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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포럼·강좌·워크숍

장성 고산서원(高山書院) 추향제

2015. 10. 28

 

 산앙문(山仰門)

(전남 장성군 진원면 소재)

 

 

노사 기정진을 중심으로 이최선·기우만·조의곤·김록휴·조성가·정재규 등의 위패를 모신 서원이다.

기정진(1798∼1879)은 조선 후기 성리학의 대가이다. 순조 31년(1831) 과거에 급제한 후 많은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이곳에서 학문 연구와 후학양성에 힘썼다. 이 서원은 기정진이 조선 고종 15년(1878)에 담대헌이라고

이름짓고 학문을 가르치던 곳이다. 1924년에 후손들이 다시 지었으며, 1927년 ‘고산서원’ 이라고 쓴 현판을 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에는 사당인 고산사를 비롯하여 강당, 동재인 거경재, 서재인 집의재, 내삼문, 외삼문과

장판각 등의 건물이 있다. 장판각에는 기정진의 문집과 목판을 보관하고 있다.

 

 

 

정면에 강당이 자리하고 있고, 좌우론 유생들의 기숙사 건물인 동재와 서재가 자리하고 있다.

 그 뒤편으로 기정진 선생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 '고산사'가 자리한다.

 

 

 

蘆沙기정진(奇正鎭)

 

이학(理學) 6대가의 한 사람이며, 위정척사파의 정신적 지주였다.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대중(大中), 호는 노사(蘆沙). 증참판 재우(在祐)의 아들이다.

7세에 이미 맷돌을 보고 시를 지었고, 9세에 경사(經史)에 통했다. 1831년(순조 31)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강릉(康陵)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봉직하지 않았다. 이후 40세 때도 사옹원주부에 임명되었으나

6일 만에 사직했다. 그뒤에도 평안도도사·무장현감·사헌부장령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1862년(철종 13) 삼남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나자 철종은 3정(三政)의 개선책을 듣기 위해 언책(言策)을 모집했다.

이때 〈임술의책 壬戌擬策〉을 작성하여 사대부 풍속의 폐단, 조정의 공경(公卿)·방백·수령·이속의 탐오함,

과거·사관(仕官)의 폐단, 부호들의 토지겸병의 폐단 등을 지적했다. 그리고 군포의 혁파, 환곡의 면제,

민전 제한 등을 그 개선책으로 제기했으나 제출하지는 않았다.

1866년(고종 4)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육조소 六條疏〉라 불리는 첫번째 〈병인소 丙寅疏〉를 올려

외적을 방비하는 대책을 건의했다. 그해 7월 동부승지·호조참의, 10월에는 동지돈녕부사·호조참판·

공조참판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했다. 이때 국가적 폐습을 비판하고 사대부에게 삼무사(三無私)를

권장하는 2번째〈병인소〉를 올렸다. 1877년 장성 월송(月松:지금의 고산리)으로 거처를 옮겨

 담대헌(澹對軒)에서 문인들과 지내다 세상을 떠났다.

 

 

 

 '노사집'을 비롯한 문집과 목판을 보관하고 있는 장서각

 

 


 

노사 기정진이 평생을 연구했던 성리학적 세계관.

 '이(理)'와 '기(氣)'에 대해서 본연의 '성(理)'과 기'(氣)'를 구분하는 것에 반대하고

양자를 합하여 '이일분수(理一分殊)'의 관계로 이해하여 '이(理)'의 분수인 '기(氣)'의 성 속에서

본연의 성을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곧 모든 사물의 개별적인 '이(理)'는 보편적인 하나의 '이(理)'와

 동일함을 의미한다. 이는 이황과 이이 이래로 계속하여 '이(理)'와 '기(氣)'를 구분해온 조선 성리학의

관념에서 벗어난 독창적인 학설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그의 학문은 스승으로부터 전수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 성리학의 저술을 녹여낸 후 자신의 독자적인 궁리와 사색을 통해 완성되었다는 사실. 

 

 

 

노사집 목판

 

 

 

 위패를 모신 '고산사'

 

 

 

 

 

 

 

 

 

 

 

 

일 년에 꽃을 두 번 피우는 '유성류나무'

마당 끝 양편으로 각각 한 그루씩 심어놓았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정조 22)1879(고종 16). 조선 후기의 학자.

전라북도 순창 출신. 본관은 행주(幸州). 초명은 금사(金賜), 자는 대중(大中), 호는 노사(蘆沙). 판중추부사건()의 후손이고, 아버지는 재우(在祐)이며, 어머니는 안동 권씨로 덕언(德彦)의 딸이다.

