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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신여성 언파레-드

新女性 언파레-드

NEW WOMEN onPARADE




 <나혜석 자화상>

1928 추정, 캔버스에 유채, 88×75cm,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소장




근대기는 미술뿐아니라 영화, 광고, 잡지 등의 매체를 통해 여성의 신체가 이미지로 소비된 시대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까지는 열녀전이나 풍속화, 미인도 같은 경우를 제외하면 여성 재현 전통이 부재했다.

여성 이미지가 공적인 영역에서 시각적 볼거리로 재현되기 시작한 것은 개화기 딱지본 소설의

표지화나『대한매일신보』나『매일신보』의 상품 광고 등에서 부터였다.


1920~30년대는 신문과 잡지의 출판이 활발해지고 영화 공연과 박람회 등 시작적 대중문화가 형성되면서

여성이미지는 매혹의 서구 문물과 상품, 소비의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기호로서의 역할을 했다.

다른 한편, 조선미술전람회나 각종 사진공모전 등을 통해 여성은 이상적 '미인', '향토적 정서'

 '조선 전통' '근대적 취미' '현모양처' 등을 표상하는 이미지로 수없이 만들어졌다.


『신여성,』『별건곤』같은 대중잡지들의 표지화, 만화, 컷 등을 통해 재현되 여성 이미지들은

실제로서의 여성이기보다는 굴절된 식민 공간 속에서 따라가야 할 서구 문명에 대한

선망과 좌절, 욕망을 투영하는 담론의 장으로서의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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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파레-드'는 '온 퍼레이드(on parade)'의 1930년대식 표현으로 공연을 마친 배우들이

무대 위에 일렬로 늘어선 모습을 일컫는다. 당시 기사들은 가수들의 사진을 나열하고

그들의신상 정보나 특징을 설명할 때 '언파레-드'란 용어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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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여성은 근대적 지식과 문물, 이념을 체현한 여성들을 일컫는다.

1910년대 여자 일본 유학생들로부터 시작하여 1920년대 초·중등교육을 받은 여학생들과

여성 민권과 자유연애를주창하는 '신여자'를  뜻하는 경향이 컸으나, 점차 양장을 입고 단발을 한 채

일본을 경유해 들어온 서구 대중문화를 향유하는 '모던 걸', 나아가 시부모와 떨어져 단가살림을 하면서

 애정적 부부 관계를 운영하는 '양처'의 의미를 포괄하는 문화적 상징이 되었다.


세계사 차원에서 보면 신여성은 1890년대 영국의 'New Woman' 열풍에서 시작하여

세계 각국으로 퍼져 나간 새로운 여성성의 아이콘이다. 공통적으로 근대적 지식을 소유하고

 경제적 독립성을 누리며 남성의 보살핌을 받는 존재를 벗어나 소비와 유행의 주역으로서

새로운 가치와 태도를 추구한 여성들을 일컬었고, 각 사회마다 이 여성들을 둘러싼 사회적 논란이 있었다.


신여성의 의미와 논란은 서구 사회와 서구 문물을 들여온 비서구 식민지 사회에서

 그 내용과 초점이 다르게 나타났다. 영국에서는 치마바지를 입고 자전거를 타는 신여성을

기존의 남성 권력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한 데 비해, 식민지 조선에서는 구조선 사회를 벗어나

근대적 이념과 문물을 추구하는 존재로 형상화했다.



- 여성 잡지 -

근대기 잡지는 대중을 교육하고 계몽하는 미디어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잡지의 표지는 잡지의 얼굴이면서 잡지가 추구하는 방향과 가치로 독자를 이끌어내는 선전(宣傳)의 공간이었다.

그중에서도 여성 잡지들은 낮은 취학율과 높은 문맹율의 현실을 타개하고 여성의 계몽을 실현한다는 기치 아래 발행됐다.

1920년대 천도교단의「개벽사」가 발행한 여성 잡지 『신여성』은 '교육을 받아 계몽된 새로운 여성'을 일컫는 말이었다.
















김주경, 북악산을 배경으로 한 풍경, 1929, 캔버스에 유채, 97.5×130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모던여성 십계명


1   노인 말을 듣지 말어라.

2   딸을 보지 말어라.

3   어디까지 여성이 되어라.

4   번역식을 쫓지 말라.

5   사랑으로 먹지 말어라.

6   유희를 배우라.

7   시류의 주관을 잡어라.

