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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철학자의 길

           철학자의 길

 

       ▶ 백우정 / 판사동산 / 귀전암 / 고봉묘소 / 백운암지 / 낙암지

 

                                                                                                                                                                    2011. 3. 15

 백우정(白牛亭)

 

월봉서원 담장 밖 "철학자의 길"이 시작되는 들머리에 자리한다.

 

 

백우정 마당에서 바라본 월봉서원

 

 

백우정 옆에 자리한 이정표.

 

원점회귀가 가능한 것 처럼 표기되어 있길래,

백우정을 출발하여 먼저 백룡사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가 보기로 한다.

백우산(청량산)에서 임곡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에 이르렀지만,

내가 찾고자 했던 '백운암지'와 '낙암'으로 이어지는 산길을 찾는데 실패하고 만 것이다.

더 이상의 이정표도 없을뿐더러 아직 완전한 길이 확보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게된다.

단언컨데 위에 적시되어있는 코스를 안내자의 조력 없이 모두 답사하기란 아직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산책로라는 취지에 너무도 잘 어울리는 길이다.

 

 

 첫 번째 만나는 정자

 

 

 작은 계곡에 다리도 놓여있고...

 

 

연이어 만나는  계곡엔 소폭과 함께 작은 다리가 걸려있었다.

수량이 많은시는 소폭 감상하는 맛도 꽤 운치 있을 듯.

 

 

 몇 개의 작은 둔덕을 넘으니 '판사동산'과 임곡을 잇는 산줄기가 나온다.

하지만  본래 의도했던  '낙암'으로 더 이상 이어가지 못하고 하는 수 없이 정상을 향하고 만다.

위에서 얘기한대로, 더 이상의 이정표도 없을뿐더러 혼자서 '낙암(樂菴)터나

백운암(白雲菴)터를 찾아간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 하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청량산(백우산)정상 판사동산

 

 '판사동산'이라는 이름이 왜 이곳에 붙게되었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하루빨리 옛 이름인 청량산으로 바꾸어 부르는 게 좋을 듯.

 

 

 '판사동산'에서 곧장 아래로 내려오면 '귀전암터'에 이른다.

 

 

귀전암유허기(歸全庵遺墟記)

 

귀전(歸全)은 선조 문헌공 고봉 선생이 학업을 강론하던 곳이다.

증자(曾子)가 말한 '부모가 온전히 낳으심에 자식이 온전히 돌아간다.'라는 한마디 말로써,

천년이 지난 뒤에도 마음을 수련하는 법도를 잘 알겠다. 생각컨데 이 암자에서 선생이 말한 것은 증자의 말이며,

온전한 것은 증자의 온전함이라. 증자도 암자가 있었던가?  암자가 있지는 않았어도 암자의 기업(基業), 

문호(門戶), 간가(間架)는 세 번 반성하는 때 얻었고, 닦고 다스린 것은  '네라고 대답하는 날' 에 얻었으니

이렇게 말함으로써 후학을 가르쳤다. 가령 암자라고 한다면, 증자의 암자는 천하만고의 암자이며, 선생의 암자는

 귀전(歸全) 두 글자를 분명히 제시하였으니, 기초작업, 출입구, 공간구조는 완연히 증자로부터 얻었다.

증자는 말(言)에로의 귀전이며 선생은 암자로의 귀전이니, 말(言)은 경문(經文)으로 비유하고

암자는 주석으로비유한다. 선생 이전에 증자가 계발(啓發)하고, 증자 뒤에 선생이 해석하시니

증자의 말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은 선생의 암자를 관건으로 삼지 않을 수 없다.

아! 후손이 불초(不肖)하고 유림이 부진(不振)하여  주초(柱礎)가 묻히고 초목이 우거져 무성하며

모질게도 폐치(廢置)되었으나, 다만 대나무는 겨울에도 푸르고 간수(澗水)는 돌에 부딪쳐 흐르니,

요(堯)의 갱장(羹墻)을 보고 훙탄(興歎)한지 오래되었다. 무릇 후손된 사람은 각기 그 온전함을 다하고

그 터를 버리지 않는다면 귀전당(歸全堂)을 지어 중건할 날이 없어도 걱정할 것이 없으나

언젠가는 그럴 사람이 나올 것이다, 나올 것이다. 유풍(遺風)이 그지없으리라.

