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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컬러플한 세계사 2

 

 

 

 

 

나는 내 눈앞에 펼쳐진 모든 아름다움을 포착하고 싶었고

마침내 그 바람이 실현되었다.

 

줄리아 마거릿 케머런. 1874년

 

 

이트섬 수변에는 저택이 하나 있었는데, 그 집의 주인이 실론섬(현재의 스리랑카)에 가지고 있던 영지의 이름을 따라 딤볼라

별장이라 불렀다. 이웃에는 영국의 계관시인 앨프리드 테니슨이 살았다. 저택의 바깥쪽에는 닭장을 개조한 사진관이 하나 있

었는데 그 집의 여주인 줄리아 마거릿 케머런은 그곳에서 카메라로 첫 실험을 시작했다. 1815년에 영국계 인도인으로 태어나

48세의 나이에 뒤늦게 사진에 입문한 캐머런은 초창기 사진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활동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녀의 손에

서 사진이 감광판은 사실보다 감정을 담아냈다. 그녀는 1840년대 말에 결성된 라파엘 전파의 감성으로 작품을 촬영하는 예술

가였다. 그녀의 관심은 로저 펜턴이나 알렉산더 가드너의 뚜렷한 세속성으로 상상할 수 있는 것과 거리가 멀었다.

 

캐머런은 부드러운 초점으로 화면을 가득 채우고 로맨스, 역사주의, 판타지, 신화 같은 주제를 담아내는 작업에 골몰했다.

심지어 찰스 다윈처럼 부자연스럽고 수염이 덥수룩한 세계적 유명 인사를 피사체로 삼아 사진을 찍을 때도 케머런은 그들에게

영적인 것을 불어넣었다. 그녀는 "외면은 특징이 아닌 내면의 위대함" 을 발견하는 것이 자신의 목적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녀는 모델들에게 아서왕이나 로마 여신 디아나 같은 상상 속 과거 인물처럼 차려입거나 전형적인 모습으로 자세를 취하게

하는 걸 좋아했다. 그녀의 손에서 (모든 초상화에서 수줍은 포즈를 취하던) 테니슨은 <지저분한 수도사>라는 제목의 사진

에서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중세 학자가 되었다.

 

캐머런의 사진 경력은 짧지만 인상적이었다. 그녀는 1863년에 자녀들로부터 카멜를 선물 받은 후 사진 촬영을 시작했고

1875년경 남편 찰스 헤이 케머런과 함게 와이트섬을 떠나 실론으로 돌아갔을 때 사진 촬영을 그만두었다. 그러나 1879년

세상을 떠났을 때 그녀는 사진 분야에 지울 수 없는 발자취를 남겼다. 뜻이 맞은 소수의 사람들(오스카 귀스타브 레일랜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저술한 작가 루이스 캐럴 역시 그중 한 사람이었다)과 함께 케머런은 사진을 진정한 예술 형식

의 하나로 만드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1860년대와 1870년대 캐머런이 여러 번 사진 촬영을 거듭했을 만큼 아꼈던 모델은 그녀의 조카 줄리아 잭슨(훗날 작가

 버지니아 울프의 어먼가 되었다)과 메이 프린셉이었다. 메이 프린셉은 사진에서 보듯 베아트리체 첸치로 분장하고 카메라

앞에서 자세를 취했다. 베아트리체 첸치는 비극적인 운명의 젊은 로마 귀족으로 16세기 말 학대를 일삼는 아버지를 살해한

로 교황 클레멘스 8세의 명에 따라 형제들과 함께 참수당했다. 베아트리체 첸치의 음산한 역사는 1870년대와 아주

잘 어울리는 이야기였다. 1870년대는 괴기함과 경이로움이 제멋대로 뒤섞인 10년이었다. 

 

1870년대의 어떤 사건들은 그야말로 중세적이었다. 로마에서는 시대에 역행했던 비오 9세의 이례적으로 긴 통치가 끝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그의 통치 기간을 특징짓는 것은 세속 군주들과 치른 전쟁과 '교황 무류성' 이라는 교리의 단언이었다.

스페인에서는 카를로스 왕가의 계승자를 자처하는 자가 부당하게 빼앗긴 왕위를 되찾기 위해 전장을 장악했다. 프랑스가

프로이센과 치른 불운한 전쟁에서 패한 뒤, 파리에서는 무장한 시민군들이 반란을 일으켜 파리 코뮌을 선언했다. 결국 파리

역사상 가장 많은 피를 흘린 학살로 최후를 맞았다.

 

그러나 1870년대의 다른 많은 발전들은 본질적으로 근대적이었다. 산업 자본주의의 보이지 않는 실타래들이 그 어느 때보다

긴밀히 엮여 있던 세계 경제는 (장기 불황으로 알려진) 역사상 최악의 집단적 경기 침체를 겪고 있었다. 미국에서는 남북전쟁

이 남긴 깊은 골로 나라가 황폐해졌다. 남부에서 앤드루 존슨, 율리시스 S. 그랜트, 러더퍼드 B. 헤이스의 행정부는 재건이라

는 어마어마한 도전에 직면했고 서부에서는 풍부한 광맥과 미 황무지의 지형 조사에 착수했다. 토지에 대한 이러한 조사와

사 활동으로 인해 미 행정부와 아메리카 원주민 사이의 긴장이 극심해졌다.

 

아프리카에서는 데이비드 리빙스턴과 헨리 모턴 스탠리를 포함한 영국의 탐험가들이 아프리카 대륙 내부의 지도를 완성하고

있었다. 그들의 대담한 탐사 여생은 유럽 주요 강대국들이 토지와 부를 이용하기 위해 아프리카를 무자비한 약탈을 시작한

과정과 무관하지 않았다.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에서는 영국과 러시아의 '그레이트 게임' 으로 거리가 피로 얼룩졌다.

발칸에서 다르다넬스에 이르는 러시아-튀르크 전쟁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테니슨 같은 위대한 시인들부터 레프 톨스토이 백작 같은 소설가들, 케너런 같은 초상 사진작가에 이르기까지

예술가들은 계속해서 그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특히 제국주의적 배경에서 근대적 수단과 중세적 감수성을 지닌

사진 작가 캐머런은 영국 해협의 작은 섬에 닭장을 개조해 마련한 자신의 성소에서 세심한 구도로 그 세계를 포착했다.

 

 

 

 

 

 

 

 

파리 코뮌

 

1870년 7월에 프랑스와 프로이센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의 조짐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오토폰 비스마르크 수상이 예비한

프로이센군이 프랑스군보다 월등하다는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노쇠한 채로 병까지 들어 혼란에 빠진 나폴레옹 3세는 독일에서

포로로 잡혀 수감되었고 프랑스 제2제정이 붕괴했다. 새로 들어선 제3공화정 정부는 전쟁을 지속하기로 결의했지만 1871년 1월까지

4개월 째 파리는 프로이센 군대에 포위되어 있었다. 결국 프랑스는 항복했고 프로이센의 왕 빌헬름 1세가 베르사유 궁전에서

신생 독일 황제로 즉위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포위 기간에 파리를 수비한 것은 민병대인 국민방위대였고 이들은 차츰 급진적인 색채를 띠기 시작했다. 3월까지 독일 군대가 여전히

파리에 주둔해 있었고 파리 내부에서는 폭동의 분위기가 감지되었다. 3월 18일에 파리의 방어 시설에서 대포를 제거하려는 정부의 시도

에 맞서 무장 저항이 발생했다. 8일 뒤 치러진 파리시 선거에서 코뮌이 성립되었다. 혁명적인 사회주의 정부였던 파리 코뮌 참가자들은

5월 21일 정규군이 파리를 휩쓸 때까지 2개월 동안 버텼다. '피의 주간'에 코뮌은 분해되었고 질서가 회복되었다. 불타는 건물과 대규모

처형의 끔찍한 풍경이 배경이었다. 파리의 사진가 앙드레 아돌프 외젠 디스데리가 찍은 유명한 사진은 대량 학살되어 매장된

6천 명에서 1만 명으로 추산되는 코뮌 참가자 가운데 고작 수십 명의 모습만 보여줄 뿐이다.

 

 

 

 

 

 

 

 

카를로스 전쟁

 

프랑스 제2제정이 몰락하는 동안 스페인에서는 왕위를 둘러싼 분쟁이 전쟁으로 비화하고 있었다. 1833년에 부르봉가의 국왕

 페르난도 7세의 후사를 둘러싼 분쟁이 일어나면서 스페인의 왕위를 두고 왕족들이 대립하기 시작했다. 한편에는 페르난도의

 딸 이사벨라 2세 여왕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페르난도 동생 카를로스의 후손들이 있었다. 보수적인 카를로스파는 

여성 군주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다. 

 

이 사진의 인물은 마드리드 공작 카를로스다. 그는 1870년대에 자신이 카를로스파의 공식적인 왕위 계승자라고 주장했다.

1870년 자유주의자들이 봉기한 후 이사벨라 여왕은 왕위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녀의 자리를 차지한 것은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한 이탈리아의 군주였고 그는 스페인 의회에서 아마데오 1세로 추대되었지만 1873년 폐위되었다. 그 후 22개월 동안

공화정부 시기가 이어졌고 1874년 12월 마침내 이사벨라의 아들 알폰스 12세의 즉위로 부르봉 왕정이 복고되었다.

 

이런 혼란의 와중에 자칭 카를로스 7세는 카탈루냐와 바스크 지방의 분리주의 정서를 자극하고 자원병 군대를 꾸려

 게릴라전을 펼치며 상당한 파란을 일으켰다. 1873년에서 1875년 사이에 카를로스파들은 전장에 수천 명, 혹은 수만 명의 병력을

 투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몇몇 주요 전투와 포위전에도 불구하고 1876년에 카를로스는 월등한 전력의 정부군에 패배를 인정하고

프랑스로 망명했다. 1881년부터 그는 또닷 자신이 샤를 11세로서 프랑스의 정당한 왕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1909년 어떤 왕위도

얻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카를로스파들은 계속해서 왕위를 주장했고 스페인 내전 기간에 프랑코 장군이 이끄는

내셔널리스트 진영 군대에 운을 걸었다.