8   건강을 놓치지 마라.

9   새로운 청춘을 창조하라.

10   조선글을 배우라.


윤지훈, 『신여성』, 1931. 4.





구본웅, <여인상>, 1940, 캔버스에 유채, 43×32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구봉웅, <여인상>, 연도미상, 목판에 유채, 22×15cm,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주경, <애인(모자 쓴 여인)>, 1937, 캔버스에 유채, 53×45cm, 대구미술관 소장




손응성, <산보복>, 1940, 캔버스에 유채, 90.8×64.7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주경, <편물하는 여인>, 1938, 캔버스에 유채, 116.5×91cm, 개인 소장




서동진, <수놓는 소녀상>, 1933, 종이에 수채, 61×40.5cm, 개인 소장




손일봉, <소녀>, 1935, 캔버스에 유채, 33×22cm, 대구문화예술회관 소장




임군홍, <여인좌상>, 1936, 캔버스에 유채, 126×94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이제창, <독서하는 여인>, 1937, 목판에 유채, 32×23.2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위) 김용조, <해경>, 1930년대, 캔버스에 유채, 40.5×42cm, 개인 소장

(아래) 이인성,<해수욕장>. 1946, 종이에 수채, 24.7×57cm, 금성문화재단 소장




- 신여성의 취미 -






김기창, <정청>, 1934, 비단에 채색, 314×159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김인승, <봄의 가락(좌측 부분)>,1942, 캔버스에 유채, 147×207cm, 한국은행 소장




<봄의 가락(우측 부분)>





이유태, <인물일대>: 탐구, 1944, 종이에 채색, 212×153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이유태, <인물일대>: 화운, 1944, 종이에 채색, 210×148.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김광배, <배우 김신재 초상>, 1930년대, 최인진, 박주석, 한국사진켤렉션 제공



<박은실 초상>, 1940년경, 사진아카이브연구소 제공





(좌) 김권수, <여인상>, 1920년대, 비단에 채색, 163×47.5cm, 개인 소장.

(우) 김은호, <수하미인도>, 비단에 채색, 125.8×41.5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장우성, <미인도>, 1930년대, 비단에 수묵채색, 50×48cm, 코리아나미술관 소장





손웅성, <부인상>, 1940, 캔버스에 유채, 91×66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김인승, <여인좌상>, 1941, 캔버스에 유채, 60×50cm,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





「여권통문,」『황성신문』, 1898. 9. 8.


1898년 9월 독립협회의 자매단체인 찬양회의 주도로 서울 북촌의 양반 여성 300여 명이 모여

이소사와 김소사란 이름으로 한국 최초의 여권선언서를 발표하였다.'여학교설시통문'이라고도 한다.

당시 황성신문은 '놀랍고 신기한 일'이라 하여 여권통문을 게재하였고,

독립신문은 정부가 여성 교육에 예산을 써야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보도하였다.

여권통문은 여성에 대한 주체적 자각의식의 중요성을 주장하면서

현실적인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대한독립여자선언서』, 1919, 독립기념관 제공


1919년 2월 간도에 있는 애국부인회가 조선 독립을 선언한 대한독립여자선언서이다.

민족지도자 33인이 3 · 1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기 전,

 여성들이 제국주의에 항거한 역사적 사건이란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근우』창간호, 표지화: 안석주, 근우회, 1929. 5, 권진규미술관 소장

















『여인』창간호, 비판사, 1932, 6,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





『여성』창간호, 경성여성사, 1934, 4,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





서동진, <소녀좌상>, 1924, 종이에 수채, 33.3×25cm, 개인 소장










딸의 더 나은 삶을 바라는 어머니들의 수업참관, 1900년대 초, 이화역사관 제공










조끼허리 치마의 체육복을 개량한 월터 선생, 1900년대 초, 이화역사관 제공





<스케이트>, 1920~30년대, 이화역사관 제공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1920~30년대, 사진아카이브연구소 제공









- 자유연애 -

 

























1955년 파리에서 처음 성탄절을 맞이하는 나의 향에게 행복과 기쁨이 있기를 마음으로 바라며

진눈깨비 날리는 성북산협에서 으스러지도록 끌어안아준다, 너를.