 

 

 귀전암유허비(歸全庵遺墟碑)

 

2월에 가묘(家廟)에 시사(時祀)를 지내고 저녁 무렵에 귀전암에 가서 구경하였는데,

이때 아들 표증(孝曾)과 유은(柳은), 김경생(金景生), 이운홍(李雲鴻), 곽호(郭顥)가 따라갔다.

선생이 산중턱을 둘러보더니 효증을 불러 한 곳을 지적해 보이면서

"사람의 일이란 알 수 없는 것이다, 훗날 모름지기 나를 이곳에 장사지내도록 하여라." 하였다.

 

- 고봉선생연보(高峯先生年譜) 중에서 -

 

 

내용은 고봉이 별세하기 1년 전인 1571년 2월의 일이다. 연보 끝에는

'이보다 앞서 선생은 조그마한 암자를 청량봉(淸凉峯) 아래에 지어 학문에 전념할 장소로 삼고

'귀전암(歸全庵)'이라 현판 하였는데, 이는 온전히 몸을 보전해서 돌아간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라고 부기하고 있는데, 이로써 본다면 귀전암은 고봉이 지은 암자로 볼 수 있다.

귀전(歸全)은 "예기(禮記)에 나오는 말로 '부모가 온전히 나아주셨으니 자식이 온전하게

돌아가야만 효라고 할 것이다."에서 비롯된 말이다. 그러나 선생이 직접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봉집"에는 귀전암과 관련된 기록이 보이지 않고 오로지 연보에서만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고봉이 낙향한 후 1570년에 지은 '낙암(樂菴)'이 있다. 이 두 암자는 비슷한 시기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데.

굳이 두 암자를 지은 이유가 분명치 않다. 추측건데 귀전암은 "자경설(自警說)"에서 언급한 것처럼

고봉이 어렸을때 자주 찾았던 사찰의 부속 암자였을 것이며, 후일 고봉이 직접 글씨를 써서 현판으로

달아놓은 것이 아닌가 싶다. 이 부분에 대해서 후일 정확한 고증을 거쳐야 할 것으로 보인다.

 

 

 고봉 묘소

 

 왼편이 고봉선생의 묘이고 오른쪽이 정부인 함평이씨의 묘이다.

 

1572년 3월 3일 고봉은 한양을 떠나 10월 10일 천안에 도착하자, 그간 앓았던 지병이 갑작스레

도지면서 운신하기 쉽지 않았다. 10월 15일에 겨우 전북 태인에 도착하여 관사에서 머무르다가

10월 28일 사동인 매당 김점의 거처로 옮겼으나 11월 1일에 운명하였다. 이듬해 2월 8일 현재

묘소에 동쪽에서 서쪽을 향한 묘좌유향(卯坐酉向)으로 안장하였다. 현재 묘소는 쌍분(雙墳)으로

 부인인 함풍 이씨(咸豊 李氏)와 나란히 모셔져 있다.

 

 

 

부음이 한양에 알려지자 간원(諫院)에서는 이렇게 그의 행적을 말한다.

 

대사간 기대승은 젊어서부터 성현의 학문에 종사하여 식견이 고명하였으므로,

이황이 더불어 의리를 논변하는데 있어서, 옛사람이 미쳐 발명하지 못한 것을 많이 발명하였습니다.

그가 경악(經幄)에 입시하여 충성으로 진술하여 임금을 인도하였던 것은 요순(堯舜)과

삼왕(三王)의 도 아닌 것이 없었으므로 온 세상이 그를 추증하여 유종(儒宗)이라고 하였습니다.

. . . 

