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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탄생 500 주년, 다시 하서를 생각하다. 3편 도학의 발자취

 

 

 

화정 (百花亭)

 

- 오석에 적힌 내용을 옮겨보면 이렇다 -

 

백화정은 1552년에 건립된 하서선생의 외헌(外軒)이다.

민씨할머니께서 낙남(落南)하여 손수 잡은 이 집터에서  태어나신 선생은 선고의 유명을 받들어

복상중에 서둘러 사당과 외헌을 짓고 안채를 개축하였다.

난산을 바라보며 죽림에 둘러싸인 백화정은 선생의 지극한 효성과 충절이 서려있는 곳이다.

선생은 1549년에 순창에서 대학강의발(大學講義跋)과 천명도(天命圖)를 짓고

1550년에 맥동본가로 돌아온 후 10년 동안 오로지 학문에 전심하셨다.

노소제(盧蘇齊), 이일제(李一齊), 기고봉(奇高奉)과의 강론과

질정(質正) 선생의 심오한 도학(道學)을 집약한 주역관상편(周易觀象篇)과

서명사천도(西銘事天圖)의 저술이 모두 여기에서 이루어졌다.

뜰에 서면 백화(百花)를 심어 완상하고 천시(天時)를 살펴

천명(天命)에 화순(和順)함을 노래한 

자연가(自然歌)가 들리는 듯하다.

 

 

 

 

 

- 장성군 황룡면 맥호리 196 맥동마을 소재 -

 

1592년 임란으로 소실되었던 것을, 하서의 손자 南重이 중건하였으나 한국전쟁 때 재차 소실되었다.

1961년 후손들이 다시 복원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3칸 대문과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관직에서 물러난 하서는 이곳에 거처하면서 학문 연구와 제자 교욱에 힘을 쏟았다.

노수신의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을 비판하여 퇴계와 고봉이 노수신의 설을 반박케 한 것이나

서경덕의 학문이 下學을 소홀히하는 것을 비판하는 등, 조선 성리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주역관상편(周易觀象篇), 서명사천도(西銘事天圖) 등 여러 주옥같은 저술들이  이 곳에서 대량 집필되었다.

말하자면, 하서 김인후 성리학의 모든것은 이곳에서 완벽하게 완성되었던 것이다.

 

 

 

 

 

 

 백화정 마루에 서면,

들판을 가로질러 동화면 쪽으로 가는 도로 끝자락에 위치한 난산(卵山)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인종은 과연 병으로 죽은 것일까?.  

인종이 10년만 더 살았더라도 정암 조광조의 지치주의는 하서를 통해 다시 꽃을 피우지 않았을까?

 하서는 이기(理氣)를 포괄한 대심(大心)철학자이다. 배타보다는 포괄, 분석보다는 회통을 중시했고

모든 사물을 같은 생명차원에서 교감한 인물.

 

그의 학설을 살펴 보자면...

「심(心)은 일신만사(一身萬事)의 주재자다. 그러나 심만으로 주재가 되는 것은 아니고 심에 내재한 이(理)를 타야만

주재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먼저 심을 정위(正位)시켜야 하는데 이 공부가 구방심(救方心), 입대본(立大本)의 경(敬)이요,

밝혀진 대심(大心·至理)을 다시 밖으로 확충해나가는 과정과 추진력이 수도요 지성(至誠)이다.

이 지성으로 진기성(盡己性)―인성(人性)―물성(物性)해서 천지의 화육을 돕고 천지와 상삼(相參)함으로써

우주생명의 대역사를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는 부모요 인간은 형제며 만물은 동포다.

어찌 이물(異物)로 대할 수 있겠는가. 오직 순수감정으로 교류하고 사랑할 뿐이다.

천지를 슬퍼하고 만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돌아갔을 때

정반(正反) 시비(是非) 득실(得失) 호오(好惡)가 가려질 것이니

여기서 정치가 시작되는 것이다.

 

하서가 단순한 성리학자가 아니라 차원이 다른 도학자임을 알수 있는 대목이다

.이러한 그의 학문과 사상은 과정을 중시하는 김안국의 온건한 학풍을 이어받은 것으로 조광조의 과격과 급진

그리고 고집과 배타 등의 약점을 보완하기에 넉넉하다.유가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교육도 중요하지만

국가 경영의 중심무대인 정치에 나아가지 않으면 안되고 특히 군왕과 의합(意合)해야 한다.

