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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청빈으로 빚어낸 찻그릇

 

 동짓달 보름달이 휘황한 산소골의 밤. 

희뫼요, 그 뜨거운 불 속에 들어가

또다른 달로 태어나게 될 달항아리.

 

 새로운 가마 그리고 첫 불

 

禪으로 빚어낸 결정체 앞에 무릎을 꿇고

경건함으로 기도를 올리는 희뫼 선생

 

火入

 

희뫼 선생께 격려를 드리기 위하여 모여든 지인 여러분

 

 격려와 담소

 

약한 불로 서서히... 

 

 송선생님과 희뫼선생께서 펼치는

이름하여

월하죽전(月下竹田) 불루스

 

 모두의 정성과 함께  달구어지는 가마

 

'불의 예술'은 과연 어떤 결과물을 내 놓을 것인가...?

 

지극정성으로 올린 정한수

 

수 일 후.

 뜨거운 산고를 치러낸 작품들이 드디어 빛을 볼 시간.

 

수 많은 시간,

공방의 어둠을 밝혀준 램프.

 

 공방 내부로 들어오는 하늘

 

도선일여(陶禪一如)

 

 산소골 희뫼요에서 탄생된 첫번째 결과물. 

그릇 전공의 이방인 부부도 찾아오고...

 

감동 에 또 감동

 

희뫼선생께 작품에 대한 총평을 부탁하니

'초짜 가마'에서 구워낸 작품 치곤 괜찮은 결과랍니다.

 

 

 

 

 규얄문 완

 

삼나무 숲 사이로 보이는 희뫼선생 초옥

 

채 몇 뼘도 않되는 선생의 단칸 초옥에

모처럼 여러 켤레의 신발이 놓이고 나즈막한 다담이...

 

고라니, 맷톨들의 놀이터

 

너무 너무 아름답고 마음에 쏙 들어오는 작품.

 

누군가 득달같이 달려들어  내 놓으라고 

하도 채근을 해 대는 바람에

억지로  내 놓기로  하셨다면서도, 못내 떠나 보내기가 섭섭하신 모양.

 

 초옥 옆, 무성했던 비목의 낙엽이  기와 속에 오롯히...

 

희뫼선생의 달항아리

(금곡숲속미술관 소장)

 

 

달항아리

                                  정영주

 

사내는 달빛을 받아

백토에 붓고 달을 닮은 항아리를 빚는다

흙에다 생기를 불어 넣는 일

달빛의 촉수를 따다가 그 빛만큼만 우려내

흙에 버무려 불가마에 굽는 일

사내는 쑥대머리를 부르며 장작을 땐다

흐트러진 머리칼 고무줄로 질겅 묶고

가마가 불을 흠뻑 받아먹을 때까지

가마의 구멍에 장작을 쑤셔 넣는다

가마가 먼저 익어야 비로소

달항아리를 품을 수 있다는 천 삼백도의 불꽃

가마의 옆구리가 툭툭 터져 새어나온

뱀의 혓바닥같은 불길들

웅크려 앉은 사내를 핥고 또 핥는다

시커멓게 밤이 익고 홀로 이틀 밤낮을

장작불 속에 주저않아

수 백 번 혼절을 거듭하는 사내

달항아리 죽고 또 죽어 다시 태어날 때까지

마침내 사내도 달항아리 될 때가지

황홀의 극한, 그 불꽃이

사라지기 시작할 그 찰나까지

깊은 산골 홀로 진흙 가마 품고 앉아

밤새도록 처자식도 눈 밖에 두고

독한 단절을 견딘다

 

선화 (一止 작)

(금곡숲속미술관 소장)

 

 

 一止 작 禪畵(부분)

(금곡숲속미술관 소장)

 

一止 작 禪畵(부분)

(금곡숲속미술관 소장)

 

 

 

여러 잡인들을 물리치고, 내밀한 가운데 禪으로 빚어낸 그릇.

드디어 가마 속으로 들아가 불의 심판을 기다리게 되는 시간.

 

희뫼선생을 아끼고,

그이가 추구하는 도선일여(陶禪一如)의 세계를 지지하는

이른바 '희뫼사랑' 왕 팬들이 산소골의 가마앞에 속속 모여든다.

