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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원림(園林)과 고가(古家) 순례 (1)

 

 

 연계정

(전남 담양군 대덕면)

 

미암 유희춘(1513년∼1577년)이 학문을 강학하던 공간으로

임란으로 소실한 것을 문인들 90여명이 힘을 모아 중건하면서

정자 앞의 계류 이름을 따 연계정이라 하였다.

후로 여러 차례에 걸쳐 중건을 하였다.

 

 

연계정에 피어난 노랑상사화

 

 

 

 

 미암 유희춘은 중종에서 선조때까지의 학자로서 호는 미암이요 자는 인중이다.

1538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등을 지내다 양재역 벽서 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와 함경도 종성등에서 장장 19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유배생활을 했다.

 

명종때에 비로소 풀려나서 선조초에 대사성, 대사간 등을 지내고

선조때에는 이조참판을 지낸 선비이다.
성리학에 침잠했으며 사후에 좌찬성에 임명되고, 문절공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모현관과 연지

연계정 원림의 핵심이 되는 공간이다.

 

 

 미암 종가

 

 

하서 김인후와 미암 유희춘은 기묘사화 때 화순으로 유배온 신재 최한두에게 동문 사숙한 사이. 

그의 아버지 유계린은 최산두와 함께 한훤당 김굉필에게 수학한 인물.

하서가 성균관에서 수학하다 전염병에 걸려 위독한 상태에 빠졌을 때,

이미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관원이었던 미암은 하서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 극진하게 병 수발을 하였던 모양.

거의 죽음 직전에서 목숨을 부지한 하서는 과거에 합격하게된다.

1543년 겨울 미암이 무장현감으로 부임할 때, 옥과 현감으로 와 있던  하서를 찾아가

"효경간오" 한 질을 놓고 갔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두 사람 사이는 아주 각별했다고. 


 

왼편의 건물은 미암일기 목판을 보관하는 모현관이다.

당호는 의제 허백련이 썻다.

 

 

미암일기 (眉岩日記, 木板包含)  조선시대(1567∼1577) 보물 제260호

지정연월일 : 1963년 1월 21일

 

미암일기 (眉岩日記, 木板包含)

 

미암일기 (眉岩日記, 木板包含)

 

이 책은 조선 선조(宣祖)때의 학자인 미암 유희춘(眉岩 柳希春, 1513∼1577)의 친필일기이다.

지금 남아있는 일기는 선조 즉위년(卽位年, 1567) 정묘(丁卯) 10월 1일부터 시작해서

선조10년(1577) 5월 13일까지 대략 11년간의 일기인데 중간에 몇 군데 빠진 데가 있다.

이 책은 조선시대 개인의 일기 중 가장 양이 많은 것이며 동시에 사료(史料)로서의 가치도 크다.


일기에 본인의 일상생활에 일어난 모든 일들을 상세히 적었기 때문에 이를 통하여 조선초,중기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또한 본인이 중앙의 요직에 있었던 만큼 선조 초년에 조정에서 일어난 사건은 물론

경외(京外)의 각 관서의 기능과 관리들의 내면생활 및 사회, 경제, 문화, 풍속 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한편 임진왜란 때 선조25년 이전의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가 다 타고 없어져 『선조실록(宣祖實錄)』

을 편찬할 때 사료가 없었으므로 이 책은 율곡 이이(栗谷 李珥)의 『경연일기(經筵日記)』와 더불어

선조실록의 첫 10년의 사료가 된 것이다. 지금 남아있는 일기초 중 제12책에는 부록으로

 미암과 그 부인 송씨의 시문(詩文) 및 잡록(雜錄)도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 판본을 포함하여 일괄 보물로 지정되었는데 이 중 3매를 전남대박물관에서 일시 보관했다가

현재는 후손들의 보존각(모현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에서 조선사료총간(朝鮮史料叢刊)의 하나로

활자본 7책으로 인간(印刊)한 바 있으며 최근에 번역본이 간행되었다.

 

                                                                                

 

 

 1547년(명종2년) 제주도로 귀양을 가게된 미암.

헌데, 제주는 그의 고향인 해남과 가깝다는 이유로  다시 두만강 근처인 함경도 종성으로 이배를 가게 된다. 

 

천리 유배길을 떠나는 미암에게 술잔을 권하며 읇었다는 하서의 詩.

 


술에 취해 꺾었다오. 버들가지 하나

이별의 순간은 다가오는 데. 한없는 이 정을 어이하리.

만리라. 내일이면 머나먼 길을 뜬다지.

저 달이 몇 번이야 밝아야 그대 돌아오려나.