성리학에 대한 독자적인 궁리와 사색을 통하여 이일분수(理一分殊) 이론에 의한 독창적인 이()의 철학을 수립하였다.

 

1815(순조 15) 양친을 여의고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장성 하남(河南)으로 이사하였다.

1828년 향시에 응시하고, 1831년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이후 명성이 조정에 알려져 1832년강릉참봉(康陵參奉)이 주어졌고,

1835(현종 1)에는 다시 현릉참봉(顯陵參奉)이 주어졌으며,

 1837년에는 유일(遺逸: 학식과 덕망이 높아 과거를 거치지 않고 높은 관직에 임명될 수 있는 학자)로 천거되어 사옹원주부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의를 표하였다.

1842년 전설사별제(典設司別提)로 임명되었으나 취임 6일 만에 병을 핑계 삼아 사임하고 귀향하였다.

얼마 뒤 평안도도사, 1857년 무장현감, 1861년 사헌부 장령,

1864년 사헌부 집의 등에 임명되었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1862(철종 13) 임술민란이 일어나자, 「임술의책(壬戌擬策)」을 써서 삼정(三政)의 폐단을 지적하고 이를 바로잡을 방책을 제시하려 하였으나, 소장의 말미에 이름을 쓰고 과거시험의 답안지처럼 봉하라는 조정의 지시로 인해 상소할 것을 포기하였다.

1866(고종 3)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서양세력의 침략을 염려하여

그 해 7월 「육조소(六條疏)」라 불리는 첫 번째 「병인소(丙寅疏)」를 올렸다.

그 내용은 외침에 대한 방비책으로 여섯 가지를 제시하고,

민족 주체성의 확립을 주장한 것으로 당시의 쇄국정책과 보조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후에 나타나는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사상은 이 소장에 이론적 기초를 두고 있다.

이 소장이 고종에게 받아들여지고, 조정에서 그의 식견이 높이 평가되어

그 해 6월 사헌부 집의, 7월에는 동부승지, 8월에는 호조 참의,

10월에는 가선대부의 품계와 함께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그는 동지돈녕부사에 임명되자 이를 사양하는 두 번째 「병인소」를 올렸다.

여기에서는 당시의 국가적 폐습을 준엄하게 비판하고, 지도층인 사대부에게 청렴 결백한 기풍이 없음을 우려해 삼무사(三無私: 공자가 사심이 없는 세 가지에 대해 말한 것으로 하늘, , 해와 달처럼 사심 없이 천하를 위해 봉사하는 일. 곧 지극히 공평한 것을 지칭함)를 권장하도록 강조하였다.

이어서 공조참판·경연특진관(經筵特進官)에 위촉되었으나 사양하였고,

1877년 우로전(優老典: 나이 많은 사람에게 대우하여 내리는 벼슬)으로 가의대부(嘉義大夫)가 주어졌다.

그 해에 장성 하리 월송( 月松: 지금의 진원면 고산리)으로 이사하였으며,

이듬해 그곳에 담대헌(澹對軒)이라는 정사를 짓고 많은 문인과 함께 거처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학문은 스승으로부터 직접 전수받거나 어느 학파에 연원을 둔 것이 아니라,

송대의 학자 주돈이(周敦頤)·장재(張載)·정호(程顥)·정이(程頤)·주희(朱熹) 등의

 성리학에 대한 독자적인 궁리와 사색에 의해 완성되었다.

이를 통해 이황(李滉)·이이(李珥) 이후 약 300년간 계속된 주리(主理)·주기(主氣)의 논쟁을 극복하고,

이일분수(理一分殊)의 이론에 의한 독창적인 이()의 철학체계를 수립하였다.

그의 철학사상은 우주의 구성에서부터 인간의 본질에 대한 해명,

사단칠정과 인심도심(人心道心) 등 심성의 문제,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의 문제,

선악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이일분수(理一分殊)라는 이체이용(理體理用)의 논리로 일관되어 있다.

그리하여 그는 우주현상을 이와 기로 설명하던 이기이원관(理氣二元觀)을 극복하고,

인간심성 내지 도덕의 문제를 가치상 우위에 있는 이의 작용으로 해명하고자 했다.

또한 인물성동이의 문제 역시 이의 완전·불완전으로 설명하여

종래의 주리 또는 주기의 심성론과 인물성동이론을 종합하였다.

그는 저술은 많지 않지만 성리학사상 중요한 저술들을 남겼다.