 

그는 가세(家勢)가 청빈하여 치상할 수 없으니, 관에서 상례와 장례를 주선하여 주어

국가에서 선비를 높이고 도를 중히 여기는 뜻을 보이소서.

 

 

 

정조는 영조 51년(1775) 세손이었을 때,

사칠리기 왕복논변을 소수 초록(抄錄)하고는 '사칠속편(四七續編)'이라 명명했다.

그는 사칠논변에서 고봉의 설에 좌단(左袒)하였다. 일찍이 김용겸(金用謙)과 학문을 논하는 과정에서

퇴계가 결과적으로 고봉의 설로 귀착하였다고 진단하였다.

정조는 또한 고봉의 "논사록"을 중시하였는데, 정조 10년(1786) "논사록'이 중간되자 전교(傳敎)를 내려

"아, 거룩하도다. 지금 나는 이 책을 즐겨 보느라 밤이 깊어 촛불이 밑둥까지 타는데도 알지 못하였다.

야대(夜對)를 열 번하는 것보다 아주 낫다" 고 하였다.

고봉에 대한 정조의 경모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정조 11년(1787) 7월에는

고봉이 학문으로 후세에 끼친 공을 기려서 그의 본가를 찾아 치제(致祭)하고 봉사손(奉祀孫)을

등용토록 하는 은전을 내렸다.

 

 

 

고봉은 정암 조광조, 퇴계 이황의 정맥(正脈)을 이은 학자이자 호남유학의 대부(代父)로,

대개 숙종조 무렵부터 그에 대한 '문묘종사' 논의가 이어져 온 것 같다.

"고봉집" 별집 부록에 "월봉서원 사실(事實)'이 있는데 여기에는 전라도 유생들이 조정에

고봉의 문묘종사를 주청하는 "쳥향소(請享疏)가 2통 실려 있다.

 요지는, 퇴계의 학문은 주자의 학문을 이었고, 고봉의 학문은 퇴계의 학통을 이었으니

실로 사문(斯文)의 종장(宗匠)이라 할 만하다는 것.

근세들어 고종 21년(1884) 3월에도 전라도 유생 백몽수(白夢洙)등이

이항(李恒), 유희춘, 노진, 박순, 기대승 등 이른바 '호남오현(湖南五賢)'의 문묘종사를 청하는

상소를 하였고, 그 직후 전라도 유생 이계호 등이 같은 내용의 상소를 한 바 있다.

 

호남의 다섯 현신(賢臣)인 문경공(文敬公) 이항, 문절공(文節公) 유희춘, 문효공(文孝公) 노진

문충공(文忠公) 박순, 문헌공(文憲公) 기대승을 성무(聖무)에 승배(陞配)하기를 청하는 것은

곧 일국의 공론이며, 숙종 때 이래로 여러번 상소하여 지금까지 수백 년 동안 학자가

억울하게 여겨 온 바입니다. 신들이 일전에 궐문에서 호소한 일은 실로 감히 망령된 의논을

한 것이 아닌데, 비지(批旨)를 받으니 "성무에 숭배하는 것은 중대한 예(禮)이니

뒷날의 공론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전국에 흩어진 서원 사우가 수도 없이 많지만 고봉을 향사하는 곳은 월봉서원 밖에 없는 현실.

파고들자면 여러 까닭이 있겠지만, 주된 원인 중의 한 가지는 고봉의 짧은 수명탓이아닐까?

당연히 제자와 문도들의 세력이 약할 수 밖에 없었을 터.

게다가 "석담일기"에서 고봉에 대해 시종일관 비판적인 평가를 내린 율곡의 입김도 고봉에 대한

평가와 추승에 결정적인 걸림돌이 되었으리라.

 

 

 

그런 율곡이었지만 고봉의 부음에 부친 만사(輓詞)는 애닯기만 하다

 

남쪽나라 높이 날으는 채색 날개

신선 자태에 맑은 세상이라 뜻이 형통했건만.

영재로서 가슴에 쌓인 포부를 펴지 못하고,

남다른 은총이 죽은 후에 내렸을 뿐이네.

