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자연/취월당

재현 임시정부와 일강 김철 선생

2012. 11. 13

 

독립운동가 일강 김철 선생 기념관 

전남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 605-1

 

 

 

 

 

독립운동가 김철(金澈)

1886.10.15~1934.6.29

 

 

 

본관 : 영산  

호 : 일강(一江)

이명 : 중청(重淸),영택(永澤)

활동분야 : 독립운동

 

1. 일생

 

전남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 609번지에서 부친 김동진과 모친 전주이씨 사이에서 4남 1녀중 3남으로 출생하였다. 어려서는 외가인 묘량면 영당에서 한학을 공부하고, 1905년 을사보호조약 이후 그는 신학문을 배워야 극일할 수 있다는 신념에서 1908년 영광읍소재 광흥중학교를  졸업하고, 1912년 서울에서 경성법률전수학교를 졸업하였고, 1915년에는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학부를 졸업하고 귀국했다. 고향에 와서 제일 처음 한 일은 형제들과 상의해 노속들에게 토지 일부를 떼어주고 집으로 돌려 보내는 것이었다.

 

1917년 2월 나라를 잃은 설음에 분노하여 구국의 일념으로 중국상해로 망명하였다. 1918.8.20. 중국상해 프랑스조계 백미로 25호에서 여운형,장덕수,김철,조동호,선우혁,한진교등 6명이 발기인이 되어 신한청년당을 창당하였다. 신한청년당 부주무로서 기관지「신한청년」을 발간 독립정신을 고취하였으며 대한적십자회의 상의원도 역임하였다.

 

1918년 11월 중국상해에서 미국대통령 윌슨의 특사 크레인을 초청하여 만찬회를 열어 만찬회석상에서 여운형, 김철, 장덕수, 신국권등이 만나서 자주독립을 요청하는 의견을 교환하고 윌슨에게 보내는 대한의 자주독립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전달하였다. 1919년  여운형,김철,김규식 등이 협의하여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여 대한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1919년 1월 신한청년당을 중심으로 각국에 독립을 선언함과 동시에 서병호, 선우혁과 같이 국내에 밀입국하여 자신의 전답을 정리하여 독립자금 1만원을 마련하여 상해로 가져가 독립운동 동지들의 생활을 원활하게 하였으며, 동년 2월 서울에서 손병희 선생을 만나 3만원의 독립자금 지원을 언약 받고, 3.1만세운동 거사를 계획하고 상해로 건너갔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상해에서 신한청년당을 중심으로 이동녕(李東寧), 이시영(李始榮), 조완구(趙琬九), 신익희(申益熙), 신석우(申錫雨), 조동호(趙東祜), 신규식(申圭植), 선우혁(鮮于爀), 한진교(韓鎭敎) 등과 함께 상해시 보창로 불란서 조계내에 대한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1919년 4월 10일 제1회 임시의정원회의에서 의정원의원(전라도 대표)에 선임되었고,같은 달 제2회 임시의정원회의에서 임시정부 재무위원겸 법무위원이 되었다.

 

1919년  8월에 임시정부 교통부차장에 임명되었고, 총장 문창범이 취임하지 않아 교통부총장대리로서 총장 직무를 수행하였다. 1920년 1월에 그는 김구 등과 같이 의용단(義勇團)을 발기해 독립운동에 박차를 가하고 의용단 산하 선전위원회가 조직되자 위원장 안창호를 도와 선전업무에 종사하였다.

 

그러던중 임시의정원과는 별도로 안창호 등이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요구했다. 그결과 양자간에 갈등이 일어났다. 급기야 1922년 7월에는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가 만들어 지고 김철은 시사책진회 회원으로 임시의정원과 국민대표회의간의 갈등 조정에 들어가  갈등을 해결에 기여하였다. 국민대표회의는 규정을 만들어 공포한다. 이런 활약이 높이 평가되어 그는 1924년 5월에는 임시정부 국무원 회계검사원 검사장에 임명되었다. 1926년 12월 김구(국무령)내각 국무위원에 임명되었고, 1927년 8월 이동녕 내각 군무부장에 임명되었다.