 

 

 

 

 

 

 

 

러시아 튀르크 전쟁

 

스페인이 내분을 겪고 프랑스가 프로이센의 공격에 대응하고 있는 사이, 동유럽은 러시아제국과 오스만제국의 오랜 적대 관계로

괴로움을 겪고 있었다. 1870년대에는 발칸반도에 긴장이 고조되었다. 1875년부터 1876년 사이에 반란의 물결이 이어져 오스만

제국이 지배 아래 있던 불가리아, 루마니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지역적인 분쟁이 발생했고,가혹

하게 진압 되었다. 발칸반도의 반란자들은 유럽 전역에서 상당한 공감을 얻었다. 불가리아에서 민간인을 대상으로 잔혹한 행위

학살이 광범위하게 자행되었다는 기다들이 보도된 후에 특히 그랬다. 러시아는 이를 기회로 보았다. 크림 전쟁과 달리 유럽의

강대국 중 어느 나라도 오스만제국을 도우려 나서지 않았다. 1877년 차르 알렉산드르 2세는 오스만제국에 전쟁을 선포했고

서쪽으로 다뉴브강을 건너, 그리고 동쪽으로는 코카서스산맥을 넘어 터키로 진군했다.

 

이 사진에 등장하는 이들은 오스만제국의 수비 대원들이다. 그들은 오스만제국의 심장부를 수호하는 임무를 받았다.

 1877년부터 1878년 사이에 치러진 전쟁에서 그들은 연전연패를 기록했다. 1878년 3월까지 러시아군은 쿤스탄티노플을 위협

했고 오스만군은 산스테파노 조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다. 그 조약에 따라 루마니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가 모두

 오스만제국의 지배에서 해방되었고 방대한 불가리아 공국이 탄생해 러시아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발칸반도의 반란과 오스만제국에 맞선 러시아의 승리는 그 지역의 세력 판도를 크게 바꾸어놓았다.

이런 변화의 결과는 다음 세기가 시작되고 나서야 뚜렸해졌다.

 

 

 

 

 

 

 

레프 톨스토이

 

터키인들에 맞선 러시아의 전쟁은 레프 니콜로예비치 톨스토이 백작의 『안나 카레니나』의 마지막 부분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이 소설은 1875년부터 1877년 사이 《러시아 헤럴드》에 연재되었고 현대문학의 걸작 가운데 하나로 여겨진다.

 

『안나 카레니나』는 동명의 여주인공의 삶과 간통, 죽음을 다룬다. 그뿐만 아니라 톨스토이의 여러 다른 작품들이 그렇듯이. 작품이

아루르는 범위는 방대하며 실질적 주제는 러시아 그 자체다. 러시아의 인민, 러시아의 정치와 딜레마, 그리고 러시아의 혼이 그 작품

의 실질적 주제다. 10년 전 톨스토이는 같은 잡지에 『전쟁과 평화』(1864~1869)를 연재했다. 그 작품은 나폴레옹 전쟁 동안 러시아

귀족의 모든 것을 담은 연대기였다. 그 소설을 쓰기 전 톨스토이느 『세바스토폴 스케치』(1855)에서 크림 전쟁에 대해 썼다.

 

이 사진에서 톨스토이는 손자 일리야와 손녀 소냐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톨스토이가 손자들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오이로 가득한 정원에 관한 것으로 그가 1910년 사망 직전에 쓴 것이다.

 

톨스토이는 위대한 문학의 시대를 살았다. 러시아에서 그의 동시대인들로는 이반 투르게네프,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안톤 체호프가

있었고 러시아 밖에는 조지 엘리엇, 토머스 하디, 빅토르 위고, 귀스타브 플로베르, 에밀 졸라, 헨리크 입센, 허먼 멜빌, 마크 드웨인과

헨리 제임스가 있었다. 그들은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19세기 중후반을 경험했고 문학은 그들의 경험에 영원한 생명을 불어넣었다.

 

 

 

 

 

 

 

포르피리오 디아스

 

포르피리오 디아스가 만약 러시아인이었다면, 톨스토이는 어쩌면 그를 자신의 소설에 등장시켰을지도 모른다.

1830년 멕시코에서 태어난 디아스는 소년 시절에 사제 교육을 받았지만 1840년대에 교회를 등진 뒤 처음에는 법을 공부했고,

그 다음에는 군에 입대했다. 개혁전쟁으로 알려진 멕시코 내전에 참전했고, 프랑스가 멕시코를 종속된 제국으로 만들었을 때

다시 전쟁에 참가했다. 프랑스군이 멕시코에서 축출되었을 때 디아스는 장군으로 진급했다. 1876년 부터 일곱 차례 대통령을

역임하면서 이 시기는 사람들에게 포르피리오 시절로 알려졌다. 재임 기간 멕시코의 문호를 개방했고 경제를 근대화 했다.

1910년 그가 여덟 번째 임기를 준비하자 혁명이 일어났고 디아스는 자신이 사용했던 방법으로 몰락했다.

 

 

 

 

 

 

 

장기 불황

 

전 세계적인 경기 침체가 발생했을 때, 비록 분배는 불공평했지만 포르피리오 시절의 멕시코 경제가 안정적으로 발전했다는

사실이 더할 수 없이 명확해졌다. 1930년대 세계가 전 지구적인 경제 위기에 압도되기 전까지만 해도, 장기 불황은 대공황으로

불리며 최초의 전 세계적 경제 위기로 묘사되었다. 1873년 5월 9일 하루 동안 빈의 증권시장에서 대규모 손실이 발생한 것을

출발점으로 1873년 공황으로 알려진 일련의 금융 쇼크가 촉발되었다. 빈에서 발생한 손실은 곧바로 해외 금융시장으로 확산되어,

그 중에서도 특히 미국과 영국이 큰 타격을 입었다.

 

스웨덴 태생으로 영국에서 활동하다가 1875년에 사망한 사진작가 오스카 구스타브 레일랜더가 촬영한 이 사진은 그 시대의

곤경을 잘 요약하고 있다. 이 사진의 원제는 찰스 디킨스의 1854년 소설의 제목을 딴 <힘겨운 시절>이다. 예술사진의 선구자로

하나의 프레임 안에 여러 장면의 몽타주를 구성하기를 즐겼던 레일랜더는 나중에 이 원본 사진에 또 다른 이미지를 흐릿하게

덧입혀 <영혼의 사진>이라는 제목의 새로운 사진을 발표했다.

 

 

 

 

 

 

 

커스터의 마지막 저항

 

장기 불황과 남북 전쟁 후 재건의 어려움 때문에 미국에서 1870년대는 힘겨운 시절이었다. 아메리카 원주민과 미국 정부 사이에

전쟁이 계속되면서 어려움은 훨씬 더 가중되었다. 아메리카 원주민과 미국 정부 사이의 갈등은 1870년대 블랙힐스 전쟁으로

 알려진 일련의 충돌에서 최고조에 이르렀는데, 1874년 사우스타코타와 와이오밍의 블랙힐스 주변에서 황금이 발견되자

1876년과 18/77년 사이 이 지역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가장 유명한 희생자 가운데 한 사람은 미 제7기병대 소속의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중령이었다.

여기 수록된 사진에서 그는 남북 전쟁 참전 용사로서 복장을 갖추었는데, 전시에 그가 소장으로 특진한 후 전역한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다. 커스터는 믿기 어려울 만큼 눈부신 인물이었다. 그 낭만적 외모와 위험에 대한 기사도적 태도, 그리고 여성에 대한 욕망은

전국적인 유명세를 떨치는 데 일조했다. 1876년 6월 25일 몬태나주 리틀 빅혼 전투에서 커스터와 그의 부하들은 수족과 샤이엔족의

대규모 군대에 제압되었다. 그들을 이끈 것은 시팅불과 크레이지 호스를 포함한 유명한 추장들이었다.

 

 

 

 

 

 

 

재건 시대

 

남북 전쟁의 불운이 지나간 뒤 미국을 재건하는 일은 그저 시체를 묻고 폭격당한 도시를 재건하고 폐허가 된 풍경을 수습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깨져버린 연방을 다시 봉합하기 위해 법적 정치적 문화적으로 해야 할 과업이 산적해 있었다. 재건 시대 동안 가장

시급한 문제는 수백만 명의 해방 노예들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법은 바뀌었지만 전쟁을 경험한 이후 많은 지역에서

인종과 평등에 대한 태도가 더 강경해졌다. 그리하여 재건은 하나로 화합된 국가를 추구하는 사람들과 미래에 대한 더 급진적이고

결정적인 관념에 집착하는 사람들 사이의 투쟁이 시작되었다.

 

해방 노예들을 찍은 이 사진은 재건 시대에 혹은 그 직후에 사우스캐롤라이나 벨튼시에서 촬영된 것이다.

이곳은 남북 전생의 총격이 처음 시작된 주에 속했을 뿐만 아니라 면화 생산으로 건설된 도시였다.

 

 

 

 

 

 

 

 

토머스 에디슨

 

에디슨은 생전에 1,000개 이상의 특허를 출원했다. 그는 최초의 전구, 최초의 영화 카메라(키네토스코프), 알칼리 전지와 축음기를

발전시켰다. 그 기계는 미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 사람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았고, 에디슨은 명성을 얻었으며 투자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로부터 얻은 자신감에 힘입어 이후 수많은 호기심을 추구할 수 있었다. 1931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도 여전히 왕성했던

탐구 정신 덕분에 에디슨은 미국을 대표하는 발명의 거장으로 기억된다.

 

 

 

 

 

 

 

 

 

스텐리와 '칼룰루'

 

에디슨이 당대의 가장 위대한 기술 정신을 표상하는 인물이었다면 헨리 모턴 스탠리는 가장 모헙적이고 별난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스텐리는 온갖 역경을 딛고 1871년 탕가니카호 근처에서 리빙스턴을 찾았다. 사진은 스텐리가 영국으로 돌아와

자신의 성공을 알린 직후 촬영했다. 스텐리는 아이에게 '칼룰루'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자신의 하인으로 삼아 몇 년 동안

데리고 다녔다. 1877년에는 탐험 도중 칼룰루가 콩고강 폭포에 빠져 익사했고 그 뒤로 스텐리는 그 폭포를 '칼룰루 폭포'

로 불렀다. 1880년대 스텐리는 기자 일을 그만 두고 벨기에의 레오폴드 2세를 위해 일했고 그 대가로 아프리카 적도 부근

콩고 분지의 방대한 토지를 하사받았다. 그런 이유로 스텐리는 '아프리카 분할'의 초기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케취와요 왕

 

 

 

 

콩고에서 남쪽으로 멀리 떨어진 줄루 왕국의 케취와요 캄판데 왕은 심각한 위협에 직면한 자신의 생명과 왕국을 기키기 위해

싸우고 있었다. 위협은 영국으로부터 왔다. 영국은 줄루 왕국의 영토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케이프 식민지와 트란습말의 보어

지방을 포함해 자신들의 식민지로 다스리고 있는 남아프리카 지역들을 강제로 합병하려 했다.