 

 

하서는 의리의 징표로 미암의 아들을 사위로 삼게된다.

문제는 미암의 아들이 요즘말로 2% 부족했던 모양.

온 집안이 들고 일어나 혼사를 반대했지만, 하서는 끝까지 밀어 부쳐

당신 셋째 딸과의 혼사를 성사, 미암과 사돈을 맺게 되었다고.

 유배간 미암에게 하서는 수시로 안위를 묻는 서신을 보낸다.

 

 

아름다운 아미암 같은 사람

어찌 이리도 생각나게 하는 가

언제 함께 평상에 앉아

책 펴고 조금씩 갈라 밝힐 수 있을 지

 

 

유배처의 미암 또한 고마움의 답서를 보내는데...


 

종성은 천하의 궁벽한 곳

티끌 모래 날로 일어 자욱만 하네.

사투리를 잃지 않은 십년 나그네.

부질없이 고향 꿈만 꾸고 있다네.


북쪽 변방 아무도 물어오는 사람 없는데

하서 혼자 나를 생각하며

삼 백 자나 되는 시를 새로 적어 보내

털끝만큼 어긋나다 크게 그르쳤음을 말해주네.


  

돌배나무와 장독대

 

 

 

 

기정떡 등을 만들 때 저 맨드라미 붉은 꽃잎으로 지게 장식하던 옛 추억이....

 

 

미암사당

 

 

 

 

 

 

 

미암사당 앞에 선 종부 어르신

 

아래는, 유배처의 지아비를 찾아가던 송덕봉이 마천령(蘑天嶺)을 넘으며 읇었다는 詩다.

 

 

  行行遂至磨天嶺

걷고 걸어서 드디어 마천령에 닿으니

 

  東海無涯鏡面平

없는 동해 바다 거울처럼 판판하구나

 

  萬里婦人何事到

만리길을 부인이 무슨 일로 왔던가

 

  三從義重一身輕

삼종(三從)의 의는 무겁고 일신은 가벼워서라네


 

 

- 덕봉이 미암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

 

엎드려 편지를 보니 갚기 어려운 은혜를 베푼 양 하였는데 감사하기가 그지 없소

단 군자가 행실을 닦고 마음을 다스림은 성현의 밝은 가르침인데

어찌 아녀자를 위해 힘쓴 일이겠소.또 중심이 이미 정해지면 물욕이 가리우기 어려운 것이니

자연 잡염이 없을 것인데 어찌 규중의 아녀자가 보은 하기를 바라시오.

3.4개월 동안 독숙을 했다고 고결한 체하여 은혜를 베푼 기색이 있다면

결코 담담하거나 무심한 사람이 아니오.인정하고 결백하여 밖으로 화채(華采)를 끊고 안으로

사념이 없다면 어찌 꼭 편지를 보내 공을 자랑해야만 알 일이겠소.

곁에 지기의 벗이있고 아래로 권속과 노복 들이 있어 십목(十目)이 보는 바이니

자연 공론이 퍼질 것이어늘 꼭 힘들게 편지를 보낼 것까지 있겠소. 이로 본다면 당신은

아마도 겉으로 인의를 베푸는 척하는 폐단과 남이 알아주기를 서두르는 병폐가 있는 듯하오

내가 가만히 살펴보니 의심스러움이 한량이 없소 나또한 당신에게 잊지못할 공이 있소.

가볍게 여기지 마시구려. 당신은 몇 달 동안 독숙을 하고서 붓끝의 글자마다 공을 자랑했지만

나이가 60이 가까우니, 만약 그렇게 한다면 당신의 건강을 유지하는 데 크게 이로운 것이지

결코 내게 갚기 어려운 은혜를 베푼 것이 아니오

하기사 당신은 귀한 관직에 있어서 도성의 만인이 우러러보는 처지이니

비록 수개월 동안의 독숙도 사람으로서 하기 어려운 일일 것이요

나는 옜날 당신의 어머니가 돌아 가셨을 때 사방에 돌봐주는 사람이 없고

당신은 만리 밖에 있어서 하늘을 향해 부르짖으며 슬퍼하기만 했소

그래도 나는 지성으로 예에따라 장례를 치루면서 남에게 부끄럽지 않게 했는데

곁에 있는 사람들이"묘를 쓰고 제사를 지냄이 비록 친자식이라도 이보다 더할 순 없다"라고 하였소

삼년상을 마치고 또 만리의 길을 나서서 멀리 험난한 길을 가는데 이것을 누가 모르겠소

내가 당신한테 한 이런 지성스런 일이 바로 잊기 어려운 일이오

당신이 몇 달 동안 독숙한 공을 내가 한 몇 가지 일과 서로 비교하면 어느 것이 가볍고

어느 것이 무겁겠소

원컨데 당신은 영원히 잡염을 끊고 기운을 보양하여 수명을 늘리도록 하시오

이것이 내가 밤낮으로 바라는 바이오.나의 뜻을 이해하고 깊이 살피기를 엎드려 바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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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암이 서울에 홀로 지낼제  여색을 탐하지 않으면서  당신을 위해서 잘 참고 있다는

