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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 성주사지(聖住寺址) * 무량사(無量寺)

                     ● 성주사지(聖住寺址) : 충남 보령시 미산면 성주리

                     ● 무량사(無量寺) : 충남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 2008. 11. 7 (금)

 

성주사지 

백제의 법왕이 왕자 시절인 599년에

전사한 군사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창건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면

혹, 백제 왕실의 원찰이 아니었을까?

 

처음엔 오합사(烏合寺)로 부르다가

하대 신라 시절,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온

낭혜화상 무염(無染 : 801~888)이 이 곳에 주석,

사세를 크게 키우고 이른바 성주산파를 개창 하게된다.

 

보령 지역을 기반으로 한 지방 호족이었던 김양(金陽)이

'성인'(聖人)무염을 이 절의 주지로 모셨다하여

성인이 거 하는 절 이라는 뜻의 성주사(聖住寺)로

부르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른다고.  

 

 

한창 번창하던 시절

성주사는 불전 80칸에다 행랑 800여 칸,

수각 7칸 창고 50칸 이었다 하니,

아마도 천여 칸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였으리라.

 

2천여 명에 이르는 엄청난 무염의 문도들이 몰려들었고

그 들을 공양하기위해 쌀을 씻은 뜨물이

성주천을 십리나 흘러내렸다니

그 사세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

 

 

백제의 멸망과 궤를 같이 하는 얘기가 '삼국사기"에 전한다.

 

의자왕 15년 5월

 "백마가 북악에 있는 오합사에 들어가서

불우(佛宇)를 울면서 돌다가 며칠 만에 죽었다"

 

또한 "삼국유사"에는

의자왕 19년에 "오합사에 큰 붉은 말이 있어

밤낮 여섯 시에 사원을 돌았다"

라고 적혀있다.

 

 

성주사는 산 속에 자리하는 절이 분명하지만

전형적인 평지 가람 형식을 보여준다.

 

당대 구산선문 중에 가장 번창했고 장엄했을 성주사가

어느날 역사의 뒤안길로 송두리째 자취를 감추고 만다.

 

"동국여지승람"에 성주사에 관해 전 하길

"성주산 북쪽에 있는데 최치원이 지은 대낭혜화상의 부도비가 있다."

라고 간단히 기술되어 있는데,

 

 후로 자취를 찾을 길이 없는 것으로 봐서

아마도, 임진왜란으로 모조리 불타 없어졌으리라는 중론.

 

 

성주사지 석계단  (문화재자료 제 140 호)

 

금당인 대웅전에 오르는 돌로 된 계단이다.

 

원래 돌계단 양 옆에 사자상을 조각한 측면석이 있어서

그것의 예술성을 인정받아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나

 

1986년 사자상은 도난 당하고

현재는 계단만 남아있는 상태이다

 

 금당터 석조연화대좌

 

금당터 중앙에는 여러 조각으로 깨어진 석조연화대좌의

하대석이 있는데 그 너비로 봐서 대좌 위에는 장륙상에

해당하는 불상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금당 북쪽의 강당터 

 

성주사지의 가람배치를 보면

절터 앞 중문터와 5층석탑 뒤쪽의 금당터,

그 북쪽의 강당터,

금당 동쪽에 남북으로 긴 건물터는

천불전으로 확인되었다고 한다.

 

 

 5층석탑 -  보물 제 19 호

 

성주사지  금당터 앞에 자리하고 있다.

하대 신라 때 조성되었으라고 본다는데. 1층 탑신석 아래 받침석이 놓여있다.

 

고려시대 석탑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형식인데,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 탑은, 굄돌 석탑 형식의 선구격에 해당한다고 한다.

 

높이 6.6m에 이르는 고른 체감률은 호리호리 하고 전체적으로 상승감이 경쾌하다.

 

 

 

성주사지 석등 - 충남유형문화재 제 33 호

 

탑 앞에 흩어진 상태로 있던 것을 1971년 5층 석탑 앞에 복원했다고 한다.

