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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도선불이(陶禪不二) / 희뫼 김형규 처사의 삶

 

                                  지우고 비우는 삶, 백자를 닮아가다

                                         스님에서 도예가 된 김형규씨
                                         절집 가마터에서 새 인연…장성 산골로 ‘환속’
                                         수행하듯 빚은 찻잔에 삼라만상 한 잔 드세요

 

 

 

 

 

 

 

 

도예가 김형규씨는 자신이 좋아하는 백자처럼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살고 싶다.

김씨가 지난해 10월 집터 주변의 흙, 돌, 띠, 그리고 수몰예정지에 버려진 나무를 주워다 만든,

못값 2만8천원이 자재비의 전부인 흙집 툇마루에 앉아 있다.

 

 

 

도예가 김형규(41)씨는 백자를 좋아한다. 담백함과 소박함,

리고 그 안에 깃든 따스함이 좋다.

백자를 좋아하는 그에게 흰색은 인연이 많다.

 

그의 가마터가 있는 곳은 전남 장성군 삼계면 백산 마을.

친구들은 그곳 이름을 따 그에게 희뫼라는 아호를 지어줬다.

그의 도자기 이름도 희뫼요다. 지금 사는 장성군 북일면 운암리 산소골도 그렇다.

 

 

“묘터였으면 묏골이라고 했겠지요. 산소는 범접할 수 없는 신성한 곳에

붙이던 이름으로 소는 희다는 뜻이랍디다.”

 

 

 

 

 

김씨는 제대로 된 백자를 만들려면 만드는 이의 삶이 백자를 닮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청빈하고 검소하게 살려고 한다.

또 백자에서 풍겨나오는 따스함처럼

자신도 만나는 이들에게 그런 따뜻한 존재가 되기를 바란다


실제 그의 삶은 청빈 그 자체다.

지난해 10월 그가 몸소 지은 집은 “가로 열여덟 뼘 세로 열두 뼘”의 아주 작은 집이다.

자재는 집터 주변의 흙과 띠, 그리고 수몰예정지에 버려진 나무를 모아 썼다.

벽과 방바닥에 바른 벽지는 주변 농민들로부터 얻은 사료 포대다.

집 짓는 데 든 돈은 못값 2만8천원이 전부.

 

샘터가 세면장이고, 초막처럼 지은 좁디좁은 공간이 화장실이다.

전기도 없고 휴대폰도 ‘터지지’ 않는다. 집처럼 밥상도 소박하다.

점심은 감자를 삶아 먹고,

저녁은 밥 위에 집 주변에서 뜯어온 나물 몇 가지를 얹어 된장에 비벼 먹는다.

 

누룽지가 다음날 아침이다.

 

 

김씨는 산소골에서 전통적인 방법으로 백자를 만들려고 한다.

“전기가 없으니 발로 물레를 차야 한다”면서도 기쁜 얼굴이다.

옛날 집터는 있지만 지금은 자신이 유일한 주민이라는 점도 마음에 든다.

 

백산의 가마터에서는 금줄을 쳐놓고 작업을 했지만 이따금씩 사람들의 방해를 받았다.

“백산에는 멋들어진 정자가 있어요.

그래서인지 거기서는 이상하게 멋을 부리고 싶고 놀고 싶었어요.

 

”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마음은 눌러도 가끔 솟아나고,

자기를 만들 때 정성은 늘 조금씩 모자랐다.

그가 가족들과 떨어져 산소골로 옮겨온 이유다.

 

가마터를 잡기 위해 1년 가까이 날씨와 바람과 물을 관찰하던 그는 최근 폐가마터를 발견했다.

그 자리에 향을 피우고 삼배를 올렸다.

너무 좋아 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곳에서 도자기를 굽다 돌아가신 조상님들이 심심하셨을 텐데 막둥이가 와서 도자를

굽는다니 얼마나 좋아하시겠어요. 이제 가마터를 어떻게 앉힐지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어요.

분들이 제게 가마를 물려주신 거나 진배없죠.”

 

 

김씨에겐 이처럼 우연 같은 일이 자주 생긴다. 도예가가 된 것도 그랬다.

도예가가 되기 전 그는 스님이었다. 출가 이유도 특이하다.

 

장성군이 고향인 그는 초등학교 4학년 때 교과서에 나오는 바다가 어떤 모습인지 보고 싶어

하루 동안 가출해 바다가 있는 영광군에 다녀왔다.