문장은 강하를 압도해 간책이 빛나고,

기개는 우두를 능가해 은하에 넓었도다.

화산의 한 번 작별이 유명을 달리하니,

초혼은 할 길 없어 눈물만 뿌린다오.

 

 

움직임은 고요함으로 뿌리를 삼고

고요함은 바로 움직임의 쉼이네

......

 

고요함에 근본하여 사람의 표준을 세워

성인은 인욕의 침범이 없네

......

 

이 때문에 군자의 배움이란

고요함을 주로 하여 공경하고 소홀함이 없네

마음의 상태를 더듬어 호연한 기운을 기르고

창졸간에도 경계하고 두려워하네

......

 

그대는 본래의 고요함 지켜서

묵묵히 깨달아 힘을 다하도록 하오

 

 어느덧 철학가의 길을 한바퀴 돌아 다시 월봉서원에 이른다.

여기서 차량을 이용 산너머에 위치한 나머지 답사처를 향한다.

 

 백운암터에 선 고목 은행나무

 

고봉이 심었다고 전해오는수피를 자세히 들여다 보니 수령이 족히 450년은 넘어 보인다.

약간 떨어진 곳 무성한 대밭 속에 또 한그루 은행나무가 서 있는데,

약간 윗쪽으로 떨어진 지점 어딘가에 백운암(白雲亭)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백운정에서 양사기(楊士奇)를 전별하는 싯구'를 보면

이 정자는 '산밑의 외로운 정자'  '석양이 머무는 높은 누대'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 누각으로 이루어진 정자였을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고봉이 수학했다는 백운정 터에서 바라본 모습.

멀리 왼쪽으로 병풍지맥의 종착지 어등산이 보이고 들판 너머로는 황룡강이 흐른다.

행정구역상 광산구 두정동으로 보통 두말마을로 부른다.

현재는 아무런 표식이나 안내판등은 찾아볼 수 없다.

 

 또다른 은행나무는 대밭속에서 악전고투 중이다.

이대로 두었다간 아마 천수를 누리기 어려워 보인다.

이곳에서 '낙암' 또한 그리 멀지 않은 듯.

 

문인 이호민(李好閔)은 만장(挽章)에서 낙암과 백운정에 대하여 읇고 있다.

 

처량한 낙암 위의 달이,

오히려 백운정을 비추이라.

책 속에 그 자태 남았으니,

아득하고 멀다고 말하지 마라.

 

 

 은행나무 옆 울창한 시누대 터널을 지나면 고봉의 신접살림 터가 나온다.

 

 이곳이 바로 고봉이 신접살림을 차렸던 곳.

고봉은 22세(1548) 되던 해에 혼인을 한다. 부인은 함풍 이씨(1530~1596)로

충순위(忠順衛) 이임(李任)의 둘째딸로 처가는 나주이다.

일대 모두가 지금도 기씨 종중 소유로 되어있다고.

 

 

고봉의 신접살림 터에서 바라보면 들판 끝으로

고봉의 부친 물재(勿齋) 기진(奇進)이 두 아들을 가르쳤던 오남재(吾南齋)가 보인다.

고봉은 조석으로 오남재 오른편에 있는 아버지 묘소에 절을 올렸으리라.

 

 오남재(吾南齋)

 

고봉은 1527(丁亥)년 11월 18일 광산구 송현동에서 태어났다고 "고봉선생연보"에 기록되어 있다.

현제 광산구 신룡동 용동마을이다.  부친 물재(勿齋) 기진(奇進 1487~1555)은 그의 동생 기준

(1492~1521)이 기묘사화로 인해 죽임을 당하자 회의를 느끼고 낙향 터를 잡은 곳이다.

이곳을 낙남처로 택한 이유는 아마도 처가가 이 근처에 있었기 때문일 거라고.

물제공의 부인 진산(晋山) 강씨(姜氏, 1501~1534))의 친정은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영광이었다.

 

 덕성군물재기공유허비(德城君勿齋奇公遺墟碑)

 

오남재 바로 못미처 야트막한 산자락에 자리한다.