팔각을 기본으로 복원할 때 부근의 판석 4개를 모아 지대석으로 썼다.

 

지대석 아랫돌은 정사각형으로 각 면에 2개씩의 안상(顔象) 조각이 있고

그 위로 여덟 잎의 연꽃이 새겨져 있는 받침이 놓여 있다.

 

옥개석은 아랫면에 일단(一段)의 옥개 받침이 있고 처마가 약간 위로 반전하였다.

조각 솜씨가 거칠고 창에 문의 고정 흔적이 없으며,

 

등을 놓는 내부가 비 실용적인점 등으로 미루어

 4 기의 석탑 보다 시대가 뒤 떨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금당 뒤에 자리한 3 기의 삼층석탑 

 

대개는 중요한 전각 앞 쪽에 하나씩의 탑이 자리하는게 일반적이라는데

통례를 벗어나  네 기의 탑이 절 터의 중앙에 몰려있는 형세다.

비슷한 크기에다 모양도 엇비슷하다.

 

 

 

 2층 기단에 3층 탑신은 전형적인 하대신라의 형식인데

전반적으로 볼 때 아담해졌다고나 할까...!

 

앞 쪽의 5층석탑 처럼 1층 탑신 아래 굄돌을 한 장 끼워 넣었다.

 

 

 

성주사지 동 3층석탑 (지방유형문화재 제 26 호)

 

이중기단 위에 만들어진 3층 석탑으로 면석(面石)과 탑신석에는

우주(隅柱)와 탱주(撑柱)가, 옥개석에는 4단의 층급 받침이 모각(模刻)되어 있는 등,

하대 신라의 전형적인 3층 석탑 형식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1층 탑신석에는 문액(門額)을 새기고 그 안에 자물쇠와 고리를 돋을 새김 하였다.

부도로 추정되어 오다가 "승주사 사적기"에 의하여 사리탑(불탑)으로 확인되었다.

발굴조사 결과, 사지 내의 다른 곳에서 옮겨온 것으로 밝혀졌다.

 

 

 

성주사지 중앙 3층석탑 (보물 제 26 호)

 

이 탑은 함께 나란히 서 있는 탑들과 마찬가지로,

상·하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리고 있다.

 

기단은 각 층의 4면 마다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새겨 놓았다.

그 위로는 1층의 탑신을 괴기 위한 돌을 따로 끼워두었다.

 

탑신부의 1층의 몸돌은 2·3층에 비해 훨씬 커 보이며,

한쪽 모서리가 크게 떨어져 나갔다.

 

남쪽의 한 면에는 문짝 모양을 조각하였고,

자물쇠 모양을 그 가운데에,

 

자물쇠 아래로 짐승 얼굴 모양의 문고리 한 쌍을 배치하였으며,

나머지 공간을 못머리 모양의 둥근 조각으로 채웠다.

 

지붕돌은 몸돌에 비해 넓어 보이며,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고,

네 귀퉁이 끝이 살짝 위로 젖혀져 있는데 그 모습이 가뿐하다.

1층 탑몸돌을 괴는 돌의 형식이라든가, 지붕돌 받침이 4단으로 된 점 등이

통일신라 후기의 모습을 하고 있어 이 때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여겨진다.

 

절터 안에 있는 다른 탑들에 비해 화려함과 경쾌함을 지니고 있으나,

가장 많은 손상을 입어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성주사지 서 3층석탑 (보물 제 47 호)

 

탑 주위에 장식물을 달았던 흔적이 많다,

상대갑석에는 각면의 처마 양끝과 남쪽 중앙에 각각 6개씩의 구멍이 있고

동서남북 중앙에는 각각 8개의 구멍이 있다.