 

케취와요의 병사들은 영국의 공격에 맞서 맹렬히 저항했고 1월 22일 이산들와나 전투에서 중무장한 영국군을 물리쳤으며 이어

로크스 드리프트 선교 기지의 소규모 영국 수비대를 공격했다. 그곳에서 11시간에 걸친 영국운의 저항에 밀려 그들은 물러났고

이는 곳 전설이 되었다.

 

이 케치와요 사진은 1870년대 중반 촬영돤 것으로, 애석하게도 이때가 그의 최고 절정기였다.

1879년 7월이면 영국군의 증원군이 당도해 줄루 왕국의 수도 울룬디를 불태워버리게 된다. 그는 포로로 잡혀 케이프타운으로

추방되었다. 그의 왕국은 그의 정적들과 영국인들이 분할해 차지했다. 1882년 케취와요는 왕으로 복귀할 것을 협상하기 위해

영국으로 향했지만 너무 많은 피해를 입을 뒤였다. 이듬해 왕국으로돌아간 케취와요는 자신의 왕국이 내전으로 분열된 것을

발견했다. 그는 한 번 더 도주할 수밖에 없었고 1884년에 사망했다.

 

 

 

 

 

 

 

미케네

 

하인리히 슐리만의 관심은 당대의 전쟁이 아니라 고대의 전쟁이었다. 열정과 야심이 넘치는 이 독일인 고고학자는 1870년대 초 현재의

터키 북부에 위치한 히사를리크에서 발굴 작업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했다. 그는 그곳에서 호메로스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트로이

의 유적을 발견했다고 믿었다. 1870년대 중반에 슐리만은 프리아모스의 보물로 알려진 고대 황금 유물을 숨겨 반출한 뒤에 오스만제국

과 법적 분쟁에 휘말렸다. 그래서 슐리만은 1874년과 1876년 사이 여기 수록된 그리스의 미케네로 관심을 돌렸다. 그가 찾고자 한 것은

역시 호메로스 시절의 보물이었다. 그는 『일리아스』에 그 업적과 연애사가 기록괸 아가멤논 왕과 그의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의 묘를

찾고 있었다. 슐리만이 발견한 것은 청동기 시대의 요새와 망치로 두르려 세공한 정교한 황금 마스크를 포함한 눈부신 보불들이 부장된

왕의 무덤이었다. 슐리만은 이 무덤이 아가멤논의 것이라고 확신했지만 실제로 그가 발견한 보물은 (학자들이 트로이 전쟁의 시기라고

여기는) 기원전 12세기~11세기보다 수백 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1878년에 슐리만은 히사를리크 발굴 작업에 복귀했고 1890년 사망하기 전에는 펠로폰네소스의 티린스에서 발굴 작업을 펼쳤다.

그는 자신의 작업을 대중화하는 능력 덕분에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는 할리우드가 좋아하는 고고학자-탐험가의 선조로서

훗날 영화 <인디아나 존스>로 재탄생 한다.

 

 

 

 

 

 

 

 

아프간 전쟁

 

중앙아시아에서 영국이 이끄는 군대는 상당히 다른 지형에서 전쟁을 수행해야 했다. 아프가니스탄은 영국 치하의 인도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고 러시아제국에 국경이자 완충지대를 제공했다. 그 지역의 패권을 둘러싼 영국과 러시아의 다툼은 '그레이트 게임'

으로 알려졌다. 1839년에서 1842년 사이 영국군과 인도군은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에서 정권 교체를 압박하며 수천 명을

희생시켰다. 1878년부터 1880년까지 제2차 아프간 전쟁이 벌어졌고 이 사진은 전쟁 기간에 존 버크가 촬영한 것이다.

아일랜드 태생의 사진가였던 존 버크는 영국-인도군이 다시 카불로 진격할 때 그들과 동행했으며 아프가니스탄의

통치자를 교체시킬 때 다시 한 번 동행했다.

 

 버크는 전쟁이 시작되자 카이바르 고개 입구에 위치한 장루드 요새 밖에서 이 사진을 촬영했다.

이 사진은 아프가니스탄 족장들에 둘러싸인 영국군 장교 터커 대위(중앙에 앉아 있다)를 보여준다. 1879년 초 영국군이 카불에

접근하자 왕셰르 알리 칸은 러시아의 보호를 받기 위해 북쪽으로 도주했다. 5월에 영국은 그의 후계자로부터 불평등한 간다마크

조약을 얻어냈고 그 덕분에 영국인 선교사들이 카불에 머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3개월 뒤에 반란을 일으킨 아프가니스탄군

에게 영국 공사가 살해되었고 그에 따라 프레드릭 로버츠 장군이 이끄는 영국군이 카불을 점령했다. 1880년 9월에 셰르 알리 칸의

아들이 이끄는 반란이 진압되었고 영국이 아프가니스탄의 외교 정책을 관장하는 것을 새로운 왕, 압두르 라만 칸이 수용하면서

짧지만 피비린내 나는 전쟁은 종결되었다.

 

 

 

 

 

 

 

교황 노노

 

그리스에서 고고학자들이 실물보다 큰 역사적 조각상들을 발굴하고 있을 때, 로마의 신자들은 역사적 인물이 영면에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로마에서는 비오 9세보다 비오 노노로 더 잘 알려진 조반니 마리아 마스타이 페레티는 성 베드로에 이어 역대 최장 임기를

수행한 교황이었다. 그는 정치적 선동가였고 근대보다는 중세의 전통에 서 있는 교황이었다. 그는 자신을 가리켜 주세페 가리발디 같은

이탈리아 내셔널리스트의 희생자라고 표현했다. (가끔은 타당한 주장이었다). 가리발디가 평생토록 교황령 국가를 정복하려고

 애썼기 때문이다.

 

31년의 교황 임기 동안 비오가 취했던(보통은 보수적이고 가끔은 논란이 되기도 했던) 여러 입장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무염시태(無染始胎, 마리아가 잉태했을 때 전혀 원죄가 없었음을 확인하는 로마가톨릭의 교리)와 교황 무류성(敎皇無謬性, 1869년부터

1870년 사이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규정된 것으로 도덕성과 신앙의 문제에서 교황의 가르침은 정의상 틀릴 수 없음을 주장) 선언이다.

그는 기차에 열광했으며 혁명가들에게 유화적인 자세를 취했다. 또 불관용적인 반근대주의자이자 로마의 유대인 게토 재 설치를 비롯,

반자유주의적인 조치를 취한 반동적 인물이기도 했다.

 

비오는 살았을 때와 죽었을 때 모두 사진에 찍힌 최초의 교황이었다. 이 사진은 1878년 2월 7일에 85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 후 관에

안치된 비오 9세를 보여준다. 시복식을 앞두고 2000년 4월 4일 하얀 돌로 된 그의 무덤이 열렸을 때 그의 시신은 거의 완벽한 상태로

보존되었고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엿보인다.

 

 

 

 

 

 

 

내 민족이 원하는 것은 자유로운 삶이다.

내가 본 바로는 백인이 지닌 것들 - 이를테면 집이나 철도나 옷이나 먹을 것 - 중에

자유롭게 펼쳐진 땅에 대한 권리를 지낸 채 우리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삶보다

더 나은 것을 보지 못했다.

 

시팅불의 인터부. 1882년

 

 

 

1885년 여름 아메리카 원주민 헝크파파의 추장 시팅불은 서커스단과 함께 미국과 캐나다를 순회했다.

<버펄로 빌의 와일드 웨스트> 공연에는 동물 묘기와 로데오, 저돌적인 사격술 묘기와 전투의 재연 등이 펼쳐졌다.

알려진 바로는 이 모든 것이 창설자인 윌리엄 프레드릭 코디, 일명 '버펄로 빌'의 자극적인 경험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그는 변경의 개척자로서 국경 지대 사람들의 왕이라는 자신의 공적 이미지를 열렬히 수행한 사람이다. 코디가 54세이 시팅불을

이 공연에 기용한 것은 파격적인 일이었다. 헝크파파는 라카타 혹은 서부 수족이었고 시팅불은 1876년 리틀 빅혼 전투에서 조지 커스터

중령과 그의 부하들에게 굴욕을 앉기고 그들을 살해한 최고의 전사였다. 부족민들 사이에서 추장 시팅불은 용기와 지혜의 표본이라는

평판을 얻었다. 위대한 백인 대중에게 고귀한 야만인의 체현(體現)이었던 그는 불가해하고 이국적이며 위험한 존재였다.

 

머리에 독수리 깃털을 꽂은 시팅불의 이 사진은 1885년 바로 그해 촬영한 것이다.

카메라 뒤에서 이 사진을 촬영한 사람은 다코타에서 활동하던 사진가 데이비드 프랜시스 배리였으며 코디와는 친한 사이였다.

 그는 아메리카 서부를 즐겨 촬영했는데 그가 촬ㅇ한 대상에는 레드 클라우드 같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물론이고 코디의 또 다른

관객몰이 일등 공신인 1급 사격수 애니 오클리가 포함되어 있었다. 시팅불의 부족에게 배리는 '리틀 새도 캐처(작은 그림자 사냥꾼)'

알려져 있었다. 그에게 이런 별명이 붙은 것은 그의 작은 키(165센티미터) 때문이기도 했고 조그만 사진 속에 생생한

초상을  담아내는 그의 기술 때문이기도 했다.

 

1890년 '유령의 춤' 운동은 워보카(일명 잭 월슨)라는 이름의 신들린 주술사에게서 시작된 구원 신앙의 광풍이었다.

인디언 보호구역의 식량 배급을 둘러싼 분쟁을 배경으로 시작된 이 무자비한 공상은 절망에서 비롯되어 거짓 희망으로 부풀려진

것이었으나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 여럿이 이에 기꺼이 귀를 기울였다. 그들 중에는 헝크파파도 포함되어 있었다. 새로운 전쟁의 근거가

마련되었다고 생각하 미국 정부는 먼저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오두막에 있던 시팅불을 체포했다.

총격전이 일어났고 시팅불은 총에 맞아 사망했다.

 

2주 뒤인 1890년 12월 29일 사우스타코타의 운디드니 크리크에서 인디언 전쟁 중 가장 악명 높은 학살이 발생했다.

