음을 공부하는 것이다. 의암은 이를 견성각심見性覺心이라 하고, 수운은 마음이 고요에 드는 것을 도를 이루었다고 하고, 마음이 활활발발하여 우주간에 미치지 아니하는 바가 없는 것을 덕을 세웠다고 하여 한마디로 도성덕립道成德立이라고 하였다. 주문의 마지막 구절인 만사지의 지를 풀이하면서 지화지기至化至氣 지어지성至於至聖이라고 하였다. 이렇듯 주문은 인간을 우주기운과 통합시키며 한울님이라고 불리는 궁극적 실재와 합일시키는 것을 근본으로 하고 있다. 생각으로 그러한 것이 아니라 직접 이 경지에 이르러 한울님 마음을 쓰며, 한울님 덕을 베풀며, 한울님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이 동학 · 천도교의 수행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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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경

 

 

 

하심下心은 모든 수행의 기초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을 낮춘다고 하여 곧바로 타자를 공경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겸손은 공경의 바탕이 아닐 수 없다. 수행자들은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뭔가 특별난 존재가 된다는 자존심과 뭔가 특별한 능력을 얻는다는 거만함에 쉽게 빠지곤 한다. 그러나 깨달음이란 풀 한포기나 먼지 한톨도 모두 다 한울님 기운의 간섭 · 명령 · 통일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기 때문에 자존심이나 거만함으로는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

 

수운이 1864년 대구장대에서 참형당한 뒤 해월의 삶은 인고의 연속이었다. 그렇지만 해월의 발이 닿는 곳에는 동학의 접들이 생겨났다. 1870년대에는 경북 지역과 강원도에서, 1880년대에는 충청과 경기 지역에서, 1890년대에는 호남 지역과 황해도 이북 지역에서 동학의 접들이 생겨났다. 이처럼 동학이 짧은 기간 안에 번성하게 된 것은, 당시의 시대적 요청과 함께 해월의 덕행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하겠다. 해월은 한울님을 공경하면 한울님이 내려오고, 사람을 공경하면 사람들이 모이고, 물건을 공경하면 물건이 모여 부자가 된다고 하였다. 천도교경전(수운 · 해월 · 의암의 글을 편집)에서 공경은 가장 자주 사용되는 단어 중의 하나로서 무려 115번이나 나온다. 공경은 삶의 중심이며 성공의 열쇠라 아니할 수 없다. 공경은 사람을 한울님과 똑같이 섬기는 일이며(事人如天), 가축이라도 아끼고 사랑하며, 나뭇가지도 함부로 꺾지 않으며, 물건이라도 다 한울님의 모습으로 여기는 생활 속의 수행이다. 수행이 생활을 떠나 멀고 높은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보되 직업이나 성별이나 신분이나 지식이나 피부색 등으로 보지 아니하고 오로지 한울님으로 보고 대하는 데 있는 것이라 하겠다.

 

해월의 삶에서 우리는 공경의 삶을 볼 수 있다. 해월은 여성들이 수도하는 글인 내수도문으로 유명하다. 그 글에는 뭔가 특별난 애용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시 여성들의 일상의 삶 속에서 오직 한울님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살아가라는 가르침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으로 꼭 한울님께 고하여 한울님을 떠나지 않는 생활을 하다가 보면 열 가지 질병이 나을 뿐만 아니라 대도에 통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천지도수가 모두 이 글에 실려 있다고 하였다. 사모하여 우러르는 님을 잊을 수 없듯이 한울님을 잊지 못할 때 공경이 나오게 된다. 한울님이 아니계신 곳이 없기에 어떤 사람을 만나더라도 한울님으로 섬기며 어떤 물건을 접하더라도 한울님으로 공경할 때 이것이 진정으로 한울님을 공경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늘 깨어 있으면서 함께 하는 것이 공경이라 하겠다.