 

(인터넷 상에서 구한 자료 참조)

 

 

 

 

 

 

 정려각과 하서선생 유허비

(맥호리 186 맥동마을)

 

행주기씨(幸州奇氏)와 태인박씨(泰仁朴氏)의 순절을 기린 정려로서

선조대에 나라로부터 정표를 받았으며 1683년(숙종 9년)에 장성 유림이 건립하였다.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이며 내부에 정려비(1683)가 있다.

 

 

 

 

 

 1929년에 세운 문정공 하서선생 유허비

 

 

 

 

 

왼편의 열녀는, 고봉 기대승선생의 딸로서 하서의 손자인 선교랑 남중(南重 1570 - 1636)의 처다. 

정유재란 때 친정에서 남편집으로 가다 일본군을 만나 손목을 잡히자 팔을 잘라버리고

물 속에 투신하여 절개를 지킨 인물이고,

 

오른편의 열녀 태인박씨 역시  김인후의 손자인 중곤(仲聰)의 처로,

일찍이 남편을 여의고 정유재란 때 피난을 가다가 일본군을 만나 피하기 어렵자 역시 물 속에

투신하여 절개를 지킨 인물이다.

 

 

 

 


어사리(御賜梨) 나무  

(열녀비각 뒷편에 자리하고 있다)

 

- 나무 앞에 적어놓은 비문의 내용은 이렇다 -

 

 

인종이 동궁 시절 묵죽도를 그려 하사하면서 제시를 짓게한 후, 배 세 개를 내렸다.

한 개를 맛 보니 매우 달고 시원하였다. 선생은 배 두개를 보물처럼 간직하였다가 맥동마을

죽림하에 그 씨를 심엇다. 잘 자라고 열매가 탐스러웠다. 후손들은 이 나무를 어사리라 부르고

정성을 다 해 가꾸고 지극히 애호하였다. 배 꽃이 활짝 핀 달밤이면 어라리에 읍 하고,

성은과 충절을 기리고 감읍하여 취흥에 젖곤하였다. 세 번 노사(老死)하였으나 다시 살아나

사백여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고 있으니 보는이마다 성충(誠忠)이 소감(所感)한 바라 이른다. 





 

 

어사리나무 옆에서 바라본 난산

 

 

아래는 하서가 인종을 그리며 쓴 시다.

 

 

 

 

    임의 나이는 서른이 되어 가고, 내 나이는 서른여섯이 되는데

 

 

    새 즐거움 반도 못 누렸건만, 한 번의 이별은 활줄 떠난 활 같네

 

 

   내 마음 돌이라서 굴러갈 수도 없는데. 세상일은 동으로 흘러가는 물 같아

 

.

한창 때 해로할 임 잃어버리고, 눈 어둡고 이 빠지고 머리마저 희었네.

 

   

    묻혀 살면서 봄가을이  몇 번이던가. 오늘까지 아직도 죽지 못했소

 

 

  잣나무 배는 황하 중류에 있고, 남산엔 고사리가 돋아나는 데

 

 

    도리어 부러워라, 주나라 왕비가, 생이별 하며 도꼬마리를 노래하다니

 

 

 

 

 

 

하서선생 묘소 전경

 

왼편 까만 비석 뒤로 보이는 두 기의 묘는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묘다.

오른편은 시아버지 종호(하서의 차남)의 묘이고, 왼편은 며느리 기씨의 묘인데

팔 하나만 장사 지냈다는 뜻에에 일비장(一臂葬)으로도 불리우기도 한다.

기씨는 시아버지 종호의 아들 남중의 처로 기고봉의 따님이기도 하다.

가운데 윗쪽으로 조금 보이는 곳에 하서선생의 묘가 있다.

 

 

 

 

 

장성 김인후 신도비 

- 전라남도 기념룰 제 219호 -  (황룡면 맥호리 산 25번지)

 

 

하서 김인후(1510 ~ 1560) 선생을 기리기 위해 1742년(영조 18년)에 세운 비로

비문은 1682년 송우암이 지었으며 글씨는 이제의 것이다.

전후면에 각 19행씩 양 측면에 각 8행씩 모두 54행 54자의 내용이다.

높이 218cm,  넓이 95cm, 두께 40cm,

 

도의와 절의, 문장을 갖춘 하서의 생애와 행적을 적은 내용으로

하늘이 우리나라를 도와  태어나게 하신 하서 김선생은

 '태산북두'와 같은 백세의 스승'이라 칭송되어 있다.