물재공은 고봉이 29세 되던 해(1555)에 별세했다.

 

 

오남(吾南)이라 당호를 지은 연유는 물재공까지 대대로 살아왔던 경기도 고양에서

당신 스스로 택한 낙남길임과 동시에 자신의 뿌리를 강조하는 의지의 표현이라 하겠다.

 

 

 정면 5칸과 측면 3칸 팔작지붕으로 측면 1 칸은 널찍한 툇마루로 둘렀다.

대문은 외삼문으로 솟을대문 양식이다.

언젠가 강풍으로 떨어져 나갔다는 현판은 아직도 보이질 않는다.

 

오남재 정면 처마 위에 "과정기훈(過庭記訓)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이는 물재공의 가르침을 기록한 것으로 "고봉집"에 실려 전한다.

11대 후손 기동준(奇東準)이 덧붙여 기록한 것이다.

 

첫째, 학문은 부지런히 하고 반드시 외우고 뛰어넘어서는 안 되며, 읽고, 생각하고, 짓는 것을 병행해야 한다.

둘째, 교육의 목적은 과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효도하고 우애하여 조상을 욕되게 하지않아야 한다.

셋째,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자연스럽거ㅔ 행동해야 하며, 유별난 행동은 하지 않아야 한다.

넷째, 생업과 효도가 교육의 또 다른 목적이다.

다섯째, 천문, 역사, 기예 등 얻을 수 잇는 것이면 모두 힘써야 한다.

여섯째, 교육을 통해 궁핍한 사람을 구제 해야 한다.

일곱째, 친구를 사귀는데 신중해야 한다.

여덟째, 벼슬도 좋지만 주자(朱子)의 짧은 벼슬살이 기간을 보더라도 자신의 뜻을 행하려면

조그마한 고을이라도 만족해야 한다.

 

 

 대문앞에 서면 왼편의 백우산(청량산)과 오른편의 고마산(叩馬山)이 한눈에 들어온다.

고봉은 7세 때부터 부친 물재공으로부터 교욱을 받아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비교적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매일 새벽에 일어나

자세를 바르게 하고 암송하여 읽기를 쉬지 않았다고 한다.

 

 

낙암터로 오르는 초입에 위치한 행주기씨 제각 

 

 

 재실 청량재

 

 청량재 앞에 자리한 정자

 

정자에 걸린 현판

 

 

청량재 바로 옆으로 늘어선 행주 기씨 선조묘 행렬.

허리 굽은 낙락장송이 선산을 지킨다더니...

묘지를 호위하고 있는 소나무 행렬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신룡동 5층 석탑 

지방유형문화재 12호

 

낙암으로 오르는 산자락 한우 농장에 서 있는 석탑으로, 현재는 절이 있었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으나,

그 옆에 석불입상이 1구가 있어 상당한 규모의 절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탑은 2층 기단(基壇)위로 5층 탑신(塔身)을 올리고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기단은 각 면의 네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모양을 새겼다.

탑신부의 몸돌은 2층에서 갑자기 높이가 낮아져 5층까지 알맞게 줄어들었으며,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1∼3층은 4단씩이다가, 4∼5층은 3단으로 줄었다.

꼭대기에는 돌의 재질이 다른 장식들이 놓여 있는데, 나중에 보충해 놓은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형식에 치우친 모습이어서, 고려 전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아래층 기단이 손상되고, 일부가 없어져 심하게 갈라진 위층 기단은 거의 무너질 정도였으나,

1981년 해체, 복원하였다. 탑 해체시 발견되었던 유물들은 국립광주박물관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쇠똥이 수북히 쌓여있는 지저분함 곁에 서 있는 신룡동 5층 석탑.

소중한 문화재의 품격과 환경 개선을 위해서라도 하루 빨리 주변정리에 나서야 할 것으로 보인다.

 

 

 5층석탑 옆에 나란히 선 석불.

