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매도(月梅圖)
어몽룡, 비단에 먹, 119.4×53.6cm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조를 통틀어 가장 많은 '매화시'를 남긴 퇴계의 '陶山月夜詠梅'가 곧바로 연상된다.
獨倚山窓夜色寒
홀로 산창에 기대서니 밤기운 차가운데
梅梢月上正團團
매화나무 가지 위로 둥근 달이 떠오르네
不須更喚微風至
구태여 청하지 않아도 산들바람 불어오니
自有淸香滿院間
맑은 향기 자연스레 서원뜰에 가득 차네.
결코 단순한 구도와 배열이 아니다.
고매(故梅)의 부러짐은 인고의 상징이요, 보름달을 향해 솟은 두 줄기 가지는
가히 우주를 관통할것 같은 선비의 웅혼한 기개를 떠올리게 한다.
탐매(探梅)의 세계에서 최고봉으로 꼽는 야월매(夜月梅) 감상.
고졸하게 피워낸 몇 송이 백매향의 그 황홀지경을 내 어찌 감히 어줍잖은 필설로.
그것은 정녕 사군자四君子로 칭송되는 梅花에 대한 예의가 아닐 터.
조선 선비들의 심미안에
묵매(墨梅)의 전형을 제시해준 기념비적 작품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묵매의 전통은 오달제(吳達濟)와 허목(許穆), 조지운(趙之耘)등의 작품으로 이어진다.
묵매도(墨梅圖)
오달재, 종이에 먹, 108.8×52.9cm, 국립중앙박물관.
윗 부분엔 숙종의 친필 별지가 붙어있고
왼편으로는 오달제의 고손자인 오언유가 영조를 대신하여 적은 시가 적혀있다.
妙筆吾東豈有二
오묘한 필치 동녘에 어찌 두 개가 있으랴.
觀啚仍忽感前事
그림을 보니 문득 지난 일이 떠오르네.
辝君不暫心忘國
사직한 그대가 잠시도 나라를 잊은 게 아님을
對虜何嘗口絶詈
포로가 이토록 꾸짖었던 일이 있었던가
絶義昭昭三子同
빛나는 절의는 세 분이 명백하나
孝忠炳炳一身備
효와 충이 빛나는 건 한 몸에 갖추었네
誰知嗣續終無傳
대를 이어 끝내 전승되지 않음을 그 누가 알리오
於此難諶福善理
이것으로 삼가며 참으로 복선을 깨닫는도다.
乙酉臘月下澣題 을유년(1705년 숙종 31년) 섣달 하순에 짓다.
英祖 御製贊
忠烈公吳達濟梅花簇
충렬공 오달제 매화족자
御詩續贊仍賜其孫大司成彦儒
어시(御詩)를 이어서 기리고 이에 그 후손 대사성 언유에게 하사한다.
今日望拜 緬憶昔年
오늘 우러러 절하며 아득한 옛 시절을 생각하노라
遙望中州 罙切愴然
멀리 중원 땅을 바라보니 더욱 간절한 슬픔만이
豈幸此辰 得覽一簇
다행스럽게도 이때에 한 족자를 대하고 보니
東閣一梅 忠烈筆蹟
동각의 한 매화가 충렬공의 필적이로다
上有御詩 追慕興歎
위에 있는 어시(御詩)는 추모하는 탄식이 일어남인데
韻律停久 敬續以贊
운율이 오랫동안 멈추니 공경하는 마음을 이어서 기리네.
樹忠何歲
세운 충성이 어느 때이던가
漢南夕雲 何以聊表
한남에 저녁 구름이 드니 무엇으로 나타낼까?
特賜其孫
마음을 드러내어 특별히 그 후손에게 하사한다.
崇禎紀元後三丙子仲冬
숭정 기원후 세 번째 병자년(1756년, 영조 32년) 11월
忠烈公吳達濟玄孫嘉善大夫行成均館大司成臣吳彦儒奉敎敬書
충렬공 오달제 현손 가선대부 성균관 대사성 신 오언유가 교지를 받들어 삼가 쓴다.
※ ※ ※
작가의 내면과 인생이 투영되어 있는 그림이다.
당연히 그의 생각과 일생을 알아야만 그림의 의미와 미감을 제대로 읽어낼 수 있기에 작가의 이력을 적어 보았다.