헝크파파와 미니콘주 라코타의 남녀, 어린이 150명 이상이 미7기병대에게 살육되었다. 아메리카 원주민과 정착민 사이의 갈등은

1920년대까지 지속되었고, 평원 인디언들의 오랜 생활 방식을 유지시켜주던 아메리카 들소들은 거의 멸종으로 내몰렸다.

 

탐욕과 복수, 문화의 절멸로 점철된 전쟁의 이런 음울한 대단원은 결코 1880년대 미국에서만 있었던 일은 아니다.

'아프리카 분할'은 무자비한 식민주의였으며 최악의 만행은 벨기에 왕 레오폴드 2세의 개인 식민지였던 콩고 자유국에서 자행되었다.

 

뉴스가 실시간으로 전 세계로 송출되지 않던 시대였기에 미국과 유럽 시민들은 아직 이러한 공포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1880년대는 경이로운 건축의 시대였고,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이나 파리의 에펠탑, 그리고 새로운 유형의 고층 건물인

'마천루'의 시대였다. 또한 1880년대는 천문학자들이 천체의 작용에 관한 새로운 통찰을 얻은 시대이며

 국제적인 스포츠 경쟁이 시작된 시대였다.

 

 

 

 

 

 

 

전차

 

궤도차(tram)의 역사는 전력이 사용되기 훨씬 전부터 시작되었다. 1807년 사우스웨일스에서 최초의 여객용 궤도차가 운행을

시작한 이후 당나귀, 말, 케이블을 이용한 도르래와 증기 엔진이 끄는 궤도차가 도시 주변을 돌았고 19세기 말이면

세계 곳곳의 도시에서 궤도차를 볼 수 있었다. 궤도차는 널리 보급되어 인기를 누린 대량 운송 수단이었다.

 

이 사진에 등장하는 전차는 1881년 5월 16일 베를린 부근 리히터펠트에서 운행을 시작한 세계 최초의 전차로 이 지역의 기차역과

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신축된 프로이센 군사학교, 즉 독일 육군사관학교를 연결했다. 한 번에 20명을 실어 나를 수 있었던 이 전차

는 처음에 선로를 흐르는 직류 전기에서 전력을 공급받았고 나중에는 위쪽의 전선에서 전력을 끌어왔다. 전차를 제작한 것은

베르너 폰 지멘스로 그의 회사는 그보다 한 해 전에 세계 최초의 전기 엘리베이터를 만든 바 있었다.

 

전력은 엘리베이터와 전차 운용은 물론이고 자석과 전구, 전화기, 심지어 배를 만드는 데도 사용되었다.

1881년 가을 파리에서 개최된 국제전기박람회에는 이 새로운 여러 발명품이 전시되었다. 그 박람회에서는 과학 보고서들도 제출

되었는데 오늘날 상식이 된 측정 단위들(암페어, 볼트, 옴)을 포함해 전기를 측정하고 사용하는 기술적 요소들이 규정되었다.

일상의 물품이 전선을 통해 연결되고 충전되는 미래가 급속히 실현되고 있었다.

 

 

 

 

 

 

 

자유의 여신상

 

"세상을 밝히는 것은 전기가 아니라 자유다."

이는 1886년 10월 28일 뉴욕항에서 거행된 거대한  기념물의 제막식에서 미국의 대통령 그로버 클리블랜드가 한 말이다.

1865년에 처음 구상된 자유의 여신상(정식 명칭은 '세상을 밝히는 자유')은 바닥부터 맨 꼭대기 불꽃 끄트머리까지의

높이가 93미터에 이르며 프랑스 시민과 미국 시민의 합동 작업 결과물이다.

 

높이 치솟은 로마의 여신 리베르타스의 조각상은 파리에서 조각조각 나뉘어 제작되었다.

1881년 파리의 가제 고티에사의 작업장에서 촬영된 이 사진에는 조각상의 왼손을 제작 중인 예술가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왼손에는 미국독립선언 날짜(1776년 7월 4일) 적힌 판이 들려 있다. 엄지손가락을 작업하고 있는 예술가는 프레데릭 오귀스트

바르톨디인데 그는 이보다 앞서 새로 건설된 수에즈 운하 입구의 거대한 여신상을 디자인한 바 있다.(제작은 되지 않았다).

 

처음 자유의 여신상은 태양 빛을 받을 수 있게 청동을 입혔지만,

 수십 년 만에 금속이 산화되어 이제는 친숙해진 녹색을 띠게 되었다.

 

 

 

 

 

 

 

존 D. 록펠러

 

19세기에 세상을 바꾼 교통과 기술의 진보는 새로운 형태의 에너지에 달려 있었다.

석유만큼 중요한 것은 없었다. 석유 사업과 유관 산업, 특히 철도 산업을 지배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막대한 부가 돌아 갔다.

록펠러는 그렇게 현대사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 되었다. 록펠러의 회사, 스텐더드 오일사는 18701년에 오하이오에서 법인

으로 설립되었지만 1880년대에는 미국 전역에 걸쳐 수십 곳의 회사를 거느린 기업 복합체인 트러스트가 되었고 소수 주주

집단이 지배권을 행사했다. 석유와 교통 산업을 잘 이해하면서, 기민하고 비밀스러운 기업의 관행을 선호하던

록펠러의 야심 덕분에 그 회사는 정유와 석유 배급을 독점할 수 있었다.

 

1911년에 스탠더드 오일사는 독점급지법을 위반한 사실이 드러나 해체되었지만 2년 뒤 확인된 록펠러의 개인 재산은

90억 달러에 달했다. 이는 역사적으로 리디아의 크로이소스 왕이나 푸거가에 견줄 만한 것이었고, 록펠러는 그 재산 때문에

많은 미움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많은 액수의 돈을 내놓았고 생명 의학 연구, 공중보건과 교육을 포함한

 자선사업에 많은 자금을 지원했다.

 

 

 

 

 

 

 

 

에펠탑

 

1880년대 프랑스인들이 다른 나라를 위한 건축만 했던 것은 아니다.

에펠탑은 자유의 여신상을 주도했던 공학자 구스타브 에펠이 토템적 창조물이었다.

 이 6장의 사진은 1888년 7월 14일부터 1889년 3월 12일 사이에 촬영된 것으로 300미터가

 넘어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던 그 탑의 건설 과정을 속도감 있게 보여준다.

 

 

 

 

 

 

 

 

파리 세계박람회

 

그 시대 전 지구의 거의 모든 경이로운 것들이 1889년 5월 6일부터 10월 31일까지 파리에 집결했다.

에펠탑 아래 샹드마르스에는 남아메리카 부터 극동에 이르는 각지에서 모인 6만 명 이상의 출품자들이 집결했다.

그리고 유리와 금속으로 주문 제작되어 '기계의 전시장' 으로 알려진 8헥타르 규모의 가건물 공간에 예술, 수공품, 음악,

가구, 직물, 금속 작품, 음식 술, 기술, 역사극 그리고 산업의 결과물 등이 전시되었다.

 

1889년에 촬영된 이 자신은 파리 세계박람회의 가장 유명한 참가자들을 보여준다.

그들은 자바의 전통 의상을 차려입은 무희들이었다. 자바는 당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속해 있었다.

자신들의 전통 촌락인 캄풍을 모방해 꾸민 전시 공간에서 자바의 무희들은 모자 만드는 기술과 농사법을 뽐냈으며 종교의식을

치르기도 했다. 그들의 공연 가운데 가장 눈부신 것은 가믈란 연주였다.

 

바스티유 습격을 재연하기도 하면서 세계박람회는 1789년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기념했다.

공화주의의 꿈을 기념하기에 완벽한 시기였다. 박람회는 놀라운 참여율을 보였으며 큰 수익을 남겼다.

프랑스의 정치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상태였지만 최소한 수도 파리는 앞선 시기의 프랑서-프로이센 전쟁과

파리 코뮌의 상흔에서 물리적으로 회복했을을 증명했다.

 

 

 

 

 

 

 

최초의 마천루

 

존 D. 록펠러의 가장 눈에 띄는 유산 가운데 하나가 1880년대에 변신 중이던 심카고의 어느 신생 대학교에 주어졌다.

이 사진은 라샐 앤드 애덤스 스트리트 모퉁이에 건축된 홈 인슈어런스 빌딩을 보여준다. 이 건물은 1885년에 완공된 후

10층 건물로 증축되었다. 이 사진은 20세기 초에 2개 층을 더 올린 뒤에 촬영된 것이다.

 

건축을 담당한 건축가는 윌리엄 르 배런 제니인데, 그는 1850년대에 파리에서 구스타브 에펠과 함께 건축을 공부했다.

제니는 1871년 시카고 화재 때문에 그곳에서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시카고 테코벤 스트리트 외양간에서 소 한 마리가

등유 램프를 걷어차는 바람에 시작된 불길이 9제곱킬로미터에 이르는 도심을 불태우고 300명의 사망자와

 10만 명의 이재민을 낳았다고 한다.

 

건축사 연구자들은 홈 인슈어런스 빌딩이 세계 최초의 마천루였는지를 두고 여전히 논쟁을 벌이고 있지만, 이후 지어진

고층 건물들이 제니의 통찰력에 영향을 받았으며 그 덕분에 세계 각지의 도시 스카이라인이 영원히 변화되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

 

1865년부터 1909년까지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는 높은 건물보다 멀리 떨어진 곳에 관심이 있었다.

1880년대에 그는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를 탐험하고 '문명화하고' 복속시키려는 노력을 후원했다.

그는 콩고 분지의 대규모 식민지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다. 그러고 나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천연자원들을 약탈하는 일에

그곳 사람들을 동원했다. 이 사진은 치체스터에서 활동하던 러셀 앤드 선스사의 사진가가 촬영한 것이다.

 

식민지에 대한 무자비한 학정은 벨기에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레오폴드의 콩고 장악은 '아프리카분할'의 일환이었고,

그 과정을 거쳐 아프리카 대륙은 1870년대와 1880년대 사이에 영국, 프랑스, 포르투갈, 독일 등 유럽의 여러 제국주의 세력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아프리카 약탈의 광풍은 1884년 베를린에서 개최된 강대국들의 회의에서 합법성의 외피를

둘러썼다. 1902년까지 아프리카 영토의 90퍼센트가 유럽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잔지바르의 슐탄

 

바르가쉬 빈 사이드(사진 가운데 각료들에 둘러싸인 인물) 는 동아프리카 잔지바르의 두 번재 슐탄으로 1870년부터 1888년

사망할 때까지 통치했다. 그 시절의 다른 많은 통치자가 그랫던 것처럼 사이드는 '아프리카 분할'로 아프리카 대륙을 나눠 가지려

혈안이 된 유럽 강대국들에 맞서 자신의 영토를 지켜야 하는 막중한 임무에 직면했다.

