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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老子의 世界 제9장 / 제10장

※ 원대(元代) 화가 예찬(倪瓚)의 <우후공림(雨後空林)> (1368年作)

 

 

 

 

※ 명대(明代) 화가 동기창(董其昌)의 <산행도(山行圖)>

 

 

 

 

 

老子의 世界 

 

제9장

 

 

공을 이루었거든 물러서라 

 

 

持而盈之 不如其已하고

揣而銳之 不可長保하며

金玉滿堂 莫之能守하고

富貴而驕 自遺其咎하나니

功成名遂身退 天之道니라.

 

 揣(췌) : 잴 췌, 생각한다. 단련한다. 헤아리다.

 

 

 

 

다 갖추어 가득함이여

헐렁하여 부족함만 같지 못하고

지성의 날카로움이여

그 예리함을 길이 지킬 수 없도다.

 

 

재물의 풍성함이여

그것을 영원히 지킬 수가 없고

부귀하면서도 교만함이여

허물을 떨쳐 버릴 수 없도다.

 

 

공을 이루고 이름을 성취하면

곧 그 자리에서 물러날지어다.

이것이 진리적인 삶이로다.

 

 

 

 

- 해설 -

 

명예와 권리를 지나치게 가지려 하면 그것을 유지할 수 있을까?

지나치면 반드시 허물어지는 것이 이치이다. 자기 자신에 적당하다고 생각할 때에 멈추어야 한다.

멈추지 아니하면 진리가 빼앗아 간다. 빼앗기기 전에 먼저 남에게 배풀면 그것이 적선이 되어서

나에게 되돌아 오지만 빼앗기게 되면 되돌아오지 않고 자신의 명예도 실추된다. 정치인들의 허욕을 보라.

 그러면 어느 때가 버릴 때이며 그만둘 때인가? 섭섭하다고 생각할 때 그만 두자. 그 때가 바로 적기인 것이다.

 

지혜와 지식으로 비판을 일삼는 사람이 언제나 명예나 권리를 갖고 있다면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굉장히 많은 시간과 정신력이 요구된다. 그렇게 많은 것을 희생해가면서 지켜야 할만큼 명예나 권리 등이

의미있는 것인가? 잘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나의 생을 이롭게 하는데는, 외물(명예, 권력)을 지키려는 수고보다는 나의 본성을 지키는 여유와

마음의 안정이 더욱 가치있는 일이 될 것이다. 외형적인 명예와 권리는 내가 감당하기에 별 어려움이

없을 정도로 헐렁한 것이 좋지 않을까 한다. 부득이 사회와 국가를 위하여 명예와 권리가 맡겨 질 때가

있다 하더라도 되도록 오래 머물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이다.

 

모든 분야의 달인(達人)들도 언제나 날카로운 예지를 발휘할 수는 없다.

내 자신이 권태롭게 도거나 안이해지거나, 나 아닌 다른 사람에 의하여 무너진다.

무너지기 전에 그만 둘 줄을 알거나, 아니면 겸손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되 일등에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

 

성공을 거두고 공을 세웠으면 남들과 공덕을 나누고 칭찬받음을 사양하고 물러서는 겸양의 정신을

 잊지 말아야 한다. 주역에는 "항룡(亢龍)은 물용(勿用)이니 유희(有悔)라" 하였는데 이것을 번역하면

제일 높이 올라간 용(지도자)은 반드시 후회함이 있다고 하였다.

젱리인자가 되고 명예가 지극할 때처럼 위태로운 때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보통사람들은 명예가 지극할 때

한없이 행복해 하다가 갑자기 불명예의 한파에 떨게된다.

 

 

 

 

 

 

 

 

※ 청대(淸代) 화가 오굉(吳宏)의 <松溪草堂>

 

 

 

※ 명대(明代) 서화가 문징명(文徵明)의 <추산논도도(秋山論道圖)> (1552年作)

 

 

 

 

老子의 世界 

 

제10장

 

 

달인의 모습을 보라 

 

 

 

載營魄抱一하여 能無離乎,

專氣致柔하여 能嬰兒乎,

滌除玄覽하여 能無疵乎,

愛民治國하여  能無知乎,

天門開闔하여  能無雌乎,

明白四達하여 能無爲乎,

生之畜之  生而不有하고 爲而不恃하며,

長而不宰  是謂玄德이로다. 

 

 

載(재) : 실을 재, 발어(發語)의 뜻, 부(夫)자로 해석하였다.

營魄(영백) : 정신작용을 말한다.

抱一(포일) : 허정(虛靜)의 도리(道理)에 합일(合一)하는 것으로 풀었다.

滌((척재) : 씻고 제거하는 것.

玄覽(현람) : 안과 밖으로 일어나는 갖가기 마음 작용.

開闔(개합) : 마음의 문을 열고 닫음.

 

 

정신을 쓸 때에 진리와 하나가 되어

능히 본성을 떠나지 않을 수가 있는가?