나의 사랑 동림이 - 수화






이중섭, 부인에게 보낸 편지, 1954, 11, 종이에 잉크, 색연필, 26.5×21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이인성, <여인초상>, 1940년대 초, 캔버스에 유채, 25.2×21cm, 권진규미술관 소장





오지호, <처의 상>, 1936, 캔버스에 유채, 72×52.7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나혜석, 「김일엽 선생의 가정생활」, 『신여자』4호, 1920, 6, 아단문고 제공




























김은호, <미인승무도>, 1922, 비단에 채색, 272×115cm, 

 플로리다대학 사무엘 P. 하른 미술관 소장 (제임스 A. 판 플릿 기증)






장우성, <승무도>, 1937, 비단에 채색, 198×161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이유태, <여인삼부작: 지(智)>, 1943, 종이에 수묵담채, 198×142cm,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이유태, <여인삼부작: 감(感)>, 1943, 종이에 수묵담채, 215×169cm,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심형구, <포즈>, 1939, 캔버스에 유채, 115×87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윤효중, <사과를 든 모녀상>, 1940녀대, 나무, 170×102×66.5cm, 서울대학교미술관 소장





(左) 함죽서, <묵란>, 종이에 수묵, 129×35cm, 개인 소장

(중) 김능해, <묵란>, 연도미상, 종이에 수묵, 148.7×39.2cm, 개인 소장

(右) 원금홍, <석란>, 1935, 종이에 수묵, 140×34.7cm, 개인 소장






정찬영, <금계유중>, 1933, 비단에 채색, 140×50cm, 유족 소장






정찬영, <공작>, 1935, 비단에 채색, 144×49.7cm, 유족 소장





정찬영, <공작>, 1937, 비단에 채색(4폭 병풍), 173.3×250cm, 유족 소장





정찬영, <한국산 유독식물을 위한 밑그림>, 1933, 종이에 채색, 125×85.8cm, 유족 소장





정찬영, <여광>, (선전 16회 입선) 기념 엽서, 1931, 유족 소장





배정례, <봄>, 비단에 채색, 136×102cm,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





이현옥, <나무 숲속의 새들>, 1950, 종이에 수묵담채, 116×146cm, 국립현대미술관














나혜석, <김우영 초상>, 1928 추정, 캔버스에 유채, 79×70.7cm,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소장





나상윤, <동경제대 구내풍경>, 1927, 캔버스에 유채, 38.1×45.8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나상윤, <가면이 있는 정물>, 1926, 캔버스에 유채, 33×23.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나상윤, <누드>, 1927, 캔버스에 유채, 62.5×45.4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이갑향, <격자무늬 옷을 입은 여인>, 1937, 캔버스에 유채, 112×89cm, 국립현대미술관





이정수, <꽃>, 캔버스에 유채, 65×53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박래현, <예술해부괘도>(1) 전신골격, 1940, 종이에 채색,

142×61.5cm, 조시비미술대학 역사자료실 소장





박래현, <여인>, 1942, 종이에 채색, 94.5×80.5cm, 개인 소장





박래현, <부엉이A,1950년 초, 종이에 채색, 81×57cm,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




박래현, <나녀>, 1960, 종이에 채색, 202×99.5cm, 뮤지엄 산 소장




천경자, <굴비를 든 남자>,, 1964, 종이에 채색, 195×135cm, 금성문화재단 소장




천경자, <연젠가 그날>, 1969, 종이에 채색, 195×135cm, 뮤지엄 산 소장








유봉임, <새끼 참새도/물렀거라 물렀거라/원님 행차시다>, 1935년경, 자수, 견, 24.5×27.1cm,

조사비미술대학 디자인 공예학과 공예전공 자수 소장




이장봉, <자수 비단보>, 1936~37년경, 자수, 견, 39×38.2cm, 조사비미술대학 역사자료실 소장








전명자, <성모>, 1940년대, 천에 자수, 24.5×17cm, 숙명여자대학교박물관 소장




김인숙, <다람쥐>, 천에 자수, 63×106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박을복, <표정>, 1963, 천에 자수, 92×110cm, 박을복자수박물관 소장




나혜석, <개척자>, 『개벽』13호, 1921. 7,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연구센터 소장




나혜석, 「경희」, 『여자계』제2호, 1918. 3, 아단문고 제공














제11회 조선미술전람회 입선작품과 나혜석, 1933년 추정,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제공





김명순, 『생명의 과실』, 『애인의 선물』


필명은 탄실(彈實) 또는 망양초(望洋草). 평안남도 평양 출신. 평양 갑부 김가산 소실의 딸이다.