 

아프리카의 뿔 바로 아래 인도양 서부 한 제도(諸島)의 중심에 위치한 잔지바르는 유리한 지리적 위치 덕분에 역사적으로

수익성 좋은 무역의 거점이 되었다. 황금과 향신료, 커피를 운반하는 상인들에게는 물론이고 아라비아의 노예 무역업자들에게도

유용한 곳이었다. 1870년대에 영국은 동인도회사와 영국령 인도의 상인들 덕분에 잔지바르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1876년에 영국이 바르가쉬에 압력을 넣어 노예무역을 폐지시켰을 때 그들의 소프트파워가 증명되었다.

 

그러나 1880년대에 영국은 잔지바르에 대한 이해관계를 유지하는 데 실패했다. 잔지바르와 마주한 아프리카 본토의 영토

탕가니카를 독일이 점령해버렸기 때문이다. 식민 세력들은 '보호'를 제공한다는 데 합의햇다는 미명 아래 동아프리카에서

잔지바르의 소유지들을 야금야금 잠식했고 조각조각 나누어 가졌다.

 

1890년 바르가쉬가 사망하고 2년이 지난 뒤에 잔지바르는 영토가 거의 없는 채로 영국의 보호령으로 선포되었고

1963년에는 독립국으로서 영국 연방 국가로 남았다. 이듬해 잔지바르는 탕가니카와 통합해 오늘날의 탄자니아가 되었다.

 

 

 

 

 

 

 

 

카이저 빌헬름 2세

 

독일이 '아프리카 분할'에 가세했을 때, 독일 내에서 독일 제국은 통치자의 변화를 경험하고 있었다.

할아버지 빌헬름 1세과 아버지 프리드리히 3세가 연이어 세상을 떠나면서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손자

빌헬름 2세가 1888년 6월 15일 29세의 나이로 황제의 관을 받았다.

 

 

 

 

 

 

대한파

 

이 혹한의 장면은 『노포크 브로즈의 삶과 풍경』이라는 사진집의 일부로서 피터 헨리 에머슨과 화가 토머스 프레드릭 구달이

잉글랜드 동부에서 촬영한 것인데 1886년의 첫 서리를 보여준다. 사진은 조용하고 목가적인 이미지를 담고 있지만 얼어붙은

시골을 제대로 묘사하고 있다. 1980년대 지구의 기온이 급격히 떨어졌기 때문이다.

 

1880년부터 1881년의 겨울은 특히 혹독했던 것으로 기록된다. 1884년 여름에 북반구의 평균 기온이 전년보다 1.2도 낮았다.

기온 하락은 1888년까지 지속되었다. 대폭설도 동반되었다. 이 기후 변동은 1883년 8월 26일부터 27일 사이에 발생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관할이던 자바섬과 수마트라섬 사이에 위치한 거대한 화산의 분출로 생성된 구름 때문이었다.

화산 폭발로 4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사망했고 사람들은 어두어진 하늘 아래 공포에 떨었다.

 

 

 

 

 

 

 

존스타운 홍수

 

1889년 5월 31일 극한의 기후 때문에 펜실베니아주 존스타운에서는 2천 명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며칠 동안 쉴 새 없이 내린 비가 급류를 형성했다. 시내에서 23킬로미터가량 떨어진 콘마 호수에 설치된 사우스포크 댐이

곧 무너질 것이라는 경고가 거듭되었는데도 대피령은 내려지지 않았다. 5울 31일 오후 3시 직전 호수의 수위가 댐을

넘어서고 높이 18미터에 이르는 급류가 존스타운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거나 집을 잃었다.

 

이 사진은 존스타운 주민 존 슐츠의 집을 촬영한 여러 장의 사진 가운데 하나다.

물론 존스타운의 재난은 1887년 황하 홍수에 비하면 약소했다. 황하 홍수로 90만 명가량의 중국인이 사망했다.

 그렇다고 해도 당시 존스타운 홍수는 미국 역사에서 민간에 닥친 최악의 참사였다.

 

 

 

 

 

 

 

클라라 바턴

 

《존스타운 데일리 트리뷴》의 편집자들은 클라라 바턴과 미국 적십자사 간호사들의 공헌으로

1889년 존스타운의 재난이 완화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모든 언어 사전을 다 뒤진다 해도 그녀와 그녀가 행한 일에 대한 우리의 감사를 표현할 만한 기호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1821년 매사추세츠에서 태어난 바턴은 수줍음 많은 아이였지만, 처음에는 교사로서, 이후에는 앤티텀 전투, 프레더릭스버그

전투와 와일더니스 전투를 포함해 남북 전쟁에서 가장 피비린내나는 전장에 자원한 간호사로서 자신의 천직을 찾았다.

존 D. 록펠러의 재정 지원과 노예제 폐지론자인 프레더릭 더글러스의 도덕적 지원을 받아 미국 적십자사를 설립했다.

그녀는 또한 투표권이 없는 흑인과 여성의 참정권을 주장한 열렬한 운동가이기도 했다.

 

이 사진은 뉴잉글랜드 출신으로 많은 초상 사진을 남긴 제임스 E. 퍼디가 촬영한 것이다.

1904년 그녀는 83살의 나이로 미국 적십자사 총재직을 내려놓고 은퇴했다. 그리고 8년 뒤인 1912년 4월 세상을 떠났다.

 

 

 

 

 

 

 

오스트리아 황태자 루돌프

 

오스트리아 황태자 루돌프 대공의 문제는 적십자사가 해결해줄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사진 속 루돌프는 1889년 1월 30일 자살 직후 모습이다.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제위를 이어야 할 사람이었지만 좌절감과

심각한 우울증에 빠졌다.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오제프 1세의 외아들이던 루돌프는 1858년 태어나는 순간부터 통치자가 될 운명

이었다. 그러나 그는 황제와 그의 각료들과 전혀 다른 정치 이념을 가지고 성장했다. 자유주의적이고 반교권주의적이며

반 러시아적 성향이던 루돌프는 정부의 주요 역할에서 배제되었다.

 

루돌프는 1881년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의 둘째 딸과 강제로 결혼하면서 더 불행해졌다. 그녀의 이름은 스테파니였다.

교회법 아래에서 결혼이 가능할 만큼 두 사람은 먼 친척이었지만 그 결혼은 잘못된 것이었다. 딸 하나를 얻은 것 외에 루돌프가

프테파니에게 준 것이라고는 성병뿐이었다. 몇년 뒤 두 사람은 이혼을 고려했다. 1889년 루돌프는 자포자기에 빠져 충동적으로 자살

을 감행했다. 그의 시신은 마리 벳세라의 시신과 함께 발견되었다. 그녀는 루돌프의 여러 정부 가운데 하나였고 감수성 예민한

17곱살의 남작 부인이었다. 빈 인근 숲속, 마이얼링의 사냥을 위한 별장에서 루돌프는 마리를 살해한 후 자살한 것으로 보인다.

 

이 일은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결과를 낳았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승계 구도가 바뀌면서 1914년에는 루돌프의 사촌

프란츠 페르디나나트 대공이 제국의 후계자라는 사실이 명백해졌고, 사라예보에서 발생한 그의 죽음은 제1차 세계대전을 촉발했다.

 

 

 

 

 

 

 

 

철월(凸月)

 

달은 지상의 문제에서 멀리 떨어진 채 변함없는 모습으로 19세기 말의 드라마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특별한 사진은 영국의 선구적인 천문학자이자 사진가인 앤드루 애인슬리 커먼이 촬영한 것이다. 그의 직업은 위생공학자였지만

그가 평생을 두고 변함없이 열정을 보인 것은 하늘을 올려다보는 일이었다. 그는 6년 전인 1880년 1월 20일에 런던 교외 일링에

위치한 자신의 집에서 직경 910밀리미터 반사 망원경을 사용해 이 고해상도 사진을 촬영했다. 이 사진에 대해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빠른 노출, 10배가량 확대." 엄밀히 말하자면, 그날 커먼이 이 망원경으로 관찰한 것은 상현의 철월이었다. 이는 지상에서 볼 때

반달보다 크지만 보름달보다는 작은 달이다. 특히 루나 마리아(달의 바다들) 혹은 '바다 들'로 알려진 달 표면의 검은 반점들이

선명하게 보인다는 사실이 이 이미지에서 주목할 만한 점이다.

 

그러나 커먼이 인화해서 보여준 이 이미지는 아래 위가 거꾸로 된 것이다.

이는 남반구에서 본 것이지 북반구에서 본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 점은 쉽게 알 수 있다. 달의 왼쪽 바닥에 있는 검는색의 작고 둥근

반점은 마레 크리시움(위기의 바다)이고 그 옆에 있는 것들은 마레 세레니타티스(평온의 바다)와 마레 트랑퀼리타티스(고요의 바다)

로 89년 뒤 장차 인류가 처음 달에 착륙하게 될 지점이다.

 

 

 

 

 

 

 

 

 

 

 

유머는 위대한 구원이다.

유머가 생기는 순간 우리의 모든 어려움이 사라진다.

 

- 마크 트웨인, 1897년 -

 

 

 

1894년에 미국의 익살꾼이자 소설가이며, 출판인이자 도선사이며, 연설가이자 현자였던 마크 트웨인은 스스로 파산을 선언하고

세계 여행에 나섰다. 그는 앞선 20년 동안 걸작 『톰소여의 모험』(1876)을 집필했다. 이상한 시대인 1890년대를 보여주듯,

그의 글은 잘 팔렸지만 그의 출판사는 파산했다. 마크 트웨인은 1835년에 미주리에서 태어났고 남부에서 성장했는데 집안 형편이

갑작스럽게 나빠졌다. 출생 당시 그의 이름은 새뮤얼 랭흔 클레멘스였지만 1863년 필명으로 개명했다. ('마크 트웨인은' 장난

스러운 이름이다. 그것은 도선사가 강을 운행하는 배에 보내는 신호로 깊이를 가늠하고 운항이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시킬 때

사용하는 말이다). 당시 그는 증기선 운전으로 생계를 해결하고 있었다. 강을 떠나 전업 작가가 된 마크 트웨인은 자신의 경험

을 바탕으로 미시시피 출신의 거칠고 투박한 '올드 보이' 캐릭터를 이끌어내는 작가라는 평판을 얻었다.