그림에서 능숙한 솜씨는 찾기 어렵지만 죽음 앞에 초지일관의 신념을 지킬 수 있었던 추담의 성정을 읽어내야 한다.
그의 절명작일 수도 있는 위 그림은 두 군왕의 시가 더해져 더욱 고매하고 기개있는 모습으로 다가온다.
매월만정每月滿庭
심사정, 종이에 먹, 27.5×47.1cm
매화의 가치를 제시하고 끌어내는 최상의 파트너는 단연코 月이다.
달을 약간 가린 엷은 먹 번짐은 낭자한 야월매향夜月梅香의 상태를 뜻함이리라.
조선 중기 월매도의 칼같은 필선이 헌제(玄齋)에 이르러선 사뭇 달라진 모습이다.
느낌의 표현이 자유로워지고 상징성 보다는 서정성의 발현이 강조되었음을 알 수 있겠다.
백매白梅
김홍도, 종이에 채새, 80.2×51.3cm, 간송미술관
세월의 더께가 한 그루 故梅의 거친 등걸에서 자연스레 배어 나온다.
엷은 먹색을 전체의 배경으로한 고졸한 白梅 몇 송이의 청아한 香은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조개 껍데기 호분胡粉으로 백매를 표현했다는데,
아직 원작을 알현치 못한지라 그 느낌은 또 어떠할지 사뭇 궁금.
우봉 조희룡의 야담집 《호산외사壺山外史》에 등장하는 단원에 관한 대목.
끼니도 잇기 어려웠던 김홍도가 그림을 팔아 거금 삼천냥을 마련했겄다,
그 중 이천냥은 매화 분재를 사는데 쓰고, 팔백냥은 친구들을 초대해 술판을 벌이고,
나머지 이백냥으로 식량과 땔나무를 구입했다는...
매화라는 동일한 소재도 문화 전반의 흐름에 따라 해석을 달리하기 마련.
이 작품은 뜰에 심어진 매화라기 보담 사람의 손길이 간섭한 분재라는 느낌이다.
결연한 기세와 문기文氣 를 중시했던 기존의 매화도완 달리 은자의 박소함이 느껴진다.
매화도梅花島
조희룡, 종이에 옅은 채색, 113×41.8cm, 고려대학교박물관
내 언젠가 언급한 바 있었다.
"이 시대 우봉이 살아있다면 간곡히 부탁하여 꼭 한 번 그려달라 청하고 싶은 매화가 있노라고."
두문동 72현 전신민이 낙향하여 무등산 자락에 심고 가꾸었을 게 분명한 '독수쌍매獨守雙梅' 말이다.
독수쌍매 중 홍매의 웅혼한 기세를 위 우봉의 그림에서 그대로 볼 수 있었기 때문.
만약 '독수매' 그림을 우봉으로 부터 얻을 수 있다면 탐매의 계절이 지나더라도
또한 그닥 조급증을 내진 않을거라는 지극히 자의적 판단에서다.
우봉은 이렇게 적는다.
"나는 매화를 몹시 좋아하여 내가 그린 큰 매화 병풍을 우울 곳에 둘러놓었다.
매화 시를 새긴 벼루를 쓰고, 매화 글방에서 묵혀 둔 먹을 쓴다. 앞으로 매화 시 백 편을 지을 참인데,
시가 완성되면 내가 사는 곳에 '매화백영루(梅花百詠樓)'라는 편액을 걸고 매화를 좋아하는 뜻을
흔쾌히 갚을 것이다. 허나 시가 쉽게 지어지지 않아 괴롭게 읊조리니 입이 마른지라 매화차를 마시노라."
추사가 질책했다던가? "우봉의 그림에선 문기가 아쉽노라고."
허나 영원한 우봉의 왕팬인 나로선 고개를 젓고 또 저을 수 밖에.
우봉 이전, 그 누가 梅香의 바다에 우리를 이토록 흠뻑 빠트린 적이 있었던가.?
조선 매화도의 완성은 누가 뭐래도 우봉이었노라는 굳건한 믿음에서다.
홍백매팔곡병紅白梅八曲屛
유숙, 종이에 옅은 채색, 112.9×387.9cm, 삼성미술관 리움.
유현하면서도 풍부하게 뻗는 고매 가지의 휨새가
장장 4미터에 이르는 팔폭 병풍을 가득 채운 이른바 '전수식全樹式' 병풍이다.