 

역사적, 학술적, 향토사적 가치를 인정받는 비 이기도 하다.

 

2003년에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

 

 

 

 

 

 

신도비  옆에 세운 뉴 신도비

 

1983년 새로운 신도비를 원래의 신도비에서 약 십여미터 떨어진 곳에 새로 세웠다.

본래의 신도비문 내용에다 이후로 변경된 내용을 덧붙인 것이다.

높이 300cm, 넓이 105cm, 두께 73cm.

 

 

 

 

 

하서선생의 묘 앞에 새로 추가된  백마 한 쌍.

흙의 색깔을 보아하니 바로 엊그제 새로 세운 것으로 보인다.

 

 

 

 

 

부인 여흥윤씨와 합장되어있는 하서선생의 묘비

 

 

 

 

華表鶴 (화표학)

 

 

 

 

平原極望路沼沼

 

끝없는 벌판 갈 길 멀다

 

 

 

有柱倚空千尺高

 

천길 화표주 華表柱 하늘로 솟았네

 

 

 

玄裳縞衣何處客

 

검정치마 흰 저고리 어디로 가는 길손일까

 

 

飄然自是天仙曺

 

표표히 날아든 하늘 신선

 

 

 

徘徊怊悵久不去

 

서글퍼 맴맴 돌아 오랫동안 머뭇머뭇

 

 

 

向來郭皆蓬蒿

 

옛 성곽엔 쑥대만 남았다오

 

 

 

長吟一聲天宇闊

 

길다란 울음소리 하늘에 번지오

 

 

 

萬里斜風吹雪毛

 

만리를 부는 바람, 눈빛 터럭 불어가네

 

 

 

 

 

 

 

 

 

病鶴 (병학)

 

 

 

 

山畔哀鳴知者誰

 

산언덕에서 슬피 울어도 알아줄 사람 그 누구랴

 

 

 

還堪垂翅倚枯枝

 

날개를 드리운 채 마른 가지에 기대었네

 

 

 

回看天際雲猶逈

 

하늘가를 돌아다보니 구름은 아득한데

 

 

 

萬里歸心空自持

 

 만리를 돌아갈 생각 부질없이 지녔구려

 

 

 

 

 

 

나라 요동의 선비 정령위(丁令威)가 신선으로 화했다가,

 

 일천년이 지난 후 학이되어 고향땅으로 날아와

 

 화표주(華表柱)에 앉아 시 한 수를 읊고 날아갔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화표학'

 

영원을 나는 천상의 학을 꿈꾸었던 하서

,

하지만 현실 세상은 그에게 피눈물만 강요하고 만다.

 

비상의 날개를 접을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을 빗대 자신을 병든 학이라 낙망하는 내용.

 

 

 

 

 

 

 

 

 문신석

 

 

 

 

 

 하서 선생 묘 윗 쪽에 자리한 두 기의 묘

 

오른쪽은 하서 부모의 합장묘이고, 왼쪽은 하서 증손자 증손부 합장 묘이다.

하서 부친은 의릉참봉 령이고 어머니는 옥천조씨로 순창이 친정이다.

증손자 형복은 둘째 아들 종호의 큰 아들인 남중의 큰 아들이다.

남중은 4형제를 두었는데 큰 아들이 형복이다

 

 

 

 

 

 

 하서 선생 묘에서 바라본 난산(卵山)

 

지관들의 얘기론 그리 큰 혈처는 아니라고들 하던데....

 

 

 

 

 

 하서선생 묘역을 내려와 아스팔트 길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가면

길 가에 서 있는 또 하나의 정려각을 만나게 된다.

 

이름하여 열녀서녕유씨(1807 - 1831) 정려각

 

울산김씨 남편이 성균관에서 공부하다 젊은 나이로 죽게되자 향리로 옮겨 3년상을 정성스럽게

지낸 다음 날 자결하였다고, 마을 사람들이 이를 기려 1832년(순조 32년)에 월평리에 비각을 세웠으며

1839년(헍옹 5년) 국가로부터 정표를 받았다. 1983년 정려 앞에 철도가 부설되자

지금의 맥호리로 이건하였다. 

 

 

 

 

1839년에 세운 정려비가 서 있고 3개의 현판이 걸려있다.