 

그러나 트웨인은 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1890년대 더 넓은 세계를 여행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여기 수록된 사진은 위대한 사진가 프랜시스 밴저민 존스턴이 트웨인의 말년 모습을 촬영한 것이다. 그는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인도, 남아프리카, 런던, 빈을 방문했다. 그는 어디를 가든 활력 넘치는 연설과 자신의 오랜 삶에서 얻은 흥미로운

이야기들로 청중을 매료시켰고, 유력 인사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그가 방문한 곳의 정서에 맞춰 자신의 무대극을 솜씨 있게

각색했다. 1870년 찰스 디킨스가 세상을 떠난 이후, 생존 작가 가운데 트웨인 보다 더 그시대의 정신에 잘 맞는 인물은 없었다.

 

당시 미국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고 있었다. 식민 지배에서 벗어난 샌생국에서 강대한 제국이 되어가고 있었다.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의 결과, 쿠바, 필리핀, 푸에트리코, 괌이 미국의 통제 아래 들어왔다. 동시에 하와이가 합병되었다.

미국의 제국주의를 지지하는 사람과 고립주의을 지지하는 사람들 사이의 갈등이 다가올 10년을 지배하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갈등은 21세기에 접어든 오늘날까지도 여러 면에서 이어지고 있다.

 

태평양 건너편에서 제국주의는 또 다른 문제를 안겼다.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벨기에의 식민 세력이 원주민들을

복속시키고 마구잡이로 분할해 차지한 대륙을 지배하기 위해 계획을 꾸몄던 아프리카에서 그랬던 것처럼, 1890년대에는 중국,

일본, 한국, 그리고 동해와 황해 주변에서 상업적, 정치적 이해관계를 가진 여러 유럽 국가들 사이의 지속적인 갈등이 목격되었다.

 

1890년대에 유럽에서는 화려한 장관을 선사한 순간들이 있었다. 1896년에는 올리픽 경기가 있었고 1897년에는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있었다. 그러나 드레퓌스 사건처럼 저급한 부패를 드러낸 악명 높은 사건들도 있었다.

그 사건으로 핵심까지 썩어 들어간 스랑스 기득권의 모습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러나 세계는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증기기관차는 계속해서 증기를 뿜어냈고 최초의 근대적인 자동차가 공장에서 출고되었으며 연극 무대의 주역들이 새로운

기술이었던 영화를 고려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마크 트웨인이 여행했던 세계였다. 모험의 모든 순간을 글로 쓰면서

 세심하게 명성을 쌓은 마크 트웨인은1900년 10월 뉴욕으로 돌아와 다시는 여행길에 오르지 않을 것이며 세계를 보면

볼수록 제국주의를 더 격렬히 증오하게 되었다고 선언했다.

 

 

 

 

 

 

 

 

 

콕시 군단

 

마크 트웨인의 '도금 시대'를 완벽하게 보여준 것은 1893년부터 미국을 사로잡은 위기였다.

4년간의 심각한 경기 침체는 미국이 그때까지 경험했던 다른 어떤 경제 위기보다 심각했고 미 재무부의 금 보유고가

고갈되었다. 미국의 달러화를 지탱한 것은 실질적인 금 보유고였기 때문에 연방의 금 보유량이 위험 수준으로 줄어들자

 1893년 4월 미국 달러화의 신용도는 크게 하락했다. 투자자들이 팔 수 있는 것을 모두 팔아 자신들의 재산을

 금화와 금괴로 교환하면서 재무부의 금 고갈이 시작되었다.

 

이  사진은 1894년 '콕시 군단'의 행군을 보여준다. 오하이오의 기업가 제이컵 S. 콕시가 이끈 시위대였다.

그는 금본위제를 포기하고 연방 도로 건설 사업으로 경기를 부양하라고 정부에 촉구했다. 수백 명의 사람이 정부에 청원하기

위해 오하이오의 매슬런에서 워싱턴 D.C로 행진했다. 길을 가는 동안 인원은 계속 늘어났다. 그러나 5월 1일에 그들이

워싱턴에 도착했을 때 콕시는 공개 선언을 하기도 전에 국회의사당 잔디밭에 불법 진입한 죄로 체포되었다.

 

경제 혼란은 1897년이 되어서야 진정되었다.

낮은 지지율을 기록한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이 그해 두 번째 임기를 마쳤다.

J.P. 모건과 로스차일드 같은 은행가들은 미국 정부에 대한 고율의 구제금융으로 부를 거머쥐었다.

 

 

 

 

 

 

 

골드러시

 

금이 미국 경제를 떠받치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금광의 발견은 수익성이 높은 사업이었다.

그리고 1896년 여름 알래스카 국경에 인접한 캐나다 서부의 유콘을 탐사하던 채굴꾼들이 클론아이크강 지류에서 금덩이를 발견했다.

그들은 클론다이크강 지류에 보난자 크리크라는 꼭 어울리는 이름을 붙였다. 투기꾼들은 모두 엄청난 부를 기대했다. 그 꿈은 1840

년대에 백인 서부 정착민들을 캘리포니아로 끌어들이며 골드러시를 촉발했다. 이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골드러시 가운데 하나였다.

 

1897년 7월에 얼음이 녹자 보난자 크리크의 황금에 관한 소식이 전 세계에 전해졌다. 10만 명가량의 사람들이 보물을 얻기 위해

려들었다. 그들은 위험천만한 산길을 건너거나 혹은 샌프란시스코에서 강을 따라 운항하는 배를 타고 알래스카에 당도했다.

클론다이크에는 정말로 막대한 금이 있었다. 그러나 금에 대한 수요가 공급을 크게 넘어서면서 일확천금을 손에 넣은 사람보다

재산을 탕진한 사람이 훨씬 더 많았다. 수백 명이 채금지에 오르다 사망했고 광산 캠프의 상황은 열악했다.

 

시애틀에서 활동하던 사진가 프랭크라 로슈가 촬영한 이 사진은 그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도슨 시티처럼 급조된 도시들에서는 도박, 과음, 질병, 무법 상태, 화재, 매춘, 폭력이 난무했다. 클론다이크는 1899년 여름까지

많은 미국인게게 외면하기 어려운 유혹이었다. 당시 유콘 입구의 놈에서 발견되는 금이 훨씬 더 많았고

일확천금에 눈먼 금 채굴자들이 몰려들었다.

 

 

 

 

 

 

 

 

 

 

사라 베르나르

 

황금 열풍이 미국 북서부를 사로잡은 동안 미국 다른 곳에서는 무대 위의 보물에 사로잡혀 있었다.

프랑스 여배우 사라 베르나르는 1890년대 파리를 떠나 미국으로 세 차례 순회공연을 했다. 그녀는 빅토리앵 사루두의 <토스카>와

<클레오파트라>, 에드몽 로스탕의 <시라노 드베르 주라크>를 포함해 프랑스 유명 극작가들이 최신작에 출현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네덜란드 유대인 코르티잔(상류사회의 사교계 모임에 동반하는 창부 혹은 정부)의 사생아였던 베르나르는 뒤늦게 활동을 시작했지만

1870년대부터 무대 위에서의 매력적인 연기와 잊을 수 없는 목소리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또한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빅토르 위고와

빅토리아 여왕의 아들이자 곧 에드워드 7세가 될 앨버트 에드워드를 포함한 유명 인사들의 구애를 줄지어 받으면서 유명세을 얻었다.

 

베르나르는 남성 역할도 연기했다. 세익스피어의 <햄릿>과 로스탕의 작품 <새끼 독수리>에서 나폴레옹의 아들 역할을 했다.

여러 해 동안 그녀는 파리에서 극단 사라 베르나르의 운영자로도 활약했다. (나중에 극단의 이름은 국민극단으로 변경되었다).

 

1890년에 W.& D. 다우니가 촬영한 이 사진 속에서 베르나르는 사르두의 <테오도라>에서 주연으로  주연으로 분한 모습이다.

사라는 불같은 성미로도 유명했다. 그녀는 도어맨의 머리에 우산을 던졌는가 하면, 1891년에는 샌프란시스코 공연에서 권총으로

조명 기사를 위협한 적도 있다. 1915년에 베르나르는 오래전에 무릎에 깊은 상처를 입었고 염증이 생겨 오른쪽 무릎을 절단했다.

그녀는 괘념치 않고 활동을 계속했다. 1923년 사망 당시에도 베르나르는 파리의 자택에서 영화 촬영을 위해 연기를 하고 있었다.

 

 

 

 

 

 

 

 

 

뤼미에르 형제

 

30년 동안 연극 무대를 지배했던 사라 베르나르가 영화 도입 초창기에 유명 배우가 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베르나르는 최고의 명성을 누리던 시절에 동료였던 오귀스트 뤼미에르와 루이 뤼미에르가 처음 만든 영화에 출연했다.

 

여기 수록된 사진은 중년의 뤼미에르 형제를 촬영한 것으로 두 사람은 아버지로부터 수익성 좋은 사진 회사뿐 아니라 호기심 많은

기질도 함께 물려 받았다. 1895년 2월 13일에 두 사람은 이미지를 영사할 수 있는 영사 카메라 시네마토그래프의 특허를 출원했다.

그 카메라는 여러 사람이 동시에 볼 수 있게 이미지를 영사했는데 이 점에서 한 번에 한 사람만 볼 수 있는 토머스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와 달랐다. 뤼미에르의 첫 영화는 46초 분량으로 리옹의 공장 문을 나서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담았다.

같은 해 12월 28일 파리의 불바르 데 카퓌신의 그랑 카페에서 여러 편의 다른 영화들도 개봉되었다.

 

시네마토그래프와 키네토스코프 같은 발명품들이 시장에 나오자, 영상의 잠재력이 곧 현실화되었고, 유명 연극배우들이 초기 단편

영화에 등장했다. 베르나르는 19001년 라에르테스와 결투하는 햄릿을 연기했다. 그러나 영화 산업에 대한 뤼미에르 형제의 관심은

오래 유지되지 않았다. 수천 편의 다큐멘터리 스타일 영화를 수집한 뒤에 두 사람은 오토크롬으로 불리는 초기 천연색 사진 처리 과정을

개발하고 3D 이미징 혹은 '입체 영상'의 연구로 관심을 돌렸다. 오귀스트는 여러 해 동안 암과 결핵 같은 질병을 연구하기고 했다.

루이는 1948년에 사망했고 오귀스트는 1954년에 사망했다.

