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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솔바람 문학과 예술시장 프로젝트

                                                                                                                                                                 2011. 2. 7

 無染(무염) 정찬주 선생의 창작 산실 耳佛齋(이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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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스승은 화순의 순한 자연과 사람들
"겹겹 인연 쌍봉사에 이끌려 내 스스로를 유배시켰다"
"법정스님 가르침 잊지 않고 저잣거리 물들지 않으려 솔바람에 귀 씻으며 산다"


3층 탑으로 솟은 화순 쌍봉사 대웅전 앞에 안내판 두 개가 서 있다.

하나는 '우리나라에 둘밖에 없는 탑 모양 전각'이라고 짧게 쓴 문화재청 것이다.

옆 안내문은 대웅전 목조삼존불상을 얼굴 선, 옷 주름까지 살피며 그 가치와 아름다움을 알린다.

 해박한 불교 지식과 부드러운 글투가 돋보인다.

26년 전 불이 난 대웅전에서 불상을 업고 나와 구한 농부의 '장한 마음과 용기'도 기린다. 소설가 정찬주가 쓴 글이다.

정찬주는 지장전 목조상 안내문도 썼다. 범종각엔 그가 쌍봉사 종소리에 싣는 축원문 '지금 바로 행복하여지이다'가 걸려 있다.

 그는 쌍봉사가 코앞에 내려다보이는 길 건너 계당산 자락에 산다.

"쌍봉사와의 인연은 금생(今生)에 겹겹일 뿐 아니라 전생에도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쌍봉사는 그의 할머니가 고향 보성 복내면에서 쌀을 이고 가 불공을 드리던 절이다.

인근 쌍봉마을은 15대조(祖)인 호남 명현(名賢) 정여해 때부터 터 잡은 하동 정씨 집성촌이다.

그는 동국대 국문과 다니던 70년대 소설을 쓰러 모포 하나 들고 수시로 쌍봉사를 찾았다.

쇠락한 절을 혼자 지키던 주지스님은 길게는 한 달씩 그를 기꺼이 먹이고 재워 줬다.

그는 '나중에 불사(佛事)로 쌍봉사를 일으켜 절밥 얻어먹은 빚을 갚겠다'고 맘먹었다.

일러스트=이철원기자 burbuck@chosun.com

대학 4학년 때 그 스님에게서 편지가 왔다.

'나 이제 생사를 끝낸다/ 얻은 것도 잃은 것도 없다…'는 오언절구 한시(漢詩)가 쓰여 있었다.

정찬주는 스님이 절을 떠나 산으로 들어간 모양이구나 생각했다.

졸업하고 서울서 국어교사를 하던 그는 스님이 강화도 절벽에서 뛰어내렸다는 소식을 1년 뒤에야 들었다.

스님 편지는 절명시(絶命詩)였던 셈이다.

마침 조계종이 월간 불교사상을 낸다고 해서 그는 학교에 사표를 냈다.

불교와 쌍봉사 주지스님에게 진 묵은 빚을 갚을 기회라 여기고 81년 불교사상에 들어갔다.

3년을 온전히 잡지 만들고 경전 읽으면서 불교 공부가 깊어졌다.

그는 84년 샘터사에 있던 대학 선배 정채봉에게 이끌려 일터를 옮겼다.

정찬주는 82년 등단했지만 불교사상과 샘터사 책 만드는 데 빠져 단편만 이따금 발표했다.

그러던 91년 암자 순례에 나섰다. 절이 관광지처럼 돼 가는 속에 청정(淸淨) 공간 암자에 눈길이 갔다.

그는 10년 동안 암자 400곳을 돌며 200곳을 기행문 네 권으로 엮어냈다.

94년엔 만해 한용운의 삶을 담은 첫 장편 '만행'을 낸 뒤로 여러 고승 얘기를 소설로 썼다.

그중에 성철 스님 일대기 '산은 산, 물은 물'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불교 작가'로 이름을 높였다.

정찬주는 인도에 반해 몇 차례 다녀왔다.

거기서 브라만 계급 귀족들이 쉰을 넘어 할 일 다하고 자식 다 키우면 숲으로 들어가 남은 삶을 혼자 보내는 걸 봤다.

자연을 스승으로 모시고 사는 그 임간기(林間期)가 부러웠다. 그는 화순 쌍봉사를 떠올렸다.

2002년 나이 쉰에 그는 30년 서울 삶을 접었다.

쌍봉사 앞에 아담한 기와집을 짓고 이불재(耳佛齋)라고 이름 붙였다.

'솔바람에 귀 씻어 불(佛)을 이루겠다'는 뜻이다.

그는 새벽 네 시도 안 돼 눈을 떠 총총한 별을 본다. 뒷산을 한두 시간 걷고 오전엔 글 쓰고 오후엔 밭을 일군다.

집중력이 높아져 한 해 두 권씩 쓰고, 글도 자연을 닮아 유순해졌다고 했다.