 

“부모님에게 혼이 났지만 그 하루 동안 제 생각이 훌쩍 자랐어요.

그때부터 함께 놀던 벗들이 어린아이처럼 느껴지더군요.”

스물네 살 때는 스님들의 삶과 생각이 궁금해서 머리를 깎았다.

 

절에서는 또 다른 인연이 그를 기다렸다. 절에서 운영하는 가마터에 갔다가 나무를 때는 모습을 보고

 “태양에서 한 점을 떼내 가져온 듯한 빛”에 반해 도자기 만드는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출가자로 4년쯤 지내자 ‘절집’에 대한 궁금증은 풀렸다.

반면에 도자기 만드는 일에 대한 열망은 커져갔다. 세상으로 돌아오기로 했다.

 “환속해서 도자기를 만들며 수행하겠다”는 그에게 도반들은 차라리 목을 매라며 만류했다고 한다.

 

 

 

그는 수행하듯이 도자기를 만들었다. 도자기가 전시된 곳과 가마터를 다니며 만행을 했다.

박물관은 집 드나들듯 다녔다. 학계에 보고된 전국 24곳의 가마터도 샅샅이 훑었다. 그가 발견한

 

가마터만 7개나 된다.

 

 

 

도예가 김형규씨는 자신이 좋아하는 백자처럼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살고 싶다.

 

 

 

대학을 나온 ‘주류’ 도예가들의 무시에도 분심을 가지지 않도록 마음을 닦았다.

낮아지고 또 낮아졌다.

 “지나고 보니 그들 또한 큰 가르침을 준 고마운 분들”이었다.

 

한때 우리나라 최고의 도자기를 만들겠다는 욕심이 있었다.

실력이 쌓이자 다른 도예가를 무시하는 마음도 생겼다. 그 또한 버렸다.

 

돌아보니 모든 도예가들이 한 모둠 안에 있는,

모두들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훌륭한 사람들이었다.

 

마음을 비우니 도자기를 만드는 자세도 달라졌다.

예전에는 황금비례율, 발색 등 자신이 정한 틀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 틀조차 버렸다.


 

 

 

“다기를 빚고, 가마에 불을 넣으며 상상을 합니다.

노 선승이 핏줄이 드러난 야윈 손으로 오래된 마루에 탁 내려놓을 때

둔탁하지만 경쾌한 소리를 내는 다기,

 

호박단추가 달린 마고자를 입은 촌로가 어디가 예쁜지는 모르지만

왠지 마음에 들어 호두를 만지듯 만지작거리는 다기,

고운 자태의 참한 여인이 차를 낼 때 들고 있는 다기 말입니다.”


 

그런 마음을 담아서인지 김씨의 다기 희뫼요는 차를 좋아하는 이들 사이에는 꽤 이름이 났다.

 하지만 그는 아무에게나 다기를 팔지 않는다.

사고 싶은 사람이 찾아오면 먼저 차를 마시며 얘기를 나눈다.

 

“딸아이를 시집 보낼 때처럼” 자신의 다기를 귀하게 여기고 아껴줄 사람이라고 생각이 들면 다기를 준다.

그런 마음은 있지만 돈이 없어 머뭇거리는 사람을 보면 다기를 싸놓았다

다음번에 만날 때 거저 주기도 한다.

 

 

의 다기에 대해 전매권을 달라는 사람이 있었고,

서울이나 대도시에 희뫼요 전시장과 판매점을 내겠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모두 거절했다

 

 

“돈을 벌거나 상을 받으러 도자기를 빚은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마음공부 하듯이 한 것이지요.”

 

 

그런 마음으로 세상을 보니 감사할 일밖에 없었다. 초등학교 때의 가출, 출가, 도자기 가마와의 만남 등.

특히 97년 장애인자활기관에서 자원봉사를 하다 만나 결혼한 아내는 넉넉지 못한 살림살이에도

구김살 없이 두 아이를 키우며 늘 그에게 지지를 보내고 있는 “큰 스승이자 부처님”이었다.

그런 감사한 마음은 그의 자기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의 찻잔은 한 손으로 잡으면 어딘가 어색하다. 두 손으로 잡아야 편안하다.


 

“제가 만든 다기로 차를 마시는 분이 그 순간만이라도

다기, 차, 물, 앞에 앉은 사람을 포함해 차 한 잔을 자신 앞에 가져온

삼라만상에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된다면 더 바랄 게 없습니다.”