『태극도설(太極圖說)』에 나오는 ‘정()’자에 대한 해설인 「정자설(定字說),

사단칠정(四端七情)을 논한 『우기(偶記)(1845),

이기(理氣) 및 이이의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에 대해 평론한 「이통설(理通說)(1852),

그의 철학에서 핵심이 되는 「납량사의(納凉私議)(1874, 초고는 1843년에 작성)와 「외필(猥筆)(1878) 등이 대표적인 저술이다.

그의 철학사상은 제자들과의 문답을 기록한 『답문유편(答問類編)』에도 잘 드러나 있다.

그의 학문과 사상은 손자인 우만(宇萬)과 김녹휴(金錄休)·조성가(趙性家)·정재규(鄭載圭)·이희석(李僖錫)·이최선(李最善)·기삼연(奇參衍) 등의 제자에게 전수되었으며, 많은 학자들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저서로는 1882년 『노사집』, 1890년 『답문유편』이 편집되어, 담대헌에서 활자본으로 간행되었고,

1902년 경상남도 단성(지금의 합천군 쌍백면 묵리) 신안정사(新安精舍)에서 목판본으로 간행되었으며,

1976년 서울에서 영인본으로 출간되었다.

 

1892년 조성가가 행장을, 1901년에는 최익현(崔益鉉)이 신도비문을,

1906년에는 정재규가 묘갈명을 지었다.

1927년 고산서원(高山書院)이 건립되어 그 사우에 조성가 등 문인 6인과 함께 봉안되었고,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낸다.

 

 

 

위성류나무(좌)와 나란히 선 노사梅

 

 

 

 

 

 

 

 

 

 

 

 

 

 

 

 

 

 

 

 

 

 

 

 

담대헌澹對軒

 

 

 

 

 

 

 

 

 

 

 

 

 

 

 

임술의책 壬戌擬策

(노사선생이 65세에 지은 삼정의 폐단을 바로 잡고자하는 책문)

 

철종 13년 임술  노사선생 65세 되던 2월에  다시 하사의 옛집으로 돌아 왔다.

삼정에 대한 책문을 지어   올리려다 못하였다. 이해에 삼남지방에 백성들의 소요가 있었는데 

상께서 대책을 구언하였기에  전정 군정 환곡의 삼정으로 써 책문하여  선생께서 개연히 봉사를 초하여

선왕의 도에 합당한 대책을 말하였지만 제출형식을  과거 답안지처럼요구하여 태워버리라고 명하였으나

아들 만연이 사사로이  간직하였다.

 (노사선생문집 3권)

 

철종十三年壬戌 先生六十五歲。二月。還下沙舊居。

對三政策。將上未果。

是歲三南 有民擾。自上有求言策。問以田軍糴三政。先生慨然草封事。以士大夫習俗之壞。爲當今壞證急候。而次及三政之弊。矯捄之方。設施之策。不規規於旣往之迹。而能合乎先王之道。先生經濟之蘊。此槩可見。將上。聞有書名封尾命下。先生曰。此試券例也。遂命焚藳。子晩衍私藏之. 擬策見文集三卷。

 