 

자기 자신을 공경하지 못하고는 밖을 공경할 수 없으니 자심자배自心自排는 의암의 표현으로 동학 · 천도교 공부의 근본 요체라 할 수 있다. 이는 타인을 위하는 학문이 아니라 유가의 위기지학爲己之學의 맥과 상통한다. 자기를 위한다는 것은 육신의 나와 세상 마음의 나를 위한다는 것이 아니요, ‘본래의 나를 위한다는 뜻이다. , 오로지 천주를 지극히 위하는 것이 마음공부이므로 천주학의 맥에도 이어져 있다. ‘본래의 나란 우주만유의 근본 바탕일 뿐만 아니라 만인의 근본 바탕이므로 진정으로 타인과 타물을 위한 길이 바로 위기지학이라 하겠다. 세상과 아집에 빼앗긴 내 마음을 공경할 수는 없다. 그러한 마음에게는 고개가 숙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어떻게 비루하고 누추하고 속된 것을 공경할 수 있겠는가? 내 마음이 본래 청정하고, 본래 순수하고, 본래 깨닫고, 본래 만선萬善을 구비하고, 본래 영원하고 나서야 비로소 이 본래의 나를 공경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심자배는 자천자각自天自覺이 없이는 행할 수 없다. 내 하늘을 내가 깨달아야 비로소 벽을 향하여 설치하였던 제사상을 나를 향하여 돌려놓을 수 있는(向我設位) 것이다. 한울님 이외에 다른 것에 진상하는 것은 미신일 뿐이다. 자심자배는 아집의 내 마음을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천심天心의 내 마음을 공경하는 것이다. 공경의 마음이 싹트기 시작한다면 자타自他 모두에게 큰 경사다. 실상 공경의 마음에는 자타의 구별이 들어설 여지도 없다. 공경함으로써 높고 높은 하늘과 온전히 닮아 같아지게 된다. 공경함으로써 다른 사람들과 화목하게 되고 공경함으로써 자연과 합일되게 된다.

 

 

정성

 

정성이 없으면 물건이 없다는 무성무물無誠無物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중용에서 정성은 중심적 개념이다. 유가에서 이미 정성은 공경과 함께 중시되어 왔다. 동학은 이러한 유가를 재해석하여 승계하고 있다. 수운 자신이 유가와 자신의 도는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고 표현하였다. 에 관한 유가와의 비교분석은 다음으로 미루고 여기에서는 동학적 재해석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해월은 정성을 순일純一무식無息으로 이해하였다. 순일은 말 그대로 오직 순수하여 안팎이 하나라는 뜻이다. , 참되어 거짓이 없다는 뜻이다. 유가식으로 표현하면 진실무망眞實無妄이다. 해월은 거짓으로 사람을 사귀는 사람은 난도자亂道者, 패도자悖道者, 역리자逆理者라고 하였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이웃과 참된 삶의 관계를 맺으며 사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진리를 실천한다는 것은 거짓으로 사람을 사귀지 않는 것이다. 해월은 진실은 생명의 핵이며 거짓은 생명을 부수는 쇠망치라고 표현하였다. 의암은 이 진실한 마음을 빼앗긴 사람은 반드시 죽고, 그 국가는 반드시 멸망한다고 하였다.10 진실성은 동학 수련의 핵심 중의 하나이다.

 

정성은 참된 마음이자 동시에 쉬지 않는 마음이다. 참된 마음이 존재론적 설명이라면 쉬지 않음은 활동론적 설명이다. 쉬지 않음은 우주 운행의 규칙성과 법칙성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하늘이 쉬지 않으므로 우주가 존재한다는 표현에서 잘 알 수 있다. 만약 하늘이 한 순간이라도 쉬게 된다면 우주는 그 즉시로 붕괴된다는 것이다.11 이러한 하늘의 길을 본받아 정성하는 것이 곧 사람의 길이라는 것이다. 부지런하여 반복하고 또 반복하는 것이 정성이 된다. 마치 태양이 180번 이상 동쪽에서 떠야 한 돌의 쌀알이 영그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수행도 이와 같이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호흡하는 사이에도 한울님을 잊지 말아야 하고, 밥을 먹을 때도 한울님을 잊지 말아야 하고, 손발을 움직일 때도 한울님을 잊지 말아야 하고, 무슨 생각을 하든지 다 내 안에 누가 있어 끊임없이 생각들이 솟아나는지를 생각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쉬지 않고 한울님을 생각하게 되면 한울님과 함께하고, 끝내는 너무 가까워지고 친해져서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한울님을 한 순간도 잊지 않는 것이 곧 정성이 된다. 정성은 도덕 실천이며 윤리적 행위가 된다. 정성은 실천적 심학의 맥락에서 강조되며 이지적 · 성리학적 덕목은 아니다. 성리학적 덕목은 이법理法으로서의 천지 운행에 대한 심학의 맥락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아는 것이 천지라도 경외지심 없었으면 아는 것이 무엇이며라는 수운의 말은 도덕 실천적 심학을 잘 보여준다. 그러므로 동학은 왕양명에 의하여 제기되었던 지행합일知行合一의 맥락과 통한다고 할 수 있다. 동학은 이법理法이나 자연법自然法으로 변해버린 천을 내 안에 모신 천주로 재발견하였으며, 초월화되고 형이상학화 되고 절대화된 천리天理와 천성天性을 활활발발하는 마음 기운을 가진 살아 움직이는 생명으로 부활시켰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동학은 양명학과 통한다. 천리나 천명보다 내 마음의 진실과 성실함이 중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동학은 천리나 천명은 양명학에서처럼 폐기되기보다는 내 안에 모셔져 있는 살아 있는 천주로 보존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동학은 양명학처럼 극단주의적 유심론으로 흐르지 않을 수 있었다. 동학은 모실 모실 시로써 유신론과 유심론의 긴장과 조화의 묘미를 살릴 수 있었다. , 동학은 상제 · 천주라는 동서양의 유신론적 전통과 정성 · 양지와 같은 유심론적 전통을 모실 시로 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동학의 심학은 포용적 심학이라 부를 수 있다.