정찬주는 농사를 점점 줄여 올해 콩·깨·고구마·고추만 지었다.

생전에 법정 스님이 "많이 짓지 마라, 글 쓰는 일과 본말이 바뀐다"고 일러주신 대로다.

법정은 그의 집 사랑채 편액도 써 주고, 추운 겨울 잘 나라고 내복도 보내 주곤 했다. 그는 법정의 재가(在家) 제자다.

그는 샘터사에서 일하면서 법정 산문집을 열 권 넘게 냈다.

교정지 들고 스님이 계시던 송광사 불일암을 숱하게 드나들었다.

그러면서 스님의 몸가짐을 가까이서 엿보게 됐다. 스님도 좀처럼 꺼내지 않던 속가(俗家) 시절 얘기를 그에겐 들려 줬다.

그는 91년 단오 전날 불일암에 가 법정 스님께 제자로 거둬 주시라고 청했다. 스

님은 이튿날 아침 삼배(三拜)를 받고는 '무염(無染)'이라는 법명(法名)을 내렸다.

"저잣거리에 살더라도 물들지 말라"는 뜻이라 했다.

오계(五戒)를 내리면서는 "살다 보면 거짓말할 수도, 바르지 않은 길 갈 수도 있지만

그때마다 계(戒)를 생각하면 걸음이 멈출 것"이라고 말씀했다.

정찬주는 "법정 스님이 그 요체(要諦)를 일러 주시지 않았다면 지금도 불경(佛經)의 숲 속에서 헤매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10년 동안 암자를 다니다 보니 탐내고 노엽고 어리석은 삼독(三毒)이 씻기더라"고 했다.

그래서 결국엔 화순 땅 쌍봉사 앞산에 스스로 암자를 지었다.

그는 그 암자를 '무염산방'이라고 일컬었다.

"법정 스님을 불가(佛家)의 스승으로 모신 것이 큰 행운이고 행복이었다"고 했다.

이제 그는 화순(和順)이라는 이름처럼 평화로운 자연, 순한 사람들을 새 스승으로 모시고 산다.

 

 

- blog chosun.com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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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재의 안쥔이자 도예가이신 박명숙 선생님의 작품

 

 

 

 

 

 도예공방

 

 

가마

 

 

공방 내부 

 

 

 

 

 

 

 

 

 

 

 

독특한 문양의 연적

 

 

 문창살 너머...

 

 

이불재 문밖, 사자산 쌍봉사 골짜기에 석양이 내리고...

 

 

 흐릿한 풍경의 사자산 쌍봉사를 뒤로하고

 

 

 파장 분위기가 역력한 광주 대인시장에 들어선다.

 

 

 대인시장 내에 자리한 디자이너 아트숍, 디자인 창작소

 

 

주차장 담벽에 그려진 무등산 폭격기 시절의 선동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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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graper와 painter를 동시에 해 내시는 황윤수 선생님,

축령산의 돈키호테 청담선생과 이 사람 다천,

 세 남자가 함께한  이른바 '입춘순례'

 

무염 정찬주 선생의 茶 독촉에 화답할 겸,

청담선생이 신명과 정성으로 덖어낸 '文香茶'를 들고

사자산 쌍봉사 앞 계당산 자락에 선방을 마련한 선생을 찾는다.

 

향기로운 차를 목으로 흘리면서 이어져간 다담.

이어  도예공방으로 이동하여 이런저런 작품 감상에 이르기까지...

 

안쥔께서 요청하신 '풍금'과 함께

 조만간 다시 방문하겠노라는 약속을 뒤로 하고 석양의 사자산을 넘는다.

 

시내로 들어와 저녁 요기도 해결할 겸 대인시장을 향한다.

 

지난 2008년, 현장미술 실험장이라는 독특하면서도

새로운 미술적 도약을 시도한바 있었던 대인시장 아트페어 프로젝트.

 

당시 국내에선 처음으로 재래시장에서 젊은 작가 지원을 위한

대대적인 미술품전시 겸 거래가 이루어져 많은 국내외의 주목을 받았었다.

 

지금까지도 열정적인 젊은 아티스트 들이 시장에 진을치고

예술혼을 불태우고 있음은 바람직스럽기 그지 없다는 생각이다.

 

 

얼마전 입적하신 법정선사의 일대기를 소설로 엮어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올려놓은 무염거사 정찬주 선생.

 

 어려운 가운데서도 '대인예술시장' 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젊은 작가들의 악착같은 정진.

 

솔바람으로 귀를 씻어 佛을 이루겠노라는 무염과의 다담에서

예술시장 프로젝트까지를 아우른 오늘의 '입춘순례'

 

솔바람 흐르는 곳에 창작혼이 살아 숨쉬고,

재래시장의 질펀함 속에 찬란한 예술혼이 꿈틀대는 곳.

 

그곳은 정녕 내가 살아 숨쉬는 공간이자,

언제고 그리운 내고향 남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