임술의책

臣對。臣伏以我主上殿下。膺受寶命。光御不基。臨政願治。十三秊于玆。日昃之勞愈勤。底寧之效尙稽。犬馬之戀。倚斗瞻天。憂愛彷徨。未達其由。乃者不意三南民變。極其駭悖。匹夫狂叫。不謀而應者。輒數千萬人。臣竊伏惟念四民分業。農民最良。民惟邦本。正在農民。今農民動搖若此。國家根本蹷矣。漆室之憂。於斯爲深。况任國家安危之大臣重臣乎。况守千年宗祧之我殿下乎。政不節歟。民失職歟。田軍糴三大政。意者有積弊歟。惻然慈念。思有以矯捄之者。乃天地好生之德也。聖策下詢。八域聳動。此宗社生靈之福也。雖然臣之狂愚。於矯捄一事。反有所憂惶悶迫而不能定情者。何者。今日生靈之所以不保朝夕。國勢之所以阽於危蹙。皆三政積弊使之然。而他無壞證急候耶。其實壞證急候別有所在。而三政之弊不與焉。臣螻蟻微命。㥘於疎賤。知而不敢言猶可也。若言而不以實。則是仰欺天日。臣則有罪。近日士大夫習俗大壞。利欲之橫流。如洪水之懷襄。典郡國者。以一境爲雞豚之圈。任方岳者。以一路爲漁獵之塲。京司經納。無難犯越。庶民破產。何憚不爲。去秊之田業。今秊碎矣。昨日之杼柚。今日空矣。貧富齊沸。山海俱竭。生離死別。子鬻身經。靡事不有。無處不然。百姓效尤成風。起相攘奪。蓋昔時之所謂貪殘者。猶憑藉田軍糴而孔穴之。尙可諉以刀筆餘技貪墨常情。民雖被害。不害爲盛世事。今之貪殘也。乃無名色而公行掠奪。其所以異於外國寇亂者。僅不掠及子女耳。世不能有治而無亂。國不能有安而無危。治亂安危者。公言之則固亦有國之常事。雖謂不必深怪可也。而天不變。彝性亦不變。故雖衰亂之世。大抵淸濁相間。理欲相參。今也廉謹掃地。饕餮滔天。可謂星月晦盲。天地否塞。求之往牒。實所未覩。抑民生塗炭。每由時君失道。或峻宇雕墻。靡金餙玉。或征伐四夷。轉輸負海。民力始屈者有之。我聖朝五百秊如傷之仁。達于四方。式至于今。日休上德。軼於高厚。而下窘急於水火。眞可謂痛哭流涕。繼之以血者矣。孔子曰。自古皆有死。民無信不立。蓋事固有重於死者。三政之弊不矯。死則死耳。人理尙在也。由今之世。無變今之習俗。人理泯絶矣。人理泯絶。而民可以爲民。國可以爲國者。殿下聞之乎。然則今日之壞證急候。在此而不在彼决矣。殿下不此之憂。而三政之矯捄是急。意者九門深嚴。習俗之壞。未盡上達而然歟。天下之患。莫大於國人皆知而人君不知。此臣之所爲讀聖策而憂惶悶迫者也。由今之世。無變今之習俗。殿下雖盡免田租。快蠲軍布。都罷糶糴。公惠纔施。私奪轉急。無補於黔首之死亡。况東破西補。支傾塞漏。則奸猾之玲瓏穿穴。必將倍蓰於前日。以何明而察之。以何法而禁之。臣嘗驗之於耳目矣。憂卹之旨。不下於朝。則民猶得以相忘江湖。一夕安寢。纔有小小移動。則傀儡四集。畢竟利歸於官吏。害中於蒼生。故救卹之朝令。奸猾喜之。良民苦之。前事之不忘。後事之鑑也。故臣之愚妄。竊恐三政矯捄令出之日。卽生民命盡之秋也。然則三政竟不可矯捄耶。曰曷爲其然也。先正其習俗而以次及之耳。殿下君臨堂堂萬乘之國。爲萬姓百神之主。天命天討。在掌握中。轉移鼓動。特顧眄間事耳。於是益懋精一之學以自治。益求直諒之臣以自輔。惟公惟一。可以動人。天下雖有倉卒之變。發於意慮之外。以吾之公與一。可以應之而有裕。彼三政者。乃日用茶飯事。可因而因。可革而革。何不可之有。傳曰正其本。萬事理。此之謂也。臣質駑識闇。最在人下。上誤三朝分外之恩造。糜粉無階。室藁竢譴。此日以此自縮。無一言獻愚。則是恝然於國家之急。臣子之分安在。臣謹昧死上愚對。臣伏讀聖策自有國之大政。止豈非經國理民之大柄歟。臣有以知殿下深知民將盡劉。國旣阽危。而反以求之於三政之間也。臣莊誦百拜。隕越于下。臣輒有素蓄。不敢不以聞于殿下。經曰德惟善政。政在養民。若是則政之爲義可知也。政而失養民之義。政乎哉。今以三大政言之。則田賦者君子野人之所以通工易事。相生相養。養民之中。斯爲本領。軍籍者所以講武事備不虞。亦養民也。國儲者所以禦凶荒備賑卹。亦養民也。惜乎開國之初。上有堯舜之君。而下不得伊臯之臣。設施經紀之際。未免有貽後人不决之疑者。軍籍還糓二事是也。蓋有軍則必有籍。軍之有籍。夫誰曰不可。而不幸收布之例一立。則是籍也乃一部平準書。非軍籍也。况我國俗尙門地。