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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탄생 500 주년, 다시 하서를 생각하다. 2편 필암서원

 

 

 

- 필암서원-

장성군 황룡면 377  원필암마을 (사적 제 242호)

 

하서 김인후를 배향한 서원으로 1590년(선조 23) 문인들의 발의로 장성읍 기산리에 세워졌으나

1597년 정유래란으로 소실되었으며 1624년(인조 2) 황룡면 증산동으로 위치를 옮겨 복설하였다.

1622년(현종 3) 유생들의 상소로 '筆岩'이라는 賜額(사액)을 받았으며,  1672년 수해의 우려로

지금의 필암리로 옮겨 다시 세웠다. 1786년(정조 10) 하서의 제자 고암 양자징이 추가로 배향되었다.

 

 

 

 

날아오를 듯 경쾌한 처마선이 눈 맛을 시원하게 한다,

약간 고개를 숙여고 드나들도록 만든 출입문은 이 곳이 강학의 공간이요

성현의 주향처니 마음을 낮추고 예를 갖추라는 뜻.

문루(門樓)에 내걸린 편액 廓然樓(확연루)는 우암 송시열(尤庵宋詩烈)의 서체다.

 

 

 

 

2층 누각 안쪽에도 똑 같은 편액이 하나 더 걸려있다

 

편액을 쓴 송우암이라...... 

 

.

 

 

 

宋尤庵 受命 遺墟碑 (송우암 수명 유허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50호

전라북도 정읍시 수성동

 

숙종 15년(1689) 2월에 제주도로 귀양갔던 송시열은 조정의 명령으로

서울로 다시 끌려오던 도중  6월 7일 밤 정읍에 도착, 객사에서 사약을 받고

다음날 새벽 숨을 거둔다. 후로 송시열의 무고함이 밝혀져 숙종 21년

정읍 하모리 모촌에 고암서원을 세우고 영조 7년(1731)에는

그가 사약을 받았던 자리에 이 비를 세웠다.

현재의 비각은 1925년에 군수 이동한이 다시 세운것이다.

 

 

 

 

 

 

어릴 적부터 총명하고 기골이 뛰어나게 장대하여 남다른 인물이 될 수 있는 자질을 갖추고 있었으며

성장 과정 동안 만났던 스승들(송이창, 김장생/김집) 또한 조선 최고의 지성들이었다.

특히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과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부자(父子)는 율곡 이이 학통의 적통이었으며

관념적인 성리학을 현실적인 예학(禮學)으로 발전시켰다.
 
우암은 이 예학을 실제 정치 현실에 적용시킨 용공부(用工夫)의 결론 자리에 위치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사후(死後)에 그는 유가의 성인에게 붙이는 자(子)가 붙여져 송자(宋子)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조선 문명사에 지대한 영향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당쟁을 조장한 인물로 회자되고 있으며 그를 이야기할 때

‘소인배에게 보내는 공허한 찬사’라고 까지 표현될 정도로

평가가 극과 극을 달린다는 것이 역사적 인물 송시열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송우암은 1635년에 봉림대군(뒤에 효종)의 스승인 사부(師傅)관직으로 출발하여

이율곡의 계열인 서인의 영수로서 한평생 그의 이념을 실천하고

 반대파들로부터 사상을 지키는 완고한 인생을 살다갔다.
 
74세 되던 해에 모든 벼슬을 버리고 화양동에 은거하였다.

 83세(숙종15년)에 왕세자(경종)가 책봉되자 이를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에 안치되고 이어 국문(鞠問)을 받기 위해 상경하던 도중

 남인의 책동으로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질긴 생을 마감한다.

 

 

 

 

송우암의 초상화를 보노라면 마치 옹골찬 기개의 무인을 보는 느낌이다.

'확연루' 서체를 보면서 어쩌면 초상화 속의 우암과 저리도 잘 어울릴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확연루에 올라 바라본 청절당

 

 

 

 

마당 양편으로 매림이 조성되어 있다.

 

 

 

 

청절당 옆으로 난 문을 통해 강학 공간으로 들어서게 된다

 

 

 

 

청절당(淸節堂)

 

유생들의 강학공간으로 중앙은 대청으로 되어있고 좌우에 협실이 딸려있다.

옛 진원현의 객사를 옮긴것이라고 한다.

 

 

- 하서를 그리며  -   송강 정철 (내부 편액)

 

 

東方無出處

동방에는 출처 잘 한 이 없더니

 

獨有湛齋翁

홀로 담재옹(하서의 다른 호)만 그러하였네

 

年年七月日

해마다 칠월이라 그날이 되면

 

痛哭萬山中

 통곡소리 온 산에 가득하였네

 

 

 

 

 

 

 대청 안 쪽에 걸린 청절당 편액은 동춘당 송준길이 썼으며

바깥쪽의 필암서원 사액 편액은 병계 윤병구(장암 정호의 제자)가 쓴 것이다.

 

 

 

 "하서집을 읽고"   -고경명- ( 내부 편액)

 

 

高矣河西子。如天不可階

높도다 하서 선생이여, 하늘같이 높은 경계라서 감히 오를 수  없네.

 

斯人今寂寞。此道已沈埋。

선생께서 이제 돌아가셨으니 선생의 도 또한 묻히고 말았네.

 

寶稿披蘭雪。虛襟罄沐齋

보배같은 유고 난초  흰 눈을 펼쳐놓은 듯,  맑은 심성 씻어낸 듯 깨끗하구나.