 

성경신은 도덕의 실천이다. 사람을 떠나서 따로 천도가 있지 아니하며 자연을 떠나서 천도가 홀로 존재할 수는 없다. 천도와 천덕은 언제나 사람의 삶 속에 내려와 있다. 윤리적 삶이란 천도와 천덕을 따르는 삶이며 수행이란 천도와 천덕을 실천하는 삶이다. 동학 · 천도교에서는 형이상학과 자연과학에 앞서서 도덕 · 윤리 · 삶이 강조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동학 · 천도교에서 수행은 철학과 과학의 기본 바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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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아는 것과 길을 가는 것은 다르다. 길을 가는 것과 길이 되는 것도 또한 다르다. 수행은 글 공부가 아니라 몸 공부이며 마음 공부이기 때문에 글의 한계는 자명하다. 설사 구름의 붓으로 바다의 먹을 찍어 하늘의 화선지에 그림을 그릴 수 있더라도 몸과 마음이 근본과 합일되지 못한다면 허무한 일일 것이다. 의암은 경전을 만 번 외우고 하늘을 보고 천 번을 절하더라도 근본을 알지 못하면 추풍의 낙엽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라 하였다. 금강불괴金剛不壞의 영원의 무형과 춤추는 우주의 조화를 느끼지 못할 것이라는 뜻이다. 내 성품과 내 마음을 내가 깨달아 하늘과 내가 둘이 아니며 자연조화와 내가 또한 둘이 아님이 청천백일靑天白日처럼 명확해지고서야 천도와 더불어 영생하며 천덕을 무궁토록 베푸는 삷을 살 수 있다는 뜻이다.

 

천도교 수행의 핵심은 주문 수련에 있으며, 성경신의 실천을 통하여 생활에서 이룰 수 있으며, 천도교라는 종교 제도에 구현되어 있음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수행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이르고자 하는 것은 내가 곧 성인이 되고 내가 곧 우주 원기와 합일하는 것이다. 내가 곧 한울님임을 청천백일처럼 명료하게 깨달으며, 이웃 동포와 삼라만상을 모두 한울님으로 섬기며, 나아가 모든 인류의 삶을 천국으로 바꾸는 개벽 문명을 건설하는 것이 수행의 목적이라 할 수 있다.

 

 

 

1 수운, 수덕문」    2 해월, 守心正氣守心正氣 四字 更補天地隕絶之氣   3 도덕가」   4 해월, 기타, ”萬物造하시고 萬物居하시나니, 萬物이니라.“   5 안심가사월이라 초오일에 꿈일런가 잠일런가 / 천지가 아득해서 정신수습 못할러라 / 공중에서 외는 소리 천지가 진동할 때 / 집안사람 거동보소 경황실색 하는말이 / 애고애고 내팔자야 무삼일로 이러한고 / 애고애고 사람들아 약도사 못해볼까 / 침침칠야 저문밤에 눌로대해 이말할꼬 / 경황실색 우는자식 구석마다 끼어있고 / 댁의거동 볼작시면 자방머리 행주치마 / 엎어지며 자빠지며 종종걸음 한창할 때 .   6 의암, 無體法經, “性本無無 無有 無現 無依 無立 無善 無惡 無始 無終”   7 수운, 도덕가8 해월 독공」   9 해월, 대인접물」   10 의암, 無體法經, 성범설,   11 의암 권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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