 

 

 

 

 

 

 

 

 

새로운 올림픽 선수들

 

이상한 말이지만, 1896년 아테네 올림픽 경기에는 금메달이 없었다. 최초의 근대 올림픽 경기는 국제 올림픽위원회의 감독 아래

개최되었다. 육상, 레슬링, 체조, 조정, 테니스와 참가 자격을 해군에 한정한 수영 경기를 포함해 특정 경기의 우승자들은 은메달

을 받았다. 준우승자는 동이나 구리 메달을 받았다. 이 사진에등장하는 것은 100미터 달리기 결승전의 주자들이다. 우승자는 12초

를 주파한 토머스 버크였다. 왼쪽 두 번째 레인에서 그는 당시에는 보기 드문 '크라우칭 스타트'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버크의

주 종목이 400미터 였고 그 종목에서 더 잘 알려졌던 점을 생각하면 이 역시 충분히 인상적인 기록이었다.

(버크는 400미터 경기에서도 우승했다).

 

고대 그리스 육상경기의 부활은 1896년 이전에도 여러 번 시도된 적이 있다. 가장 주목할 것은 자선가이자 사업가인 에방켈로스

자파스가 처음 조직해 1859년과 1888년 사이에 개최한 일련의 올림픽 경기들이다. 그는 기원전 4세기에 올림픽 경기를 목적으로

처음 지어진 판아테나이아 경기장을 발굴해 복원했다. 1896년은 자파스가 세상을 떠난 지 30년도 더 지난 때로 조직의 기반은 프

랑스인 피에르 드 쿠베르탱에게로 넘어갔다.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아테네 올림픽은 소규모 아마추어 경기였지만 고전적 개념을 성공적으로 되살려낸 경기였다.

정기적인 하계 올림픽과 (1924년부터는) 동계 올림픽이 시작되었고 두 차례의 세계대전 동안에만 중단되었다.

 

 

 

 

 

 

 

 

자동차

 

1830년대 이후 발명가들은 철제 궤도의 유도없이 자체 동력만으로 달릴 수 있는 교통수단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1890년대에 최초의 가솔린 동력 자동차가 도로 위에 등장했을 때 마침내 그 꿈은 실현되었다. 독일의 카를 프리드리히 벤츠와

고틀리프 다임러는 1880년대에 유럽에서 가솔린 동력을 사용하는 사륜차를 시연한 바 있었다. 미국에서는 찰스 듀리에와

프랭크 듀리에가 1893년 가을에 매사추세트주 스프링필드 부근에서 그들 자신의 창조물인 듀리에 자동차를 운전했다.

듀리에 형제가 만든 자동차는 미국 최초의 도로 경주에서 우승했으며 최초의 교통 사고에 연루되는 영예까지 얻었다.

 

사진에 등장하는 이 자동차는 프랑스에서 만든 6마력짜리 파나르 르바소이며 사진은 1898년에 촬영된 것이다.

당시 그 차는 웨일스 남작의 아들이자 열광적인 공학자로 초기 비행기와 자동차를 수집했던 찰스 스튜어트 롤스 소유였다.

그의 관심은 20세기 초에 사업으로 발전했다. 로이스가 그의 동업자였다. 그들의 회사 롤스로이스사는 1906년에 설립되어

조용하고 부드러우며 값비싼 차를 만들기로 정평이 났다. 1910년 에어쇼에서 라이트 플라이어의 추락으로

롤스가 사망한 뒤에도 그들의 회사는 존속했다.

 

1890년대의 자동차들은 실험적이었고 많은 경우 실용성이 없었지만 자동차의 시대가 시작된 것만은 분명했다.

다음 101년 동안 올드스모빌 커브드 대쉬와 포드 모델 T 같은 차들이 공장의 조립라인에서 대량 생산되었고,

이로서 사람들의 여행 방식은 이전과 같아질 수 없게 되었다.

 

 

 

 

 



 

 

 

몽파르나스 역 열차 탈선 사고

 

교통수단이 진화하면서 눈부신 광경뿐만 아니라 치명적인 사고를 목격하게 될 가능성도 함께 커졌다.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사진으로 잘 표현된 철도 ㅅ하고는 1895년 10월 파리의 몽파르나스 역에서 발생했다.

오후가 끝나갈 무렵 그랑빌에서 출발한 파리행 열차가 완충장치를 들이받고 질주해 기차역의 벽을 뚫고 나왔고

기관차 앞 부분이 렌 광장에 거꾸로 박히고 나서야 멈춰 섰다.

 

이 사진은 사진 우편엽서를 전문으로 제작했던 레용 앤드 레비 인쇄소가 출판한 것이다.

같은 장면을 촬영해 유명해진 사진으로는 사진가이자 발명가인 앙리 로제의 사진이 있다.

 

 

 

 

 

 

 

 

 

 

드레퓌스 사건

 

1894년에 유대인 육군 대위 알프레드 드레퓌스는 독일인에게 군사기밀을 팔아넘긴 반역 음모 혐으로 기소되었다.

 이 '드레피스 사건'은 10년 이상을 끌며 세기의 재판이 되었다. 여기 수록된 드레퓌스의 사진은 1895년 1월 5일에 그가 공식적으로

강등된 뒤 촬영한 것이다. 그는 공개적으로 계급을 박탈당하고 계급장이 떼였으며 그의 검은 절단되었다. 그는 종신형을 선고받고

프랑스령 기니의 데블스아일랜드에 있는 감옥에 수감되었다. 드레퓌스는 결백을 주장했고 그의 주장은 옳았다. 곧이어 그가 그릇된

박해, 날조된 증거와 사악한 반유대주의의 희생자였다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를 대립하는 두 진영으로 갈라놓았다. 드레퓌스를 지지하는 공화주의적이고 반 교회적인 좌파와

가톨릭 민족주의자들로 나뉘었다. 7년 뒤 드레퓌스 지지자들이 정부를 장악했을 때 민간 법정에서 무죄를 선고 받았다.

드레퓌스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눈부신 활약을 했고 1935년에 사망했다.

 

 

 

 

 

 

 

 

메인호의 격침

 

드레퓌스 사건으로 프랑스가 분열되어 있을 때 대서양 건너편 쿠바에서는 폭력적인 충돌이 진행되고 있었다.

189*8년 2월 15일 미 해군 무장 순양함 메인호가 아바나 항에서 폭파되었다. 거대한 폭발로 승선 인원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해군 260명이 사망하고 배의 앞부분이 파괴되었다. 폭발이 왜 일어났는지를 만족스럽게 입증한 사람은 없었지만 결과는

고통스러울만큼 명확했다. 그 일로 미국과 스페인 사이에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이 사진에는 침몰 뒤 메인호의 모습이 보인다. 메인호는 쿠바에서 미국의 시민가 이해관계를 보호하기 위한 장기적인 노력의

일환으로 아바나에 머물고 있었다.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려는 반란 전쟁이 4년째 계속되었고 강제수용소에 수용된 전쟁 포로

에게 자행된 학대 행위가 미국 언롡에 폭 넓게 보도되었다. 1898년 4월 22일과 25일 스페인과 미국이 선전포고를 주고 받았다.

 

그후 미국의 원정군은 쿠바 그리고 스페인의 또 다른 식민지 필리핀에 파견되었다. 압도적 군사력을 앞세운 미국이 10주 동안

치러진 전쟁에서 승리했다. 8월에 쿠바는 미국의 감독 아래 독립을 획득한 한편, 미국은 필리핀, 푸에르토리코, 괌을 차지했다.

이제 미국은 명실상부한 전 지구적 강대국이었지만 한때 강력한 제국이었던 스페인은 크게 축소되었고 상처를 회복해야만 했다.

 

 

 

 

 

 

 

 

 

하와이의 마지막 여왕

 

릴리우오칼라니는 여러 면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인 여성이었다. 그녀는 하와이섬을 통치한 최초의 여성이자 1898년에

리디아 카마카에하라는 이름으로 태어났고 오빠 칼라카우아 왕의 사망으로 52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녀의 재위

기간은 짧았고 힘겨운 시기였다. 그녀는 진주만 해군기지 건설을 포함해서 미국과 긴밀한 호혜적 경제협정을 발전시키는 과정을

지연시키려고 노력했다. 이로 인해 여왕은 하와이 태생 선교사의 아들 샌퍼드 B. 돌이 이끄는 정치집단과 직접적인 갈등을 빚었다.

샌퍼드 B. 돌은 긴밀한 유대 관계를 통해 하와이가 미국에 점진적으로 합병되기를 원했다.

 

1893년에 릴리우오칼라니는 자신의 궁전에 구금된 채 폐위를 강요당했다. 돌은 1894년 하와이 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4년 후 스페인-미국 전쟁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대통령 윌리엄 매킨리는 하와이의 합병을 승인했고 하와이는 미국 영토가

되었다.그리고 1959년부터느 미국의 50번째 주가 되었다.

 

이 사진은 바넷 M. 클리네딘스트가 촬영한 것이다. 릴리우오칼라니는 국가를 빼앗긴 뒤에도 호놀룰루에 남아 잇단 법정 소송을 통해

빼앗긴 왕국의 영토를 되찾으려고 노력했다. 그녀는 1917년 11월 11일에 하와이에 있는 워싱턴 플레이스 자신의 집에서 사망했다.

 

 

 

 

 

 

 

 

청일 전쟁

 

메이지유신 이후 근대화를 이루고 자신감에 차 공격적이던 일본이 조선을 두고 중국의 청 황조와 충돌했다.

한국은 명목상 조선 왕조의 고종과 그의 부인 명성황후가 다스리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은 조선을 속국으로 간주했으며

일본은 조선의 풍부한 철광석과 석탄을 약탈하기 위해 자신들에게 유리한 조건의 통상을 조선에 강요하고자 했다. 청과 일본이 각각

조선 정부와 군대의 서로 다른 분파를 지원함에 따라 조선에서는 정치적 분쟁이 일어났고 피비린내 나는 충돌이 잦았다.

 

1894년 3월에 친일 개화파였던 김옥균이 상하이에서 살해되었다. 6월에는 청과 일본의 긴장이 고조되어 일본인 8천 명의 원정군을

조선에 파병해 고종을 포로로 잡고 친일 내각을 수립했다. 결과는 청과 일본 사이의 전면전이었다. 8월 1일에 전쟁이 선포되었고

결국 영국의 해군을 모델로 탁월한 해군력을 구축한 일본이 승리했다.

 

이 사진은 웨일즈에서 건조된 철갑 순양함, 히에이호에 승선한 일본 수병들을 보여준다.