 

文章方日下。三復有餘懷。

햇살 가득한 선생의 문장,  세 번 되내어 읽어도 미련만 남네

 


 

 

 

 

 

해마다 청절당에서 열리는 하서 추모 백일장

아래는 지난 2008년 장원작이다

 

 

             筆巖院謁麥秋陽  咳唾如廳景慕長

                필암서원 보리익을 때 절하니, 기침소리 들린듯하여 공경하는 마음 길고 길어


             卓瑩文章千古鑑  淸高節義萬年綱
                높다란 문장은 천고의 거울이요, 맑은 절의는 년의 기강일세


             洛閩脈絡繼承地  洙泗淵源傳授鄕
                
낙민의 학맥을 이어받은 지역이요, 수사의 연원이 전수된 고을일세


             懿蹟英名誰不仰  遺芳百世塋永宣揚
                
아름다운 유적과 훌륭한 명성을 누가 우러르지 않을손가, 남기신 향기 천백세에 길이길이 선양하리라

 

 

 

 

 


 

경장각 (敬藏閣) 

 

하서 김인후선생을 문묘에 배향코자 할 때 정조가 내탕금(內帑金)으로

경장각을 세웠으며 인종이 하사한 묵죽도의 판각을 보관하는 곳이다.

팔작지붕으로 귀공포와  네 모서리의 용머리가 볼 만 하다.

 

 

 

 

 

 

정조대왕의 친필, 

 

왕의 글씨는 똑바로 쳐다봐선 안된다는 의미에다

이런 저런 훼손까지를 걱정하여  망사를 씌워 놓은 모습이다.

 

 

 

 

 

계생비(繫牲碑)

 

향사의 제물로 쓰일 가축을  이 비 앞에 가져와 충둔례를 행한다.

 비문은 연재 송병선이 지었고,  전서는 동강 김영한이, 앞면의 글씨는 봉사 송일준,

뒷면의 글씨는 해관 윤굥구가 각각 썼다.

 

 

 

 

祐東祠 (우동사) 

 

하서 김인후를 주향하고  제자 고암 양자징을 종향으로 모신 사우로서

주자의 글씨를 집자한 편액이 걸려있기도 하다.

 

 

 

 

 

어느 건물이고 간에 핵심이되는 공간이 있기 마련이다. 

동 서재, 청절당, 우동사 등의 당우에 둘러싸인 마당이  바로 필암서원의 중심이요 핵심.


 

 

 

 

- 원진각 -

필암서원 유물전시관

 

 

 

 

보물 제 587 - 13호 봉심록

 

인조 2년(1624)부터 숙종 24년(1701)까지 필암서원 방문자들의 명단을 기록.

 

 

 

 

 

 

 필암서원 집강안(執綱案)

 보물 제 587 - 3호 /  1책 19장 /

 

조선 영조 28년(1752)에서 고종 24년(1887) 년간 필암서원의 원장 등

서원의 소임을 맡은이들의 명부.

 

 

 

 

 

 

문계안(文契案) 

보물 제 587 - 4, 5호

 

서원의 강회(講會) 주관자 및 참가자들의 명단과 조약을 기록한 문서

 

 

 

 

 

교지 (敎旨)

 

1796년(종조 20년) 10월16일 김인후의 시호를 文正으로 한다는 내용.

 

 

 

 

 

교지 (敎旨)

 

1796년(정조20년) 10월16일 김인후의 시호를 文正으로 추증하고

품계를 정1품인 '대광승록대부'로 올린다는 내용.

 

 

 

 

 

교지 (敎旨)

 

1796년 (정조20년) 9월17일 하서 김인후에게 내린 추증 교지로서

이조판서에서 영의정으로 품계를 올려 준다는 내용이다.

 

 

 

 

 

 

하서가 쓰던 옥으로 만든 인주함

 

 

 

 

 

 하서가 썼다는 옥필

 

 

 

 

 

 하서가 쓴 단계석 벼루

 

 

 

 

 

 

 

초서의 경지가 대단했다는 하서의 친필(부분)

 

 

 

 

 

 

인종이 세자 시절 스승인 하서에게 내렸다는 묵죽도(墨竹圖)

 

34세 때 홍문관 박사(博士)에 시강원 설서(設書)로 세자를 가르치게된 하서.

  군왕의 자질이 충만한 세자와 현신(賢臣)의 궁합은 가히 환상이었던 모양, 

하서의 인품과 학문에 감공한 세자는 온갖 예우를 다 했고,

 손수 묵죽도(墨竹圖)'까지 그려 선물하는 정성에다

궁중에 있던 <주자대전> 한 질까지 하서에게 선물하는 등 온갖 정성을 쏟았다고.

위의 묵죽도 왼쪽 하단에는 세자의 청으로 하서가 쓴 시가 들어있다.

이를테면 세자와 스승의 합작도인 셈

 

 

                           

根枝節葉盡精微

뿌리 가지 마디 잎이 정밀도 하여

                

 石友精神在範圍  

굳은 돌은 벗인양 주위에 들어 있네  

                           

 始覺聖神모造化 

성스런 우리 임금 조화를 짝 하시니     

                           

一團天地不能違  

천지와 함께 뭉쳐 어김이 없으셔라

 

 

 

 

 

 

 

- 2010, 8. 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