 

 

 

     

                            지우고 비우는 삶, 백자를 닮아가다

 

 

장성/글·사진 권복기 기자 bokkie@hani.co.kr

 

 

- 이상은  지난 9월 중 한겨례 신문의 "더불어 삶" 란에 실렸던 내용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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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래들어 축령산 자락에 토굴을 마련한 희뫼 선생을 찾아갔으나

 

아무런 인기척도.....

 

통나무 다리를 건너면 거기 피안의 세계가

 

 청빈 그리고 담백함...

 

 잠시 툇마루에 걸터앉아 주변의 풍광에 눈길을 ...

 

 찻샘

 

물이 너무 좋아 예전부터 눈독을 들여왔던 석간수

 

돌덩이를 쌓아 조릿대를 얹고 대발로 문을 대신한 희뫼표 해우소

 

  주변의 풍치와 너무나도 조화로운 연못

 

훤칠한 삼나무를 배경 삼은 적막한 초막

 그 초막을 지키며 나란히 선 비목 한 그루

 

천연덕스러운 문살의 휨새에서 자유가 느껴지는 듯.

 

마치, 눈 위를 걸을 때 신는 설피의 형상이 떠올려지는 창호.

휘영청 밝은 달이 찾아와 놀자고 두드리지 않을까....!

 

 

부엌문 윗쪽의 엉성한 창호

   새가 드나들기 편하도록  배려라도 한 걸까...?

 

정갈하기 그지없는 찻부엌

 

띠를 엮어 지붕을 얹은 작업실

 

삼배를 올려 감사함을 표 했다는 폐가마.

 준수한 모습으로 재 탄생 시켜놓고 이번에는 아예 삼천배라도 올리셨을 듯.

 

 

 

 

백자의 단아함과 담백함을 추구하는 희뫼 김형규 처사의 삶.

이런 저런 인연으로 진즉부터 눈여겨 봐 왔던 터.

 

작품과 수행의 근거지였던 삼동저수지 옆, 삼우정에서의 생활을 마감하고

이 곳, 축령산 자락 산소골로 자리를 옮겨 의욕을 불태우는 중.

 

진즉부터 들러보고 싶었으나

당신의 작업이 곧 수행의 연장이라는 사실을 잘 아는 나로서는

선뜻 방문하기를 주저 했었다.

 

세심원에 다녀오는 길에 용기를 내어 찾아든 선생의 초막.

역시 어떤 자리건 간에 땅에는 쥔이 있기 마련인 모양.

 

예전, 여러차레 이 자리를 찾아와 저 수승한 지세에 찬탄하곤 했던 기억.

역시 수행자에게 딱 어울리는 장소가 분명했다.

 

 

“제가 만든 다기로 차를 마시는 분이 그 순간만이라도

다기, 차, 물, 앞에 앉은 사람을 포함해

차 한 잔을 자신 앞에 가져온 삼라만상에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된다면 더 바랄 게 없습니다.”

 

위에서 그가 한 말 그대로

 

그의 작업은 결단코, 단순한 그릇의 조형과

미학을 추구하는 수준에 그치는 도예를 하는게 아니고

다구에서 선을 읽어내고 백자에서 도를 찾는 수행을 하고 있기에

아무 때고 불쑥 찾아 가는  실례를 범 할 수는 없는 노릇.

 

진즉부터 다구를 한 벌 선물하시겠노라는 말씀이 있었지만

선생이 쏟아부은 공력을  잘 아는 나로서는 도저히 선뜻 나서질 못 하고

지금까지도 어물어물하고만 있을 뿐이다.

 

 

 심호흡 끝에 찾아든 산소골의 초막 토굴서옥에선 칼같은 정적만이 흐를 뿐

아무런 인기척을 찾을 길이 없었다.

차라리 다행이다 싶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조심조심 이 곳 저 곳을 둘러본다.

 

눈 밝은 재가 운수납자의 처소답게 청정함이 자연스레 묻어 나는 토굴 앞에 서니

시정 잡배에다, 희멀건 동태 눈깔의 소유자인 나 로서는

괜시리 엄청 미안한 느낌이 들면서,

 자연스레 두 손이라도 모아야만 할 것 같은 분위기다.

 

 

도선불이(陶禪不).... 

 

 도예(陶藝)와 참선(參禪)이 결코 다르지 않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水月처사 희뫼  김형규 선생.

새롭게 둥지를 튼 적막한 축령산의 공간 속에서  부디 확철대오.  

선생이 바라시는 공부에 보다 큰 진척을 이루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