 

 

 

 

 

내부에 계시된 정려문

 

 

 

 

 

정려비각 뒷편에 자리한 울산김씨 재실

 

 

 

 

 

맥동마을 회관과 정자

하서의 본향답게 를 새긴 비를 세워놓았다

 

 

 

 

 

맥동마을 앞  느티나무 사이로 바라본 난산

 

 

 

 

 

 卵山

 

고향에 은거한  河西는 매년 7월1일 인종의 기일이면

마을 앞 난산(卵山)에 올라 망배단(望哭壇)을 쌓고 북쪽을 바라보며 통곡 하였다고 한다. 

숨을 거둘 때까지 15년간을 계속했다는 망배통곡, 단 하나의 主君이 道의 표상이었을때

 하서는 의로운 길을  택해 그 길을 표표히 걸어 갔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난산 망배단을 오르는 입구에 아담한 교회가 하나 서서 난산을 지키고 있는 듯.

교회명을 보는 순간 떠오르는 이가 있었으니...

 

언제가 읍내 해장국 집에서 식사를 하던 중, 동행자와 주역에 관한 애길 나누고 있었는데

곁에서 식사를 하던 허연수염의 사내가 귀를 세우고 있었던지라 수인사를 나누었는데

그 이가 준 명함에 적힌 교회가 바로 이 곳에 있을줄이야....

 

도학자 하서와 목회자의 만남이라....!

인기척이라도 있으면 좋을텐데, 불쑥 문을 두드리기가 .....

 

 

 

 

 

 

 장성 김인후 난산비(長城 金麟厚 卵山碑)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41호, 장성군 황룡면 맥호리 105번지

인종(仁宗)의 억울한 죽음에 북망통곡(北望慟哭) 난산(卵山)에 통곡단(痛哭壇)을 세우고

그 사실을 새겨서, 난산의 남쪽 입구에 세운 비이다..

 

 

 

 

 

 

 1793년 무렵 석재 윤행임이 비문을 짓고 이익회가 글씨를 썼으나

비를 세우지 못하였는데, 1843년 그의 아들 교리 윤정윤이 추기(追記)를 쓰고

광주 목사 조철영이 비를 세웠다 

 

 

 

 

 

비문은 비제(碑題)를 포함하여

모두 31행(전 10행, 좌 5행 후 10행, 우 6행), 1행 26자이다.

난산비는 선생의 행적과 정신을 알 수 있으며 국상(國喪)에 따른 당시 제도사를 알 수 있는 등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크다. 2003년에 전라남도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통곡단(痛哭壇)

 

하서라는 인물은 실력 플러스 배경에 이르기까지  어찌보면 모든 배경을 완벽하게 소유한 인물이었다.

성균관에서 퇴계(退溪)를 비롯한 많은 현능(賢能)들을 만났고

특히 스승의 배려로 세자를 가르치는 보덕(輔德)에 올라 차기 대권 주자였던  세자와

군신관계를 넘어선 도타운 의로움과 경애로움까지를 나눠가진 의기 투합한 환상적 복식조였던 셈.

요순시대를 꿈꾸었던 하서에겐 그야말로 일생일대 호기였을 것이다. 

허나 이 모든 신심과 희망은 인종이 즉위한지 1년도 못되어 승하함으로써 물거품이되고 마는 것이다 

하늘이 무너지는 통한의  설움을  하서는 더욱 더 학문으로 승화시켰다.

청상(靑孀)으로 자처하며, 일체의 벼슬을 거부하고 절개를 지켰던 하서

그러한 하서였기에 도의(道義)와 문장(文章)에다 절의(節義)까지 보태지는 것이다.

 

 

 

 

 

 

맥동마을로 들어설 때는 잘 보이지 않던 붓바위 필암

마을을 빠져나갈 때는 금방 알아볼 수 있다 붓바위 다리를 건너기 직전 왼편에 서 있다.

이 붓바위의 영험함으로 이 곳에서 하서가 태어나게 되었다던가....?

 

 

 

 

 

 

단정하면서도 굳센 기운이 느껴지는, 조선 영조 때의 명필 병계 윤봉구의 글씨.

 

 

 

 

 

 

 전북 순창군 복흥면  상송리 소재 낙덕암, 동산위에 낙덕정이 자리하고 있다.

낙향한 하서가 자주 찾았던 곳이라고.