매화의 상징성 보다는 사실적 묘사에 방점을 찍은 자연스러움이 돋보인다는 중론.
화원이었던 혜산 유숙은 조희룡과 함께 추사의 지도를 받았으나 김정희 보다는 되려 우봉에게
더 큰 감화을 받았다고. 심오한 정신세계를 강조했던 추사 보다는 우봉의 배려에 훨씬 더 끌렸다는 얘기가 될 터이다.
괴석과 어우러진 세 그루 둥치에서 뻗어올라간 고매의 연륜과 품격은
성글게 피워올린 홍 백매에 이르러 정점을 이룬다.
왼편 아래의 제시는 명나라 문인 예경이 쓴 시를 옮겨 놓은 것으로 시의 마지막 구절은
"시가 완성되니 그림에 적고, 술이 익었으니 꽃 아래 술 마실 생각을 하노라."로 끝난다.
인고하는 지조와 절개 보다는 탐미적 시각에서 매화에 근접하고 있다는 사실.
때는 이미 조선이 기울고 있었던 시기였음을...
석매도石梅圖
김수철, 종이에 채색, 51.8×28cm, 개인 소장.
철석심장鐵石心腸이라는 화제를 지닌 북산 김수철의 작품이다.
그의 생애에 대해선 그닥 알려진 바가 없다. 추사의 지도를 받았다는 사실 정도가 전부일 정도.
품격과 아취로 대변되는 추사가 김수철의 그림을 평하길,
"지극히 기뻐할 곳이 있다. 요즘 쉽게 그리는 기법으로 그리지 않았다. 다만 번짐이 너무 심한 듯하다."
감식안의 대가인 추사가 이 정도의 평가를 내렸다면 그건 큰 호평으로 봐야 한다.
기존 매화 그림에 대한 관념에 경종을 울리는 작품이라고나 할까.
마치 천진난만한 동심을 보는 듯, 묘한 감동을 선물한다. 그것을 일러 '서툼의 미학'이라 한다던가?
엉성한 듯 보이지만 그 작품 속에 녹아든 정신과 감각을 중요시 하기 때문이리라.
김추사가 늘 강조하던 '대교약졸大巧若拙'의 경지가 분명한 것
.
묵란墨蘭
이우, 종이에 먹, 43.6×30cm, 삼성리움미술관
단순 조형미만을 놓고 보면 사군자 중 난이 으뜸일 것이다.
점과 선만으로 소재의 형상을 넉넉하게 담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서예와의 궁합이 잘 맞을 터.
하여 '그린다'라기 보다 '친다'라는 표현을 우선시 한다. 바로 그 '친다'의 개념을 잘 드러내는 작품이 <묵란>이다.
신사임당의 넷째 아들 이우는 시,서,화, 예, 악 모두에 능했던 인물.
남아있는 묵란화 가운데 제작 시기가 가장 이르면서 조선 중기 묵란화의 특징을 두루 갖춘
미술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품이다.
형란荊蘭
이정, 비단에 금니, 25.5×39.3cm, 간송미술관
비단에 먹물을 진하게 들인 흑견에다 금가루를 아교에 갠 금니로 난을 친 작품이다.
나라 안 최고의 묵죽 화가로 잘 알려진 탄은 이정(1554~1626)의 굳세고 강한 난이다.
하늘거리는 맑은 청향 보다는 활달함으로 마치 손을 대면 날카로움에 베일 듯한 느낌인 것이다.
최상의 재료를 선택하여 그려낸 배경에는 그가 왕실 화원이라는 배경도 한 몫 거들었을 터.
분명 누군가의 요구가 있었을 터이고 거기에다 자신의 웅혼한 배포도 겯들어졌으리라.
물경 사백여 년이 흐른 오늘날에도 전혀 날이 무뎌지지 않은 날카로운 황금검사위를 보는 듯하다.
석란錫蘭
심사정, 종이에 뎥은 채색, 32.5×26.5cm, 간송미술관
물기를 흠뻑 적신 붓을 들어 휘두른 '묵희墨戱'의 지경을 살필 수 있는 작품이다.
이른바 '먹 장난'은 문인화의 주요한 특성중의 하나이다.
그 누구의 요구에 의한 게 아니라 심신 수양의 차원에서 해석되어져야 하는 명분있는 세계인 것이다.
서정적인 아취가 물씬 풍겨 나오는 심사정의 난.