一入軍籍則不齒土族。今也旣欲其軍。兼責其財。尺籍之虛。固其勢也。兵部之籍。雖有原總。營邑雜色。額外加增。昨闕未塡。新簽又滋。魚鱗襞積。莫可爬櫛。黃壤抱寃。赤子祝死。備不虞之意安在。此軍籍失養民之義者也。還糓雖本是憂卹之意。其出納改色。不遵漢氏之常平。乃踵宋人之靑苗。靑苗之爲民害。宋人言之詳矣。其言鑿鑿如親見今日東方還糓之弊者。蓋吏者至狡至黠。又挾城社之勢。民者至愚至弱。又無蚍蜉之援。使吏與民。逐秊逐月。交手取與於錢糓之間。文簿之變幻。孰能辨之。斗量之減縮。孰能詰之。實糓之化爲糠粃。孰能責之。譬如使兒犬與饑狼。共一俎之肉。兒犬之口。豈有肉乎。其始也。則侵蝕盜竊者吏胥而已。士大夫之爲守令監司者。見其爲利竇。從而染指焉。奇逕別歧。神奸鬼秘。言不能盡。指不勝屈。先朝臣丁鏞牧民書中槩言之。殿下試取以備淸燕一日之覽。則其爲瘡痏於民。蟊賊於國者。可得其實際矣。今之時距丁鏞之時。又加遠矣。巡營移粟。山澤爲之翻倒。河東之民一石出錢三百零。而河內之民一石所受。纔六七葉。吏逋之至累萬。倉糓之無一粒。半從此中生。毒不民歸而將焉往。以此經國則如逆水行船。以此毒民則如順風放舟。臣所居之邑。卽長城也。長城之糓簿虛實。有府使在。臣不敢知。以所聞列邑言之。其尙有殘糓處。皆糓簿輕歇之地。自數萬大簿。以至十萬以上。大抵紙上虛簿。簿虛耗實。毒民而已。備凶荒之意安在。此國儲失養民之義者也。作法於涼。其弊猶貪。况此二大政立法之初。外廷之議。已失遠慮。無怪其下梢之墊溺也。聖策中與田賦並列。槩之以爲經國理民之大柄。臣不敢唯唯以爲信然也。臣伏讀聖策自唐虞三代。止亦有古制之可援歟。臣又有以知殿下將試矯捄之策。而先泝沿革之宜也。臣莊誦百拜。隕越于下。臣聞見寡陋。其於典故年代。未能通念記憶。臨時搜獵故實。以塞聖問。如入場擧子之爲。則非臣之所欲也。若其得失二字。殿下旣問之。敢無一辭以對乎。田賦之制。在我朝制度中。最爲纖密。此大聖人活規神筭所及。田量年分之法。實與三代貢助徹。殊塗同歸。但其患在於太纖太密。或將宜於古而不宜於今。以筭術折量。而六等之田尺廢。以舊帳考結。而二十之新量停。以原總納稅。而秊分之舊規弛者。或非民瘼之所大段關係耶。若乃實結歸於隱沒。白地不免徵稅。浸以成弊者。非量田久停之罪。乃吏胥之奸。守令容之而然也。容奸出於騗利。騗利由於習俗。不矯習俗而欲禁其奸欺。則臣恐其愈量而愈棼也。雖然量田今過百秊。山澤易形。隱沒多端。此而不改量。則可謂仁政自經界始乎。臣之以舊法謂患在纖密者。非以爲今日不當改量也。五衛之設。本是藏兵於農之義。自古論兵制者。莫不以唐之府兵爲善。五衛豈非府兵乎。然府兵之法。在唐亦不能久行。而彍騎出矣。壬亂後懲五衛之不得力。漸設三營。不能善用府兵之致。非府兵法制有未善而然也。雖然以今日事勢言之。三營可行而五衛不可行。何者。立府置衛。分番迭休。將歸於朝兵散於府者。必民有餘力。入兵籍者。皆有所倚賴。敎練有素而後始可議也。今兵籍中人。皆生涯懸罄。人立鵠面。手不知弓矢。目不知旗鼓。雖欲使之分番入衛。不可得也。京營兵收布。固始於放番之日。而各色軍收布。已自簽軍之初。臣聞養兵以禦侮矣。未聞爲收布而簽軍也。此蓋中廟朝建請之臣。取便於一時國計。而不思軍之不可以收布也。我國武備不競。遠不逮三韓。壬丙之變。社稷幾墟者。實由於此。國之有軍旅之事。五帝三王之所不免也。漢唐盛時之所不免也。假令今日外夷有覬覦者。則禦侮折衝。京營兵可獨辦乎。必將藉手於坊曲之兵。夫欲使彼以血肉扞鋒鏑。性命易賊首。而先使納布以饑寒之者人情乎。名不正則言不順。臣期期知其不可。還糓之取耗補用。始見於續大典。此是一時權宜之政。聖策中不得已三字。本領已正。臣不敢疊有論陳。但有所可言者。糓之有雀鼠耗者。本所以防斗斛之縮。一變而雀鼠耗爲原糓。再變而糓耗爲作錢。則是許其減縮也。減縮之門一開。勢將何所不至乎。嗚呼。孰謂日月之明。亦有所漏照耶。摠此三政而言之。田之有賦。天之經地之義。寓歲計於軍兵。還糓雖國制所行。而實非萬世可行之經法。此臣所以爲國家恨也。嗚呼。國朝三政。雖有可議。列聖三宗。固嘗用之。民無捐瘠。國無艱危。昔日泰山之安。今成累棊之危。是必有所以然矣。故臣之愚妄。