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리어찰(樊里御札) 3
(1799. 8. 7 ~ 1800. 4. 30)
● 정조가 외삼촌 홍낙임洪樂任에게 보낸 편지로, 번리(樊里)는 지금의 강북구 '번동'지역을 뜻한다.
38.5×57.5cm. 경신년(1800) 4월 1일. (정조 24년)
꽃은 만발하고 버드나무 우거져 날로 따뜻해져 가는데, 이때 조용하고 한가한 가운데 안부가 평안하시며,
수레를 타고 꽃 핀 들로 나가거나 말을 타고 버드나무 강가에 나가 유람하며 시 짓고 술 마시는 풍류가 혹 많은지요?
또 들으니, 그동안 어언가객於焉歌客을 예뻐하다가 어제 이미 작별하여 보냈다고 하는데, 삼대가 한 집에 함께 사는 상서롭고
아름다운 일로 '오직 세월 가는 것만이 안타깝다.' 라고 할 수 있겠군요. 내게도 더없이 기쁜 일 입니다. 껄껄.
나는 날마다 공무로 바쁘며, 또 문과와 무과의 전시를 앞두고 있는데, 충효장원을 어떤 인물이 할지 몰라 마음이 설렙니다.
경과慶科가 한결같이 방종하고 해이했는데, 그 무질서함 또한 처음 듣는 일입니다. 화수회를 이번 봄에 하기로 약속하고
또 이렇게 때를 넘기게 되었으니, 대저 계획하는 일들이 늘 이렇습니다. 나머지는 이만 줄입니다.
즉시 올림.
햇어란 항아리를 편지와 함께 보냅니다.
『주고奏藁』 중초中草도 가까운 날에 보낼 것입니다.
34.3×53.5cm. 경신년(1800) 4월 5일. (정조 24년)
일간 안부가 어떠한지요?
나는 이틀 밤을 새고 어제 늦은 오후에 비로소 과거 급제자 명단을 발표했는데, 과로로 쓰러지지 않아 다행입니다.
여양驪陽의 가문에서 새 급제자 한 사람을 냈는데, 역시 글이 전혀 엉성하지 않아,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나의 기쁨 또한 정말
적지 않습니다. 문상[홍낙윤] (딸의) 혼인날이 가깝고 게다가 상대가 누구 못지않은 세벌世閥인 청해백靑海伯의 후손이니,
그 기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 혼인에 이어서 혼기를 넘긴 아이들이 차례로 성혼하기 바랍니다. 이만 줄입니다.
즉시 올림.
햇조기 2속을 편지와 함께 보냅니다.
* 여양驪陽 가문: 인현왕후의 친정인 여흥민씨 가문. * 세벌世閥: 대대로 공훈과 명망이 있는 집안.
* 청해백靑海伯: 태조를 따라 많은 공을 세운 개국공신 이자란李之蘭. * 1속: 20마리
34.7×53.4cm. 경신년(1880) 4월 19일. (정조 24년)
꽤 오래 비가 오지 않은 후라 한바탕 쏟아지면 좋겠습니다. 지금 안부가 더욱 평안하지요?
나는 그동안 격열膈熱로 눈에 치증이 있어 연달아 양료凉料를 쓰고 있으나, 치은과 이근耳根의 통증이 한꺼번에 있다가 며칠 전부터
조금 덜합니다. 정계상鄭季祥이라는 사람의 의술이 꽤 정밀하여 근자에 어머니의 환후에도 그 의술의 도움을 받았고 지금 또 내가
효험을 보니, 그 사람은 '팔천 냥짜리 높은 어른' 이라고 합니다. 문상[홍낙윤] (딸의) 혼례일이 다가오니 아주 기쁩니다.
여기 어첩魚帖을 보내니, 헤아려 받기 바랍니다. 잠깐 쓰고 이만 줄입니다.
즉시 올림.
『주고奏藁』는 언제 내보내야 합니까?
나는 근자에 시력을 보호하고 아끼느라 이렇게 하루 종일 책을 보지 못합니다.
41.3×58.4cm. 경신년(1800) 4월 20일. (정조 24년)
밤새 안부가 더욱 평안하시지요?