1911년서울진명여학교(進明女學校)를 졸업한 뒤, 1917년 잡지 『청춘(靑春)』의 현상소설에 응모한 단편소설

「의심(疑心)의 소녀(少女)」가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1919년 동경유학시절에 전영택(田榮澤)의 소개로 『창조(創造)』의 동인으로 참가하면서 본격적인 문필활동을

전개하였으며, 매일신보(每日申報)의 신문기자(1927)를 역임한 바 있고, 한때 영화에도 관여하여 안종화(安鍾和) 감독의

「꽃장사」·「노래하는 시절」 등에 주연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1939년 이후 일본 도쿄로 건너가 그곳에서 작품도 발표하지 못하고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정신병에 걸려 동경 아오야마정신병원[靑山腦病院]에 수용 중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소설 「칠면조(七面鳥)」(1921)·「탄실이와 주영이」(1924)·「돌아다볼 때」(1924)·

「꿈 묻는 날 밤」(1925)·「손님」(1926)·「나는 사랑한다」(1926)·「모르는 사람같이」(1929) 등이 있으며,

시작품으로 「동경(憧憬)」·「옛날의 노래여」·「언니 오시는 길에」·

「석공(石工)의 노래」·「시로 쓴 반생기」 등이 있다.


신문학 최초의 여류문인으로서 여성해방을 부르짖은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으며,

 여자주인공의 내면심리를 치밀하게 묘사한 소설들을 많이 남겼다.

 개인적인 생활의 고뇌와 사랑의 실패 등으로 인하여 불우한 삶을 살았으나,

창작집 『생명의 과실(果實)』(1925)을 간행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






김세진, <나쁜 피에 대한 연대기>, 2017, 싱글채널 HD 비디오 & 6채널 사운드, 작가 소장





김명순의 연대기에 기록된 그녀의 사망 추정 시기인 1951년 4월은 '나쁜 피에 관한 연대기라는 이야기의 시작점이 된다.

그녀가 역사에 기록된 1951년에 죽지 않고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어딘가에 생존하여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완성한다는

가정하에 시작된 스크립트는 그녀가 남긴 수 많은 시, 소설, 희곡 그리고 에세이에서 발췌한 문단들과 단어들로 지극히

개읹거인 내적 욕망, 이상, 좌절, 외로움, 희망, 고립감에 대한 고백적 텍스트의 조각으로 구성된다.





(좌) 후지이 코유, <최승희 보살춤>, 1943, 청동, 38.5×18×15cm, 서대식 소장

(우) 최승희 사진<보살춤>, 1942, 광주시립미술관 하정웅 컬렉션









「목포의 눈물」음반 가사지, 1935, 한국유성기음반아카이브


<이난영>, 본명 이옥례(李玉禮). 전라남도 목포 출생.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오빠 이봉룡(李鳳龍)과 함께 불우하게 자랐다.

16세 무렵 태양극단의 순회공연 중 막간무대에서 노래를 인정받아 순회극단을 따라 나섰다.


단체가 일본에서 순회공연을 할 때 오케레코드사 사장 이철(李哲)에게 발탁되어, 1933년에 염석정 작곡의 「향수」를 취입하였다.

 하지만 그보다 조금 앞서 태평레코드에서 발매된 「시드는 청춘」, 「지나간 옛 꿈」이 이난영의 데뷔곡이다.


1935년 가사모집에서 입선된 문일석(文一石)의 작품에 손목인이 곡을 붙인「목포의 눈물」을 불러 크게 인기를 얻으면서

가요계의 새별로 등장하였다. 1936년 20세가 되던 해에 가요작곡가 김해송(金海松)과 혼인하였다.


뒤이어 이봉룡 작곡의「목포는 항구다」, 김해송 작곡의「다방의 푸른 꿈」등으로 당대 최고의 유명 가수가 되었다.

 광복 후에도 무대가수로 활약하였는데, 6·25동란 때 김해송이 납북된 이후 K.P.K악단을 손수 운영하였다.


자식들도 미국에서 김씨스터스·김보이스라는 이름으로 연예활동을 하였고,

1963년 한때 자식들을 따라 미국에서 생활하다가 귀국하여 별세하였다.





1930년대 여가수들의 모습.

왼쪽부터,  홍청자, 왕숙랑, 박향림, 이난영, 이준희, 김능자, 장세정, 이화자.




이난영 의상, 목포의 눈물 기념사업회 소장.