 

1930년 7월 조직된 한국독립당의 14인 이사 중의 한명으로 활약하였다.

같은해 12월 새 헌법에 의하여 임기가 만료 제2차 내각구성에서 군무부장에 재임명되었고, 1931년 10월 도산 안창호 선생과 함께 대한교민단(大韓僑民團)심판이 되어 상해교민의 복지향상에 전념하였다. 같은해 11월 중국인과 공동항일전선을 형성하여 한중항일대동맹을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조소앙과 중국인 오징천,서천방 등과 함께 상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1932년 1월 상해 대한교민단(大韓僑民團)의 정치위원으로 선출되고,같은 해 11월 국무위원에 임명되었다.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의사의 일황 저격사건과 동년 4월 29일 윤봉길의사의 중국 홍구공원에서의 백천대장 등 일본인 폭살 양대 의거를 당시 군무장으로서 백범 김구 선생과 같이 주도하였다. 이 사건 이후 일경의 추격이 급박해지자 상해에 있는그의 친지인 미국인 피치목사의 집 2층에 백범,엄항섭,안공근과 같이 피신해 있었다.

 

같은해 5월 10일 상해임시정부를 항주로 이동하여 선생의 숙소인 항주시 소재 청태(淸泰)제2여사(第二旅社)32호실에 임시정부판공처(臨時政府辦公處)를 설치하여 임시정부 항주시대를 개막하였다. 동년 5월 16일 항주에서 첫 국무회의에서 선생은 재무장 에 김구선생은 군무장에 임명되었다.

 

1933년 7월 임시정부 의정원 자격심사위원으로 신도의원의 자격을 심사하였다.

같은해 신한독립당·조선혁명당·의열단과 함께 결성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에 한국독립당의 대표로 참석하기도 했다

1934년 1월 3일 제3차내각(주석 양기탁) 무임소장에 임명되었다.

 

같은해 4월 2일 국무원비서장에 선출되어 임시정부의 이동에 따라 각지를 전전하면서 오로지 조국광복을 위하여 고군분투하며 기력이 다 할때까지 분골쇄신하였다. 한때 김구와 맞선 조소앙(趙素昻)과 제휴하였다.

 

2. 일생 마침

 

1934년 6월 29일 중국 항주(杭州)소재 광자병원에서 격무에 시달려 몸이 쇠진하여 급성폐염으로  순국하였다. 이시영, 조완구, 송병조, 양기탁 등 임정요인들의 애도속에 악비묘(岳飛廟) 뒷산에 안장되었다. 사실 일강은 상해에 망명하기 전에 고향에서 김해김씨 부인과 혼례를 치루고 부인은 고향에 남아 있었다.

 

상해에서 일강으로부터 "나는 조국 독립을 위해 기꺼이 이 한몸 조국에 받쳤으니 더 이상 찾지도 기다리지도 말고 부인께서는 앞날을 알아서 처신하시오"라는 서신을 받고 "부군이신 선생께서 가족 걱정없이 오로지 독립운동에 전념토록 하기위해 죽는길 밖에 없다"고 결심하고 이곳 집뒤에 있는 단심송(斷心松)에 목을 메어 순절하고 말았다.

 

그후 상해에서 조산원이던 최혜순(崔惠淳)여사와 혼인하여 미경, 혜경 등 두딸을 남겨 두었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독립장)이 추서 되었다.

 

3. 주요 연설문

 

◆ 신념의 감상『新年의 感想』

 

「교통부총장대리(交通部總長代理) 김철씨 담(金 澈氏 談)」

 

작년(昨年)을 돌아보면 참 감개무량(感槪無量)하오 나도 비재(菲才)로 최초(最初)부터 제형배(諸兄輩) 동지(同志)로 더불어 독립운동(獨立運動)의 획책(劃策)의 말석(末蓆)에 참여(參與)하는 영광(榮光)을 득(得)하였거니와 과거(過去) 우리 동포(同胞)의 충성(忠誠)되고 용감(勇敢)한 활동(活動)은 더 감사(感謝)할 말이 없습니다.