 요지의 편지를 부인게게 보냈던 모양. 이에 덕봉이 젊잖은 톤으로 일갈하는 내용이다 .

그 시절만해도 시집을 가는 게 아니라 장가를 드는 시절인지라, 해남사람이었던 미암이

덕봉의 친정 담양 대덕땅에 살았다는 사실도 상기할 팰요가 있다.

일만리를 걸어 종성으로 유배간 남편을 찾아갔더니, 종으로 딸려보냈던 계집아이가

미암의 딸을 주렁주렁 낳아놓아 그 처리 문제로도 골머리를 썩인 모양.

이 밖에도 이런 저런 그 시절의 생활상이 가감없이 적나라하게 기록되어있어

 '미암일기'는 그  가치를 높게 평가받는 것이다.

 

  

 

 미암의 처 송덕봉이 담양 대덕에서 자그만치 만리길이나 되는 함경도 종성까지 오갔으니

집을 지키는 며느리의 고초 또한 대단했을 터,

 

  하서는 당신의  딸에게도 위로의 시를 한 편 보낸다.

 

 

與柳氏女

유씨에게 시집 간 딸에게...


 

我友在朔方

내 친구는 북방에 귀양 가 있고

汝夫隨萬里

네 지아비도 만리를 따라 갔구나

秋風意無窮

가을바람에 시름겨운 생각 그지없는데

野菊盃觴裡

          들국화가 술잔 속에  떠 있구나.      

 

 

 

 바깥 사랑채

 

 

 

 부처꽂 군락

 

 

 

 비에 젖은 무궁화

 

 

상사화 한 무더기

 

 

 

대한민국 홍매 중 최고의 화려함을 자랑하는 미암매

저 미암매도 하루 빨리 썩어가는 부분을 관리해야 할텐데...

 

 

 지난 봄 날의 미암매

 

 

 

 내남없이 굼꾸는 이상향은 바로 이런 모습...?

 

 

 

 


 

 

 

 

 

長田이씨 고택 사랑채 - 전남 민속자료 제 41 호 

(담양군 창평면 장화리)

 

비날론을 만든 저 유명한 월북 과학자 이승기 박사의 생가다.

고종 1 년에 건축된 건물로 특이한 점이 많은 건물이다.

 

 

여러번 찾아왔지만,  

쥔장의 완곡한 거절로 단 한 번도 안채는 아직까지 들어 가 보질 못 했다. 

객의 안채 출입을 거의 무표정한 얼굴로 거절하는 쥔장의 모습을 보면서.

지극히 내 개인적이고, 다소 조심스런 느낌을 피력하자면

 

'도대체  이데올로기 피해자로 얼마나 시달림을 받았으면....'

 

 

 

 지난 봄 날의 長田

 

위의 고택 바로 앞 쪽에 자리한  이종문 (子 이웅)씨 댁의 고매(홍매)인데

명매에 대한 대접이 너무나 소홀한 듯.

나팔꽃 넝쿨이 매화나무를 휘감아 오르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 역시 관리를 잘 해야 할텐데.....

정녕, 고매와 명매에 대한 소중한 가치를 알아보는 안목이

담양 고을엔 존재하지 않는단 말인가?

 

정녕, 안타까운지고....!

 

 

 

 


 

 

 

 

 

 담양 창평면 장화리 홍주송씨 종택 하심당(下心堂)

 

딱 한 송이 고고하게 피어난 백련에서 쥔장의 고고한 성품이 느껴지는 듯.

 

 

 

 

 河觸을 답으려다 가슴 다친 피울음이 蓮燈으로 피어나면
청아! 내 딸 청아, 너를 찾는 아비 목소리 바람결에 떠돌고

 

- 백여 고 중 영 -

 

 

 

 하심당 원림의 핵심이랄 수 있는 고매

 

당양땅  모든 고매(홍매)의 어미목이 아닐까...?

집 뒷편 대밭을 따라 오르면 만날 수 있는데, 이 역시 관리가 문제라.