 

 

 

 

 

 

 낙덕정(樂德亭)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72호

 

광무 4년(1900년)에 김노수(金老洙)가 하서의 발자취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하서가 자주 찾아왔다고, 낙덕이란  덕망이 높아 후학들로 부터 존경을 받고, 평소

늘 자연을 벗삼는 김인후의 인품을 상징한 것이라고 한다.

 

 

 

 

 

 

 

훈몽재 (訓蒙齋)

전라북도 순창군 쌍치면 둔전리 45 - 1번지

 

 훈몽재는 하서선생이 명종 3년(1548년) 지금의 위치 점암촌 백방산 자락에 지은 강학당으로 원래 이름은 훈가(訓家)였다. 

송강 정철을 비롯, 고암 양자징, 조희문, 기효간, 변성온 등이 하서선생을 모시고 공부했다고 한다.

말 하자면 당대 유명한 학자들을 배출한 성리학의 산실.

임란 때 훼손된 훈몽재는 선생의 5대손인 자연당 김시서(1652 - 1707년)에 의해 1680년 경 원래의 터 인근에

'자연당' 이라는 이름으로 복원되었다가 퇴락하였다. 이후1827년 후손과 유림들에 의해 점암촌이 복원되었고,

더불어 하서선생과 김시서, 송강 정철, 율곡 이이를 모시는 어암서원이 금방에 건립되었으나

고종 5년(1867년)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에 의해 철폐되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쇠락해 가던 훈몽재는  1951년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던 것을

근래들어 순창군이 복원사업을 펼쳐 2009년 현재의 위치에 복원하게 되었다고.

 

 

 

 

 

 

 

 훈몽재 지석묘 (訓蒙齋 支石墓)

 

크기가 상당한 것으로 봐서 권력자의 무덤으로 추정한다고 

 

 

 

 

 

대학암 (大學巖)

 

 

훈몽재 앞을 흐르는 추령천변에 놓여진 넓은 바위로서

이 곳에서 하서선생이 소년시절의 정철에게  대학을 가르쳤다는 얘기가 전한다

 

 

 

 

 

 

 

 

 

 명정실록에 전 하는 하서에 관한 내용이다.

 

 

앞전의 홍문관 교리(校理) 김인후가 세상을 떠났다.

자(字)는 후지(厚之), 호는 하서(河西), 다른 호는 담재(湛齋)였다. 장성 출신이다.

타고난 자질이 맑고 순수했다.

5~6세에 문자를 이해해 글을 지으면 사람을 놀라게 했고, 커서는 시문(詩文)을 지으면

 청아하고 고묘해 당대에는 비길 만한 사람이 드물었다.

사람들은 그의 용모만 바라보고도 이미 속세의 사람이 아님을 알았다.

시와 술을 아주 즐겼고, 마음이 관대해 남들과 다투는 적이 없었다.

그의 뜻한 바는 예의와 법도를 실천하려는 것이어서 전혀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그러나 잘 모르는 사람은 세상물정에 어둡지 않은가라고 의심하기도 했다.

30세 이후에 문과에 급제해 부수찬을 지내고 옥과현감이 됐으나, 오래지 않아 중종·인종의 상을 당하자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몸이 상해 을사년 겨울 마침내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집으로 돌아간 뒤에는

여러 벼슬이 내렸으나 일절 응하지 않았다.

고향집에 거처하면서는 성현의 학문에 전념해 조금도 쉬지 않고

 사색하고 연구하며 순서대로 힘쓰며 실천했다. 만년에는 조예가 더욱 정밀하고 깊었다.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마음을 기울이면서 상·제례(喪祭禮)에 삼간 마음으로 실천했다.

모든 제사에는 아무리 병중이라도 반드시 참례했고 세속의 금기에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자제들을 가르칠 때에도 효제충신을 먼저하고 문예(文藝)는 뒤에 하게 했다.

남과 대화할 때에도 자기의 견해만 주장하지 않았으나 한 번 스스로 정립한 원칙은 매우 확고해

뽑아낼 수가 없었고 너무 높아 따를 수가 없었다.

해서와 초서를 잘 써서 필적을 따를 사람이 없었다. 51세에 세상을 떠났으며

하서집(河西集)이 있어 세상에 전한다.

 

- 고전문학원 박석무 원장 주해 -

 

 

 


 

 

 

문묘에 배향키로 결정을 내린 정조의 변. 

 

"나만큼 하서(河西)를 잘 아는 사람은 없다"

 

 


 

 

- 2010, 8, 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