 떨어져 나간 불두 대신 비슷한 형상의 돌을 올려 놓았던데, 원래의 불두였는지 모르겠다.

법의 자락이나 수인을 볼 때 고려때의 작품으로 일단 추정해 볼 수 있겠다.

 

 낙암(樂菴) 터

 

1570년 고봉이 낙향하여 5월에 지은 암자이다.

위 오층석탑 오른쪽을 지나 울창한 대밭을 따라 한참 오른 곳에 자리한다.

"고봉선생연보"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5월에 낙암이 완성되었다. 낙암은 고마산 남쪽에 있다. 그 아래 동쪽에 또 몇 칸의 집을 지어 찾아오는

학자들을 머무르게 하고 '동료(東寮)라 이름하였다. 선생이 퇴계 선생에게 올린 편지에 "집에서 가까운

 산기슭에 조그마한 초암을 신축하였는데 한가하게 노닐며 쉴 곳으로 삼을 생각입니다"

'낙(樂)' 자로 현판을 걸고자 하는데, 이는 전에 보내 주신 편지에 '가난할수록 더욱 즐길 수 있어야 한다"

라는 말씀으로 인하여 제 마음에 원하고 사모하는 바를 부치려는 것 입니다." 하였다.

 

 샘터

 

 낙암구지(樂菴舊址)비 

비에 적힌 시를 옮겨보자면.

 

숲 속 막집도 조용하고 밝아 환하기에 모처럼 서재를 푸른 언덕에 의지해 지었네

비탈에 청기한 대숲 밤 빗소리 울리고 잿마루 외로운 소나무 노을에 떠 있네

눈을 대고 있기도 원래 싫지 않했고 거친 조밥으로 배를 채워도 역겹지 않네

또 성현들이 전수한 뜻도 알아보며 어찌 옳고 그름과 빗나감을 논 하리오.

 

 

 

그런데 지금 비석이 서 있는 장소보다는 약간 윗쪽으로 대숲을 뚫고 오르면 다소 평평한 곳이 나온다.

여러 정황상, 이 장소가 원래의 낙암 자리였을 개연성이 크다고 봐야겠다.

 

 

 

 대나무와 잡목이 가린데다 박무로 인해 보이지 않지만

저 건너 무등산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는 장소임에 틀림없다.

 

 

고봉이 퇴계에게 보낸 편지를 더 살펴보기로 하자.

 

산이 비록 높지는 않으나 시야가 두루 수백 리나 되고 집이 완성되어 거처하게 되면

진실로 조용히 수양하기에 합당한 곳이니, 그 사이에서 학문에 힘쓴다면 주위의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는 취흥(趣興)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이 밖에 또 무엇이 마음을 끌만한 것이 있어

 다시 이런 저런 말을 하겠습니까.

 

 

퇴게가 1570년 7월 12일 보낸 답장이다.

 

높고 넓은 땅에 서실(書室)을 새로 지어 학문을 닦는 낙(樂)을 부치고,

또 서실의 이름을 낙암으로 하는 것이 매우 알맞고 좋다는 것을 알았으나,

한번 가서 며칠 동안 정답게지내며

중의 낙이 어떠한지 차여하여 느껴 보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습니다.

 

 

답사를 마치고 다시 돌아온 월봉서원 빙월당 다실(茶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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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성리학자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

 400여년 전, 조선 최고의 사상 로맨스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의 주인공이었던 두 사람

물경 13년 동안 논쟁을 벌였다는데...

 

두 사람의 나이 차이는 무려 스물 여섯. 처음 만나 편지 왕래를 시작했을 때,

퇴계는 벌써 일가를 이룬 쉰 하고도 여덟 살의 대학자였으며. 성균관의 대사성이라는 지위에 까지 올라있었다.

그런 그가 이제 갓 과거에 장원 급제한 신출나기 서른 두살 짜리 서생과 논쟁을 시작했다.?

위 나이 차이  남녀간의 로맨스 라고 한다면 혹(?) 몰라도....

 

화려함의 극치를 달렸던 로맨스의 주제는 다름아닌 사칠논변(四七論辯).