나는 어머니의 손 부위 환후가 두드러지게 좋아져서 다행스럽고 기쁩니다.
『주고奏藁』중초中草를 보내드리는데 그 중에서 미처 편찬하지 못한 첫 권은 일단 여기 둡니다.
생선 젓갈이 혹 채소의 구미를 도울 수 있을지 몰라 보내니, 잘 받기 바랍니다. 잠시 쓰고 이만 줄입니다.
즉시 올림.
34.5×58.3cm. 경신년(1800) 4월 27일. (정조 24년)
맥풍麥風에 가뭄을 참느라 비를 기다리는 마음이 목마름과 같을 뿐만이 아닙니다.
요즘 안부가 평안하고 건강하겠지요. 그리움이 날이 갈수록 더합니다.
나는 며칠 동안 가뭄을 걱정하고 형조의 문서를 결재하느라 스스로 강해지기 위하여 노력하고,
틈틈이 『주고奏藁』와 『유집遺集』의 두 서문을 썼습니다. 무릎에 앉히고 머리를 쓰다듬으실 때를 추억해보면
새벽에 있었던 일처럼 생생한데, 무덤의 나무가 이미 한 아름이 되었습니다. 지난날을 곰곰이 생각하며 쓰던 글을 덮고 탄식한 것이
여러 번이었습니다. 다만 필력이 졸렬하고 거칠어, 황각黃閣의 광대한 지모智謀를 선양하는 것과 고아한 집사의 훌륭한 부탁에
부응하는 것에 실패할까 두렵습니다. 전전긍긍하며 겨우 이렇게 완성하여 보여 드리니, 사정없이 고치고 바로 잡아
큰 문장에 누가되지 않게 하시기를 천만번 바랍니다.
문상[홍낙윤]이 사위를 맞이하는 잔치는 날씨가 좋았는데, 소사해小四海의 큰 잔칫상을 차려 손님들로 하여금 배불리 먹게 했겠군요.
피로가 약간 풀리면 속히 함께 왕림하여 어머니께 들려주시겠습니까. 나머지 사연은 다음 편지로 미루고 이만 줄입니다.
즉시 흠배欠排.
가는 비늘 조기 2속과 별어란 한 항아리를 함께 보냅니다.
* 황각黃閣: 재상을 말함, 홍봉한을 가르킴. * 소사해小四海: 송宋 손승우가 사치를 좋아하여 평소에도 천하의 산에진미를 차려 먹었는데, 객이 그것을 보고 '부富로써 소사해를 가졌다' 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십국춘추十國春秋』에 나온다.
-별지-
34.5×53.3cm.
두 서문을 각 한 개씩 베껴 장주[홍용한]에게 보내어 질정叱正을 청했습니다.근래 나의 정력이 글을 쓸 때 더욱 정신이 흐릿하고 몸이 피곤하지만, 외할아버지를 위하여 정성을 다할 기회가 이 한 가지 일에있으므로 먹을 적셔 붓을 다듬으며 깊은 의리를 탐색하고 심오한 뜻을 찾았으나, 감히 영서연설郢書燕說로 적석보상赤舃黼裳을더럽힐 수 없었습니다. 나 스스로 '공적으로는 유감이 없지만 나는 할 말이 있다.' 라고 생각했는데, 이 글을 보는 사람 또한 그것을 인정할 것입니다. 만족스러운 글과 만족스러운 글씨로 공의 충성이 더욱 잘 드러나기를 바라는데, 어떻게 생각할 지 모르겠습니다. 원문의 교정은 언제 시작합니까?
* 영서연설郢書燕說: 글의 본래 뜻을 잘못 해석하여 와전하는 것을 말함. * 적석보상赤舃黼裳: 왕이 신는 신과 왕이 입는 제복. 왕의 지위를 말함.