 

또 지붕돌 양 끝에 7개, 중앙에 1개씩의 구멍이 있고,

1층 몸돌을 받는 옥신 괴임에는 각면 모두 양 끝에 2 ~ 4개,

가운데 3 ~ 6 개의 구멍이 있다.

 

낭혜화상비가 세워진 연대와 지붕돌 받침등의 조각 수법으로 미루어

통일신라 말기에 조성된 것으로 짐작된다.

 

 

 

성주사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 (국보 제 8 호)

 

신라 구산선문(九山禪門) 가운데 하나였던 성주산문(聖住山門)을 처음으로 창시한

낭혜화상(郎慧和尙) 무염(無染)을 기리는 비석이다,

 

몸돌을 받치는 지대석 일부가 손상되었을 뿐,

비신과 머리돌이 원래의 모습대로 보존되어 있다,

 

낭혜화상은 신라 29대 태종 무열왕의 8대 손으로

성은 김씨. 호는 무량(無量) 또는 무주(無住)이다.

 

낭혜는 그가 입적한 후에 내려진 시호이다.

12세에 출가하여 821년에 당나라로 건너가 선종(禪宗)을 습득하고

 

20여 년 동안 중원을 방랑하며 병든자와 외로운 자들을 돌보았다.

중국인들이 이러한 그를 지칭하여"동방대보살" 이라 일컬었다.

 

847년에 귀국하여 40년간 성주사에 주석하며

불법을 크게 떨쳐 성주산문을 일구었다.

 

비가 세워진 연대는 비문의 내용으로 보아

그가 세상을 뜬 2년 뒤인 890년(진성여왕 2년)으로 짐작된다.

 

높이 4.5m, 폭 1.57m, 두께 42cm로 신라 부도비 중에서 최대의 것이다.

 

 

 

등에는 육각무늬가 이중으로 새겨져있고 등 중앙의 비좌에는 안상이

새겨져 있는데 그 안에 꽃무늬와 구름문양이 돋을새김 되어 있다.

비신은 까만 남포 오석에다가 바문이 자그만치 5천여 자에 이른다.

규모 면에서나 조각의 솜씨 모두 하대 신라 부도비 가운데 단연

최고 수준의 작품이라는 평이다.

 

낭혜는 그의 시호이고 백월보광은 탑호다.

설악의 오색석사로 출가하여 스물 한 살 때 당나라로 유학하여 선 수행에 몰두하였다.

 

그의 공력에 대하여 당의 여만선사는

 

"내가 수 많은 이 들을 만나 보았지만 이 신라인 같은 사람은 아직 본 적이 없다.

훗날 중국이 선풍(禪風)을 잃어버리는 날에는

중국사람들이 신라에 가서 선법을 물어야 할 것이다"

라고 하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다.

 

낭혜 무염은 현실과 유리되어있던 당시의 교종을 비판하면서

말이나 이론에 억매이지 않고 이심전심(以心傳心)하는 것만이 바른 길이라고 하는

이른바 '무설토론"(無舌吐論)을 주창하게 된다.

 

당시 사회가 직면하고 있었던 모순을 혁파하고 나선 무염에게

당연히 구름처럼 많은 이 들이 모여들어 문도를 이루게 되고

훗날, 구산선문의 하나인 성주산문을 개창케 된다.

 

 

 

부도비가 들어있는 전각 밖에 놓여있는 연화대석

 

유학과 깨달음, 현실참여와 일파를 이루는 바쁜 삶에

종지부를 찍은 낭혜선사, 그의 입적은 88세 때인 888년의 일이다.

 

 

머리 위에 뿔이 하나 솟고 퉁방울 눈에다가 입은 약간 벌린 모양새다.

반대쪽의 귀부가 많이 상하긴 했지만 그 조각 솜씨만큼은

절절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이 비는

 당시 신라 최고의 문장 고운 최치원이 글을 짓고,

그의 사촌동생 최인곤이 글을 썼다.