현재는 본디 사군자 중 국화에 편중했었다. 난이나 대나무 그림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 가운데 이 <석란>의 존재 의미는 도드라질 수 밖에 없다.
서예적 필치로 군자의 상징성을 드러내야 하는 강박감을 떨쳐내고 화훼화의 감각을 동원했다는 사실.
조선 사군자화은 심사정에 이르러 또 다른 길을 개척하고 있는 셈이다.
국향군자國香君子
김정희, 종이에 먹, 22.9×27cm, 간송미술관.
추사가 왜 해동국 제일의 천재였는지를 살필 수 있는 작품이다.
추사가 강조하길, 사군자의 대표선수격인 매화나 대나무 보다 난을 치기가 훨씬 어렵다고 했다.
대저 그것은 선비의 고아한 정신세게를 강조하고 일깨우는 멘트로 해석하면 될 터이다.
문자향, 서권기로 대표되는 드높은 학문에다 날카로운 수신이 바탕이 된 연후라야
붓을 들어 난을 칠 자격이 있다는 지적이리라.
예서를 동원한 <국향군자>는 추사가 강조한 졸박拙撲의 미감에 대하여 생각케 하는 작품인 것이다.
묵란을 글씨의 연장으로 본 김추사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을 평생의 화두로 삼았던 인물.
"此國香也君子也 이것이 국향이고 군자다."라는 화제는 그의 도도한 정신세계를 대변하는 문구일 터.
두 줄기 잎이 좌우로 교차하며 시원스레 화면을 가르는 가운데 활짝 핀 꽃잎에서
짐짓 나라 안 제일의 향기가 풍겨나올 듯 하다.
불이선란不二禪蘭
김정희. 종이에 먹, 55×3ㅐ.6cm, 개인 소장.
당황스러우리만치 파격의 美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윗 부분에 적은 추사의 설명인 즉.
"난을 치지 않은 지 20년, 우연히 하늘의 본성을 그려냈다네. 문 닫고 찾으며 또 찾은 것이 유마維摩의 불이선不二禪일세.
만약 그 누가 억지 요구를 구실로 삼는다면 마땅히 유마의 말 없음으로 거절하리라."
만물의 합일과 절대 평등의 경지인 유마의 불이선에 자신의 그림을 견준 것이다.
너무 관념적이었다는 판단에서 다시 한 번 우측에 적길,
"초서와 예서를 쓰는 법으로 그린 것이니 세상 그 누가 이를 알겠으며, 어찌 이를 좋아하랴."
서화일치書畵一致의 지경 그리고 자긍심까지를 동시에 설파한 것.
추사는 본디 이 그림을 자신을 시봉하던 달준이라는 시동에게 주었다.
"애초에 달준을 위해서 아무렇게나 그렸다. 한 번만 있을 수 있고, 두 번 다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라고 화면에 이 내용을 적어놓았다.
헌데 이를 본 추사의 제가 소산 오규일이 욕심을 내더니 기어코 달준에게서 이 그림을 빼았는다.
이를 본 김정희가 꽃잎 아랫 부분에 다시 적기를,
"오소산이 이를 보고 억지로 빼앗아 가니 이 어찌 우습지 않은가."
<불이선란>은 단순한 시각적 재현이 아닌 추사의 정신세계가 고스란히 녹아든 작품으로
자신의 초상을 난에 녹여낸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하리라는 생각이다.
동신여란同心如蘭
이하응, 종이에 먹, 27.3×37.8cm, 간송미술관.
번득이는 날카로움 경쾌한 운필, 석파 특유의 개성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왼쪽 여백의 화제, "동심지언기취여란 同心之言 其臭如蘭" 마음을 같이하는 사람의 말은 그 향기가 난과 같다.는
《주역》13번재 괘 '천화동인天火同人'에 나오는 "두 사람의 마음이 같으면 쇠도 자를 수 있으며,
같은 마음에서 나오는 말은 그 향기로움이 난초와 같다." 라는 구절.
추사가 강조하던 삼전법三轉法(난 잎을 칠때 세 번 굴리는 방식)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아직은 수련 과정의 작품으로 보일만큼 천편일률적이고 도식적임이 눈에 들어 온다.
그가 묵란첩을 완성하고 적기를,
"난을 그리는 것은 스스로 마음을 속이지 않는데서 시작해야 한다.