斷然以爲習俗之矯可先。而三政之矯可後也。臣伏讀聖策自國初三政。止蠲之固快。又將何取而給其代歟。臣有以知殿下方將釐正蕩滌。又慮及於國計之甁罄也。臣莊誦百拜。隕越于下。臣聞天能生此民。而不能治而敎之。付之人君。蓋民如嬰兒。君如乳母。嬰兒失乳。但能啼哭。不能引乳自哺。必乳母察其飢飽而乳養之然後。可保其生也。今秊三南之變。雖農民無知妄作。自陷罪辟。然其實則失乳而啼哭也。殿下旣聞其啼哭而知嬰兒之危急。救之當如救焚拯溺。小緩則不及矣。然則臣之所謂三政之矯捄可後者。豈眞以爲可後哉。痛人心之陷溺若此。懼救民之翻成厲民也。然則三政之矯。如之何其可也。田結改量。其難不在於改量。而在於守宰之得人。一邑之守宰得人。則不借人於他邑。不討財於越境。而一邑之田可量矣。四境之守宰皆得。則不借人於異代。不索財於前世。而四境之田可量矣。患在爲人擇官。私情用事。則一物不可運。一步不可行。豈徒量田哉。若量田使則只用本道都事足矣。在其人之曉事能幹。悉心民國而已。豈繫官之崇卑哉。聖策中人與財之憂。臣實迷闇。未達人者果指何人。而財者果指何財也。軍糴二事。眞是大承氣證。非四君子湯之所可醫。非臣淺慮可妄論也。蓋論軍弊者必曰搜括。而搜括之擧。例不免縱魚漏網。故朝塡而暮闕。所得者騷動而已。語糴弊者或主蠲紓。而蠲紓之典。只歸於敎猱升木。故吏歌而民咷。所失者糓簿而已。以此救民之急。乃縱酒解酲。助薪救火。嚴法所不能禁。上仁所不能化。故軍布之收如前。則尺籍不可得正。還上之法依舊。則民弊無由可息矣。必欲言之。則其惟罷軍布而不收。轉還糓爲常平乎。軍布旣罷。又有以優假之。則實兵自此可得。實籍自此可立。陰雨自此可備矣。還上變爲常平。則其出納盈縮。專責官吏。而百姓無所與焉。蔀屋自此回春矣。聖策中蠲之固快四字。固已微發其端。而徒蠲減而不蕩滌。但變其一而不變其二。則臣以爲民之不保如昨也。臣爲此除軍布立常平之說。凡食祿於殿下之廷者。以及內外各衙門胥吏。其平心者必以臣爲狂子。其峻文者必以臣爲亂臣。一辭以爲國計從何出乎。臣竊以爲誤矣。有若。聖人之門。似聖人者也。其言曰百姓足。君孰與不足。豈有若爲此迂濶人言耶。百姓與君。外若疎遠。而其實則手足腹心。一體相聯。百姓足而國訃不足。臣未之聞也。我國幅員雖小。長短絶補。過於千里。人戶將數百萬。卽古所謂地方千里。出兵車萬乘者也。豈有萬乘之國而患貧者乎。願殿下斷自聖心。行之勿疑。扶桑數千里。鼓舞洋溢。宗社億萬年無疆之休。湊集於冥冥之中。周雖舊邦。其命維新。此之謂也。世必有非常之事而後。有非常之功。豈不盛哉。豈不休哉。國計之說。臣請畢言之。元古之世。人文未盛。國用甚約。故一取諸田賦而足。世降文繁。用度浸廣。又有軍旅之事凶荒之憂。田賦固有不能贍者。故採山煑海。榷酒榷茶。賣級免罪。均輸平準。筭車筭舟。稅架除陌。經制總制。白圭握筭。硏桑發策。以收權宜。一切之效者。不可勝數。利旣歸國。害潛及民。非堯舜之道。不敢以陳於王前。非臣之所宜獻於殿下也。臣聞之。唐之租庸調。在後世賦民。最爲詳審。伏願殿下命大臣重臣。討論而潤色之。擧而行之。此法之行。東國之名兩班者必多異說。然而此有片言可折者。定鼎之初。幾歲幾年。計戶收布。迺家先祖父固嘗供之。彼獨何人哉。唐之戶調。未聞士族獨免。不可許也。或有難臣者曰。詩云不愆不忘。率由舊章。舊章可輕改耶。臣答曰。舊章之不當輕改。人孰不知。先賢獨不曰宜於百姓者。百世不可改。害於百姓者。雖三年可改乎。蓋先王以宗社付後嗣王。後嗣王惟當以保全宗社爲孝。豈在於遵守變革之間乎。難者又曰。除軍布立常平。本以惠民。今又創租庸調之新法。則惠民之意安在。答曰。其說甚長。不得不畧言之。天之生物。常均停。天下之財。本足以濟天下之用。但爲人上者政令有得失。使有用歸於無用則貧。使無用歸於有用則足。國之安危。民之苦樂。惟此二塗。我國之財。十之八九。皆歸於無用。言其最大者。則田者生民之根蔕。古聖王之所畫井而制產者也。古今殊宜。井田雖不可復。獨不可爲之限節乎。是以自董仲舒師丹建言之後。歷代皆畧有限節。雖麗朝亦然。而我朝全無限制。一任豪勢之兼並。自都下名貴大賈。以至鄕曲豪擧。占田無有限極。所謂地有盡而秦之求無已。於是國收十一之稅。