 

 다행(多幸)히 우리 동포(同胞)의 애국심(愛國心)과 단결력(團結力)은 더욱 작열(灼烈)하고 임시정부(臨時政府)의 기초와 각원(各員)의 화합(和合)도 더욱 공고하며 대정(大政)의 방침(方針)도 연말(年末)까지에 확립(確立)하였으니 今年부터는 前年에 배사(倍徙(艸)한 대활동(大活動)이 있을 줄 믿습니다.

 

 그러나 정부(政府)만으로 어찌 하겠습니까 내외(內外)의 각단체(各團體)와 국민(國民)이 일심일체(一心一體)가 되어 일일(一日)이라도 바라는 대사업(大事業)을 성취(成就)하기에 육력(戮力)하기를 바랍니다.

 

▶「교통부총장대리( 交通部總長代理) 김철(金澈)의 1920년 신년감상(독립신문 대한민국2년(1920)1월 10일 2면)」

 

 

 

4. 주요 유적지

 

전남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 546-2「일강 김철선생 기념관」(2003.6.28)과 생가

전남 영광군 불갑면 모악리 불갑사입구「임시정부 국무위원 일강 김철선생기념비」(1984.6.28)

전남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 지경재「일강 김철선생 숭모비」(1975.8.15)

전남 영광군 불갑면 모악리 산47 「유조선국 영산김씨세장비」(1919.10.)(전남문화재 제142호)

 

/네이버 한국사에서 발췌/

 

 

 

 

 

 

단 심 송 斷心松

 

위 소나무는 일강 김철 선생의 부인이신 김해 김씨가 목을 매 순절하신 소나무로 순절 소나무

또는 단심송으로 불리우고 있다. 지난 1917년 조국 광복에 투신하기 위해  중국 상해로 망명하신 김철 선생께서

부인에게  "나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기꺼이 이 한몸 조국에 바쳤으니 더 이상 찾지도 기다리지도 말고

부인께서는 앞날을 알아서 처신하시오" 라는 서신을 보냈다고 한다.

 

당시 부인은 일제의 감시가 점점 심해짐에 따라

"부군이신 선생께서 가족 걱정없이 오로지 독립운동에 전념토록 하기 위해서는 죽는 수 밖에 없다"

라고 결심 위 소나무에 목을 매 자결하셨다고 한다. 

 

 

 

 

 

 

재현 상해임시정부청사

(독립운동역사관)

 

 

 

 

 

 

 

 

 

 

 

 

 

 

 

 

 

 

 

 

 

 

 

 

 

 

 

 

 

 

 

 

 

 

 

 

 

 

 

 

 

 

 

 

 

 

 

 

 

 

 

 

 

 

 

 

 

 

 

 

 

 

 

 

 

 

 

 

 

 

 

 

 

 

 

 

 

 

 

 

 

 

 

 

 

 

 

 

 

 

 

 

 

 

 

 

 

 

 

 

 

 

 

 

 

 

 

 

 

 

 

 

 

 

 

 

 

 

 

 

 

 

 

 

 

 

 

 

 

 

 

 

 

 

 

26회 임시의정원 회의록

1933년 10월 김철 선생이 임시의정원 의원 대표로 축사한 내용이 실려 있다.

 

 

 

    

 

 

 

 

 

 

 

 

 

  

  

1932년 12월 13일 독립운동가 이봉창이 일왕을 처단하기 위해 일본으로 출발 하기 전 

자필로 쓴 한인애국단 입단 선서문

 

나는 적성(赤誠)으로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敵國)의 수괴(首魁)를 도륙하기로 맹서하나이다. 李 奉 昌

 

 

 

 

 

 독립운동가 윤 봉 길의 유언 

 

아직은 우리가 힘이 약하여 외세의 지배를 면치 못하고 있지만 세계 대세에 의하여

나라의 독립은 머지 않아 꼭 실현되리라 믿어마지 않으며

대한 남아로서 할 일을 하고 미련 없이 떠나가오.