 

최치원은 이 낭혜화상부도비 말고도

하동 쌍계사의 진감선사부도비, 문경 봉암사의 지증대사부도비,

그리고 경주 초월산의 대숭복사비 등,  

 

네 곳 개창조의 비문을모조리 독식하게 되는데,

그 역시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자신의 뜻을 펼치고자 했으나

 

골품제를 금과옥조로 떠 받드는 왕실의 행태에 실망,

40세에 관직을 모두 버리고 산천에 은거하게 된다.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던 고운과

새로운 패러다임을 추구하던 호족세력이나

선종의 승려들과의 궁합이 잘 맞았기에

아마도 사산비문을 모조리 독식하지는 않았을까 유추해 본다.

 

 

 

성주사지 석불입상 (지방문화재자료 제373호) 

 

강당터의 한쪽에 서 있는데 얼굴의 형태가 말씀이 아니다.

물어보나마나 고추생산(?)과 관계있는 속설의 흔적이리라.

 

조성시기는 알 수 없고 발굴조사 결과 다른 곳에서 옮겨와

세운 것으로 본다는데,

 

시멘트 성형 솜씨는 그냥 애교 쯤으로...?

 

 

 

 

 아담하고도 어찌보면 기품어린 솜씨의 석불입상.

 

다시 한번 성주사지를 방문하고 싶다면

그것은 분명, 저 친근한 석불입상  때문 일러니...

 

 

 

철책을 넘어 들어가 한번 꼬옥 안아보고픈 충동이...

 

 

 

비어있음에서

오히려 충만함보다 더 많은 것을 읽어낼 수 있다는

이 황망함 ... !

 

 

 

샛노란 은행잎 터널을 지나

 

 

만수산(萬壽山) 기슭의 무량사 일주문에 들어서서

저잣거리를 돌아보니...

 

 

 

無量秋色

 

 

 

 사천왕문에 이르는 길

 

 

 

무량사 당간지주 (유형문화재 제57호)

 

고려초에 조성된 것으로

지주나 기단부에 아무런 꾸밈이 없이 소박 단아한 모습이다.

당간지주는 기둥을 받치는 바닥에 원형의 초석을 마련하였고,

돌기둥의 바깥 면에 띠가 양각 되어있다.

 

 

 

無量...

셈을 할 수 없는 경지란 어떤 것일까?

 

만수산(575m) 기슭에 아늑하게 자리한 절집 무량사.

9세기 때의 범일국사가 창건했고

성주산파의 좌장 무염도 이 곳에 머무른 모양.

 

역시 임진왜란 때 불타고 17세기 초에 대대적 중창 불사가 이루어졌다.

그 예로 주전인 극락전과 그 안에 모셔진 아미타삼존불상은 17세기

전반기의 형식을 완벽하게 보여 주고 있다.

 

선승 진묵(震默)대사가 무량수불에 점안을 하고 나서 기분이 좋은 나머지

나무열매로 곡차를 빚어 마시고 호방한 시심을 펼쳤다는 애기도 전한다.

 

 

 

무량사 5층석탑 - 보물 제185호

 

무량사 극락전 앞에 자리하고 있는 웅장한 모습의 5층 석탑이다.


탑을 받치는 기단(基壇)은 1단으로,

둥글게 다듬은 두툼한 석재를 포함한 층단으로 괴임을 만들고

각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을 세웠다.

 

탑신(塔身)은 지붕돌과 몸돌을 한 층으로 하여 5층을 이루고 있다.

네 모서리에 기둥을 세우고 있는 몸돌은 지붕돌에 비하여 높이가 낮은 편이나

전체적으로 알맞은 비례를 보이고 있어 우아하면서도 장중한 느낌을 준다.

 

지붕돌은 얇고 넓으며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가 끝에서 가볍게 들려있다.

지붕돌과 밑의 받침은 딴 돌로 구성되어 있고

받침의 수는 위로 올라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탑의 꼭대기에는 낮은 받침돌 위로 머리장식의 일부가 남아있다.