而私門取太半之賦。農民一年勤苦。收穫之日。甕罌已空矣。彼兼並之家。囷廩富於國儲。究亦何用哉。不過敎子孫淫侈。自速罪罟。輦載而入城闉鑽貴要。以壞亂國綱耳。此有用歸於無用之一事也。軍布糶糴。爲民大穽。贓吏猾胥。以此籠絡而駔儈之。利之入於國家經用者有筭。而膏血之入於贓猾囊橐者無竆。其究也亦不過以此金錢。自速罪罟。壞亂國綱。此有用歸於無用之二事也。書院之儒。爲今日巨患。絃誦道旣喪。酒肉風又痼。鮮衣怒馬恣行漁奪。絡繹馳逐於閭里。廣開尾閭之壑。此有用歸於無用之三事也。侈靡之風。自京洛起。四方化之。竊聞漢城內外。飛亭傑構。架雲耀日。一開宴席。油蜜之臭滿城。民財只有此數。東溢則西虛。如月之盈縮。潮之進退。天地亦不能以兩盈。况於民財乎。設使外國人來覘。則觀於此而豈不知四方之民困乎。此有用歸於無用之四事也。科擧必先有鄕擧里選而後試之可也。而我國科擧。傭人樵夫。奴隷盜賊。駿奔入塲。一人入塲之費。少不下千錢。萬人入場。則爲千錢者一萬矣。二萬三萬。以至十萬。則其率如之。非但虛費民財。國家選此人。將安用之。此有用歸於無用之五事也。其目猥多而五事最大。主上旣於軍糴二事。行廣蕩之德。出民於水火之中。其餘四事。亦痛革之。持之不撓。則害馬者去矣。若是而民豈有不足乎。民苟足矣。則歲出若干絹。或若干錢。著爲常經。以佐軍國之急。民豈有㤪之者乎。此轉無用爲有用也。非聚斂之比也。然則田賦亦可加斂乎。曰不可。我國田稅。其初甚薄。殆近三十而稅一。其後大同與矣。官需雜需興矣。今則殆重於十一。又加斂焉則病農。農病則國病。不可不察也。大抵國之於民。行政當明白洞達。以大義驅之。最不可以私恩小數。苟悅其心。而陰奪其利。終必橫潰。莫可收拾。可不愼歟。臣抑有一說。行政自身始。故曰以身敎者從。以言敎者訟。人君亦必先正其身而後。百司庶僚六軍萬民。可得以心服也。臣草澤窾啓。宮掖朝廷之事。臣固有未能詳者。然冗官冗費。以及宦侍內人之額數可裁減者必多。又聞各宮折受限節不立。或致大農減縮。殿下苟有大有爲之志。必先正此等事而後。可正百官。可正萬民。伏願殿下察焉。人君以一國爲家。以道德爲麗。以仁義爲富。此等裁損。皆足以增光聖德。臣不勝惓惓焉。芹曝之念雖切。鼯鼠之技已竆。惟殿下生死之。臣伏讀聖策自予以寡德。止其各無隱悉陳于策。予將親覽焉。臣有以見殿下以民國相須之義。深喩之於臣庶。而又開之以盡言之路也。臣莊誦百拜。隕越于下。嗚呼。今日民情國勢。眞危急矣。如臣蟣蝨賤微。雖不足爲有無。亦不自知大命迫在何日。其悶渴之狀。殿下何以盡知乎。臣何以盡言乎。蓋嘗千回思量。萬般忖度。士習之壞。元氣內陷。不顧元氣之如何。惟病之務祛。則非徒病不可祛。或將變爲別證。頃刻危禍。故以今日習俗。欲先行矯弊之政。廷臣之計過也。臣僅得一說。曰先矯習俗。旣獻之殿下矣。然此事極易而極難。在殿下之心與殿下之朝廷。所謂極易也。自一念之微。以至一人用舍一時嚬笑。無不本天理協公論而後。可以挽迴旣倒之風俗。所謂極難也。朝廷之事。用人最大。用人以私。而望其人之盡忠奉公。譬如使盜守藏而望其不偸。人必笑之。今之用人。臣遐外聾瞽。安能知朝廷之事。然而四方者朝廷之影子。四方不得其寧。則朝廷用人。蓋有不由其道者矣。最有一事可證。宋之劉安世。司馬光之門人也。司馬入相之後。安世未嘗通書。張師德再及宰相之門。則仕路爲之沉滯。蓋禮義廉耻。人之四維。士不可不以此自待。朝廷亦不可不以此待士。風俗安得不美乎。今之奔競於勢要之路。喪四維而不顧者。其心欲何爲哉。不過欲借勢而病民。藉力而蠧國。款誠之效於我者僅毫芒。而民㤪鬼嗔之由彼而及於我者。大者如山。小者如屋矣。殘盃冷炙。猶不當爲彼設。况可以顔面之私。屈吾君之天命天討乎。此理昭然。不待智者而知。然而科擧之榜目未出。逆知非杜門之拙客。官爵之邸報未頒。預料必入幕之密人。朝廷何以得此聲於四方哉。人情趨利。如水走下。苟利之所在。驪龍之頷可摘。鍾乳之窟可入。不以至公鎭遏之。粘天慾浪。無由可息。今日事不在多言。使柄臣勤身求士。而勿使士倒求柄臣。則天下事始可爲也。臣蓬蓽賤士。桑楡短景。其於當朝公卿。非有毫髮私怒。特以同舟遇風。叫號不得不急。其情誠可悲也。干犯天威。罪在不赦。臣昧死謹對。

