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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탄생 500 주년, 다시 하서를 생각하다. 1편 여흥민씨의묘

 

 

 

 

靑山自然自然 綠水自然自然

 

山自然水自然 山水間我亦自然

 

已矣哉 自然生來人生 將自然自然老

 

 

청산도 절로 절로 녹수도 절로 절로

 

산 절로 수 절로 산수간에 나도 절로

 

이 중에 자란 몸이 늙기도 절로 절로

 

 

 

  

오는 8월 28일(음 7, 19)은

하서 김인후(厚)선생이 이 땅에 태어난지 500 주년이 되는 날.

 

 

등잔밑이 어둡다고 했던가.!

깊고 넓은 하서선생의 은혜로운 후광을 업고 장성이라는 지역사회에서 여태껏 살아왔지만

선생의 삶과 사상에 대해 도대체 제대로 아는 게 몇 가지나 될까.?

 

 

가만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폭염 가운데,   

노쇠한 애마를 간신히 어르고 달래, 위대한 선생의 발자취를 한 번 따라가 보기로 한다.

 먼저, 하서가 이 곳 장성땅에 태어난 원류를 살펴보려면 꼭 들러야 할 곳이 있다.

 

 

  전남 장성군 북이면 명정마을에 소재하고 있는 

 하서 김인후 선생의 5대 조모이자 울산김씨의 중시조비가 되는 여흥민씨(麗興閔氏墓)의 묘.

 

 

 

 

소나무 사이로 본 여흥민씨麗興閔氏墓)의 묘 

 

 

 

 

 

 영세흥왕(永世興旺)의 터를 직접 잡았다는 여흥민씨.

자신이 죽으면 이 터에 묻어줄 것을 유언하며 이렇게 말 했다고.

 

“내가 이 터에 묻히면 말을 탄 자손이 밀등에 가득할 것이며

현인이 나면 필시 필암은 서원 터가 될 것이다”

 

해동 18현의 반열에 오른 하서를 비롯,  

수많은 인재와 재력가가 배출되었으며,  필암서원까지 세워진 것은 물론

해마다 그녀의 기일엔 명정마을이 미어터지도록 차량으로 넘쳐나니 

그의 예언은 등골 오싹하게 적중한 셈.

 

 

그녀가 해박한 풍수지식을 갖게된데는 무학대사가 업무상 자주 한성판윤댁을 드나들었기 때문.

 여흥민씨(1350-1421)는 아호(雅號)가 하소부인(荷沼夫人)으로 한성판윤 량(亮)의 딸이었고

태종 이방원의 왕비 원경왕후 민비와는 사촌간.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풍수이론을 전수받을 수 있었다는 하소부인. 

그녀의 풍수이론을 정립한 하소결(荷沼訣)은 울산김씨 집안의 비결서로

대대로 지금까지 전해온다는 소문도 있다.

 

 신라 경순왕의 둘째왕자이자 울산김씨의 시조가 되는 김덕지(金德摯)의 17세손

김온(金穩)과 혼인, 달근, 달원, 달지 3형제를 두었는데

 둘째 아들이었던 달원의 현손이 바로  하서(河西) 김인후 선생인 것이다.

 

 

 


 

 

 

- 천하 명당 울산김씨의 발복처 여흥민씨 묏자리에 관한 또 다른 스토리.-

 

 

 

하서 선생의 조부는 당대 최고의 지관이라는 박 풍수에게

기막힌 명당을 하나 잡아달라고 애원과 함께 갖은 정성을 쏟아부었으나 무응답이라.

 

 조선 천지를 모조리 헤메는 게 본디 지관의 행태인지라

집을 찾아가도 그를 만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고.

 

 궁리 끝에 내 놓은 묘책 한 가지,

 지관 부인의 마음을 사로잡아 명당의 위치를 캐 내기로 작정하고 작전에 돌입,

 

시쳇말로, 하서 조부의 용모가  여성에게 잘 먹히는 스타일 이였던 모양.

지관 부인 마음을 사로잡는데 성공하여

아침내 명당자리를 빼내 주겠노라는 약조를 받아낸다.

 

긴 시간 적조했을 남편이 집에 돌아오자 부인은 잔뜩 지분향을 풍기며

남편의 품을 파고들어  이렇게 말 한다.

 

" 신후지지身後之地)가 아무리 기막힌 명당이라 하여도

만약 잘 못되어 당신이 죽기라도 하는 날에는

내가 그 자리를 알고나 있어야 묘를 써 드릴것 아니오"

 

나름 일리있다는 생각에 지관은 명당의 내력을 부인에게 알려주고 말았으니...

 

드디어 명당을 빼내게 된 하서 조부는 지관이 길을 떠난걸 확인하고나서

 감쪽같이 민씨 할머니 묘를 이장 해 버렸다고.

 

얼마 후, 집에 돌아온 지관이 확인차 산후지지를 찾으니

누군가 이미 묏자리를 차지해 버린것이 아닌가.

 

 

땅이 꺼지는 기다란 한숨 끝에 지관이 내 뱉은 말씀.

 

"미련하도다,

이 세상에 나 말고도 또 하나의 명풍수가 또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다니....!"

 

 

 

 

 

 

 

왼편의 네모난 상석은 여흥민씨 남편 김온(1348-1413)의 단(壇)이다.

 

 

김온은 고려 우왕 때 등과하여 이성계의 요동정벌과 조선개국에 참여했으며,

태조원년에는 회군원종공신(回軍原從功臣)에 책록되었고

밀양부사와 양주목사를 지냈으며 정종2년에는 좌명공신(佐命功臣)에 녹훈되어

여산군(麗山君)에 봉해진다.