백제와 통일신라의 석탑 양식을 조화시켜 만든

고려 전기의 탑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백제의 옛 땅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으로 백제의 기법이 이어졌고

통일신라의 시대적인 양식도 계승되었다.


해체공사를 할 때 탑신의 1층 몸돌에서 금동제 아미타여래좌상,

지장보살상, 관음보살상의 삼존상이 나왔고,

3층에서는 금동보살상, 5층에서는 사리구(舍利具)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보물 제 365호 무량사 극락전

 

장중한 형태의 무량사 극락전은

우리 나라 절 집의 건축물 중에서 보기 드믄 2층집으로

대단한 가치를 지녔는데, 보수중 이어서

안타깝게도 전모를 볼 수 없었다.

 

 

무량사 석등 - 보물 제233호

 

높이 2.5m로 5층 석탑과  비례와 궁합이 잘 맞는 모양새로 봐서

탑과 함께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기둥은 날렵하고 8각의 화사석(火舍石)에는 창이 나 있다.

연꽃 장식은 고려시대 양식을 잘 보여준다.

 

1971년 해체 수리 할 때, 보살상이 새겨진 거울 모양의

둥근 청동 원판 2장이 나와 무량사에 보관하고 있다고.

 

 

극락전에 모셔진 아미타삼존소조불

 

 

 

 

 

 산신각

 

 

 

 

 

 

 

 

김시습 영정(金時習 影幀) 

- 충남 유형문화재 제64호 -

 

 

 

무량사 김시습 부도

- 유형문화제 제25호 -

 

매월당 김시습(1436 ~ 1493)의 사리를 안치하였던 팔각원당형 부도.

 

 

 

기단 표면엔 여의주를 희롱하는 용이 새겨져 있다

 

 

이곳 무량사는 매월당이 탈속과 환속을 반복하다

노년에 이르러 자리를 잡고 파란만장한 삶에 마침표를 찍은 곳이다.

 

 

 

유불선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세상을 맘껏 희롱하다

단 한 과의 사리를 무량사에 떨구고  자신의 껍데기를 정리한 매월당.

 

時習이라는 이름처럼

총명함이 지나쳐서 평생을 밖으로 떠돌 수 밖에 없었을까...?

세조에 의한 단종의 폐위를 보고 경주 금오산에 10년 동안 은거하며

저 유명한 "금오신화"를 집필하게 된다.

 

그가 남긴 시만 자그만치 2,200여 수에 이른다는데.

"매월당집" 23권 중에 물경 15권이 詩일 정도다.

 

매월당이 남긴 시에 대하여 오늘날 까지도 의견이 분분한 모양.

운율도 맞지 않는 쓰레기라 폄하 한다는 부류에서 부터

당대 최고란 찬사에 이르기까지...

 

 그가 정작 유불도를 말아먹었던 것 처럼 보이긴 하지만

좁은 소견을 가진 내 눈에 비친  매월당은.

 

껍데기는 붓다의 제자이면서 알맹이와 사상의 근저는

유교에 굳게 뿌리를 두고 있는 골수 유림이라는 느낌이다.

 

언제 한번 부여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는 그의 사리를 찾아가서

"당신은 진정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 

물어볼 작정이다.

 

돌덩어리 외엔 아무것도 남은게 없는 성주사지에서

역사의 꼬투리를 주워보는 재미가 쏠쏠한 것 이었다면

 

천재 시인 김시습이 말년을 보내고 입적했다는 절 무량사에선

무량함에 대한 해답을 얻겠노라 감히 시건방을 떨어보았다.

 

가을.

그것도 농익어 흩어지는 만추여서 였을까?

 

모처럼,

무식한 산적의 머리가 오색단풍으로 물든

경쾌한 날 이었다는 느낌이다.

 

 

참고 : 현장의 안내문, 답사여행의 길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