삐치는 잎 하나와 꽃 속의 점 하나도 마음을 살펴 거리낌이 없어야만 남에게 보일 수 있다.
수 많은 눈이 보고, 수 많은 손이 가르키니 그만큼 엄격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도 속이고, 남도 속이게 된다.
비록 이것이 작은 재주지만 반드시 성의정심誠意正心에 합당해야만 비로소 그 핵심에 손댈 수 있다."
파락호破落戶를 자처하며 훗날을 기약하던 석파에게 추사는 가히 홀연히 나타난 구세주였다.
자칫 타락하고 무능한 왕족에 머물뻔한 이하응을 묵란이라는 향기로운 세계로 이끈이가 바로 김추사였던 것.
노근묵란露根墨蘭
민영익, 종이에 옅은 채색, 128.5×58.4cm, 삼성리움미술관.
석파란과 운미란의 발원지는 당연 추사 김정희다. 차이라면 석파는 김정희의 직접 지도를 받았고,
운미 민영익은 추사의 제자인 부친과 숙부를 사사했다는 것. 석파와 운미 두 사람은 인척 관계로
할아버지와 손자뻘이지만, 난 그림에 있어서는 두 사람을 맞수로 기억하는 이가 많다.
화려하게 꽃을 피운 난이 위 아래로 나뉘어 무더기로 피어났다.
이를 조선 말에 유행했던 총란도叢蘭圖라 칭한다. 이른바 뿌리가 드러난 난인 것이다.
나라를 잃었으니 난인들 뿌리 내릴 땅이 어디 있겠느냐는 표현이라고.
중국에서는 남송 말의 정사초가 이런 모습의 난을 그렸다.
칼칼한 농묵으로 난잎의 끝을 처리했다. 그리고 몇 개의 난 이파리를 길게 뽑아 올렸다.
고고함과 청초함 보다는 거칠고 굳센 시대의 맛이 물씬 풍긴다.
채란彩蘭
조동윤, 종이에 채색, 31.1×22.2cm, 간송미술관.
먼저 눈에 들어 오는 꽤나 느끼한 서체의 화제인 즉.
道是深林種 還憐花谷香
깊은 숲의 종자라 이르지만 꽃 골짜기 향기는 오히려 어여쁘다.
不因風力聚 何以度瀟湘 穎雲仁兄法正 惠石 趙東潤
바람의 힘에 감기지 않는다면 어찌 소상강을 건널 수 있겠는가.
타원형의 인장엔 '열금경閱金經'이라 새겼다. '소박한 거문고 타고 좋은 경전 열람'이라?
대표적 친일파요, 악행을 서슴치 않았던 자의 인장에 새겨진 내용이라니...
묵란이 아닌 채색란이다.
군자의 고매함과는 거리가 먼 '친蘭'이 아니라 '그린蘭'으로 보면 되겠다.
조동윤, 대원군 집군기에 판서를 지낸 조영하의 아들로 일찍 급제하여 무관 벼슬에 올랐다.
한일병탄의 공로로 일본의 남작 작위를 받고 영친왕의 강제 정략 결혼을 추진하는 등, 친일에 앞장 선 인물이다.
부귀와 영화만을 좇은자의 정신세계가 어떤 것인지 살필 수 있는 그림이자
"그림이 곧 그 사람이다."라는 말을 새삼 떠올리게 하는 그림이다.
석국도石菊圖
정선, 비단에 옅은 채색, 53.3×30cm, 호림박물관.
겸재는 일반적으로 진경산수화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인물이나 화조등도 잘 그렸다는 사실.
왼편 윗 부분에 '원백작元伯作'이라 적었다. 원백은 정선의 子이기에 젊은 시절 그렸음을 알 수 있겠다.
사군자는 보통 사실성 보다는 사의성이 강조되는데 이 그림은 사실적 화풍으로 그려냈다.
사군자라기 보다 꽃그림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심금을 울리는 그 무엇은 찾기 어렵다.
사생의 힘을 느끼는 차원에서 감상하면 되겠다.
오상고절傲霜孤節
심사정, 종이에 옅은 채색, 27.4×38.4cm, 간송미술관.
영조 37년(1761년) 그의 나이 55세 때 그린 작품이라면 그가 최 전성기 시절 그렸다는 얘기다.
'현국화'라는 별칭에 어울리는 심사정 최고의 국화라 해도 별 무리가 없을 그림이다.