 

기운 단련하기를 지극히 부드럽게 하여

갓난아기의 부드러움과 같을 수 있는가?

 

마음을 닦고 닦아 지극히 맑혀

한 티끌 흠결이 없게 할 수 있겠는가?

 

백성을 사랑하고 국가를 다스리기를

빈 마음으로 할 수 있겠는가?

 

마음의 문 여닫기를 임의로 하여

여인네 처럼 할 수 있겠는가?

 

일과 이치에 통달하여도

그 앎을 능히 감출 수가  있겠는가?

 

낳고 기르되

마음에 두지 않으며

일을 성취하되 자랑하지 않고

으뜸이 되어서는 다 참견하지 않으니

이것을 진리적인 덕의 완성이라 하도다.

 

 

- 해설 -

 

영백(營魄)이란 정신작용을 말한다. "정신을 작용할 때에 본성을 떠나지 않고 작용할 수가 있겠는가?"

라고 고도의 수도자에게 하는 질문이다. 차원이 높은 성자는 우주의 진리를 깨달아 그 진리를 본받아서

자기의 정신을 훈련하여 간다. 정신훈련으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도」(道)라고 표현된 자기 자신의

마음 바탕인 본성에 합일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란 정신작용의 연속인데 그 치연히 작용하는 정신을

사용할 때에 늘 본성자리를 떠나지 않기란 참으로 어려운 수련이 아닐 수 없다.

 마음공부에 익숙한 사람은 늘 자성을 떠나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럴 수 있는 공부가 되었는가 하는 뜻이다.

 

'전기(專氣)'란 수도인이 기운 단련 또는 감정 단련을 오롯하게 한다는 뜻이다.

인간은 안으로 기(氣)를 작용하고 살아간다. 그 기운을 아무런 훈련과 공부 없이 되는 대로 쓰면

거칠어지거나 안정을 얻지 못하거나 흩어지거나 난폭한 행동을 하게 된다.

그러나 수도인은 감정 조절을 늘 공부 삼아서 실천하므로써 그 기운이 정신의 통제를 받게 되고

구경에는 매우 평화롭고 부드럽게 자애로움에 이르른다.

 

수도인은 마음에 때가 끼지 않은 청정일념을 목표하여 수련한다.

보통 인간의 내면에는 욕심과 번뇌와 잡념으로 가득하다. 때문에 희로애락의 마음이 끊임없이 발생하여

괴롭게 살아간다. 상당한 마음공부를 쌓은 성자는 마음을 좀먹는 티끌을 다 털어 버릴 줄 아는 것이다.

또 수도를 하면 자기 자신의 마음의 문을 여닫을 줄 알게 된다. 보통 사람은 마음도 모르고,

모르기 때문에 마음의 문을 닫을 줄도 모르고 열 줄도 모르며 되는 대로 살아간다.

 

집에는 대문이 있다. 손님이 와서 문을 두드리면, 열어 줄 사람이면 대문을 열어 주고

안 좋은 사람이 오면 대문을 굳게 닫는다. 이렇게 대문은 가정의 평화를 위하여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들 마음의 문을 잘 여닫을 줄 안다는 것 참으로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국가를 관리하는 위정자가 되거나 제자를 길들이게 될 때에, 야욕이나 명예심으로 하면

위정자 중심이 되어 부자연스럽게 운영되고 억지와  폭력으로 다스리게 된다.

그래서 백성이 위정자로 인하여 고초를 당하게 된다. 성자는 백성의 편이 되어서

나라의 형편에 따라서 순리자연하게 다스려 간다는 뜻이다.

 

수도를 하면 결과적으로 마음의 자유를 얻고 평화를 얻고 또 지혜를 갖추게 된다.

지식이 아니라 진리를 깨달은 슬기를 얻게 된다. 그런데 그러한 지혜를 갖추어 주고 겸손하게 쓸 자리에만

쓸 수 있는, 지혜의 운용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자제력이 있는가 하는 말씀이다.

지혜롭지 못한 지식을 지닌 사람은 그 지식을 생활의 도구로 달고 다니거나 그 지식을 남에게 자랑하는데

급급하여 지식이 오히려 자기 자신을 동여매는 오랏줄이 되기도 하고 사회를 분열시키는 칼날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참다운 지혜를 쓸자리에 쓰고 써서는 안 될 자리에서는 그 빛을 감출 줄 아는 자제력을 가져야 한다.

 

제자를 가르치고 세상을 위하여 열심히 일하고 때에 따라서 중요한 책임자가 되어서,

사람을 성공시켜 놓고 뽐내거나 밑에 있는 사람의 일을 지나치게 참견하거나 내가 공로자라는

자만심에 휩싸이지 않는 참으로 사랑을 배풀 만한  인물이 되었는가 하는 물음이다.

 

이 장을 읽노라면,

마음공부를 좀 하였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에게 무서운 경종이 되는 구절이라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역해 - 耕山 장 응 철 원불교 종법사)

 

 

 

 

 

 

추야월(秋夜月) 이생강 단소 연주