 

 

 

 

 

1931년 4월 26일 윤봉길이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의  거사를 앞두고 자필로 쓴

한인애국단 입단 선서문

 

 

 

 

 

 

윤봉길 의사의 마지막 편지 

 

강보에 싸인 두 병정(兵丁)에게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어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가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에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기념관을 떠나면서

일강 김철 선생 동상 앞에 정성스레 두 손을 모아 고개를 숙인다.

 

 

 

 

 

 

한 분 한분 이름을 불러가며  꼭 기억해야 할 우리의 거룩한 선인들.

 

 

 

 

*******************************************************************************************************

 

 

 

 

23번 지방도로를 지날때 마다 늘 뭔가 찜찜하고 죄송했었다.

독립운동가 일강 김철 선생 기념관이 근처에 있기 때문.

 

 인사 한번 못 드린게 못내 송구해서 오늘은 아예 작정을 하고 찾아 뵌 것.

헌데, 기념관 정도 있으려니 했는데 '임정청사'까지 재현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1층엔 임정회의실과 부엌, 식당, 화장실 등으로 재현 했고, 2층 목조계단을 올라서니

오른쪽으로 김구선생 집무실(침실포함)과 정부집무실을 재현해 놓은 모습.

 

일제의 잔악상을 보여주는 고문도구 전시실은 출입을 제한해 놓았지만

차마 가까이 다가가 전시물을 보지 못하고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그외 "통곡의 철창" "독립운동 영상관" 등이 건물 내부를 채우고 있는 모습.

생활 소품과 가구를 비롯, 심지어 화장실과 욕조까지도 당시의 모습을 완벽하게 재현해

놓을 정도였는데 책상, 침대 등 각종 소품은 중국 현지에서 직접 제작한 것이라고.

 

 어느곳을 가던지 근처에 우리나라 독립에 관련된 인물의 자취가 있다면 

당연히 찾아가 예를 올리는게 마땅하고 또 그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의 도리라는 생각.

 

비록 늦긴 했지만,  

오늘 나는 작은 마음의 평화 하나를 얻었음이라.

 

 

 

 

 

 

 


Sterday once More(La Golondrina)

 

 

A donde ira veloz y fatigada la

golondrina que de aqui se va.

Oh, si en el viento se hallara extraviada

buscando abrigo y no lo encontrara?

여기를 떠나가는 제비는

아, 혹시 바람 속에서 은둔처를 찾다가

길을 잃었나 아니면 은둔처를 찾지 못하나?

 

Junto a mi lecho le ponde su nido

en donde pueda la estacion pasar

Tambien yo estoy en la region perdida

oh, cielo santo y sin poder volar!

내 침대 곁에 그의 보금자리를 만들어주리

그곳에서 계절을 보낼 수 있으리라

나도 역시 이 지방에서 길을 잃었네

오, 하나님, 날을 수도 없구나

 

Deje tambien mi patria idolatrada

esa mansion que me miro nacer

mi vida es hoy errante y angustiada

y ya no puedo a mi mansion volver

Ave querida, amada peregrina,

mi corazon al tuyo estrechare

Oire tu canto, tierna golondrina

recordare mi patria y llorare

나도 역시 사랑하는 조국을 등졌네

내가 태어난 집도

나의 삶은 오늘 방황하고 고뇌스러우며

이제 나는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네

사랑하는 제비야, 배회하는 여인이여,

나의 가슴으로 당신의 가슴을 안으리라.

당신의 노래를 들으리라, 다정한 제비야.

나의 조국을 생각하며, 나는 눈물 흘린다.

 

 

 

 

 

 

'자연 > 취월당'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근자에 선물 받은 책   (0) 2012.12.22
교육문화공동체 '결' 스텝과 함께  (0) 2012.11.22
老子의 世界 제11장 / 제12장  (0) 2012.11.12
老子의 世界 제9장 / 제10장  (0) 2012.11.05
老子의 世界 제7장 / 제8장  (0) 2012.1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