앞서 겸재가 사생풍의 국화를 그려냈다면, 현재는 국화에 자신의 감성을 유감없이 담아냈다.
과감한 구도와 흥건한 붓놀림에서 비롯된 필묵의 흥취는 현재의 트레이드 마크.
바위와 국화, 바랭이를 조화시킨 구성은 앞서 본 정선의 <석국도>와 일견 비슷하다.
이 세 가지 사물은 조형적으로 조화될 뿐만 아니라 의미에서도 잘 어울린다.
바위는 '변치 않음'을 나타내므로 절개의 상징인 국화와 짝을 이루기에 손색이 없다.
바랭이는 추워지면 금방 시들고 마는 잡초이므로 옆에서 국화의 가치를 빛내 주는 역할을 한다.
묵란화에 가시나무를 함께 그리는 것과 같은 이치다.
<오상고절>은
심사정의 태도와 삶을 들여다 볼때라야만 충분한 이해와 해석이 따르는 작품이다.
병국도甁菊圖
이인상, 종이에 먹, 28.6×15cm, 국립중앙박물관.
그 누가 병든 국화에 주목한단 말인가? 까닭을 화제에서 찾는다.
"南溪冬日偶寫病菊 寶山人 남계의 겨울날 우연히 병든 국화를 그렸다."
보산인은 능호관 이인상의 또 다른 호.
거의 사국死菊에 이른 지경인데 굳이 병국甁菊이라 고집함은
능호관의 성품과 일생을 관통하는 키워드인 셈.
만년의 자신 모습을 한탄하는 넋두리라기 보다는
처연함에 스민 고고한 기상을 읽어내게 하는 그림이라는 생각이다.
야국野菊
정조, 비단에 먹, 84.6×51.4cm, 동국대학교박물관.
모든 이의 임금이자 스승을 자처했던 군사軍師의 풍모가 이와 같지 않았을까?
제왕다운 기품과 권위, 문사다운 넉넉함과 여유가 동시에 느껴지는 정조의 걸작으로 평가 받는 <야국>.
정조는 학문과 예술 전 분야에 걸친 총체적으로 해박한 진정한 문예 군주였다.
학예일치의 예술론을 바탕으로 회화의 본질과 효용을 구체적으로 밝혔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조선 군왕들이 남긴 작품이 전해지는 경우는 극 소수이다.
그 중에서도 육필肉筆 로 남아있는 경우는 정조가 유일하다.
그의 그림으로 <파초>, <묵매>, <사군자팔곡병> 등이 있는데,
그 중 가장 빼어난 기량과 품격을 보이는 것이 바로 <야국>인 것.
영, 정조라는 문예 군주를 통해,
우리는 한 나라를 이끄는 이의 안목이 얼마나 소중하고 큰 것인지를 미루어 헤아리게 된다.
기국연령杞鞠延齡
안중식, 종이에 옅은 채색, 143.5×45.5cm, 삼성리움미술관.
구기자와 국화를 통해 장수를 기원한다는 내용이다.
이 그림의 주인공 심전 안중식은 당대 최고의 화가였지만 너무도 극심한 혼란으로 나라가 망해 가는 시기였다.
그의 그림도 시대의 흐름에서 비켜나지 못한 듯,
청빈함 보다는 불로장생의 원으로 채워져 있음이 아쉽다.
순죽筍竹
이정, 비단에 금니, 25.5×39.3cm, 간송미술관.
원나라 이후 금과옥조로 여겨지는 말인 즉, 대나무는 글씨 쓰는 방법이어야 좋은 그림이 된다. 라고 했다.
하지만 회화성도 무시할 순 없다. 서예와 회화의 적절한 조화가 사군자의 격조를 나누는 기준이 될 터.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모든 묵죽 화가 중 최고로 평가 받는 탄은 이정의 작품.
임란시, 왜적의 칼에 맞아 팔이 잘릴 고초를 겪어낸 강인한 의지로 그려낸 <순죽>이다.
이 작품은 당시부터 일세지보一世之寶로 평가 받을만큼 큰 화제를 모았던 작품이다.
정밀한 사생성은 마치 사진을 보는 느낌. 일 천 그루 대나무를 곁에 두고 관찰한 결과이리라.
죽준과 대나무의 성장 과정이 한 화면에 집약되어 있는 희대의 명작이다.
풍죽風竹
이정, 비단에 먹, 127.5×71.5cm, 간송미술관
조선 최고의 묵죽 화가로 평가되는 탄은 이정.