권혜원, <모르는 노래>, 2017, 오디오 - 비디오 설치, 작가 소장.





김소영, <SF Drome: 주세죽>, 2017, 3채널 영상, 작가 소장


일명 까레에바·한 베라. 함경남도 함흥 출신이다.

함흥 영생여학교 고등과에서 2년 동안 수학했다. 1919년 함흥에서 3·1운동에 참가했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1개월 동안 유치장에 감금되었으며, 공소가 끝나 석방되었다. 감옥에서 석방된 뒤

함흥의 한 병원에서 근무하기 시작했고, 1921년까지 그곳에서 일했다.


1921년 4월 상해(上海)로 가서 안정씨여학교(晏鼎氏女學校)에 입학해 영어와 피아노를 배운 뒤 1922년 5월 귀국했다.

 이해에 박헌영과 결혼했다. 1924년 5월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 여성단체인

조선여성동우회(朝鮮女性同友會)를 발기하고 집행위원이 되었다.


1925년 1월 경성여자청년동맹 결성에 참여해 개회선언을 하고 강령과 규약을 기초했으며 집행위원이 되었다.

 2월에는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준비위원으로 선정되었다.

 4월 고려공산청년회 결성대회에서 중앙후보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1월 ‘제1차 조공검거사건(신의주 사건)’으로 체포되어 신의주 경찰서에서 취조 받고 12월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1927년 5월 근우회 창립대회에 참가해 임시집행부 성원이 되었다.

 1928년 8월에 남편 박헌영과 함께 일제경찰의 추적을 피해 소련으로 탈출했다.

박헌영과 함께 정치망명가들을 위한 집에서 살았으며, 1929년에 동방노력자공산대학 ○반에 입학해 1931년까지 공부했다.


당재건운동을 위해 1932년 1월 상해로 갔다.

 1933년 7월 박헌영이 체포된 뒤 일정 기간 상해에 머물다가 1934년에 김단야와 함께 소련으로 되돌아갔다.

1934년 김단야와 재혼했다. 그 해에 5개월 가량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공부했고, 그 뒤 외국인노동자출판부에서 교정원이 되었다.


1937년 11월 재혼한 남편 김단야가 ‘일제 밀정’이라는 혐의를 받아 체포되었다.

1938년 ‘사회적으로 위험한 분자’라는 혐의로 모스크바에서 알마아따로 유배되었다.

1938년 9월부터 1940년 9월까지 피혁공장의 개찰원으로 근무했다.

1940년 9월부터 1946년 3월까지 까르마끄치구역 협동조합에서 근무했다.

1946년 7월부터 끄질오르다주 공업기업소에 있는 봉제작업장에서 직공으로 근무했다.

 1946년 해방된 조국으로 귀환시켜 주거나 17세 된 딸과 함께 있도록 모스크바로 가게 해줄 것을

소련당국에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50년대 중엽 사망했다.





김소영, SF Drome: 주세죽, 2017, 3채널 영상, 작가 소장





//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다.

우리는 아직 신여성이 무엇이며, 누가 신여성인지, 그리고 왜 이들은 그렇게 화려한 등장과 철저한 망각을 오갔는지

충분히 알지 못한다. 요동치는 시대를 온몸과 온 영혼으로 부딪치며 살/죽을 수밖에 없었던 어떤 여성들,

또는 어떤 여성들의 이미지를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여성의 가시성에 사로잡혀야 한다.

사로잡힐 것을 두려워하지 않은 채, 그 화려한 이미지들을 응시하면서 그것이 말하고 있을

경탄, 연민, 슬픔, 냉소, 분노, 울적함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흔적의 귀환은 그것을 보고 듣는 자에게만 허용될 것이다.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학예연구원, 김 수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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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7년 12월 21~2018년 4월 1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렸다는『신여성 도착하다』展


사실 궁벽한 시골에 살고 있는 나로선 위와 같은 전시회가 열렸는지 알기도 어렵거니와

설령 안다고 해도 불원천리 특별시까지 쫓아 간다는 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닐 터수다.


동네 도서관에 들러 위 전시회에 관한 내용이 수록된 책을 집에 들고와 흥미롭게 읽어 본 후,

책 뒷 부분에 수록된 논문 수준의 글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그림을 이 자리에 옮겨 보았다.


마치 상 다리 부러지게 잘 차려진 <문화 한정식> 한 상을  맛나게 쓸어 담은 듯.


 


Faithfully - Eric Chiryok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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