 

산소골에 마련한 가마에 처음으로 불이 들어가는지라,

모두의 관심과 정성이

가마 주위의 하늘을 찌르고 서 있는 청죽의 기세다.

 

그릇을 빚어 가마에 넣고 불을 때는 것 까지는 인간의 몫일 수 있지만

흙과 물과 바람과 불이 어우러지고 작당을 해 대면서

인간을 맘껏 조롱하고 희롱하게되는  나머지 세계 만큼은,

 

결코,

어찌 해 볼 도리가 없을 뿐더러  

참견한다고 나서도 결코 내 맘대로 되는 세계가 아니라는 사실이

고금을 통한 진리로 굳어져 있다는데야 어쩌겠는가?

 

기다려 볼 수 밖에....

 

 

며칠 동안 산을 헤매면서도 궁굼하기 짝이 없었다.

돌아오자마자 허겁지겁 쫓아 올라간 산소골의 희뫼선생 초막.

 

무쇠솥에다 찻물을 끓여,

솥 째 방으로 들고 들어와 차를 내 주시는데

며칠 간의 깔깔했던 혀와 목이 일순간 개운해지며 정리되는 느낌.

 

때 마침,

애일당의 강선생님 내외를 비롯, 이방인 부부에다 화순에서

도예를 하고 계신다는 선생님도 올라오셔서 모두 함께

가마에서 나온 작품 감상에 나섰는데

한결같이 감동 일색이었다.

 

희뫼선생의 작품은 한 마디로

'맑고 투명함' 그 자체다'

청빈함으로 빚지 않고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예술세계인 것이다. 

 

다기(茶器). 그것은 그 어떤 것 보다도 내 가까이 있는 물건이요,

자주 손길이 가는 그릇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가장 먼저 고려 대상으로 꼽아야 될 항목은 뭘까?

결코 어색하지 않고, 이질감 없이 손에 착 감기는 맛이어야 한다.

희뫼선생의 작품이 바로 그렇다는 얘기다.

 

 차(茶)는 그냥 마실거리인 음료일 뿐 이다.

그런데 그러한 차를 일러 정신문화의 소산이요

결정체인 꽃이라고 까지 일컫는다.

그렇다면 그것은 단순한 끽다거가 결코 아니라는 말씀.

 

요즘 기준으로 보면 별 그리 신통한 맛을 가진것도 아니요,

엄청 매력있는 뭔가가 확 드러나는 것도 없는 차...

 

헌데,

자그만치 오 쳔 년의 기나긴 역사를 가졌다는 사실을 보면

뭔가 있기는 있는 게 분명하지 않을까?

 

누구나 나름대로 차를 가까이 하게 되는 계기가 있는데

 

가령,

 내 주위에 차 봉지가 굴러다녀서 마셔보는 경우.

준 사람의 성의를 생각해서 마셔보는 경우.

비싸다는데 아까워서 한 번 마셔보는 경우.

다구를 선물 받았는데 썩히기가 뭐 해서 등등등.

 

어찌됐던간에 

어영부영, 그럭저럭 홀짝거리다 보니

인이 박혔다(?)는 경우가 그야말로 다반사요, 대부분은 아닐까...?

 

암튼,

'다선일여'(茶禪一如)를 통해 심오함을 얻으려는

종교인들의 용처에 까지는 이르지 못 하더라도,

 

보통의 우리네 들이 일상 속에서 사색의 시간을 갖고

마음을 다스리려 하는데는  매우 긴요한 물건이요, 

정신적 위안을 얻는 약리적  쓰임새로도 효과가 분명하다고들 한다.

 

이러한 판국이니 어찌 우리가 차를 마시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문제는 

차 한 잔 마시자면, 그게 그리 간단치가 않다는 사실이다.

다소간의 번거로움을 각오해야 한다는 말씀.

 

허지만,

다반사가 지속되다보면 결코 번거롭다는 생각 따위는

전혀 들지 않고, 오히려 즐겁기 짝이 없다는 사실이 재미있다.

 

자연인을 꿈 꾸려면 차를 마셔야 한다.

마음에 쏘옥 들어오는 다기면 더욱 좋고,

그저 그런 다기여도 괜찮다.

 

 다기를 어루만지며 즐기는 한 잔의 차.

 

순간

나와 그대는 곧바로 자연인(自然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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