지난 봄 그렇게도 쥔장에게 부탁했건만 아직도 고매즐 중심으로 한

일정 반경의 복토를 걷어내질 않고 있었다.

 

 숨 쉬기가 거북하다는 모습이 역력히 느꺼지고 있었는데....

 

 

 

지난 봄 날의 하심매

 

 

 

지난 봄 날

하심당 다실에서 차를 마시며 바라본 마당 왼편에 선 홍매

 

 

 

 

 


 

 

 

 

 

 

문화유씨 종택 와송당(臥松堂) 누마루에 내걸린 편액

- 당양군 창평면 해곡리 -

 

 일명 '와송당의 정침(臥松堂의 正寢)'이라고 불리는 문화유씨의 종가.

성종 경인년(1470)에 증이판행훈도인 유문표가 창평에 들어와 이곳에 살기 시작하였고,

중종조의 명신인 정간공 우석헌 선생의 태지이기도 하다.

명종 임자년(1552)에 송강 정철(松江 鄭澈)이 문화유씨(文化柳氏) 석헌(石軒) 손녀와 결혼,

신방으로 사용하기도 한 곳이다.

 


 

 

문화유씨 담양 유종헌(柳宗憲) 가옥(家屋)

-문화재자료 제192호 -

(지난 봄 날의 모습)

 

와송당의 정확한 건립연대에 대한 문헌은 없으나

송강의 4남 정홍명의「維村外家舊業重修上樑文」에 의하면 1647년에 대중수를 하였고

1919년에 와송당 정침구조의 변화가 생겼다.

본래 정침(안채)는 터진 입구자형(□)으로 원래는 대청 8칸(정면4칸, 측면2칸)을 중심으로

양측 횡각(橫角)에 부엌과 방이 있었으나 1919년 정침(正寢)을 5칸으로 개조하고

2칸 대청과 좌우에 방 2칸과 좌편에 부엌 1칸 구조로 만들었다고 한다.

현재는 양횡각이 없고 대청만 남아있는 전남지방에서는 보기드문 특이한 모양을 갖추고 있다.

이와같은 내용은 현존 건물의 양측 칸과 중항 3칸을 잇는 부재의 특징과 가구법의 차이에서 알 수 있듯.

중앙 3칸은 1647년 전후에 지어지고 양측간의 1919년 이후 변화된 구조로 파악된다.

 

와송당 삼문매

 

큰일 이었다.

언제부터인가 한쪽 가지가 시들시들 하더니만 기어히 죽고 말았다.

지금 당장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을 시 

머지 않아 나무 전체가 고사하고 말게 분명해 보이는데.

 

이런 보물을 알아보는 안목이 담양의 고위 당국자들 중에 단 한 명 이라도 있었으면....!

 

 

 

지난 봄 날,꽃을 피워내던 삼문매

 

 

 

 

가옥의 특징은 앞마루의 중앙에 있는 2개의 기둥 상부를 측면에서 보면

주두 밑보아지의 돌출된 머리 위에 연봉을 새겨넣

무익공 장식을 한 점과 전면에서 보면 투각한 첨차 위에 소로를 물려

처마도리 밑 장혀를 받게 결구 한 점이다

  

 

 

 대청의 전면 벽에 있는 내진주 상부의 퇴량 위에 고졸한 쇠서를 두어 장식한 점이 특이하다.

 비록 이러한 장식 수법은 대청 칸에서만 볼 수 있지만

고려시대 민가의 유일한 유구인 맹씨행단의 것과 상통되는 점이 있음은 물론

이 지역의 전통 주택에서도 보기 드문 화려한 장식을 갖고 있다.

 

 

 

안채 마루에서 내려다 본 모습

 

 낮은 구릉을 배경으로 배면과 좌우가 늘 푸른 대나무 숲으로 둘러 쌓여 있는

경사진 남향받이 건물이다.

이곳에 정침을 중심으로 동쪽으로 좀 떨어져서 북쪽으로 물러나

가묘가 있는 공간 얼개는 조선시대 반가의 배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정침의 평면은 왼편부터 부엌, 안방, 대청 2칸, 방으로 구성되고

전퇴와 우측퇴를 가진 일반형 평면이다. 대청과 퇴의 바닥은 모두 우물 마루이고

 연등천장으로 되어있다.

가구형식은 5~6단의 부정형 막돌 쌓기 기단 위에 덤벙 초석을 놓고

전면에는 원추를, 측면과 후면에는 방주를 세운

반칠량가로 무익공양식의 겹처마팔작집이다. 

 

(와송당 건축 양식에 대한 내용은 "광주 민학회 카폐" 내용을 참조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