35.0×53.9cm
35.0×53.8cm
「연보年報」권卷에 다시 생각해야 할 곳이 있습니다. 외할아버지께서 조정에서 벼슬하신 사적事蹟이 이렇게 간략해서는안 될 것 같습니다. 게다가 경인(1770)년 이후 일에 관한 사실이 너무 빈약합니다. 그것이 무슨 사건이며, 어떤 사단事端의원인이 무엇이며 누구로부터 비롯되었는지, 후세 사람들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근자에 편찬한 『주고』와 『실기』도,「연보」에 연조年條를 두고 연조 아래 월조月條를 달아 촉사비사의 체제로 남기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세계世系는 군수卷首에 넣어야 되겠지요? 만약 권수의 편목을 둔다면, 선조先朝[영조]의 글씨와 지난해 내가 지어서 직접 쓴 글씨 중에 혹 전하여 보일 만한 것이 있거든 실었으면 좋겠는데, 어떨지 모르겠군요.
* 경인(1770)년 이후 일: 노론 벽파僻派가 훗날 정조正朝가 된 세손을 해치려 하자, 홍봉한이 이에 맞서다가 청주에 부처付處되었던 일련의 사건.* 촉사비사: 역사를 서술하는 기사본말체紀事本末體의 한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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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정공실기총서翼靖公實紀総序
41.0×59cm
40.2×59.9cm
40.2×59.2cm
42.1×57.5cm
41.1×56.4cm
41.4×53.8cm
나의 영고零考 영종대왕英宗大王께서 50여 년 동안 왕위에 계시면서 걸출한 인재들을 등용하여 제 자리에 배치하시고,연세가
높으셔서도 사람을 변화시키고 고무시키는 교화가 가송歌頌에 넘쳐흘렀다. 그때는 덕德을 같이한 선비들과 마음이
변치않는 신하들이 좌우 가까이서 도와 높고 빛나는 정치를 화합과 활기 속으로 끌어올렸는데, 영의정 익정翼靖 홍공洪公도
그 중의 한 분이다. 공은 소년 시절부터 이미 재상감으로 촉망을 받고 구름을 일으키는 용과 바람을 일으키는 범과 같은
훌륭한 인물이 되어 찬란히 빛나, 육조六曹의 장을 역임하고 오군영五軍營을 담당햇으며, 모든 업무를 총괄하고 학문의
각 분야를 주관했으니, 임금의 명령을 전적으로 들어 독실하게 보좌한 두드러진 공로는
역대 조정의 진신搢紳들 가운데 공만한 사람이 없을 것이다.
* 영고零考: 『서경』「대고」에 나오는 말로, 정조가 혈육관계로는 할아버지이지만
왕조대로 보면 바로 윗대이므로 아버지에 해당한다.
* 익정翼靖 홍공洪公: 홍봉한 洪鳳漢(1713~1778).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
* 오군영五軍營: 조선시대 군사를 담당한 중앙의 다섯 관아, 총융청, 수어처으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
공은 임금의 남다른 예우에 감격하여 평탄한 일이건 험한 일이건 가리지 않고 예악禮樂, 병농兵農, 헌도憲度, 강기綱紀 등에 관하여
임금과 자유 토론하며 스스로 분발하여 국정에 몰두하였고, 공무의 여가에는 늘 은퇴한 무신이나 경험이 많은 괁리들을 만나 군정
軍政과 국정國政의 잘된 점과 못된 점을 물어 거론하지 않은 폐단이 없었고 일단 거론되면 바로잡지 않음이 없어, 조야朝野가 모두
의지하여존경한 것이 거의 40년이니, 장하다고 할 수 있다. 또 생각컨데, 공은 풍채가 단아하고 장중했고 의지와 기개가 빼어
났으며, 지혜는 만물을 두루 알기에 충분하고 도량은 세속을 진압하고도 남음이 있어, 조정에서 점잖고 편안한 모습으로 정색을
하고 거닐면 뭇 관료들이 얼굴 표정을 바꾸었다. 그리고 나아가 드리는 말과 물러나 올리는 글이 명백하고 진지하여 역사에
전하면 은택이 먼 후세에 미칠 것이니 이것이 어찌 근본이 없고서 그럴 수 있겠는가.
