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 고중영 -
雨煎차가 왔으므로 茶器를 꺼내 놓고
동원 냉온수기에서 뜨거운 물을 다관에 받아
잔을 덥히고 마음을 함께 덮히며
당신에게 전화를 걸겠소.
沫차도 있고 감잎차도 좋으나
오늘은 보성 오선봉에서 손톱으로 끊어 낸
香 맑은 우전차가 왔으니 내게로 오시오.
당신이 올 냥이면
놋주전자에 샘물을 길어 담고
건너편 화로를 다시 한번 다둑거려
불씨를 모은 뒤
그리움만큼 묵직한 무쇠 삼발이 위에
두 가슴을 포개듯 주전자를 얹겠소.
오랫동안 밀어놓았던 다포를 털고
새 행주를 꺼내 다탁에 마른걸레질을 하면
눈이 먼저 차맛을 보는 이 아침에
그대여 그냥 오시구려.
동편강 물소리 저벅저벅 안개도 퍼지고
안개속에 뛰놀던 바람도 숨죽을 무렵
초가지붕 용마루에 햇살처럼 그냥 오시구려.
문은 두드릴 것없소 그냥 여시구려.
당신을 기다리는 내 마음이 열렸는데
그까짓 문이 무슨 상관이겠소.
어제 만났다가 헤어졌다는 듯
묵례를 하고 맞은편에 앉으시구려.
첫 잔은 단맛이라오.
그대와 내 인생을 생그럽게 달인 맛.
두번 째잔은 떫은 맛이라오.
그대와 나 사이에 끼어든 찰라의 호흡을 걸러내는 맛.
세번 째잔은 쓴맛이라오.
이만큼 익히느라 주름진 세월을 걷어내는 맛.
네번 째 잔은 맵고 매운 불맛이었으면 하오.
마땅히 덥고 마땅히 식어
혀끝을 스치는 잔잔한 열기를 음미하며
그대와 나의 비등점을 견주어 보는 불맛.
다섯번 째 맛은 짭짤한 소금맛이면 더 좋겠소
세상의 부패를 갈무리하는 소금맛 말이요.
오늘아침은 차를 달이겠소.
沫차도 있고 감잎차도 좋건만
보성 오선봉에서 온 우전차가 장하겠으므로
맑은 샘물을 길어 우전차를 달여
그대와 마주앉은 이곳에서 그곳까지의 간격을
녹색물결 출렁이는 뱃길로 열겠소.
첫얼음 단상
- 고중영 -
어디로 가려능가 저 느티나무
이파리 다 털어서
겨울이라는 보재기 싸들고
어디로 가려능가
혼자 먹는 아침상에 올려놓을
시래기 된장국
지금 막 끓기 시작하는데
겸상 마다하고 가려능가.
한뿌리 한 둥치래도
허우대 멀쩡해서
한여름 매미도 좋고
지빠귀의 흘러간 가요 잦더니
세월 따라 풍습 따라
훌훌이 가려능가.
오늘 아침 첫얼음 얼었는데
맨발에 벌거벗은 몸 뽑아들고
전라도 머슴애처럼 가려능 갑네.
2009년 11월 중순 훌쩍 뛰어넘어
콧물 훌쩍이며 가려능갑네.
無念가운데도 그리움은 도사렸다
- 고중영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날
아무 일이나 일어나야 하겠기에
오래된 잡지를 뒤적거려
30만톤급 여객선 사진을 오려 주머니에 찔러넣고
시치미를 떼고 문밖으로 나가
해를 올려다 보다가
아하! 겨울 해도 눈이 부시구나.
혼자 감탄하다.
저 아랫길 쇠무릎풀 앙상한 천변
어디로 갈까 두리번거리는 바람.
낡은치마 끝자락같이 찢어진
눈물이 그렁해진 겨울바람
비로소 나는 그리움을 뒤적거려
쿠르드족의 난민 같은 그녀를 떠올리고
눈이 큰 그녀의 뒤로 돌아가
팔을 늘여 그녀를 껴안았는데
그녀의 가슴은 점액질 끈끈하게 젖었지만
어쩌지,
우리 두사람은 그림자가 없어.
가끔은 삐걱거리는 의자
의자도 세월을 의식하는 건지?
튼튼한 가죽의자도 말이지.
/의/字를 사용하지 않으려 해도
椅子에는 /의/자가 들어가잖아?
펑펑펑 폭발하는 초침의 뇌관
젤리를 녹여서 만든 물고기
손가락으로 건드리면 꼭 그만큼 움직이다가 그치는
시작과 끝의 불변성 원칙
눈으로 바닷물을 너무 마셔
찝찔한 물이 꾸역꾸역 삐져나오는
젤리피쉬 눈
쓸쓸해하지 마시게나.
그냥.
해탈로 가는 길
- 고중영 -
미동도 없이 결가부좌한 대지에 서서
미흡한 한 생을 닦느라고
명상에 들었던 집앞 은행나무가
적정(寂靜)을 흔들어 해탈을 시작한다.
우수수 떨어져내리는 번뇌의 껍질들-
노랗다.
형상과 유약 그리고 불
위의 세 가지 요소가 도자 예술의 핵심이라 들었다.
그 중에서도
가마 속, 불의 희롱이 빚어내는 요변의 세계는
인간의 간섭이 극히 제한적인 모양.
물론 의도적 요변은 일정 부분 수용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망뎅이 가마 속 세계는
불의 신 들이 춤을 추어대는 영역이라 봐도 무방할 터.
위 요변 작품이 가마속에서 익어가고 있을 때
나와 몇몇 지인들 모두는 성심어린 마음으로
불을 다독이느라 분주한 희뫼 선생의 손놀림을 지켜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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