 

 

 

장성 진원리 오층석탑(長城 珍原里 五層石塔)

 

진원리 뒷산 탑동이라는 곳에 있던 탑으로, 일제시대 때 일본인들이 불법으로 몰래 빼내가려던 것을

주민들의 반대로 옮기지 못해 현재의 터에 자리잡게 되었다.1층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이며,

4층 이상은 잃어버리고 없다. 기단과 탑신의 몸돌에는 기둥 모양을 새겨 두었다. 지붕돌은 낙수면이 급경사를 이루고,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가 네 귀퉁이에서 치켜올라갔으며, 밑면에는 3단의 받침을 두었다.

탑을 옮겨 세우면서 각 부재가 제대로 짜 맞춰지지 않아 탑신이 반듯하지 못하다.

또한 탑 전체가 가늘고 길어 안정감이 없는데,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황룡강변을 거닐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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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양원을 찾아 어머니를 모시고 나선 산책길.

'고산서원'을 들렀더니 마침 추향제를 마무리 짓고 식사와 담소가 진행중인 상황.

 

여러번에 걸쳐 찾아왔지만 늘상 굳게 닫힌 대문에 막혀 단 한 번도 내부에

발을 들여놓지 못했는데 잘 됐다 싶어 부리나케 한 번 둘러본 것.

 

노사문집 목판이 보관된 장서각 내부를 들어가 보고싶었으나

 엄중한 주름 철문 틈새로 간신히 눈팅에 그치는 아쉬움.

 

지인 분에게 서원의 상시 공개 여부를 물었더니

여러 상황을 조율하고 있는 중이라는 답변이 돌아온다.

 

명색 선비의 고장임을 내세우는 장성군.

하루 빨리 서원의 대문을 열어제치고 문화 해설사를 상설 배치하길 기대해 본다.

 

 

 

 

 

 


Elgar의 Concert overture, "In the South (Alassio)" 중
(fashioned after) Canto popolare / Lydia Mordkovitch, viol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