그 함선은 1984년 9월에 압록강 어귀 인근 황해 전토로 수병들을 실어 날랐고 그곳에서 치며적이지는 않았지만 심한 손상을 입었다.

1895년 봄까지 일본이 떠들썩하게 연전연승을 거두자 청은 평화 조약을 모색했다. 4월 17일에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었고

청은 타이완과 만주 일부를 일본에 할양했으며 조선의 독립성을 인정했다. 일본의 승리는 청 왕조의 종말을 재촉했고

조선 내부에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명성황후

 

189*4년부터 1895년 사이 청일 전쟁의 결과는 고종에게는 크나큰 압박이 되었다. 그는 일본의 이해관계에 맞춰 정책을

수립해야 했다. 고종의 아내이자 왕비인 명성황후(가족의 성씨를 따라 '민비'로 알려지기도 했다) 에게는 특히 불편한 일이었다.

1866년 14세의 나이로 고종과 결혼한 이후 명성황후는 경계심을 늦춘 적이 없다. 그녀는 여성의 종속적인 지위를 주장하는

전통적인 유교 가치를 거스르는 인물이었고 왕궁 안에서 정치적으로 적극적인 역할을 하려고 했다.

 

그녀는 자신의 정치적 분파를 이끌며 군사 개혁, 전면적 근대화, 서양과 적극적인 문화적, 경제적 접촉을 포함하는 정책들을 지지했다.

청일 전쟁 이후 그녀는 일본의 지배를 저지하기 위해 러시아와 조선의 더 긴밀한 관계를 주장했다.

 

명성황후의 사진은 드물다. 사진 속 여성의 신원에 대해서 여전히 논란이 많다. 어떤 이들은 이 사진이 명성황후를 촬영한 것이라고

말하고, 또 어떤 이들은 사진의 주인공이 조선 왕실의 궁녀라고 주장한다. 안전을 위해 궁녀들이 명성황후처럼 차려입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1895년 10월 8일에 명성황후는 43세의 나이로 경복궁에 침입한 일본 자객의 검에 시해되었다.

시해 후 명성황후의 시신은 소각되었고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1896년 궁으로 돌아온 황제는 명성황후의 유품으로

그녀를 위한 성대한 장례식을 치렀다. 고종은 1897년 자신의 왕국을 제국으로 선포했지만 10년 뒤 일본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양위했다. 1910년에 조선은 일본에 합병되었고 1945년까지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

 

 

 

 

 

 

 

 

 

의화단 운동

 

청일 전쟁의 여파는 중국에서도 극적인 반란을 초래했다. 1898년부터 1901년 사이 광범위한 기근과 가뭄으로 고통받고

1900년부터는 서태후의 지원을 받은 민중은 외국인들과 중국의 크리스트교 신자들을 공격했다. 반란의 지지자들은 외국인과

중국인 크리스트교 신자들이 중국을 몰락시킨다고 비난했다.

 

의화단, 혹은 '정의롭고 조화로운 무술단'이라고 불린 비밀 결사체가 반란을 선동했다. 의하단원들은 서양 무기와 총탄을 막을 수

있다고 믿으며 무술을 연마했다. 그들은 결국 무술에 대한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지만 그때는 중국 북동부에서 수많은 크리스트교

신자와 선교사들을 살해하고 교회와 외국인들의 집을 불태우고 베이징을 점령한 뒤였다.

 

1900년 6월 20일에 시작된 의화단의 베이징 포위 공격은 중국에 이해관계가 있는 8개 동맹국(일본, 러시아, 프랑스, 영국, 미국,

오스트리아-헝가리, 독일과 이탈리아)의 대규모 반격을 촉발했다. 거의 2만 명의 연합군이 베이징으로 진격했고 의화단의 포위

공격은 해제되었다. 서태후와 광서제는 피신했고 1901년 9월 7일 청의 조정은 서양 강대국들에게 엄청난 배상금을 지불한 것을

명시한 굴욕적인 평화 협정에 합의했다. 의화단과 그들의 반란을 후원했던 조선 대신들은 처형되었고 외군 군대가 베이징 주변에

주둔했다. 이 일은 중국의 위신에 엄청난 타격을 주었고 청 왕조에는 치명적인 일격이었다. 이후 중국에서 수백 년에 걸친

청 왕조의 지배가 곧 막을 내리게 되었다.

 

 

 

 

 

 

 

 

에티오피아 전생

 

이탈리아군은 중국에서 의화단의 난을 진압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에 아프리카에서 이탈리아의 의지를

관철하려던 시도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낳았다. 에티오피아 제국(유럽에서는 아비시니아로 알려졌다)은 1880년대 '아프리카 분할'

진행되는 동안 유럽 열강의 식민지가 되지 않은 몇 안 되는 아프리카 지역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1895년에 수상 프란체스코

크리스피가 이끄는 이탈리아 정부가 에티오피아를 보호령으로 삼으려 시도햇을 때 에티오피아는 시련을 맞았다.

 

이탈리아의 이러한 주장은 1889년 두 왕국 사이에 체결된 조약 가운데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만든 조항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그 조항은 에티오피아의 황제 메넬리크 2세가 식민 지배자로서 크리스피의 오만함에 격분해 조약을 파기하게 하는 데

그쳤다. 비밀리에 영국의 후원을 받은 이탈리아가 1895년 전쟁에 돌입하며 기대한 것은, 해안 도시 마사와의 병원 밖에서

촬영한 이 사진에서 보듯이 기술적으로 앞선 서양 국가와 훨씬 더 초보적인 수준의 무기로 무장한 비유럽 교전국의

충돌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결과였다.

 

그러나 이탈리아군은 무장을 잘 갖추고 사기충천한 적에게 철저히 패배했다.

전통적으로 호전적인 에티오피아의 여러 부족이 메넬리크 편에 서서 싸웠다. 그리고 1896년 3월 1일 결정적인 아두와 전투에서

수적으로 압도당한 이탈리아군은 메넬리크에게 충성하늦ㄴ 10만 명의 병사에게 섬멸되었다. 이탈리아는 철수할 수밖에 없었고

너무 치욕적이었던 나머지 이후 수십 년간 식민 지배의 야심을 포기했다. 크리스피는 사임했다. 한편 메넬리크는 승리에 도취되었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유럽 열강의 침략을 막아내고 자기 제국의 독립을 지킨 유일한 국가 수장임을 주장할 수 있었다.

 

 

 

 

 

 

 

 

 

키치너 경

 

아프리카에서 식민주의가 절정으로 치닫고 있을 때 영국의 전략적 목적 가운데 하나는 프랑스의 발을 묶어 수단 밖에 머물게

하는 것이었다. 당시 수단은 남쪽의 에티오피아, 북쪽의 이집트 사이에 위치했으며 1885년 이후 마흐디로 알려진 구세주의

등장을 고대하는 이슬람 지도자의 추종자들이 통치하고 있었다. 에티오피아에서 일어난 봉기는 수단에 개입할 구실을 제공

했고 영국은 1898년에 그들의 보호국인 이집트에 군사 지원을 명령하고 수단을 침공했다. 정복 임무를 책임진 인물은 사진

속의 인물, 큰 키에 고약한 성격을 지닌 아일랜드 태생의 육군 장교 허버트 키치너였다.

 

키치너는 많은 사람들의 미움을 받았지만 전장에서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며 수단에서 연승을 거두었고 1898년 9울 2일에

몸두르만 전투에서 최고의 승리를 거뒀다. 훗날 윈스턴 처칠이라는 이름의 젊은 영국 장교의 참전으로 유명해진 이 전투에서

영국군과 이집트군은 압둘라 이븐 무함마드가 지휘하는 수단의 군대를 격파했다. 움두르만 전투 이후 키치너는 1899년 11월

움 디웨이카라트 전투에서 또다시 결정적 승리를 거두었다. 그 결과 수단은 이집트와 영국의 공동 보호령이 되었고

키치너는 백작이 되었다.

 

1899년부터 1902년 사이 보어 전쟁 중에 키치너는 로버츠 경 휘하의 영국군 부사령관으로 활약했고 1900년

11월에는 총사령관이 되었다. 키치너는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전쟁부 장관을 역임했는데 당시 모병 포스터에 수염을 기른

그의 이미지가 사용되었다. 키치너는 1916년 6월 영국 전함 햄프셔호에서 전사했다. 당시 그 순양함은 오크니 서쪽에서

독일의 기뢰에 격침되었고 737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영국의 국왕 조지 5세는 키치너의 죽음을

 "커다란 국가적 손실"이라고 말했다.

 

 

 

 

 

 

 

 

 

재위 60주년 기념식

 

키치너의 군대가 수단의 모래사막을 가로지르며 임무를 수행하고 있을 때 영제국에서는 성대한 왕실의 야외 행사가 펼쳐지고

있었다. 1897년 6월 22일에 빅토리아 여왕은 재위 60주년을 맞았다. 이는 영국사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사진에 등장하는 것처럼 런던에서 다양한 행진으로 기념되었다.

 

영국의 여러 식민지, 보호령, 영국령들에서 온 총독과 군대 대표자들이 행진에 등장해 걸으며 영원할 것 같은 그들의 군주에게

다채로운 존경을 표했다. 하루 종일 기나긴 행진이 진행되는 동안 78세의 나이로 관절염을 앓고 있던 여왕은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가족 구성원들을 애도하기 위해 입기 시작했다가 이제는 일상복이 된 검은 드레스 차림으로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마차에 앉아 있었다.

 

빅토리아 여왕은 행사를 기념하며 짧은 전보 메시지를 냈고 국왕의 메시지는 제국의 가장 먼 곳까지 전달되었다.

"내 사랑하는 신민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전하노라. 그들에게 신의 은총이 깃들기를." 여왕이 전한 메시지의 내용은 그리 대단치

않을지 모르지만 인도,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처럼 멀리 떨어진 곳들과 즉시 소통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근가 처음 통치를 시작한

1830년대와 이제 황혼기를 맞은 1890년대 사이에 발생한 많은 기술적 진보들을 일깨웠다.

 

영제국과 그 너머의 세계는 60년에 걸친 여러 발명과 격변으로 뚜렷한 변화를 겪었다.

여왕 자신은 거의 변하지 않은 몇 안 되는 것들 가운데 하나였다. 20세기가 밝아오며 마침내 빅토리아 시대가 막을 내렸을 때

이제 그 너머에 놓이 것이 무엇인지는 누구나 짐작할 수 있었다.

 

 

인용서적: 댄 존스, 마리나 아마랄 著, 김지혜 易 『역사의 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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