공의 선조 문경공文敬公은 훌륭한 인품으로 후손에게 음덕을 물려주었으며, 문의공文懿公은 귀주貴主께 장가들었고,시와
글씨의 뛰어남을 자부했으며, 정간공貞簡公과 정헌공貞獻公은 충절이 변함 없고 마음이 진실하여 덕을 베풀고 공을 세웠다.
공의 대에 이르러 몸을 다하여 노력하고 행실을 깨끗이하여 가문이 더욱 번창했으며, 경사스럽게도 왕후감을 낳아 지위가
신도莘途와비교할 만하게 되어 왕실과 지극히 가까운 친척이 되었다. 뛰어난 자손이 번성하고 고관대작이 집안에 가득하여
내외이 자손이 복이 많기로는 비록 분양汾陽이나 중산中山이라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물의 흐름이 긴 것은 원천이 깊기
때문이고, 가지가 번성한 것은 뿌리가 견고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후대에 옛날을 논하는 사람은, 마음을 다하여 남을 사랑
하는 공의 어짊 때문에 공의 가문이 번성하게 되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공의 평탄한 생애에 갑작스런 풍랑이 일고 술 한 잔
마시는 사이에 못 화살이 틈을 노렸던 일은, 사람과때가 어긋나기도 하고 행적과 마음이 다르기도 하여 못 사람들의 시기가
때로는 있었다가 때로는 없었다 하는 것이니, 군자가 그것을운명이라고 한다. 그것이 공에게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내가 일찍이 주부자朱夫子가 쓴 『축공유사祝公遺事』를 흠모하여, 공의 연대筵對와 주문奏文 중 기록할만한 큰 업적과
좋은 내용을 모으고 『상서尙書』와 「기거주起居注」및 중앙과 지방의 역사적 사실에 관하여 쓴 글들을 모두 열람하여,
부문별로 목目을 정하고 목을 유類로 모았다. 유가 모두 6개고 목이 59개며, 또 「별고別故」1편을 추가했다.
* 중산中山: 서달徐達. 명나나의 개국훈신. *축공祝公: 朱熹의 외조부 축확祝確이다. 자신이 외조부의 실기를 편집하는
것을 주희가 외조부 축확의 유사를 편집한 것에 비유한 것.
숙구씨叔舅氏와 편지를 주고 받으며 토의와 수정을 거쳐 3년이 걸려서야 비로소 완성하고 제목을 『실기實䄫』라고 붙였다.
전례典禮를 첫머리에 실어 오용五庸을 밝히고, 그 다음에 출척黜陟을 실어 삼고三考를 밝혔으며, 이어 법기法䄫로 육익六翼을
모방하고이어 제부財賦로 팔정八政을 중시했고, 이어 군려軍旅로 구부를 닦았으며, 영선營繕을 끝에 붙여 모든 용도에 대비했다.
거슬러 고대까지 올라간 것은 그 근원을 밝힌 것이고, 미루어 지금에 이른 것은 그 내력을 자세히 설명한 것이다. 판화判花, 시초視草,구호口呼, 수첩手帖까지도 모두 포함시킨 것은 대개 그 강령을 들어 요점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아, 깊고도 아름답도다. 마음속에서 꿈틀대는 심오하 의리의 묘한 운용이 여기에 있고, 후대에 영원히 빛날 금과옥조金科玉條가
바로여기에 있으며, 임금을 높이고 백성을 비호하는 시원始原을 찾고 근본을 추구하여 이끌고 도우는 경經으로 삼고 법으로
삼으며, 임금은 막중한 책임을 지고 삼공三公은 받을어 보좌하는 것이 여기에 있다. 큰 계획과 큰 규모를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섬세하고분명하게 설명한 것은 육주陸奏와 가깝고, 조정의 전장과 국가의 법도를 종합적으로 평가하여 설명한 것은
두전杜典과 비슷하다.태사공太史公이 말했듯이, 명산에 보관하고 서울에는 부본副本을 둘 만하지 않은가.
마침내 이 책을 인쇄에 부쳐 나라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의 길잡이가 되게 하고, 우리 영고英考 때 군신君臣
사이가 이러했다는 것을 우러러 알 수 있게 할 따름이다.