그 사단과 칠정을 논 하는데 있어 필연적으로 따르는 게 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이기론(理氣論).

문제는, 이론의 뼈대를 세우는데 있어 형이상학적인 근거가 등장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쯤에 이르면 나같은 삼류산적 주제로선 감당키 어려운 난제요, 습득불가의 가시밭길이라.

이쯤에서 대충 발을 빼는게 그나마 신상에 이로울 터. 그만 답사 얘기로 돌아가련다.

 

월봉서원을 중심에 두고  백우산(청량산) 자락을 일별한 후 산너머 신룡동에 당도.

'백운암터'와 '낙암터'를 찾아보려 수소문 했건만 동네 사람 그 누구도 속 시원한 답을 주지 못한다.

할 수 없이 '고봉학술원'의 강기욱 선생님께 손폰을 날려 정확한 위치를 묻는데....

 

"절대 혼자서는 못 찾습니다. 애일당으로 오시면 제가 안내 해 드리겠습니다."

 

 너부실을 향해 달려가니 선생께서 기다리고 계신다.

기실 폐를 끼치지 않으려 혼자 찾아나섰건만,  결국은 선생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는 형편.

천군만마를 얻은 셈,  신이 나서 선생을 앞세우고 제일 먼저 찾은 곳은 '백운암터.'

고봉의 신접살림터를 비롯, 고봉이 심었다는 노거수 은행나무와 백운정터를 돌아본다.

소중한 사상사의 흔적이 도처에 널려있었으나 그 흔한 안내판 하나 없다니...

 

제일 주의 깊게 살핀 것은, 기록에 나오는 고봉의 편린과 현재의 지세를 대조해 살펴보는 것.

이어 고봉의 부친이 낙남하여 터를 닦은 '오남재'에 당도 지세를 살피니

들판 건너 백우산과 고마산 능선의  흐름이 유현하기 이를데 없다는 사실.

'오남재'에서 부친에게 몸가짐과 학문을 수학했다면 건너편의 산자락은 훌륭한 보림처(保任處) 였을 터.

 

이어 당도한 '낙암터' 첫 느낌은 선생이 거처를 마련하기 전, 암자터였을 것 같다는 생각.

낙암지 오름길 초입에  '신룡사지 5층석탑이 선 것으로 봐도 과거 이 일대가 모두 사찰과 관련이 있었을 듯.

강기욱 선생께서 지금의 낙암지 바로 윗쪽을 한 번 살피자는 제안을 하신다.

울창한 대숲사이를 뚫고 위로 오르니 잡목과 가시덤불 속 여기저기 석축의 흔적이 나타난다

.

무등산이 곧바로 조망되는 위치, 지세등으로 볼 때, 이곳이 바로 확실한 '낙암지' 였을거라는

강선생님의 의견에다 내 의중까지 보태지니 그야말로 완벽한 '의견합일' 

아래쪽 샘터와 비석이 선 자리는 기타 주거지 등이 있었을 거라 짐작해 볼 수 있겠다.

잡목과 대숲 일부를 제거하면 훌륭한 조망이 확보될 수 있을텐데 그 점이 다소 아쉬울 뿐이었다.

 

철인의 향기로 가득찬 월봉서원을 품은 자연 속의 백우산(청량산)숲길.

그곳에 가면, 철학의 뿌리를 찾고 철학적 성징 속에서 내 자신을 살필 수 있으리라

.

월봉서원이 있는 백우산 자락을 더듬는 것이 '철학자의 길'이라고 한다면

반대편의 백우산자락과 고마산 자락을 더듬는 길은 더하고 말 것도 없이

너무나도 명확관화(明若觀火)한 '사상가의 길'임에 틀림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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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 고봉학술원 펀저 : 高峰 奇大升 硏究

* 전남대학교출판부 鄭炳連 저 : 高峯 先生의 生涯와 學問

 

* 문헌제공, 안내와 도움말 : 고봉학술원 강기욱 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