바위을 뚫고 솟아오른 대나무가 거센 바람에 댓잎 모두가 한 쪽으로 휩쓸렸다.
대나무의 탄력과 기개는 강인함과 올곧은 삶을 잘 표현하고 있다.
기존의 중국풍과는 확연히 구분지어지는 조선 묵죽화의 전형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정의 묵죽화 가운데 최고의 기량과 품격이 돋보이는 작품이라는 평.
풍죽風竹
이정, 비단에 먹, 148.8×69.8cm, 국립중앙박물관.
이정이 세상을 뜨기 1년 전인 72세 때의 작품으로 병고에 시달리던 때로, 인조의 보살핌에 감읍,
"개미 같은 목숨이 실과 같이 끊어지지 않으니, 땅 속으로 들어갈 기약이 아침인지 저녁인지 어찌 헤아리겠습니까."
라며 자신의 관직을 삭탈해 줄 것을 간청하는 상소를 올렸었다.
운신키도 어려운 와중에 이런 명작을 그려냈다는 사실에서 그의 완고한 절개가 잘 드러나 있음이다.
노죽老竹의 특징을 너무도 완벽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설죽雪竹
유덕장, 종이에 채색, 139.7×92cm, 간송미술관
수운 유덕장(柳德章, 1675~1756)은 일찍 벼슬을 포기하고 오로지 묵죽화 하나에만 매달린 인물.
이정이 그려낸 묵죽화의 영향력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이급, 이정의 외손자인 김세록 등이 이정을 계승한
인물인데 모두 다 이정 묵죽화의 진수를 구현치는 못했다.
유덕장 역시 필력에서 이정을 능가하기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다른 방향에서 자신의 개성을 살려 나간다.
강함 보다는 온아한 필치의 서정성으로 묵죽화를 그리기 시작한 것.
79세 만년작으로, 함박눈이 그친 뒤의 여유로운 서정을 윤택한 필치로 그려낸 것이다.
대나무 아래 한 포기 난을 포치한 구성이 인상적이다.
운근동죽雲根凍竹
심사정, 종이에 옅은 채색, 27.4×38.4, 간송미술관
신사년(1761) 겨울 묵죽으로 모진 겨울바람과 혹독한 추위에 시달린 듯 잎은 메마르고 갈라졌다.
전체 분위기에 냉랭함이 가득이다. 이것이 헌제 심사정의 개성이자 매력이 아닐 수 없다.
군자의 상징성 보다는 자신의 심경을 담아낸 것으로 봐야할 터.
명문가에서 태어났지만 조부의 파렴치한 부정과 역모로 평생을 숨죽여 살아야 했던 기구한 삶이
서정으로 포장된 처연한 필치로 그림에 녹아 있음을 알 수 있겠다.
난죽도蘭竹圖
강세황, 종이에 먹, 39.3×283.7cm, 국립중앙박물관.
자신의 자서전에 적길,
"나의 묵란과 묵죽은 티 없고 굳세지만 세상에 이를 깊이 알아주는 이 없고,
나 스스로도 잘하는 일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오직 이것으로 흥취를 담아내고 뜻에 맞으면 될 뿐이었다."
표암이 세상을 뜨기 1년 전에 그린 것으로 그의 사군자화 가운데 걸작으로 꼽힌다.
가로로 긴 화면은 수직의 대나무와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이 작품은 바위와 난은 짜임새있는 화면 포치로
확대된 공간감과 이중 시각을 적용하여 우아한 가운데 상쾌한 느낌마저 자아내게 한다.
이것이 곧 표암 강세황이 추구하고자 했던 문인화의 경지라고.
편연수죽便娟脩竹
신위, 종이에 먹, 17.2×22.3cm, 간송미술관.
시 · 서 · 화 삼절(三絶)로 불리우는 자하 신위(申緯, 1769~1845).
그는 14세 때 표암 강세황을 만났다. 표암의 나이는 70세로 이 영민한 수재를 열심히 가르쳤고,
자하 역시 표암의 학문가 예술을 열심으로 사사했다.
71세의 그림으로 시대적 분위기가 흠씬 풍기는그림이다.
물기 많은 먹으로 강가의 습윤한 대기를 머금은 대나무와 바위를 부드럽고 간결한 필치로 담아냈다.