* 육익六翼: 구정九鼎 중 귀가 달린 정鼎 여섯 개로 우 임금 때 구주의 쇠를 공물로 받아 만든 것으로
하, 은 이래로 전해져 황제의 보물이 되었다.
익정공유집서翼靖公遺集序
41.1×56.6cm 41.4×54.3cm
41.0×56.6cm
41.0×55.3cm
41.1×55.5cm
내가 공의 『실기實杞』에 이미 서序를 썼다. 또 그 『유집遺集』이 서문도 공의 남산南山 아들에게 부탁을 받았다.
내가 일찍이 큰 외삼촌[伯舅] 안와공安窩公에게 글을 배웠다. 그때 붓과 벼루를 들고 다니던 일을 생각하면 마치 간밤의 일 같은데,
눈 깜짝할 사이에 벌써 물은 잦아들고 바위가 드러나 탄식을 금할 길이 없다. 지금 이 『유집』을 보니, 안와공이 그의 선친에게서
덛은 바가 아주 많다는 것을 더욱 알겠다. 공의 저술은 대체로 위아래로 내닫는 일시적인 감정을 버들 꽃과 제비로써 표현한 것이
아니라, 글의 구상이 한 번 영감을 표현하면 법도가 있고 규칙이 있었다. 안와공에 이르면 문장이 조화로우면서도 화려하고
고아하면서도 강렬하니, 세가世家와 화벌華閥이 유지되고 법도를 지키는 것이 오직 부귀와 영화의 아름다움에만 있는 것이 아님을
공의 부자를 통하여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유집遺集』의 서문을 삼가 다음과 같이 쓴다.
국조國朝 삼백여 년 이래 한 몸이 장상將相을 겸하고 문장과 사공事功으로도 당대에 뛰어난 인물이 많지 않다.
대개 사공에 치우치면 문장을 잘 하는 사람이 드물고 문장이 훌륭하면 사공이 부족한데, 형편상 그럴 수밖에 없다.
배진공裵晉公이 천하 창생의 명망을 한 몸에 지니고도 한림원翰林院의 화려한 명성은 도리어 원진元稹과 유우석劉禹錫에 미치지
못한 것을 보면, 그것은 지력智力으로도 취득하기가 어려운 것임이 분명하다. 오호! 文에도 능하고 武에도 능하며 정숙한 위의威儀
와 훌륭한 용모로 두 가지 아름다움을 겸비한 자는 오직 공이 아닌가. 내가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 과장이다.
어찌 공에 대하여 과장하여 말하겠는가.
공이 일찍이 묘당에 앉아 국정 전반을 관장하며 맑고 발게 보좌했을 때는 군국軍國의 각종 문서와 수레와 말을 타고 찾아오는 빈객으로
날나다 떠들썩 했는데, 한적한 곳에 은퇴해서는 푸른 북악산 기슭을 한가롭게 바라보며 술 마시고 시 읊는 것으로 낙을 삼았다.
종정鐘鼎, 잠홀簪笏, 성리聲利가 북적대던 곳에, 서가에는 도서가 꽂혀 있고 꽂과 대나무가 무성하게 우거져 마치 벼슬 하지 않은
선비처럼 청빈한 기상을 잃지 않았다. 공의 시는 담백하고 평이하며 난삽한 말을 쓰지 않아 성송盛宋의 시인들처럼 부드러운 아름다움과
길고 깊은 멋이 있어 사람들로 하여금 거문고 가락을 듣는 느낌을 갖게 하고, 문장 역시 자세하고 시원하며 조리가 명확하여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면서도 은연중에 법도에 맞았다. 비록 당시 문학과 예술을 주름잡으며 홍유석학鴻儒碩學으로 자처하는 자들이라도
공 앞에서는 한 발 물러섰다. 내가 생각하기에, 공의 고상한 뜻이 자연에 있었기 때문에 그 마음이 높은 벼슬에 얽매이지 않았고
그 가사의 멋도 깊고 아늑하여 기산箕山과 영수穎水의 느낌이 많았다. 지위가 날로 높고, 명망이 날로 융성하고, 공적이 날로 무성하고,
임금의 대우가 날로 두텁고, 책임이 날로 무거워 항각黃閣에서 맴돌며 차마 벼슬을 그만 두고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다.
