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눈앞에 펼쳐진 모든 아름다움을 포착하고 싶었고
마침내 그 바람이 실현되었다.
줄리아 마거릿 케머런. 1874년
이트섬 수변에는 저택이 하나 있었는데, 그 집의 주인이 실론섬(현재의 스리랑카)에 가지고 있던 영지의 이름을 따라 딤볼라
별장이라 불렀다. 이웃에는 영국의 계관시인 앨프리드 테니슨이 살았다. 저택의 바깥쪽에는 닭장을 개조한 사진관이 하나 있
었는데 그 집의 여주인 줄리아 마거릿 케머런은 그곳에서 카메라로 첫 실험을 시작했다. 1815년에 영국계 인도인으로 태어나
48세의 나이에 뒤늦게 사진에 입문한 캐머런은 초창기 사진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활동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녀의 손에
서 사진이 감광판은 사실보다 감정을 담아냈다. 그녀는 1840년대 말에 결성된 라파엘 전파의 감성으로 작품을 촬영하는 예술
가였다. 그녀의 관심은 로저 펜턴이나 알렉산더 가드너의 뚜렷한 세속성으로 상상할 수 있는 것과 거리가 멀었다.
캐머런은 부드러운 초점으로 화면을 가득 채우고 로맨스, 역사주의, 판타지, 신화 같은 주제를 담아내는 작업에 골몰했다.
심지어 찰스 다윈처럼 부자연스럽고 수염이 덥수룩한 세계적 유명 인사를 피사체로 삼아 사진을 찍을 때도 케머런은 그들에게
영적인 것을 불어넣었다. 그녀는 "외면은 특징이 아닌 내면의 위대함" 을 발견하는 것이 자신의 목적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녀는 모델들에게 아서왕이나 로마 여신 디아나 같은 상상 속 과거 인물처럼 차려입거나 전형적인 모습으로 자세를 취하게
하는 걸 좋아했다. 그녀의 손에서 (모든 초상화에서 수줍은 포즈를 취하던) 테니슨은 <지저분한 수도사>라는 제목의 사진
에서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중세 학자가 되었다.
캐머런의 사진 경력은 짧지만 인상적이었다. 그녀는 1863년에 자녀들로부터 카멜를 선물 받은 후 사진 촬영을 시작했고
1875년경 남편 찰스 헤이 케머런과 함게 와이트섬을 떠나 실론으로 돌아갔을 때 사진 촬영을 그만두었다. 그러나 1879년
세상을 떠났을 때 그녀는 사진 분야에 지울 수 없는 발자취를 남겼다. 뜻이 맞은 소수의 사람들(오스카 귀스타브 레일랜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저술한 작가 루이스 캐럴 역시 그중 한 사람이었다)과 함께 케머런은 사진을 진정한 예술 형식
의 하나로 만드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1860년대와 1870년대 캐머런이 여러 번 사진 촬영을 거듭했을 만큼 아꼈던 모델은 그녀의 조카 줄리아 잭슨(훗날 작가
버지니아 울프의 어먼가 되었다)과 메이 프린셉이었다. 메이 프린셉은 사진에서 보듯 베아트리체 첸치로 분장하고 카메라
앞에서 자세를 취했다. 베아트리체 첸치는 비극적인 운명의 젊은 로마 귀족으로 16세기 말 학대를 일삼는 아버지를 살해한
죄로 교황 클레멘스 8세의 명에 따라 형제들과 함께 참수당했다. 베아트리체 첸치의 음산한 역사는 1870년대와 아주
잘 어울리는 이야기였다. 1870년대는 괴기함과 경이로움이 제멋대로 뒤섞인 10년이었다.
1870년대의 어떤 사건들은 그야말로 중세적이었다. 로마에서는 시대에 역행했던 비오 9세의 이례적으로 긴 통치가 끝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그의 통치 기간을 특징짓는 것은 세속 군주들과 치른 전쟁과 '교황 무류성' 이라는 교리의 단언이었다.
스페인에서는 카를로스 왕가의 계승자를 자처하는 자가 부당하게 빼앗긴 왕위를 되찾기 위해 전장을 장악했다. 프랑스가
프로이센과 치른 불운한 전쟁에서 패한 뒤, 파리에서는 무장한 시민군들이 반란을 일으켜 파리 코뮌을 선언했다. 결국 파리
역사상 가장 많은 피를 흘린 학살로 최후를 맞았다.
그러나 1870년대의 다른 많은 발전들은 본질적으로 근대적이었다. 산업 자본주의의 보이지 않는 실타래들이 그 어느 때보다
긴밀히 엮여 있던 세계 경제는 (장기 불황으로 알려진) 역사상 최악의 집단적 경기 침체를 겪고 있었다. 미국에서는 남북전쟁
이 남긴 깊은 골로 나라가 황폐해졌다. 남부에서 앤드루 존슨, 율리시스 S. 그랜트, 러더퍼드 B. 헤이스의 행정부는 재건이라
는 어마어마한 도전에 직면했고 서부에서는 풍부한 광맥과 미 황무지의 지형 조사에 착수했다. 토지에 대한 이러한 조사와
탐사 활동으로 인해 미 행정부와 아메리카 원주민 사이의 긴장이 극심해졌다.
아프리카에서는 데이비드 리빙스턴과 헨리 모턴 스탠리를 포함한 영국의 탐험가들이 아프리카 대륙 내부의 지도를 완성하고
있었다. 그들의 대담한 탐사 여생은 유럽 주요 강대국들이 토지와 부를 이용하기 위해 아프리카를 무자비한 약탈을 시작한
과정과 무관하지 않았다.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에서는 영국과 러시아의 '그레이트 게임' 으로 거리가 피로 얼룩졌다.
발칸에서 다르다넬스에 이르는 러시아-튀르크 전쟁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테니슨 같은 위대한 시인들부터 레프 톨스토이 백작 같은 소설가들, 케너런 같은 초상 사진작가에 이르기까지
예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