먹의 번짐과 농담의 어울림은 가히 필묵의 유희가 아닐까?
안온함과 평담함을 추구하면서도 엄정함을 잃지 않았던 스승 표암의 묵죽화와는 뚜렷하게 갈린다.
난죽석도蘭竹石圖
임희지, 종이에 먹, 87×42.3cm, 고려대학교박물관.
중국어 역관이었던 수월헌 임희지(林熙之, 1765~?)의 호기롭고 자신만만한 그림이다.
조선 말엽 중인들이ㅡ 성장과 진경 문화의 화려함을 볼 수 있는 것으로 조선 후기 사군자 그림의 만월이자
만화방창한 결과로 볼 수 있겠다.
엎어질 듯 걸려 있는 바위 아래위로 대나무와 난을 그린 것으로 거친 필치와 자유분방함이 압도적이다.
농담과 파묵과 필묵의 현란한 붓놀림이 예사롭지 않다. 분방한 필치는 심사정과 통하지만
그보다 훨씬 파격적이라는 중론.
묵죽墨竹
조희룡, 종이에 먹, 127×44.8cm, 국립중앙박물관.
서너 살 차이의 스승 추사가 우봉의 그림엔 문자향이 결여되었노라 개탄했노라지만
이내 시각에 비치는 우봉의 서권기는 대단함 그 자체라는 생각이다.
그의 생각과 취향을 야멸차게 나무란 추사의 언변엔 결코 동의할 수 없다는 말씀.
<묵죽>은 그의 유배지 임자도 대숲의 드세고 강한 생명력을 세련된 필치로 나타냈다.
"옛날 법에도 없고, 내 수법에도 없다. 습기(習氣)를 완전히 벗어나는 데 있다."
그림의 여백엔 묵죽을 잘 치는 방법론을 제시한다.
"내가 평소에 대다무를 그린 것은 매화나 난초 그림의 열에 하나를 차지할 뿐이었다.
그저 머리로만 그리던 그림과는 달랐다. 비록 원치 않은 유배 생활이었지만
누구도 경험치 못한 것을 보고, 느끼고 화폭에 담아냈다는 자부심도 생겼다."
도봉산 아래에서 태어나 평생을 서울에서 살았던 우봉에게 신안의 외딴 섬 임자도의 대나무 숲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고, 화첩 속 그림과 전혀 다른 감흥이고 자극이었을 터이다.
그의 묵죽화가 조선 미술사의 흐름에서 중요한 변곡점이자 또 다른 경계를 실증하고 있음은 누구도 부인 못한다.
풍우죽風雨竹
민영익, 종이에 먹, 135×57, 간송미술관.
왼편 상단에 청나라 화가 포화가 지은 제시가 보인다.
"대나무의 정신을 능숙하게 그려 내니, 들의 물가에 비바람 소리 많기도 하다.
필치가 때에 따라 미친 듯 움직여 막힘이 없어야 군자가 지닌 성정의 참됨을 펼쳐 낼 수 있으리라."
운미 민영익은 구한말의 격동기 한복판의 문인지자 정치가, 예술가이다.
명성황후의 친정 조카로 갑신정변 때는 죽음의 문턱까지 갔었다가 홍콩과 상해 등지를 전전하다 생을 마감했다.
'난 걸인(蘭乞人)이라는 별칭까지 얻었던 '운미란'이라 불렸던 그의 묵란화는 이런 관심과 노력의 산물.
화면 중간에 바위를 포치하고 그 주변에 대나무를 그려 넣은 죽석화 형식으로 갈필과 윤필, 담북과 농묵의
적절한 섞음에다 입체감과 질량감을 살린 작품이다. 댓잎은 한결같이 아래를 향해 쏟아져 내린다.
군자의 기백은 살아 있지만 모진 세파에 시달리는 모습을 통해 망명객으로 살아야 하는 회한을 표출하고 있다.
을사년(1905년) 봄에 그린 것으로 이 해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물리적 시기에서 조선 말기 묵죽화의 범주에 편입시킬 수 있지만,
그 양식적 특징과 경향성은 오히려 근대 묵죽화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민영익은 조선시대 최후의 묵죽화가이자 근대 묵죽화의 선구자로 평가 되어야 마땅 할 것이다.
참고 서적 : 백인산 저, "선비의 향기 그림으로 만나다" 중 '사군자화' 부분.
Streets Of Laredo - Phil Coul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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