뭇 사람들이 단지 공의 사공事功이 남의 이목에 눈부실 정도로 두드러진 것만 알지, 문장에 대한 공의 조예가 문단을 누르고
세교世敎를 도울만큼 탁월했던 것은 깊이 알 수 없다. 내가 공의 『실기』를 편찬하고 또 『유집』을 펴내 차례로 세상에 유행하도록
하는 것은, 공의 글을 전하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후진을 위한 것이다. 사공에 뜻이 있는 자는『실기』를 보고, 문장에 뜻이
있는 자는 『유집』을 보면 얻는 것이 있을 것이다. 뜻이 있는 자라면 어찌 이 책을 한 번 보지 않겠는가!
때는 나 소자 小子 즉위 24년 경신(1800) 여름에 삼가 쓰다.
34.7×53.4cm
34.7×53.2cm
인편이 돌아와 위로되고 기쁩니다. 이 사내는 하늘을 쳐다보며 생각하느라 잠을 자도 편치 않고 밥을 먹어도 달지 않습니다.
다만 이것은 스스로 성의가 독실하지 못하여 와야 할 비가 오지 않아 갈증으로 번민하는 것일 뿐입니다.
근자에 모상某相의 『유집遺集』을, 벼슬을 그만 두고 돌아가면서 부탁한 글을 쓰기 위하여 몰두하여 보았습니다.
대개 그 기개와 수법에 취할 만한 것이 없지 않으나, 작가로 자처하지 않은 외조부에 비하면 시와 문에 시로 세상에서
이른바 '반상의 격차' 가 있었습니다. 드디어 용기를 얻어 고단함을 떨치고 두 서문을 지었습니다.
서문의 구와 단어에 왕왕 부끄러운 과장이 있어, 과장의 개탄을 면할 수 없습니다. 장주[홍용한]의 답장을 받아보니,
또 이렇게 고친 것이 있습니다. 보신 후 어제 보낸 본本에 이 초고를 고쳐 써서 돌려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두 서문에 '주고奏藁'라고 한 것은 모두 '실기實杞' 로 하나하나 바로 잡고, 그 밖에 이 두 서문의 자구가 만약 중첩된
곳이 있으면 취야{홍취영]를 시켜 교정하고 첨지籤紙를 붙이게 하여 가까운 날에 들여보내세요.
여기 있는 본本에 반영할 생각입니다.
『유집遺集』의 서문에 연월年月만 쓴 것은 그 위의 총서總序와 제인諸引과 통일하기 위해서인데,
과연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연보年報」중 경인(1770)년 이후 연조年條의 건件은 반드시 초안을 작성하여 먼저 보여준 후
정서하기 바랍니다. 『주고奏藁』의 원편元編에 고칠 곳이 아주 많은데, 엉성하고 경솔하게 만들어 보는 사람의
비웃음을 받아서는 결코 안 됩니다. 이 점도 각별히 유의하기 바랍니다.
장주[홍용한]에게 보내는 답장을 하인으로 하여금 집사執事께 드리고 내어 주기를 기다려 장주에게 바치게 했으니,
받은 즉시 읽은 후 풀로 봉하여 이 하인에게 주고, 이 편지의 답장은 장주에게 간 인편이 돌아오는 길에 부치기 바랍니다.
이만 줄입니다. 즉시 올림.
34.4×52.6cm. 경신년(1800) 4월 30일. (정조 24년)
일간 안부가 어떠한지요?
취야就野[호우치영]의 첨지籤紙을 보고 고친 것을 보냅니다.
근자에 가뭄 걱정으로 자연히 수응酬應이 많아 첨지 외에는 상세히 보지 못했으니, 일일이 교정하여 알려주기 바랍니다.
비 올 기미가 여전히 아득하니, 답답함을 어찌 말로 할 수 있겠습니까.
마침 빈대賓對[次對]가 있어 이만 줄입니다.
즉시 흠배欠排.
웅어 다섯 두름을 편지와 함께 보냅니다.
● 인용서적 / 국립중앙박물관 『정조임금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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