 

호는 학천(鶴川)으로 학천군 또는 흥려군(興麗君)으로 불리며,

바로 울산김씨의 중시조가 되는 인물.

 

위 사진상에 보이는 산은 방문산이다.

 내장산과 백암산을 잇는 호남정맥상의 소둥근재에서  가지를 치게되는 영산기맥.

 

입암산을 솟구치고 갈재를 거쳐 방장산으로 뻗어가던 중,

방장산의 지기를 몽땅 끌어안고 내려선 곳이니 만큼,

표적인 돌혈(突穴)이요, 회룡고조(回龍顧祖)복부혈(覆釜穴)인 것이다.

 

 

 

 

 

 

 

 

 한양에 살던 하소부인이 머나먼 장성에까지 내려오게 된 것은, 

태종의 왕권강화에 희생된 사촌오빠 민무구, 민무질 형제의 옥사에 양주목사로 재직하던 남편까지 연루,

사약을 받아 죽게되자 멸문지화를 피해 세 아들을 데리고  남으로 내려오게 되었는데.

장성 갈재를 넘던 중 나무로 깎아 만든 매(罵)를 날렸는데 

매가 날아가 안착한 곳이 바로 황룡면의 맥동마을이었으니...

 

 

 

 

 

 

넒다란 들녘을 가운데 두고 안산과 조산이 차례로 펼쳐진다.

멀리 왼편의 시루봉에서 오른편의 장자봉 끝에 이르는 라인이

바로 조산에 해당한다고 봐야겠는데, 세상만사가 모조리 이 곳을 우러르는 듯.

겹으로 감싼 모든 산자락의 흘러드는 모양새가 마치, 여흥민씨묘를 향해 모여드는

전형적인 용사취회(龍蛇聚會) 형상.

 

 

 

 

 

 

 재실 명정재(鳴鼎齋)

 

 

 

 

 

후손들을 위한 배려(?)....

 

하늘에서 부감한 묘의 사진까지 걸어 놓았다.

 

 

 

 

 

 

전남 장성군 북하면 중평리에 소재한 하서선생의 종가.

 

   선생에 대한 예를 올리려 찾아갔으나

 

 대문은 굳게 잠겨있고...

 

 

 

 

 


 

 

 

 

 

  아래는,

작년 2009. 9. 25  "가을예감" 이라는 제호로 내 블로그에 올렸던 내용 중의 일부로

여흥민씨 할머니의 후손 울산김씨 가운데,

대표적인 명당 신봉자라 일컫는다는, 인촌(仁村) 家에 관한 내용이다.

 

 

 

 장성 백암산 백학봉 언저리에 자리잡은 인촌((仁村) 김성수 첫 번째 부인 고씨의 묘

 

 

 

 

현대사의 인물로 인촌 만큼 많은 인구에 회자되는 인물도 찾기 어렵지 않을까?.

특히 그가 굳세게 신봉했다는 명당론은  풍수사가들의 설왕설래 속 단골 메뉴.

 

고려대, 동아일보, 경성방직 등을 창립하고 제2대 부통령을 지낸 인촌.

고 김상만 동아일보 회장이 인촌의 아들이고

동생 수당은 삼양사 설립자이고, 국무총리를 지낸 김상협은 수당의 아들이다.

호남 유일의 문묘(文廟) 배향자 하서 김인후가 인촌의 13대조.


 

위의 묘가 바로 풍수학 개론 제 1장 1절에 나온다는 이른바 '군신봉조혈'의 전형.

 인촌家처럼 풍수지리를 금과옥조로 떠 받든 집안이 조선 천지에 또 있을까 싶다.

 

내 어릴적, 이 묘를 쓰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본 기억이 나는데

암튼 요란 뻐적지근 했었다.

 

명당에 관하여 널리 알려진 내용 중에서 몇 가지를 간추려 보자면...

 

인촌가는 9대조 합장 이후 다음 대부터는

일명당일묘(一明堂一墓)를 고수하고 있다고 한다.

정확한 재혈(裁穴)이 아니고서는 자칫하면 혈처를 비껴 가게되는 법이요. 

 

더구나 쌍분으로 용사할 경우는

둘 중 누군가는 혈장에 들어갈 수 없음은 당연한 이치.

 

● 고창군 아산면 선운사 뒤 도솔산 옛 백련암 자리의 조부(김요협·복치혈) 묘

● 고창군 아산면 반암리 호암마을의 조모(영일 정씨·선인취와혈) 묘
● 전북 부안군 산내면 지서리 변산해수욕장 뒷산에 있는 비룡승천혈의 증조부(김명환) 묘

● 순창군 쌍치면 시산리 보평마을의 증조모(전의 이씨·갈용음수혈) 묘

 

이 모두가 말 그대로 천하길지 대명당이라는데....

 

순창군 복흥면 반월리 화개산의 9대조(김창하·순천 박씨) 묘만 합장이란다.

허나 이 또한 '삼천년향화지지'로 너무나 유명.

 

인촌의 묘는 경기 남양주시에 있다던가...

암튼 이 묘들은 작게는 수십리에서 멀게는 수백리까지 떨어져 있다고 한다.

 멀고 가까움에 일절 상관치 않고

인촌가는 지금도 '일명당일묘'를 고수하고 있다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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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을 앞 두고 있어서일까?  말끔하게 벌초를 해 놓은 모습이었다.

 

무슨 용도인지 알 수 없지만,

묘 아래 쪽 잔디 한켠엔 군용 야전침대까지 놓여 있었다. 

늦은 아침과 함께 늘어지게 한 잠을 자면서  동기감응을 신청했건만...

 

 내내, 종무소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